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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묵상글 (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그들에게도 아버지이신 하느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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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그들에게도 아버지이신 하느님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미사를 드리는 오늘,
저는 우리나라 현실을 보며 그리고 우리 교회의 현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남북의 화해와 일치와 관련하여 현 정부는 폭주 기관차 같고,
우리 교회와 국민은 기도하지 않고 방관하고 있는 것 같아서입니다.
현 정부는 북한을 주적이라고 하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고
화해와 일치와 반대되는 길을 가는 것을 잘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형제를 형제가 아니라 원수로 생각하는 것을
잘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에게 잘못했다고 해서 형제를 원수로 여기면
부모는 그것을 잘하는 것이라고 할까요?
용서와 화해가 쉽지 않더라도 그쪽으로 방향을 잡고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야 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이라면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우리는 남북의 관계도 성찰해야 합니다.
북한과 남한은 우리인가? 우리가 아닌 남인가?
하느님 아버지는 북한과 남한의 아버지인가? 남한만의 아버지인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기도드릴 때
우리는 북한은 배제하고 기도 드리는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할 때 북한에게는 주지 마시고
우리에게만 주시라고 기도 드리는 것은 아닌가?
저희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해달라고 할 때 북한은 예외인가?
진정 하느님 아버지는 모든 이의 아버지이고,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우리에게 아버지이신 하느님 아버지는
북한의 우리 형제들에게도 아버지라고 믿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큰 상처를 안겼던 일본 사람들을 우리의 형제라고 하고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과 화해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 알고 있지만
마음은 그렇게 하기 쉽지 않은 것처럼 북한에 대해서도 그리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의 과거 잘못을 묻지 않고 미래지향적으로 관계를 정상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북한과는 더더욱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 우리라면
저처럼 주님의 기도를 바꿔 바치는 것도 좋을 것이고,
그런 뜻에서 제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를 소개하며 오늘 나눔을 마치고자 합니다.
“북녘의 형제들에게도 아버지이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남녘에서도, 북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느님
북녘의 형제들에게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그들을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외면하고픈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그들을 악으로 보는 악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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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전례력으로 연중 제12주일 입니다. 한국교회는 2005년부터 민족의 분단된 6월 25일과 가까운 주일에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여 남북통일을 기원합니다. 1965년부터 이 날을 기념해 오고 있는데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이라 칭했었습니다. 그러다가 1992년에 그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바꾸게 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이 어떻게 하면 서로 화해와 일치를 이루어 하나가 되는가를 제시합니다. 1독서를 내용을 통해 분단된 우리 민족이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바로 지난날 서로가 행한 잘못을 뉘우치는 겸허한 회개의 마음에서 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께서 바라시는 용서와 화해를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는 참된 회개의 마음이 있을 때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을 자비로이 굽어 보시고 흩어진 우리 민족들을 다시 불러 모아 하나되게 해 주신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체험의 역사를 통해 1독서는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구체적인 행위는 바로 2독서에서 잘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서로 해가되는 나쁜 말을 삼가고 서로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격려와 위로가 되는 좋은 말을 하여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여 서로 용서하는 일입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 각자가 지녀야 할 마음자세를 한 마디로 말하면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용서입니다. 용서는 무한한 자비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무조건적입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이 하나되는 지름길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자세가 어떤 다른 것보다 우선해야 합니다.
그래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 신앙인들 먼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신 자비와 사랑을 지닌 용서를 일상 안에서 몸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분께서 용서의 마음을 거저 받았기에 거저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용서는 기적을 낳습니다. 그 기적은 분열을 만들었던 증오, 분노, 원한, 완고한 마음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고 들어주는 개방적인 마음 자세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 용서는 주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민족의 화해와 일치는 어떤 외적인 구호나 거창하거나 탁상공론이 아닌 겨자씨 만한 작은 용서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의 내면 안에 용서치 못하고 화해하지 못한 것들과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도 더 나아가 매일 매일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용서와 화해의 체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여져 한마음이 될 때 민족의 화해와 일치는 이루어 지게 됩니다.
매일의 삶안에서 용서와 화해의 삶을 사는 한주간 되시길 빕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몬카다(Moncada)의 성체기적
스페인 - 1392년
그 동안에 제의실에서 사제는 성의(聖衣)를 입고, 구원을 청하듯이 벽에 걸린 십자가를 쳐다보았다. 영혼의 목자인 그 신부는 밖의 성당의자에 무릎꿇고 앉아 있는 아무 죄없는 어린 양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크리스마스의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는 존경받고 매우 양심적인 신부였으나 때때로 매우 불안해 하였다. 그 신부를 매우 증오하였던 어떤 사악한 원수는 다름아닌 그 신부가 자신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그 신부의 거룩한 사제 소명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려는 그의 계획에 있어서 사제의 온유한 양심을 악용하였다. 원수는 사제서품의 타당성을 문제로 삼아 신부를 괴롭혔다. 왜냐하면 그 신부는 교회가 매우 어려운 상태에 있을 때, 곧 교황에 대립해서 반대파를 형성했던 시절의 교황이 재위하고 있을 때에 신품성사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량한 신부는 아무 말없이 선교에만 열심하였다. 그는 마음 속으로 그를 불쌍히 여겨 그가 이러한 유혹으로부터 빠져나오도록 주님께 기도하였다. 결국 그는 주교에게 모든 것을 말하기로 결심하였으며, 필요한 경우 이러한 내적 고통을 없애기 위하여 자신을 다시 사제서품 절차를 거치게 해 줄 것을 청하기로 하였다.
열 두 번째 종이 울리자 그 신부는 경건하게 불빛이 비치는 성당안으로 들어섰다.
성스러운 미사가 시작되었다. 경건하게 그는 기도를 올렸다.
“주여, 우리를 불쌓히 여기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성당은 우리같은 죄인이 얼마나 주님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성당에서는 모두가 이러한 기도를 세 번 반복하도록 되어 있다.(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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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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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1953년 7월 23일 체결된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70주년이 됩니다. 분단은 길어지고 그 아픔이 깊어만 갑니다. 평화와 통일을 향한 우리의 열망도 깊어만 갑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참 평화’를 위하여 걸음을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평화를 주셨고, 우리를 평화이 일꾼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라고 하셨으니, 참된 평화의 일꾼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다. 우선,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마음을 모아”(마태 18,19) 기도하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너희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구하라.”(마태 18,20)
바로 “이 땅”이 우리가 이루어야 할 친교와 화해의 장소라는 말씀입니다. 먼 훗날이 아니라, 평화로운 새로운 새 땅에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서로 마음을 모으라는 호소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곳, 이 땅 한반도에서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적대감과 대립을 몰아내고, 편견과 거짓과 위선을 몰아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와 용서, 일치와 사랑이 필요할 때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특별히 “오늘”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한 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신명 30,2-3)
분단극복과 화해와 일치의 실현에는 그동안의 우리의 불성실을 성찰하는 동시에, 바로 ‘오늘’ 우리의 책무와 투신이 요청됩니다.
사실, 그동안 한국 천주교회는 한반도 평화를 간절히 염원하며, 지난 2015년 이래로 매일 밤 9시에 주모경을 바쳐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17일부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9일 기도”를 해 왔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새로운 생활 법칙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에페 4,29)
사실, 우리들 사이의 분쟁의 상당한 것들은 잘못된 말이나, 욕, 비난, 중상모략, 거짓말로 시작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남과 북이 서로를 비방하고, 거짓 뉴스와 유언비어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를 멈추고, 오히려 서로를 격려하고 고무, 찬양해야 할 일입니다. 축복을 가져다주는 좋은 말, 기쁨과 칭송의 말을 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는 대립과 반목으로 오랫동안 쌓여온 남북의 적대를 용서로 바꾸어야 할 일입니다. 적이 아니라, 형제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용서와 화해, 사랑과 일치를 이루어 나가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처럼, 화해와 일치를 위해 바치는 향기로운 산 제물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이는 꼭 남북관계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모두 서로에게 그렇게 해야 할 일입니다. 특히 같은 공동체 식구끼리는 더더욱 그러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용서하게 하소서.
아니, 용서하기에 앞서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합니다.
주님!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셨으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합니다.
또한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합니다.
주님!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으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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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다
오늘 남북통일기원 미사를 봉헌하면서 무엇보다도 아버지 하느님의 큰마음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서로의 허물을 인정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웃, 가까운 사람과도 용서하고 화해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남북의 화해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용서와 화해는 지금 삶의 자리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가까운 이웃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과 백 사람이 하나 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예,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쉽다고만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다 좋은데 이것만은 안돼!’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 한번 틀어지면 둘이 하나가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정성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머리수가 아니라 마음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18,19) 마음을 모아 청하면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머리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보이는 사람과 서로 하나가 되기가 힘든 데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예수님과 한 마음 되기는 얼마나 더 힘들겠습니까? 사실 하느님과 하나 되면 이웃과 일치하는 것은 문제될게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입으로는 하나가 되고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일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안 그렇다고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실제 몸으로 마음으로 손발로 고백하는 분들은 적습니다.우리가 입으로는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막상 얼굴을 마주 하거나 목소리를 들으면 옛 생각에 울컥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것은 아직 용서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으로 품어 끌어안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 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크지 못한 것입니다.
신비한 것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받아들이는 사람의 그릇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이나 행동하는 사람도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나를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용서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면 상대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에게 상처를 준 저 사람을 용서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는 힘이 들지만 당신이 이미 용서 하셨기에 용서합니다. 당신이 그를 사랑하시기에 저도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것이 있다면 먼저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1절에서 11절을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 이 여자를 끌고 와서는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마음 안에는 ‘나는 의롭다’, ‘나는 잘 살고 있다.’ ‘나는 거룩하다.’ 뽐내고 으스대는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그러는 것입니다.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소리를 듣고 금방 대답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히시어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엇을 쓰셨을까요?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추측 하건 데 아마도 ‘너 자신을 알라!’하셨을 것입니다. ‘너도 하느님 앞에 죄인 아니냐? 잘 생각해 봐라. 너 잘 난척하지만 너도 별 수 없다.’ 예수님께서 뜸을 들이시자 사람들이 재촉합니다. ‘스승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씀 좀 하십시오.’ 사람들이 줄곧 물어대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을 때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다 떠나갔습니다. 마침내 예수님 앞에는 죄 많은 여자만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그러자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과거를 묻지 않고 자비와 용서를 허락하셨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성경은 나이 많은 자들부터 떠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삶의 경륜이 많은 사람부터 떠나갔습니다. 말하자면 의롭다고 자처한 사람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세상에는 밝게 눈떠 있었지만 하늘에는 눈이 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한 말씀에 눈이 뜨였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하시는 한 말씀에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자기 죄에다 죄를 더 보태지 않고 떠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눈뜨지 못했다면 돌을 집어 던졌을 것입니다. 죄에 죄를 더했을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을 봅니다. 그것을 보고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굉장히 잘난 줄로 알아요. 의로운 줄로, 거룩한 줄로 알아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순간 순간마다 죄에 죄를 더해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죄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먼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눈을 떠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보이지 않고 남이 잘못한 것은 아주 크게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눈뜬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눈뜬 사람은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눈 뜬 사람은 그 허물을 통해서 자기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내가 저 사람과 똑같은 잘못은 범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잘못과 허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리처럼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이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18,21)하고 물었습니다. 일곱 번, 많죠. 한 번도 힘든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용서는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잘 산다고 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용서 받고 살았느냐? 너 그거 아느냐? 너 그거 안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 못할 것이 없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를 결코 ‘용서 못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용서 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네가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내가 너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는데 이렇게 앙갚음을 하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 하느님께 눈뜨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 고백할지언정 몸으로 마음으로 손발로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 눈뜰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눈뜨면 내 힘으로 안 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힘으로, 능력으로 먼저 용서를 청할 수 있고 베풀 수 있습니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억울해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진실을 알고 뱃속까지 환희 들여 다 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못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단순히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지 말고 마음으로 온 몸으로 손발로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으뜸제자 베드로를 보면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를 하실 때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떠날 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막상 위험에 직면하자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야 말로 본이 아니게 얼떨결에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우리가 나는 의롭다, 떳떳하다.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 앞에서 별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자비와 용서를 입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주님의 으뜸제자로 활동을 할 수 있었겠어요? 바오로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어떻게 이방인의 사도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가 과거의 살인죄에 매여 있었다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이끄는 도구로 활동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다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로 하느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자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님으로부터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의 대상은 우리 가족 안에 있을 수 있고 이웃 안에 공동체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용서를 행하는 사람이야 말로 믿음의 사람이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미사를 봉헌 하면서 남북의 화해와 친교에 앞서 먼저 가까운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베푸는 것부터 시작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하신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고 ‘내가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말씀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이웃에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짐하시길 희망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결코 화해를 재촉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섣부른 화해는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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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그리스와 터키’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4년 전에 가려고 했는데 ‘코로나 팬데믹’으로 연기되었다가 이번에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4년 동안 순례의 여정을 기다려주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4년 전에는 54명이 신청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30명이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스와 터키를 순례하면서 새삼 ‘바오로 사도’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생겼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지칠 줄 모르는 선교에 대한 열정과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초대교회는 예루살렘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그리스와 터키로 복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었습니다. 그 씨앗이 열매를 맺어서 굳게 닫혔던 로마의 문을 열었습니다. 당시 가장 강한 국가였던 로마의 길을 따라 ‘PAX ROMANA'는 ’PAX CHRISTIANA'가 되었고, 교회는 오랜 박해의 터널을 지나 유럽문명의 토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마을의 중심에는 ‘성당’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삶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사도들 중에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이 없는 유일한 사도가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박해하였던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러 가는 길에서 ‘회심’을 체험했습니다. 그 체험이 워낙 강열했기 때문에 사도행전은 몇 번에 걸쳐서 바오로 사도의 체험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사막에서 3년 동안 자신이 체험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는 예수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복음을 선포했고 죽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면 부활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복음 선포는 그리스와 터키에 전해졌고,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현실의 삶에서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는 이들에게, 노예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부활’은 희망이었고,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선포할 당시에는 아직 ‘복음서’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선교한 공동체를 격려하거나, 엄중하게 책망할 때 편지를 작성하였습니다. 그것이 신약성서의 한 부분이 되는 바오로 사도의 서간입니다. 공동체가 분열 할 때는 일치할 수 있도록 편지를 보냈습니다. 공동체가 이교도의 풍습에 빠져들 때는 엄하게 책망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공동체가 성령의 감도로 성장할 때는 축복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공동체가 절망 중에 있을 때는 희망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업적과 능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과 계명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지면 구원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생활로 나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곧 재림할 것임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니 깨어서 준비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에게서 두 가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하여 이방인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학이라는 ‘틀’에 가두어 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심금을 울리는 ‘글’을 남겼습니다. 그 글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삶의 ‘이정표’가 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여러 글들이 있지만 저는 오늘 고린토 전서 13장의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오늘은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고린토인들에게 전해준 ‘사랑’의 축복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에게도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그 사랑이 다리가 되어 평화와 자유가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그 사랑이 다리가 되어 일치와 화해가 넘어오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하여 남과 북의 일치와 협력을 위해서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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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민족의 화해와 일치
-평화공존-
오늘 2023년 6월25일은 연중 제12주일이자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73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해 저는 2살이었기에 기억은 못합니다만 이야기는 많이 들었고 전쟁후 50년대 힘들고 가난했던 생활은 생생히 기억합니다.
한국전쟁으로 남북이 원수가 되어 완전히 갈린지 73년입니다. 예전 한때 애절이 불렀던, 그러나 지금은 거의 잊혀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가 생각납니다. 지금도 남북동포가 함께 부를 수 있는 곡중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나라 살리는 통일, 이겨레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인터넷 뉴스를 검색해 보니 6.25 한국전쟁에 대한 기사는 거의 없었고 단 하나, 부산-경남 지역 신문에 나온 <“한국전쟁 73년, 이젠 평화를”... 25일 곳곳서 미사, 기도회, 답사>란 기사만 구석에 작게 나와 있었습니다. 이젠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는 6.25 한국전쟁입니다.
그러나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동족상잔의 전쟁입니다. 다시는 전쟁이 없고자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젠 평화입니다. 결코 꿈에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민족통일, 남북통일입니다. 그러나 통일에 앞서 평화입니다. 평화공존이 우선입니다. 어느 학자의 지극한 이성적, 합리적 글에도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분단과 적대의 반대는 통일이 아니라 평화공존이다. 독재를 겪지 않은 청년들에게 세습독재와의 통일을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다. 한국과 조선의 평화공존은 통일의 포기가 아니라 유예다. 독립공존을 거친 평화세대에 의해 통일 가능성은 더 높아질 수 있다. 그러나 통일이 목적이 되면 언젠가는 한국전쟁처럼 통일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
통일 대신 평화가 목적이 됐을 때 끝내 통일폭력을 넘어 평화공존을 구가할 수 있다. 한국전쟁 73년, 한국과 조선은 이제 국가대 국가로서 보편의 지평에서 만나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마침내 항구 평화를 향유할 수 있다.”(박명림)
그렇습니다. 통일이 아니라, 전쟁이 아니라 평화입니다. 평화가 최고의 가치입니다. 산상설교에도 명시적으로 진복팔단의 참행복중 하나로 선언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또 우리는 자랑스럽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에페2,14)라고!
정말 남북통일이나 남북평화에 우선되야 할 것은 남남통일, 남남평화입니다. 우리 남한의 한국은 얼마나 내부적으로 산산히 분열되어 있는지요! 치열한 내전상태를 연상케 합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저런 까닭이나 사연들로 죽어가고 있는지요! 지금도 생존을 위한 치열한 생존경쟁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까이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부터 통일이, 화해와 일치가, 평화공존이 우선입니다.
바로 그 빛나는 모델이 여기 요셉 수도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수도원 본원 숙소 명칭은 “자비의 집”, 자매들 개인 피정집 명칭은 “평화의 집”입니다. 또 수많이 분들이 주님의 평화가 목말라 끊임없이 수도원을 찾습니다. 어제 이름을 밝히지 않은 분이 전송해준 메시지도 반가웠습니다. 전문을 인용합니다.
-‘평화와 쉼, 아름다운 성가로, 기도로 이루어진 자연에 가까운 요셉수도원! 몇 년전에 한 무리로 다녔던 이름도 예뻤던 개들! 기도와 일! 인생 참 단순하네요(행동과 최고가치의 동행). 수사님과의 면담, 남편의 외도,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30년동안 살면서.
수사님의 끊임없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갈망들... 수사님의 답변, “아내의 믿음이 깊어져서 향기가 나면 남편을 저절로 돌아올겁니다.”인생 달인의 대답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수사님이 계셔서. 또한 우리에게 평화의 집을 허락해 주셔서. 건강하시고 시간들이 기쁨, 행복 가득하기를 아멘!!’
‘아내의 믿음이 깊어져 향기가 나면 남편은 저절로 돌아온다’, 제가 언제 이렇게 멋진 말을 했는가, "인생 달인" 이라니, 감격했습니다. 무명의 아름다운 메시지에 감동하여 ‘진선미’라 작명하여 저장해 뒀습니다. 이런 평화로운 수도공동체 분위기라면 얼마나 이상적이겠는지요! 어느 화가 자매의 요즘 동향도 인상적이라 주고 받은 글도 나눕니다.
“저는 요즘 ‘사랑의 찬미’라는 주제로 돌고래 소재를 그리고 있어요.”
“기막힌 착상이 참 좋습니다. ‘사랑의 찬미’ 역시 참 좋은 하늘에 보물 쌓기입니다. 한결같이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화가 선물처럼 주어질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어떻게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남북의 평화공존을, 또 내 가까이서부터 평화공존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말씀에서 답을 찾았으니 기도와 사랑, 그리고 경청입니다.
첫째, 기도하십시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 역시 참 좋은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그리고 ‘간절하고 항구하게’가 기도의 원리입니다. 홀로의 개인기도도 좋지만 마음이 하나된 함께의 공동기도는 더욱 좋습니다.
우리의 광야 인생 순례 여정은 혼자가 아닌 “더불어(together)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개인입장이 아니라 단체입장임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최소한 두명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도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고마운 가르침입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교회공동체의 믿음이 고맙고, 미사경문중 제가 특히 사랑하는 대목입니다. “주님,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소서.” 기도문의 위치도 절묘하게 주님의 기도와 성체를 모시는 영성체 사이에 나옵니다.
둘째,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도 배워야 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평생공부가 사랑공부입니다. 아무리 사랑을 공부해도 우리는 영원한 초보자일뿐입니다. 사랑 역시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사랑하면 행복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본질은 사랑이자 말씀입니다. 결코 무지도 허무도 욕망도 아닙니다. 그러니 평생 말씀을, 사랑을 공부하고 실천할 때 참나의 실현입니다. 이 사랑공부 소홀로 급기야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괴물이, 폐인이 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사랑은 구체적이요 현실적입니다. 모호하고 추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제1독서 에페소서에 나오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이 참 고맙고 적절합니다. 우선 말로서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선 안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다음엔 용서의 사랑입니다. 용서야 말로 신적 사랑, 하느님의 자녀다운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답변에서 끊임없는 용서의 사랑을 명령하십니다. 내가 살기위해 먼저 용서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숨쉬듯이, 밥먹듯이 지칠줄 모르는 용서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이점에서는 바오로 사도 역시 일치합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용서받았기에 용서입니다. 새삼 사랑의 용서도 은총임과 동시에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참 아름답고 멋집니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셋째, 경청하십시오.
사랑의 경청입니다. 사랑의 경청은 영성생활의 기초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경청의 사랑입니다. 귀기울여 듣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사랑의 경청입니다. 경청 역시 의식적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경청의 선택, 경청의 훈련, 경청의 습관, 바로 이런 이들이 성인입니다. 제1독서 신명기 모세의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를 격동시킵니다.
“모든 말씀, 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마음 속으로 뉘우치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돌려 주실 것이다.”
강조되는 바, “오늘”이요 “들으면” 이라는 말마디요 운명을 바꿔주실 것이란 약속입니다. 하느님은 곡선으로도 똑바로 쓰실 수 있는 분입니다(God can write straight with crooked lines). 참으로 사랑의 경청, 사랑의 겸손, 사랑의 순종에 시종여일始終如一할 때 우리의 운명도 바뀔 것이요, 굽어진 곡선 인생도 똑바로 펼쳐질 것입니다. 마침 게시판에 붙은 시편말씀도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옳거니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나이다.”(시편34,6)
오늘 주님은 고맙게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평화공존을 위한 길을, 또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가 평화롭게 살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1.기도하십시오.
2.사랑하십시오.
3.경청하십시오.
기도도 사랑도 경청도, 참 좋은 은총이자 거룩한 선택이요. 거룩한 훈련이자 거룩한 습관입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사랑의 성체성사 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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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용서가 쉽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은 용서했다고 말하거나 쉬운 것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용서했다고 생각해도 다시금 그 사람 얼굴만 보면 화가 나거나, 혹은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피해 다니는 모습이 우리에게서 나타난다면 완벽히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행동들은 용서해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자신의 아픈 마음을 모르는 체하는 행동입니다.
누군가는, 용서에는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 없는 용서란 어쩌면 피하거나 묻어 두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용서는 누가 하는 것이지요? 가해자입니까? 피해자입니까? 피해자가 용서하는 것입니다. 상처 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사람이 하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그러니 ‘용서하시는 하느님’이란 말은 하느님이 늘 피해자라는 말입니다. 가해자는 누구라고요?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어떤 행동들이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만 생각하는 아집이나, 교만이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것보다 세상 것을 더 좋아하는 우리의 모습들이 바로 하느님에게 우리가 상처를 주는 일입니다. 그 외에도 많지요.
잠시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잘못과 죄 속에서 살아왔고 또 살고 있고, 앞으로 살아갈지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용서하는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용서하십니다. 용서를 비는 사람은 무조건 용서해주십니다. 그런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사제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땅에서 풀어주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용서를 청하십시오. 그럼 용서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있습니다. 용서를 청하는 사람이 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모습이십니다.
미래에 있는 것
일본 야구 선수 미즈오 요시타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무슨일을 했느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재미있고 좋은 일을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거든요.
과거는 추억 혹은 기억에 불과합니다.
물론 과거가 우리들을 즐겁게 하고 행복하게 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재미있고, 진짜 좋은 일들은 모두 미래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미래에 더욱 즐겁고 행복한 일이
가득하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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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이제 막 돌이 지난 아기의 부모에게 “아기 키우면서 언제 제일 기쁘셨어요?”라고 물었습니다. 어떤 대답이 나왔을까요? “걸음마 할 때요.”라고 대답하더군요. 다른 부모도 이때가 정말 기뻤다고 대답하십니다. 이제 같이 걸으며 어디를 갈 수도 있고, 아이가 이제 컸다는 생각도 갖게 된다고 하십니다.
걸음마는 빠르면 7~8개월째, 늦으면 돌이 지나서 걷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처음을 걸음마를 할 때, 성인처럼 잘 걷는 아이가 있을까요? 몇 걸음 떼지 못하고 철퍼덕 주저앉는다고 “바보야! 그것도 못 걸어?” 하면서 야단치지 않습니다. 걷는 시도하는 것 자체를 기뻐합니다. 만약 아이가 걸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누워만 있으려고 하면 부모는 큰 걱정에 빠질 것입니다. 주님도 그러시지 않을까요? 걷다가 넘어지더라도 계속 시도하는 노력 자체를 기뻐하는 부모처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계속된 실패에도 다시 일어나 주님의 뜻을 따르는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어렸을 때, 친구들이 먹는 과자를 너무 먹고 싶어서 어머니 지갑에서 몰래 20원을 꺼내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큰 죄책감에 빠졌는지 모릅니다. 어머니께서 가계부를 쓰면서 “돈이 비는데….”라며 계속 돈 세시는 모습을 보고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어머니와 미사에 갔는데, 마침 신부님께서 불붙은 지옥 불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돈 훔쳤던 일로 곧바로 지옥 불에 떨어질 것 같아서 미사 내내 울고 어머니께 고백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죄 한 번으로 우리를 불붙는 지옥 불로 이끄시지 않습니다. 그보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우리를 이끄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우리를 보고 기뻐하십니다. 문제는 하느님 뜻을 따르려 하지 않는 우리의 나태함이 아닐까요? 그리고 하느님 뜻보다 자기 뜻대로 살려는 고집스러움입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하느님께서는 걱정하실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서 더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안고 있는 우리나라의 지금 현실을 기억하면서,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자고 교회는 권합니다. 그러나 분단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기도를 멈추려고 합니다. 이제는 함께할 수 없다면서, 오히려 서로를 적으로 생각하면서 으르렁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분열이 아니라 일치입니다. 미움으로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 하느님의 뜻을 무시하는 나태함과 고집스러움을 버리고, 대신 하느님 뜻에 맞게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는 오늘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주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께서도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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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가 그 이상 죄를 범하지 않게 될 때까지 용서해주어야 한다(성 예로니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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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 한반도에 평화를 주소서!
용서와 화해는 내 ‘아량’이 아니라 주님께 바치는 감사와 찬미의 행위
잃어버린 우리의 평화 되찾기 위해 진심 모아 하느님께 기도 바치길
예수 성심 성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 되어, 이 땅에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한 핏줄 한 겨레이면서도” 서로 헐뜯고 싸우는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서기를, 참으로 바라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둘로 갈라져 어언 칠십 년을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떠나온 고향을 잊지 못하는 이산가족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말할 수 없이 딱하고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해마다 6월 25일이 되면 주일과 평일의 구분 없이, 똑같은 성경 구절로 우리를 깨워주는 주님의 말씀이 무척 은혜롭게 다가옵니다. 용서를 당부하고 기도할 것을 청하시며 우리 모두가 “마음 속으로 뉘우치고”,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면” 그분께서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라는 약속에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기막힌 우리의 처지를 가엾이 여기시는 주님의 진심을 느끼게 됩니다.
성경은 까마득한 옛날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 삶 안에서 ‘살아’ 생명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친히 당신의 마음을 읽는 방법을 깨우쳐주시고, 어떻게 당신을 따라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신 덕분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성령을 통해서 그 길과 방법을 상세히,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거창하지 않은, 작고 사소한 일상을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으로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다는 진리를 모르지 않습니다. 이 작은 사랑의 실천이 성령님께 힘을 실어드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재료’임을 믿고 지냅니다. 그래서 더욱, 같은 민족끼리 갈라져 ‘원수’가 된 채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습이 아픕니다. 상대의 허물을 덮어주고 모자람을 가려주며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외면한 것이 들통난 기분입니다. 마음에 쌓인 증오를 멈추고 단호히 잘라내라는 말씀을 흘려들은 것을 들킨 느낌입니다. 악에 대한 ‘수동적 자세’를 벗어나서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라는 명령을 어겼다는 걸, 부인할 수가 없으니 민망하고 송구하기만 합니다.
이리 긴 세월 동안, 판단하고 미워하고 외면하면서 서로의 마음에 지옥을 만들었으니, 무어라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녀들은 절대로, 그러지 않기를 바라시니, 참으로 그렇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왕따가 된 북한에는 굶주리고 헐벗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남한의 부요와 사치에 대한 십자가를 대신 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믿음의 폭을 넓혀야겠습니다. 매일 밤 아홉 시에 바치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에 진심을 모아야겠습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큰 믿음으로 도약해야겠습니다. 하여 잃어버린 우리의 평화를 되찾아야겠습니다.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첫 선포는 “회개하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틀린 길에서 벗어나고, 아닌 것을 고쳐 살으라는 당부였습니다. 무릇 회개란 서로가 같음을 인정함에서 비롯됩니다. 마음에 자리한 미움, 원한, 분노가 주님의 것이 아님을 처절히 깨달아,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온 삶의 양식을 하느님께로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사제의 마음은 가볍지가 않습니다. 회개를 너무나 허술히 여기는 현실을 우려합니다. 은근슬쩍 ‘알아내지 못한 죄’라는 너울로 가려 덮어 두는 것으로는, 결단코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잘못한 이에게 베푸는 내 아량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용서에 감읍하여 바치는 감사와 찬미의 행위인 까닭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와 모든 선각자들은 지혜로운 삶의 목표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좋고 귀한 것을 “네 힘으로 그것을 성취해 얻어 누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스스로 자신을 단련하고 연마해야 하느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이르지 않습니다. 다만 새 마음으로, 주님의 뜻에 오롯이 의탁해 살아가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당신께서 손수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물며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다짐의 증표로 보호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너무너무 벅찬 은혜입니다.
꽤 오래, 오늘 강론을 ‘일흔 번의 용서’에 초점을 맞췄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르신 용서의 폭이, 큰 울림으로 제 마음에 담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우리와 함께 있겠다’는 주님의 약속에 감격합니다.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바로 그 자리에 함께 계시겠다니, 횡재한 기분입니다. 오늘 바치는 한국교회의 기도에 함께하실 것이 틀림없으니,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이 글을 적습니다.
성경은 주님께서는 버림받고 외면당하는 이들을 절대로 소외시키지 않는 분임을 선포합니다. 이야말로 더 사랑하려고 노력함으로 서로가 존중하고 서로를 수용하는 복된 결과를 선물 받을 것이란 귀띔이라 믿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통 크게 축복하시는 주님께서 남과 북이 하나가 되도록, 섭리해 주실 것을 굳게 믿으며, 하늘의 성인들께 전구를 청합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 성인이여, 갈라져 살아가는 저희 민족이 하나가 되도록 빌어주소서.
“평화의 모후시여,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위로해주소서. 아멘!”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원장
2023. 6. 25 자 가톨릭신문에 게재됨. [제3349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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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 함께 계시네>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가짐이 아니라
나눔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내침이 아니라
품음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가름이 아니라
이음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죽임이 아니라
살림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맞섬이 아니라
화해가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폭력이 아니라
평화가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분단이 아니라
통일이 있는 곳
주님 함께 계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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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한국 교회는 전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이 서로 화해하고 일치를 이루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남측과 북측이 휴전에 합의한 지도 어느덧 칠십 년이 훌쩍 지나 버렸습니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로 서로 적으로 여겨 총을 겨눈 세월이
이토록 길게 이어져 오고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여도 남북 정상이 만나 한반도 평화의 해법을 찾아가며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화해의 분위기를 이끌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와 희망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고,
지금은 언제 그러하였냐는 듯이 더 강한 수위로 서로 위협하고 비방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반목과 대립이 계속되는 슬픈 역사에 우리는 언제 마침표를 찍게 될까요?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요?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요한 20,1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처음 남기신 인사는 다름 아닌 평화의 인사입니다.
산란하던 제자들 마음에 평화를 빌어 주신 그리스도께서는
불안의 역사를 안고 살아가는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 평화의 해법을 제시하는 듯합니다.
무엇보다 서로가 가진 증오와 원망을 내려놓을 것을 주문합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그리고 용서를 주문합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마지막으로 기도하기를 주문합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이처럼 서로에 대한 증오심을 내려놓고, 서로를 더 깊이 용서하고, 서로 일치를 이루고자 마음 모아 간절히 기도하는 일,
우리가 사는 이 땅에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일들입니다.
물론 칠십 년 동안 쌓여 온 서로에 대한 깊은 불신과 갈등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뿌린 평화의 씨앗은 반드시 싹을 틔우고 자라나 언젠가는 그 열매를 맺게 되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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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독서 복음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남북통일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통일을 준비하는 자세가 담겨있다. 회개와 용서를 통한 사랑의 생활과 믿음의 기도로써 민족화합과 통일을 기원하자. 일제의 손에서 우리에게 광복을 주신 하느님께서 자비로이 평화통일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으며 사랑의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듯이 서로 용서하라고 하며 분노와 욕설과 악의를 내어버리라고 한다. 북한의 위협적인 태도가 용서와 신뢰를 회복하기에는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북한의 어떤 주민이 “남한과 미제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이대로 폭삭 망하는 것이 낫겠다.” 한 기사는 그들 또한 우리를 두려워하고 못 믿고 용서 못 할 자들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북은 서로를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의 자유, 복지와 평화 그리고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안보 의식을 굳게 가져야 한다. 그러나 상호 용서를 통해 민족이 화해할 때 그 이상의 안보와 평화는 없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먼저 마음으로 용서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복음: 마태 18,19-22: 기도와 용서
복음에서는 기도와 용서를 가르치신다. 기도는 통일과정에 필요한 교회의 역할 가운데 가장 우선적인 선택이다. 기도하면서 남북의 화해를 이루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우리는 우리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화해하지 못한 형제가 있으면, 이 미사의 은혜로 서로 화해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하도록 하자.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를 오랫동안 용서하지 못하고 또 화해하지 못하고 끝내 이 세상을 떠나보낸 적이 있다. 그때는 그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기도하던 중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와 화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냥 모른 척 부딪히지 않고 관심 두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그와 화해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하느님과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사랑하는 아드님을 통해서 나를 용서하셨고, 그런 나를 받아들여 주신 하느님 앞에 나는 그를 더는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얼굴을 맞대고 손을 먼저 내밀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내 마음이 열리기를, 용기가 생기기를 기도하였다. 하루 이틀 미루던 중 갑자기 떠나버린 그를 앞에 두고 뒤늦게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어리석게도 ‘내가 화내는 이유는 너무나 정당한데 왜 내가 먼저 화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자꾸 던졌던 내게 하느님은 아무 말 없이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나를 용서해 주시지 않았는가?” 하였다. 기회는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다. 은총의 때를 잘 알고 그 순간에 우리는 용기를 내어서 다가가야 할 것이다.
별 뚜렷한 근거 없이 낙관하는 통일관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장벽에 좌절한다는 것은 우리의 희망을 빼앗아 간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통일을 이루어 주시도록 겸손과 인내로 기도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랑의 생활할 때 통일은 성큼 우리에게 다가와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사회가 서로 용서하고 화합할 수 있도록 우리 신앙인들이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먼저 화해하지 못하고 일치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북이 통일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먼저 우리 사이의 관계 개선을 위해, 그래서 일치되도록 노력하자. 이것이 남북통일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항상 하느님의 일,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말씀을 선택하여 실천하는 삶으로 우리나라의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결심하며, 오늘을 살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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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북녘 동포들을 좀 더 알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또 다시 오랜 분단의 세월을 돌아보며,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을 애써 달래야 하는 날이 돌아왔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특별히 오늘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해,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기도하고 행동하자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같은 피를 물려받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 동포인 남과 북이 갈라서서, 점점 더 멀어지기 시작한 지 벌써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리적으로는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살아가지만, 심리적으로는 지구상 가장 멀리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서로가 너무 낯선 존재, 이질감이 커져 버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강력한 소비에트의 철조망도 제거되었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베를린 장벽도 허물어졌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지구상 유일하게 남과 북 사이에 세워진 무시무시한 철조망은 끝도 없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너무나 큰 슬픔이자 치욕꺼리이며,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은, 우리 자녀들과 후손들에게는 너무나 큰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서로 크게 상처를 주고받은 누군가와의 관계 회복과 새 출발을 위한다면, 가장 우선적인 일은 일단 만나는 일입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더 자주 만나면 좋습니다.
일단 그를 만나서, 그의 얼굴을 대면하고,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그의 입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말을 듣게 될 때, 좀 더 그를 이해하게 됩니다.
함께 소통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될 때, 그간 감춰두고 있었던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자연스레 그간 쌓였던 오해가 풀립니다.
그런 과정 안에서 화해와 일치는 한결 용이해질 것입니다.
일 년 이년도 아니고 반 백년 이상 계속되어온 첨예하고 복잡한 화두가 평화 통일이기에, 더 오랜 고민과 성찰, 뼈를 깎는 노력과 큰마음이 필요합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야속하게도 상황은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과 머리싸움을 벌이고 있는 외세는 결코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원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미사여구를 늘어놓지만, 통일 이후 자국에 끼치게 될 경제적 손실과 다양한 측면의 데미지에 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사실 남북 분단은 국제정치패권세력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강대국들의 국익에 따라 강제된 분단이기 때문에, 분단을 반대하고 통일 정부를 외치던 수많은 민족 인사들이 속속 제거되었습니다.
국제정치패권세력인 미국과 소련은 우리 민족에 참으로 못할 짓을 저질렀습니다.
815 해방 이후 유럽 쪽 전범 국가인 독일을 분단시켰다면, 당연히 아시아쪽 전범 국가인 일본을 분단시켰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승전국가들은 엉뚱하게도 우리나라를 분단시키는 중차대한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가로막는 분단 고착화 세력은 바깥에만 있지 않습니다.
더 큰 적은 내부에 있습니다.
분단 고착화는 강대국들에 빌붙어 제 한 목숨, 제 호주머니만 생각하는 독재자들을 거듭 배출시켰으며, 기회주의의 명수인 친일파 세력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했으며, 아직도 그들의 잔존 세력들은 독버섯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버젓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어떤 정당 안에서, 여러 매체 안에서 얼토당토않은 논리로 선량한 국민들을 호도시키고 있습니다.
분단 고착화를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분단 고착화 세력에 희생되신 백범 선생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마음 깊이 담고 지내야겠습니다.
“분단된 동포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이 시대 새로운 독립운동입니다.
통일 운동은 곧 제2의 독립운동입니다”(백범 선생)
한반도의 평화 통일은 다른 그 누구의 과제가 아니라, 남북 당사자들 사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남북을 둘러싼 주변 국가들 겉으로는 반기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지속적인 분단을 원합니다.
한반도의 분단이 곧 그들의 국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의 내밀한 가정사에 대해 옆집 이웃들이 끼어들어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얼마나 기분 나쁜 일이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처한 형국이 똑같은 현실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남북 문제의 주도권을 우리 손으로 가져와야 마땅합니다.
70여년 이상 분단 고착화로 인한 남과 북의 증오와 대립, 불신으로 우리는 북한에 대하여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왜곡, 날조된 정보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이른바 우리는 북맹(北盲) 상태입니다. 북한에 대하여 증오와 불신으로 눈이 멀어 아무것도 아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북녘 동포들을 좀 더 알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단의 벽을 넘어서는 일은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온몸이 으깨어질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대한 용기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 한민족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이제는 그만 분단의 세월을 끝내고, 조속한 평화 통일을 선물로 주시라고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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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전삼용 요셉 신부님.
통일을 원하면 북한에 도움을 청하라
남북통일은 우리 민족의 숙원입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왜 큰 비용을 들이며 이념도 다른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버린 이들과 참아가며 살아야 하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결혼과 아기를 낳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왜 그런 고통을 분담하며 결혼해야 하고 아기를 키워야 하는 말과 같습니다.
어떤 누구도 자신에게 더 큰 이익이 오지 않으면
그런 일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통일에 대한 생각도 조금은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것이 반은 맞는 복음이지만, 동시에 반은 맞지 않는다고 봅니다.
내가 용서해 주는 사람이라면 상대는 용서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둘이 화해가 이루어질까요? 화해는 쌍방의 이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나는 무조건 손해 보고 상대는 무조건 용서받는 식의 화해는 좋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대부분 “통일하면 너희가 얼마나 좋은 줄 알아?”라는 마음으로 다가가려 하는 것 같습니다.
“너희에게는 자유도 없고, 돈도 없고, 종교도 없고, 기술도 없으니 내가 도와줘야 해!”라고 하면 상대는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런데 참 행복은 돈과 명예나 성공이 아니라 자존감입니다.
자존감이 무너지면 자존심만 남습니다.
그 자존심이 우리 통일을 저해하게 할 것입니다.
‘스탠리 밀그램’은 상황의 힘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을 죽을 수도 있는 정도까지 전기충격을 가하게 하는 유명한 실험을 한 심리학자입니다.
한 번은 어머니가 지하철에서 자신에게 누구나 자리를 양보해 주지 않는다는 푸념을 듣고는, 무조건 도움을 청하면 사람들은 어느 정도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원생들을 시켜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무조건 청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보다 두 배 정도나 높았습니다.
이 요청을 받은 사람 중의 68%가 자리를 양보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 실험에 참여한 대학원생들이 다시는 그런 실험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밝힌 것입니다.
왜 그런 상처들을 받았는지 궁금해서 밀그램이 직접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청해보았습니다.
물론 70% 정도가 자리를 양보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앉는 순간 기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굶을 수도 있고 죽음까지 받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절대 내가 더 주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상대의 자존심을 깎아내려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은 ‘가스라이팅’, 곧 심리적인 지배를 통해 상대를 이용하려는 이들이 쓰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이미 초등학교 고학년인데도 밥을 먹여 주고 양치질과 세수를 시켜 주고 학교까지 바래다준다면, 지금이야 엄마가 그렇게 하게 허락하겠지만, 나중에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자신의 탓을 엄마에게 돌릴 것입니다.
일방적인 관계는 부담스럽게 만들어 상대를 떠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한 번은 적십자에서 일을 하는 유럽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북한과 한국으로 오가며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어느 나라 사람들이 더 행복해 보이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북한 사람들의 표정이 훨씬 맑고 밝고 웃음기가 많았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지하철에서 그는 웃는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못 봤다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통일되면 그들이 우리에게 더 큰 피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더 준다고 생각하고 만나는 관계는 언제나 갑을 관계이지 친구가 되는 관계가 아닙니다.
북한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우리는 먼저 통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의 처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저출산율과 경제성장률 둔화 때문에 어쩌면 유일한 돌파구가 통일일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우리가 북한을 더 필요로 하니 북한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처지입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을 지독히도 미워하는 정적이 있었습니다.
프랭클린은 그 상대가 자신이 읽고 싶은 귀한 책을 한 권 소유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그 책을 좀 빌려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는 순순히 책을 빌려주었고 프랭클린은 잘 읽고는 너무 좋은 책이라는 감사와 함께 돌려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벤저민 프랭클린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북한과 우리 가족, 그리고 모든 이웃에게 나아가야 하는 자세입니다.
모든 관계의 기본은 겸손입니다.
친구가 되려면 도움을 청하십시오. 많은 친구를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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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이승화 시몬 신부님.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원수를 보지 않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사를 가는 것입니다.
직접 마주칠 수 있는 접점을 하나하나 없애서
내 마음을 돌보는 방법입니다.
다만 돈이 많이 든다는 점과
상대를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원수를 안아주는 것입니다.
감싸 안을 때 원수의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이 있음을 인정하고
상대에 대한 나의 마음을 받아들이며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입니다.
처음 마주칠 때는 힘들지만
이내 상대를 의식하지 않게 됩니다.
당장은 편하지만 상대를 계속 의식해야 하는 방법과
당장은 불편하지만 상대를 잊을 수 있는 방법
과연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일까요?
둘 방법 다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결국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상대를 품에 안으며
상대가 괴물이 아닌 사람임을 느끼고
그 사람 뒤에 있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오히려 하느님께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더 깊은 충만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그러한 자세를 말해줍니다.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와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 다시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조금 더 나아간 말을 합니다.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도록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내버려야 합니다.
상대에 대한 감정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한 용서는 하느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기에
우리는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역시 그렇습니다.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서로에 대한 감정이 아닌 하느님을 바라보라는 뜻이며
내가 진정으로 자유롭기 위한 선택을 하라는 뜻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서로의 감정이 반목하여 세워진 벽은
하느님이 오심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나 벽을 허물 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올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며
서로에 대한 감정을 넘어
하느님을 먼저 바라볼 수 있는
한 주간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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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 안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ㄴ-20).”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우리가 마음을 모아서 긴 세월 동안 조국 통일을 위해서 기도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데 왜 통일이 안 되는 것일까? 라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제대로 마음을 모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목소리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제각각 다른 통일을 생각하고 있으니, 마음을 모아서 기도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평화 통일을 바라는 사람이 많지만, 무력 통일을 바라는 사람도 있고, 통일이 아니라 전쟁을 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북 갈등만큼이나 남남 갈등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교회 내부에도 그런 갈등이 있으니, 우리가 마음을 모아서 청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도 함께 있겠다.” 라고 약속하셨는데, 이렇게 마음이 갈라져 있는 상황에서, 함께 계셔 달라고 예수님께 청하는 것은 참으로 염치없는 일입니다.>
요즘 길거리에 붙어 있는 정당의 현수막들 가운데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힌 자들이 애국자 행세를 하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을 흐려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양들이 이리 떼와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 가능할까?
화해와 일치는 ‘선(善)의 실현과 완성’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인간의 선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입니다.
화해와 일치는 인간들만의 화해와 일치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만일에 양들이 양이기를 포기하고 이리 떼로 바뀌면, 이리 떼와 한 덩어리로 뭉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화해도 아니고 일치도 아닙니다.
선을 포기하고 악과 타협하는 것은 화해와 일치가 아니라 하느님께 반역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안에서’ 참된 화해와 일치를 이루려면 ‘하느님의 선’에 대한 신념을 더욱 확고하게 지켜야 하고, 이리 떼를 양으로 변화시키려고, 즉 악인들을 회개시키려고 노력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실제 현실에서는 그게 사람의 힘으로는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더욱더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이라도 주님의 힘으로는 됩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선은 선이고 악은 악입니다.
선과 악은 화해할 수도 없고 일치를 이룰 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악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의 선’ 안에 모일 때, 그때 비로소 참된 화해와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가장 먼저 할 일은 회개하도록 인도하는 일, 그리고 회개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앙갚음 하지 마라.”,
또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고 가르치셨는데(마태 5,38-48),
루카복음 17장에서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라는 가르침도 주셨습니다(루카 17,3ㄴ).
사랑한다면 죄를 꾸짖어야 합니다.
죄를 내버려두는 것은 사랑도 아니고, 화해와 일치도 아닙니다.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라는 베드로 사도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라고 대답하신 것은, 용서를 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신 것이고, 우리는 용서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죄를 짓고 나서 회개하지 않은 채로 “나를 용서하여라.” 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용서를 청하는 일은 ‘요구’가 아니라 ‘간청’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무조건, 언제든지, 무한정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어도, 용서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죄를 인정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고, 용서를 청하지도 않으면, 용서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주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따라서 제대로 용서가 이루어지려면 진심으로 회개할 수 있도록 꾸짖고 타이르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 라고 가르치셨고(요한 13,34), 바오로 사도는 “서로 용서하십시오.” 라고 권고했는데(에페 4,32), ‘서로’ 라는 말은 가르치는 입장에서 사용한 표현이고, 실천하는 입장에서 사용할 말은 아닙니다.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는 것이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해법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예수님의 말씀과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일 뿐입니다.
사랑과 용서는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하지 않더라도......
어쩌면 우리는 그 ‘서로’ 라는 말의 함정에 빠져서
이렇게 긴 세월을 허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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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사랑보다 더 지키기 어려운 것이
용서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사랑과 용서가 같은 의미이겠지만
원수라는 단어 앞에서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 앞에서
사랑을 표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표현이 용서이든, 원수 사랑이든
우리는 그 상황에서
용서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게 됩니다.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고
더 나아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나 자신을 봅니다.
물론 지키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지키지 못하는 것이지만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용서해야지 스스로에게 재촉하는 모습과
용서에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안에서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보기 앞서
용서 받은 나를 먼저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다는 것,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허물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감싸 안아 주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용서 받은 기억,
사랑 받은 기억에
충만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둘째 문제인 듯합니다.
받은 것에 충만할 때
용서하지 못하는 나 자신도
크게 문제 되지 않고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크게 문제 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노력에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용서를 잘 못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잘 해보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못하는 것은 못한다고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용서하기를 멈추고
우선 용서 받은 나를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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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아프리카의 한 정글에서 생물학자들이 한 가지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그곳에 사는 많은 종류의 짐승들을 한 종류씩 없애보기로 한 것입니다. 먼저 새를 없애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정글은 마치 공동묘지처럼 적막한 숲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번에는 원숭이들을 쫓아냈습니다.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 다니며 나뭇가지를 꺾어 숲을 망가뜨리는 원숭이는 필요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숭이가 사라지자 나무 가지들이 서로 어지럽게 뒤엉키면서 햇볕을 가려버려 땅이 썩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징그럽고 위험한 뱀들을 다 제거했습니다. 그러자 천적이 없어진 쥐들의 개체수가 급격히 늘었고 그로 인해 해충을 잡아먹던 큰 벌레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학자들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에 ‘필요 없는’ 것은 없으며, 그들이 모두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만 생물 전체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그런 점은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가 서로를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며 함께해야 모두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벌써 7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뿌리 깊은 오해와 갈등,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혀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바로 한국전쟁 이후 남북으로 분단된 채 유지되고 있는 대치상황 때문입니다. 그 역사 안에서 얼마나 많은 슬픔과 아픔들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적대심을 드러내면서, 상대방을 멸망시켜야만 내가 사는 것처럼 서로 못 잡아 먹어 안달인 상황이지요. 하지만 한 민족 한 핏줄인 우리는 서로 평화롭게 어울려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점을 되새기며 한민족의 참된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매년 6월 25일 오늘 성경에 기록된 용서의 메시지를 읽고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여 참된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그러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욕심과 고집에 사로잡혀 당신을 떠난 이들이 언제라도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여 당신 품으로 되돌아오기를 목놓아 기다리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십니다. 우리가 언제 당신을 찾아가도 언제든 용서하실 수 있도록, 죄라는 무거운 짐을 가득 지고서 당신께 나아가는 우리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서 계시지요.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은 ‘대체 나에게 왜 그렇게 하였느냐’고 잘잘못을 따지고 벌을 내리시는게 아니라, 당신 자녀인 우리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 곧 당신 사랑의 품을 되찾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우리가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목표가 다르다는 이유로 형제를 미워하고 배척한다면, 그들을 용서하기를 거부하여 그들이 하느님께 돌아가는 길을 가로막는다면, 그건 우리를 공평하게 사랑하시고 우리 모두의 행복을 바라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가슴아프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형제들 사이에 갈등과 분열을 멈추고 일치와 평화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 일치의 길은 ‘마음을 모으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나와 여러가지로 ‘다른’ 누군가와 마음을 모으기란 참으로 어렵지요. 듣기 싫은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지키고 싶은 고집과 신념을 꺾어가며, 불이익과 희생까지 감수하는, 그야말로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포기와 양보, 용서와 사랑, 이해와 배려가 그와 나의 마음 속에 스며들어야 비로소 그 마음의 밭에서 일치와 평화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는 겁니다. 그 노력이 얼마나 힘들고 눈물겨운지를 아시기에, 주님은 우리가 마음을 모아 당신께 바치는 기도를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어렵게 하나로 모아진 그 소중한 마음이 실망과 좌절 속에 흩어지지 않도록 우리가 당신께 대한 믿음 안에서 ‘한 마음’으로 드리는 청원을 반드시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참된 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베드로가 엉뚱한 질문으로 예수님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형제가 자기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하느냐고 그 ‘한도’를 물은 것입니다. 그의 물음에서 그가 ‘형제’라고 부르는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마음가짐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즉 형제는 여러 실수와 잘못으로 자기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죄’를 짓는 골치아픈 존재이고, 그보다 더 나은 존재인 자신은 그에게 넓은 아량으로 용서라는 은혜를 베풀어야 하는, 그래서 여러가지로 손해를 보는 억울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디 베드로만 그러겠습니까? 우리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의 실수와 잘못, 허물과 단점을 보면 그것을 일일히 지적하고 비난하며 심지어 직접 단죄하려 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 식으로 구는건 내가 그보다 더 잘났다고, 더 의롭다고, 더 올바르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 때문에 자기 마음 안에 더 큰 죄를 쌓으며 살고 있다는건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남의 잘못을 보기 전에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바라봐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자신과 남을 바라보는 사람은 타인의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을 어떻게 도와주어서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줄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또한 그가 저지르는 실수와 잘못을 나 또한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지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바로잡는 계기로 삼습니다. 그러면 그를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먼저 그에게 용서를 청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마음으로 멀게는 저 북녘에 있는 동포들을, 가깝게는 나와 부대끼며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 자매들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서 함께 살아갑니다. 그렇다는건 나에게 상처를 준 저 사람도 하느님께서 오롯이 사랑하고 계신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부드럽고 넓은 마음을 주시기를 주님께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따스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그를 마음에서부터 용서해야 합니다. 몇 번까지만 한계를 두고 봐준다거나 특별한 조건을 채워야만 용서해주겠다는 옹졸한 마음을 버리고 그를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오늘 우리가 청하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라는 거창한 목표는 먼저 가까운 이웃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베푸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하신 말씀에 비추어 나를 돌아보고,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행동으로 삶으로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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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이재을 사도 요한 신부님.
주일은 복음 선교의 날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19-20
강한 것이 약한 것을 괴롭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강자가 약자를 그렇게 하고, 권세가가 약한 백성들을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강할 때 힘이 있을 때, 약함을 알고 힘이 없는 이들을 돌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종종 약자가 강자와 놀아나고, 강자의 들러리꾼이 되기도 합니다. 힘이 없으면서도 힘이 있는 체 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선과 진실을 잃고 정의와 공정을 잃으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선과 진실함을 잃으면 사람을 바르게 대하지 못하며 더구나 자비와 사랑을 베풀수 없습니다. 선과 진실, 정의와 공정을 잃으면 자기 욕심과 자기 욕구를 채우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자기 조직과 자기와 이익에 연결된 조직 만을 챙기는 데 눈이 충혈됩니다.
신자 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때때로 선과 진리와 멀어지려고 하고, 정의와 공정을 외면하고, 자비와 사랑을 못본체 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늬로만 종교를 따르는 것이지, 속은 하느님을 멀리하고 있는 것이고, 나 자신이 만든 신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젊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전례 성사 생활의 참여가 줄어들고, 고령자나 종교나 신심이 필요하다는 이들만 활동하는 방향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 교회가 교회의 복음의 본질을 잃어 가고 있는 때문입니다. 현대의 물질적 자본적 풍요와 활동에서 부와 유여와 풍요만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의 반대편에 상처나 아픔, 소외와 권리와 존엄을 잃은 이들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가 풍요하고 모든 것을 누리고 있지만, 엄연히 정신적 심리적 공동체적인 고통과 어려움이 있고, 소외 뿐 아니라 구조적인 모순과 괴리감도 있습니다. 그 안에서 속박되어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더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가난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가난함을 위해서, 그 구조를 선의 지향으로 극복해 나가는 데 있습니다. 그 가난에 복음의 신비가 있습니다. 세상 창조 신비의, 가난을 바르게 보고 가난과 함께 걸어가고 가난을 회복하고 치유하는 데 그 복음의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작은 이, 가난한 이였습니다. 제자들도 그런 작은 이, 누리거나 가지지 못한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여성들도 제자들로서 여러 조건과 삶에서 가난하고 사회에서 공동체에서 소외된 이들이었습니다. 최후 심판에서 예수님의 벗들되고, 그분 안에 드는 이들에게. 그들도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서고 도와주고 함께 하며 기꺼이 내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교회의 기쁨도 '가난'을 놓지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회의 성장과 발전도 가난을 치워놓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벗이 되고, 그들과 함께 걸으며 함께 기쁨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교회가 이어가고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주일은 복음 선교의 날입니다. 복음은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있는 이들에게 우리도 흘러가게 되고 그들과 함께 모이게 됩니다.
주님,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당신께서, 우리와 교회와 공동체에도 복음의 빛을 , 곧 가난과 창조의 신비의 길을 알게 하시고, 교회가 그 가난과 함께 걸어가고 함께 회복해 가는 가운데 은혜가 되는 거룩한 구원의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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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남북통일 기원 미사)-묵상과 기도
우리 나라는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합니다. 민족 상잔의 비극이 있었습니다. 일제의 불의함에서 벗어난지 얼마 못되어, 외세와 사상적 갈등과 정치 세력들의 우열다툼으로 6.25일 비극이 시작되었고 현재까지 70년 이상 동안 우리 민족 모두가 아픔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민족과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를 위하여, 남북한의 화해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한국교회는 1965년부터 이날을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였고, 1992년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2005년부터 주일로 지내다가, 2017년부터는 6월 25일에 거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화해하고 일치를 위하여 나아가도록,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주님의 명령에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 운명을 되돌리신다. 가엾이 여기신다. 바오로 사도는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라.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다. 하였습니다.
회상과 성찰
-. 지난 시간을 되돌아 봅니다. 어제 등. 지난 시간 걸어온 길. 자리, 만남, 대화를. 나의 모습과 말, 처신과 행위를 바라봅니다.
-. 사랑과 자비, 진리와 선을 중심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 개선, 자선을 생각합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나의 바람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또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의 내용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이 모든 말씀, 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또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너희가 하늘 끝까지 쫓겨났다 하더라도,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그곳에서 너희를 모아들이시고 그곳에서 너희를 데려오실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이 차지하였던 땅으로 너희를 들어가게 하시어,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하고 조상들보다 더 잘되고 번성하게 해 주실 것이다.” 신명 30,1-5
형제 여러분,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에페 4,29―5,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 18,19ㄴ-22
말씀 실천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자기에게 죄를 지으면 일곱 번이면 됩니까? 물었을 때, 그분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고 하였습니다. 동족상잔으로 70년 넘게 남북이 분단되고 대치되어온 우리 나라. 남북의 이 민족이 함께 '평화'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신 것처럼, 외세와 민족의 분단으로 둘로 갈라진 우리나라를 하나로 만드실 주님이십니다. 당신께서 둘로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시고 새 민족 새 나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이루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시고 모인 사람들을 지켜 주시는 하느님, 남북으로 갈라진 저희 민족을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평화 통일을 이루어 주시고, 민족의 상처를 치유하시며 흩어진 가족들이 한데 모여 기쁘게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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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삶
<2023.6.25> 아침을 여는 묵상 (롬 14:13~23절)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삶❞
❚ 자기 자신의 믿음으로 형제들을 판단하지 말고, 서로 덕을 세움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야 합니다.
✔ 공동체를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넘어서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13~15절).
바울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며, 서로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할 것(13절)을 당부합니다. 이어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살리신 형제에 대하여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무엇이든 속된 것이 없게 만드셨는데, 사람들이 스스로의 생각과 전통으로 어떤 것을 속된 것으로 여기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지적(14~15절)하고 있습니다.
본질이 아닌 것을 가지고 얼마나 다투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이 분명한 답을 제시하고 있음에도 ‘주 안에서’가 아닌 ‘내 안에서, 내 뜻대로, 내 경험대로등등’을 앞세우는 어리석음을 보게 됩니다. 주 안에서 행할진대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나의 행동과 나의 믿음의 생활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할 수 있다면 나의 믿음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의 잘못된 행실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나버리는 안타까운 일을 행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 자신도 귀하지만 모든 교회 공동체의 사람들 또한 귀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 간의 다름과 차이를 넘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두를 포용하므로 교회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서로의 기준과 권리를 넘어서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16~21절).
그러므로 내 생각에 좋아하게 여기는 일이 도리어 비방거리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16~17절). 그리스도를 이렇게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게 됩니다(18절). 그렇기 때문에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더욱 힘쓰며(19절)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므로 하나님이 이룩해 놓으신 것을 음식 때문에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며, 형제나 자매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20~21절).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답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고 성도 간에 화평과 덕을 세우기 위해 교회 공동체의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특별히 신경을 쓰며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 덕을 세우는 데 방해가 되는 내 자신의 신념과 자유 그리고 나의 성품이 있는지를 말씀을 거울로 삼아 매 순간 점검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나의 삶이 의와 평화와 기쁨을 이루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나 보다 연약한 사람들의 신앙에 기준을 두어 건강하고 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삶을 통해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서로의 상황과 처지를 넘어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22~23절).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과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지키는 것은 좋은 현상입니다. 또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22절). 그러나 의심을 하면서 먹는 사람은 이미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음에 근거해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다 죄입니다(23절,새번역).
주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의심 없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신앙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이 정해 놓으신 믿음의 길을 가는 이유는 이 길을 걷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이 길이 옳은 길이기 때문에 나는 이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조금 더 이득을 보기 위해, 또 사람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해 믿음대로 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서로의 상황과 처지가 어떠하든지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선한 것과 악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믿음으로 분별하여 누구든지 사랑하므로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성도 간의 다름과 차이를 넘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포용하며, 인정하여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믿음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답게 살아가므로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롬 14:13~23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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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삼용 수사님. 카카오 스토리 230625
Imagine - John Lennon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봐요. 한번 해보면 쉬울 거예요.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우리의 아래엔 지옥같은건 없고, 우리의 위는, 오직 하늘 뿐이에요.
Imagine all the people Livin' for today
모든 사람을 생각해봐요. 오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을...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어떠한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해봐요. 그리 어렵진 않아요.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
죽여야 하거나 죽는 것 하나 없고, 종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을요.
Imagine all the people. Livin' life in peace
모든 사람들을 상상해봐요. 평화롭게 사는 사람들을...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그대는 내가 몽상가라 말하겠죠.. 하지만 이게 나뿐만은 아니에요.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난 그대도 언젠가 이곳에 오길 바래요.. 그러면 이 세상이 하나 되겠지요.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소유"가 없다 상상해봐요. 난 그대가 이를 할 수 있을지 궁금해요.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욕구나 배고픔도 없고, 사람의 형제애의 정신도.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모든 사람들을 상상해봐요. 모든 세상을 나누어주는...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그대는 내가 몽상가라 말하겠죠. 하지만 이게 나뿐만은 아니에요.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난 그대도 언젠가 이곳에 오길 바래요. 그러면 이 세상이 하나 되어 살겠지요.
프란치스코의 회개 시점은 정확히 보면 전쟁터가 나가서 전쟁의 참상과 인간성의 말살, 파괴, 멸망을 보고 겪으면서 부터이다. 완전히 인생이 바뀌게 된 계기를 준것이 전쟁이다. 그로 인해 평화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되었고 급기야 인간 사이에 타협하기 최고 어려운 이념과 종교의 대립의 현장인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십자군 전쟁 중에 적장인 술탄을 홀홀단신 맨 몸으로 찾아가 형제애를 나누게(물론 복음전파와 회개를 선포하기 위해서 였겠지만~) 되기 까지 하였다.
그래서 평화를 위한 기도의 주인공으로 평화의 사도라 불리며 보기에도 그렇지만 그의 고향 이태리 아씨시가 평화의 도시이다. 즉 프란치스코는 당시 도시간 귀족과 평민의 전쟁에 승전을 통해 기사 작위로 명예와 권력을 얻고자 직접 뛰어든 전쟁에서 인간의 참상을 겪고 진리와 평화의 길을 극적으로 걷게된 원천적인 회개의 길이었던 것이다.
오늘은 6. 25 정전 70주년으로 우리 교회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지내고 있다. 우리나라의 갈등과 혐오의 근본적인 원인은 분단이다. 상대를 적으로 규정할 수 밖에 없는 분단의 구조가 갈등과 혐오를 부채질하고 우리를 얼마나 옥죄고 이해와 대화보다는 상대를 악마화 하는 원죄와 같은 것이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충돌하는 지정학적 리스크를 오히려 국은 융성과 웅비의 기회로 지정학적 기회와 세계평화를 이루는 교두보 역할을 하는 길로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 한국은 대륙의 길이 막혀있는 섬나라가 아닌가? 우리가 대륙성을 회복하고 평화통일의 길로 간다면 우리의 마음은 넓어지고 평화롭게 하는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이다. 그렇다~6. 25 정전 70년 만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천주교에서도 군대에 군종신부를 파견하고 있는데 군종신부라는 말이 맞는 것인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의 은총을 빌고 비폭력의 하느님의 힘,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하는 사랑과 평화의 길을 가야하는 사제와 군대가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무기와 사랑, 전쟁과 평화가 양립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군대의 구성원이 사람이기에 인간구원을 위한 종교를 군대가 필요로 할 수는 있어도 사제가 군대의 일원으로 사목을 수행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고 맞지 않다. 사제 신분으로 군대와 군인 사목을 해야 정체성에 맞는 것이다. 즉 지역교회의 사제가 사제복을 입고 군인 사목을 해야지 군인의 일원으로 군복과 계급장과 모자를 쓰고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말이다. 더구나 군종신부가 사람을 죽이는 총을 겨누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다. 종교는 힘으로 무력이 아닌 비폭력으로 상호 이해와 사랑 정의실현을 통해 하느님 나라 건설을 하는 것이 사명 아닌가? 군전력강화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은 큰 직무유기이다. 현실적 법적으로 무순 문제가 있는지 모르지만 문제 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어째꺼나 북한은 우리 민족이고 형제이기도 하지만 상존하는 현실적인 가장 큰 위협의 대상이기 때문에 증오와 경계를 가지고 대립하는 것이 당연한 현상이고 분단을 이용하여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이해관계의 열강들과 내부적으로 이데롤로기로 이용되어 진실을 가리고 상대를 빨갱이로 매도하고 북한과 동일시 하는 등 정쟁화 하는 행태도 볼 수 있다.
전쟁은 우리 모두에게 씻지 못할 아픔과 상처를 주고 멸망에도 이르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어렵고 힘든 길 이지만 평화통일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 우리 예수님이 전한 복음이나 존레논의 이매진이나 어떻게 보면 불의가 판치고 무기와 권력 돈이 최고가 되는 현실과 맞지않는 뜬구름 잡는 소리, 몽상가의 잠꼬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남북의 화해를 위한 주님의 기도
북녘의 형제들에게도 아버지이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북녘의 형제들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남녘에서나 북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주님
북녘의 형제들에게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 서로 잘못한 것을 우리 서로 용서하게 하시고
그 용서를 보시고 저희를 용서하시며
그들을 외면하고픈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형제를 악으로 보는 악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아멘
Imagine - John Len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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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 20)
발상(發想)의 전환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냥
이루어지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가 아닙니다.
포기할 수 없는
기도의 길입니다.
끊임없는
봉헌의 길입니다.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조건없이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상호존중과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화해가 참된
화해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기도의 실천입니다.
실천만이
이 땅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진리의 길입니다.
진리는 어렵고
힘든 실마리를
하나씩 풀어
나가는 것입니다.
비난과 비방이
아닌 힘과 지혜를
기도로 모으는
것입니다.
분단의 벽을
허무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공동체의 회복은
기도의 회복입니다.
기도는 인격체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만남은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오해와 편견
모든 모순과
왜곡과
배척을
바로잡는 것이
하나되는
여정입니다.
하나됨의 실천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로 시작됩니다.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는 것이
상생과 동질성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공동체의
간절한 기도는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서로의 얼굴에서
화해와 일치의
하느님을 만나는
마음의 만남이길
기도드립니다.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올려드리는
구체적인
기도입니다.
화해와
일치를 위해
간절히
기도드리는
새 날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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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놀라움 회복하기, 회개, 기도, 용서] 2023년 6월 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이병근 대건안드레아) 원당동 성당
https://youtu.be/Y5Uqc5OF2G4 21:02
병근병근 신부
2023.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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