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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5058]王守仁(陽明)-泛海 (범해)
泛海 (범해)
王守仁(陽明: 1472년 ~ 1528년)
險夷原不滯胸中 (험이원불체흉중)
좋은 일도 험한 일도 지난 일 마음에 담아두지 않나니
何異浮雲過太空 (하이부운과태공)
뜬구름이 하늘을 지나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네.
夜靜海濤三萬里 (야정해도삼만리)
고요한 밤바다에 이는 파도는 삼만리에 이르고
月明飛錫下天風 (월명비석하천풍)
밝은 달빛 아래 석장 휘두르며 하늘에서 내려오네.
險夷原不滯胸中 (험이원불체흉중)
: 험하고 평탄함 따위 원래 가슴에
담아두지 않거늘
何異浮雲過太空 (하이부운과태공)
: 뜬 구름이 하늘을 지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夜靜海濤三萬里 (야정해도삼만리)
: 고요한 밤 파도 소리는 삼만 리에
이르고
月明飛錫下天風 (월명비석하천풍)
: 밝은 달에 운유(雲遊)하는데
하늘 바람 내려오누나!
險夷험이= 험하고 평탄함을 가리킨다. 이 구절의 대체적인 뜻은
험하거나 평탄한 처지 모두 가슴에 담아두지 않으니
마치 뜬 구름이 하늘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
原=근원 원.본자(本字)厡
不滯불체= 滯=막힐 체, 약자(略字)滞
胸中흉중= 마음속에 지닌 뜻을 말한다.
何異하이= 무엇이 다른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
浮雲부운=뜬 구름. 過=지날 과.
太空태공= 아득히 높고 먼 하늘.
夜靜야정=고요한 밤.
海濤해도= 바다 위 풍랑.
三萬里삼만리= 3만 리.
月明월명=명월. 밝은 달.
飛錫비석=승려들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를 말하는데
여기선 운유(雲遊)나 행각이란 뜻이다.
下天風하천풍= ‘하늘 바람이 내려옴(下天風)’을 어떤 사람은
정기(正氣)로 해석하는데 이렇게 해석해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때 시인이 을 만난 상태이기 때문에
이때의 큰 바람과 파도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명대(明代)의 대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왕수인(王守仁, 왕양명)의 시 《범해(泛海)》는
당나라 시처럼 이해가 쉽진 않지만 담겨진 의미가 자못 깊다.
이 당시 시인은 정의감에서 직언(直言)으로 간언하다
환관의 박해를 받아 거의 죽을 뻔 했지만 가까스로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 아직 놀란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바로 이 시기에 시인이 느낀 소감을 펼쳐 이 시를 쓴 것이다.
시인은 사실 출가만 하지 않았을 뿐 재가(在家) 수련자였다.
이때 시인이 겪은 것은 한마디로 운유할 때 마난(魔難)을 만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 바람’은 하늘이 내린 고험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낭송이 쉽지 않아 널리 전해지진 않았지만
내함(內涵)이 아주 깊어 일부 인사들에게 특별한 호평을 받았다.
시인은 막 환관에게 살해당할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또 다시 바다 위에서 큰 풍랑을 만났다.
사람의 말로 하자면 그야말로 설상가상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것들을 자신에 대한 하늘의 고험으로 여겼으니
자연히 같지 않았다. 어떤 문제나 번거로움에 봉착했을 때 낙담하면서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지 않으며 담담히 마주 대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가장 좋은 상태이자 수련인으로서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이다.
왕수인(王守仁)
자-백안(伯安), 호-양명(陽明)
명나라 때의 사대부 사상가이자 교육가.
명필가 왕희지의 후예로 육상산의 학설을 발전시켜 이정 형제와
주자 계통의 성리학인 정주학(程朱學)에 대항했다.
육상산의 사상인 심학으로써 나라를 구하려 했고,
그를 맹자 이후 첫째가는 사람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조산아로 태어나 허약했던 까닭에 양생법에 관심이 많았다.
처음에는 주자학에 심취했으나 신선술 공부를 하기도 했다.
훗날 주자의 이론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스스로 이론을 세워나갔으며,
양명학의 기초를 세웠다. 《전습록》은 왕양명의 제자들이 스승의 학문과 삶에 대한
어록과 편지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육상산의 심학을 계승하다
육상산이 세상을 떠난 지 300여 년 만에 한 철인이 나타나 그와 마음을 같이하여 세상에 널리 펼쳤으니, 이 사람이 바로 왕양명이다. 왕양명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육상산에 대해 "상산의 학문은 간략하고 평이하며 거추장스럽지 않으니, 맹자 이후에 첫째가는 사람일세"라고 말했다. 그리고 격렬한 어조로 "나는 천하의 모든 사람들의 책망을 무릅쓰고서라도 상산을 위해 한마디 하고자 하며, 또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누명을 쓴다고 해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겠네"라고 했다.
왕양명은 '송나라가 멸망의 지경에 이르게 된 까닭은 학술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학문에 대한 바른 길이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선비들의 기풍이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마음이 흔들리게 됨으로써 나라가 약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육상산이 주창한 심학1) 의 깃발을 계승하고 도로써 나라의 몰락을 구하려 했다.
왕양명의 이름은 수인(守仁)인데, 스스로 양명자(陽明子)라 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양명 선생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는 명나라 헌종 때에 저장성 위야오의 서운루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이 운(雲)이었으나 5세가 되도록 말을 하지 못하자 할아버지가 수인(守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왕양명은 명필 왕희지2) 의 후예였으며, 아버지 화(華)는 진사 시험에 장원급제하여 난징 이부상서를 지내기도 했다.
부엉이는 죽은 어머니의 혼
왕양명은 팔삭둥이로 태어난 탓에 몸이 약해 이미 청년기에 폐병에 걸려 피를 토하기도 했다. 10세 무렵 어머니가 죽고 새어머니가 들어왔는데, 그녀는 그를 매우 차갑게 대했다. 그가 하루는 부엉이 한 마리를 사서 계모 방에 집어넣었다. 깜짝 놀란 계모 앞에 이미 왕양명과 입을 맞춘 점쟁이 노파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그 부엉이는 죽은 양명 어미의 혼이오. 당신이 양명을 너무 괴롭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오. 그러니 또 그를 괴롭히면 당신이 죽고 말 것이오."
점쟁이가 돌아간 후로 계모는 그를 따뜻이 대했다고 한다. 왕양명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기상이 범상치 않아 11세 때는 큰 잔치 자리에서도 시를 읊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큰 뜻에 걸맞은 선생을 만나지 못했다. 무능하고 부패한 선비들은 오히려 그의 의혹을 가중시키기만 했다. 한번은 그가 참다못해 서당 선생에게 이렇게 물었다.
"천하에서 제일가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에 선생은 참으로 엉뚱한 대답을 했다.
"책을 읽으면 벼슬자리에 오를 수 있지."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왕양명은 애써 좋게만 해석하려고 했다.
'아마 단순히 벼슬길에 나아가라는 뜻은 아닐 거야. 독서를 열심히 하여 성인이 되라는 뜻이겠지.'
첫날밤을 독수공방한 신부
왕양명의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17세 되던 해 7월, 결혼을 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결혼식 당일, 그는 혼자서 집 근처의 철주궁(일종의 도교 사원) 안으로 들어가다가 도사 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그는 그 도사에게 물어보았다.
"병에 걸리지 않고 오래 사는 방법, 즉 양생이 무엇입니까?"
그러고는 조용히 앉아서 그것을 배우느라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도 잊었다. 화려한 신방에서 아름다운 신부와 함께 달콤한 첫날밤을 보내야 할 신랑이 생면부지의 도사와 밤을 지새운 것이다. 어쨌거나 이날 밤의 인연으로 왕양명은 도사가 되겠다는 뜻을 품게 되었다.
먼저 그는 주자의 학설을 연마한 다음, 격물3) 공부에 큰 흥미를 느꼈다. 어느 날, 친구와 함께 뜰 앞의 대나무를 마주하고 격물을 시작했다. 둘은 하루 종일 대나무를 대면하고 깊이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친구는 3일 만에 병이 나 누웠고, 왕양명 자신은 7일 만에 눕고 말았다. 그런데도 대나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대나무는 역시 대나무였고, 그는 그였다. 이에 왕양명은 "성현은 따로 있는 것이로구나!" 하고 학문을 버리고 입산하려고 마음을 먹는다.
그가 입산하려고 한 데에는 다른 배경도 있다고 전한다. 즉, 왕양명은 20세에 제1차 과거시험 향시에 합격하고, 회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4년 후에 응시하나 또 낙방했다. 자신의 재주만을 믿고 남을 가볍게 여긴 결과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때 폐병에 걸리자 산속에 들어가 양생법을 공부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몇몇 친구들과 더불어 용천사에서 시 모임을 조직하고, 매일 시 읊는 데 도취했다. 2년째 되던 해에 서울로 돌아온 그는 나라의 변두리 지역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고 무술을 연마하는 한편, 병법에 관한 책을 두루 읽었다. 무인으로 크게 성공해볼까도 생각했던 왕양명은 결국 이 방면에서도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
몇 번의 실패를 경험하고 나자 그의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치고 말았다. 학문이나 문학에 대한 공부가 그의 웅지(雄志, 커다란 뜻)를 채워주지 못했고, 무예에서도 특출한 소질을 발휘하지 못하자, 그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임금에게 올린 주자의 글을 보게 되었다.
"독서의 근본은 거경4) 으로 뜻을 잘 보존하는 것이고, 독서의 방법은 순서에 따라 정성을 들이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왕양명은 과거에 자신의 뜻이 너무 높고 먼 데에만 있어서 실제에 적응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그는 방황하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독서에 정진하기 시작했다. 28세 되던 해에는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몇 해 동안 왕양명은 정치에 대단한 열정을 쏟았는데, 임금에게 수천 자나 되는 상소를 올려 폐단에 대한 시급한 조처를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열렬한 충정이 효종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실망한 나머지 점점 낙심해갔다.
그가 35세 되던 해였다. 명나라 제10대 황제 무종이 즉위하자 환관 유근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 신하들이 임금에게 옳은 말을 하기만 하면 잡아다가 감옥에 넣었다. 왕양명은 충신들을 풀어주도록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유근은 도리어 그를 무고하게 끌어다가 곤장 40대를 때려 기절하게 만들었다. 결국 유근은 왕양명을 용장 지방의 역승[驛丞, 각 지방의 역(驛)에 있는 말에 관계되는 일을 맡아보는 외직] 자리로 내쫓아버렸다.
왕양명이 용장으로 길을 떠나는데, 어떤 사람이 그를 미행했다. 그는 화를 당할 것을 미리 알고 저장성 항에 이르러 투신자살을 가장하려고 강가에 옷을 벗어놓았다. 또 글까지 써두고 몰래 상선에 붙어서 그곳을 피했다.
그는 푸젠성에 도달하여 산중을 방황하다가 어떤 절을 찾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과거에 만나서 양생법을 배운 적이 있는 철주궁 도사가 그곳에 있었다. 깜짝 놀란 왕양명은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몰래 숨어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도사는 "만일 그대가 몸을 감추어버리면 유근이 그대의 아버지를 잡아다가 문초할 것이 아닌가?"했다. 왕양명은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부임지 용장으로 떠났다.
명대(1368~1661)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시인으로써 주관적인 관념론자로 불렸던 왕수인, 즉 왕양명은 그동안 국가의 지배적인 주자학을 대신하여 독자적인 유학사상을 세우고 발전 시켰습니다.
그가 갖고있는 중심 사상의 기본 원리는 '지행합일'(知行合一), '정좌법'(靜座法), '치량지'(致良知)입니다. 그의 사상을 통해 일관되게 흐러고있는 '물(物)의 이(理), 바로 우리들 마음이며, 우리의 마음 이외의 곳에서는 그것을 찾을 수 없다라고 하는, 심즉리心卽理) 즉 주관적 관념론입니다.
그가 생각했던 지행합일은 지(知)와 행(行)이 모두 마음의 활용으로 하나라고 생각하는것인데, 주자가 주자학에서 지(知)에 중점을 두어 얘기했던 '선지후행'(先知後行)과는 대립되는 것입니다.
정좌법은 인욕을 버리고 천(天)의 이를 밝히는 방법으로서, 치량지(致良知)에 의해 실천적으로 결합 됩니다. 즉, 우리 마음의 양지(良知) 양심은 천리(天理)이고,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선과 악을 직각(直覺)하는 마음이 있고, 이것이 바로 양지로서 이에 의해 '지식을 넓히고 사물의 이치를 연구한다'(致知格物)라는 실천도덕이 요구됩니다.
이렇게 선천적이고 직각적인 양지를 통해 선과 악을 구별하는 그의 도덕설은, 분명 주자학과는 또다른 측면에서 사회의 굳건한 지배적인 봉건 도덕의 한 측면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뭏든 왕양명의 유명한 저작물과 제자와의 문답은 후세 사람들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기록되었고, 책으로도 편찬되어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상기 왕양명의 시 속에는, 정의감에서 왕에게 직언(直言)했다가 환관의 박해를 받았고 정말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습니다. 가까스로 위험천만한 죽음의 상황에서 벗어나, 아직까지 두근거리는 놀란 가슴 여전히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쓰여진 시입니다. 당시 시인은 바다 위에서 매우 거친 풍랑을 만난 작은배의 운명같은 상태였기 때문에, 정말 수행자같았던 그의 고단한 삶속에 다시 하늘이 내린 절대 절명의 매우 위험 천만한 시험적인 상황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모든 어려움에 대해서 담담히 모두 받아들였고 몹시도 골치아픈 현실의 문제와 반드시 주체적으로 해결해야만 할 아주 번거로운 일이 세상에는 가득했지만, 낙담 하거나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고, 남을 탓하지 않고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정면으로 담담하게 마주하여 처리할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이미 천하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학자였지만, 왕양명은 인생의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 담글질 되어갔고, 모든 일에는 반드시 하늘의 뜻 天意가 담겨 있음을 깨달았고, 하늘이 정한것을 어찌 사람이 할수 있는가 하면서, 사람의 일생이 암암리에 배치 되어있고, 감개 무량한 나머지 이렇게 깨달음의 극치에서 터져 나오는 아주 좋은시를 지어 후세들에게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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