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3총사
정확히 44년만의 재회이다. 군대는 제대하면 모든 것이 끝이다. 전우애(戰友愛)라는 것은 전시에나 있는 것이지 의무 복무를 억지로 하는 병사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군복무가 의무사항이 아니라면 자원입대 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자신의 병역비리 때문에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자식들의 병역문제로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기도하고 대통령의 꿈도 접어야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군 통수권자가 군대생활은 썩는 거라고 군복무를 단축하는 것이 좋다고 발언하여, 상당한 기간동안 회자(膾炙)되고 부적절한 언사였다고 지탄을 받기도하였다.
내가 군에 입대할 무렵 병역면제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조금만 공을 들이면 빠질 수 있었다. 그 후 점점 병역관리가 엄해지고 투명해졌다. 훈련소에 들어가기 전에 며칠간 대기병으로 있을 때 병역면제의 유혹이 직간접적으로 뻗혀왔다.
난 단호히 거절하고 군번을 받았다. 군번이 부여되고 나면 면제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훈련을 마치고 특과병 교육을 거쳐서 근무할 부대로 배치되니 진짜 군 생활이 시작되었다.
후방 부대에 근무하게 되어 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아 다소 안도감을 가졌다. 군인 교회에 출석해보니 고참들이 무척 따뜻하게 대해주어 더욱 좋았다.
사단 급 교회이나 시설은 다소 부족해도 상하 간에 신우애(信友愛)를 느낄 수 있었다. 삼총사는 거기서 만났다. 남 병장과 박 상병 그리고 김 일병인 나. 우리는 계급은 달라도 나이는 비슷했다. 군대는 마치면 끝이 아니었다. 그렇게 만난 우리는 일생을 함께 가는 벗이 되었다.
남 병장은 제대하여 행정공무원의 길로 박 상병은 신학을 마치고 목회자의 길로 나는 교사가 되었다. 가끔 연락은 되었지만 세 사람이 함께 만나지 못했다. 나는 대구에 살게 되고 남 병장은 서울에 박 상병은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박 상병은 목사가 되고 나와 남 병장은 장로가 되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것일까? 나는 서울에 가면 남 장로의 집에 드나들었다. 그는 사무관이 되어 지방대학에 근무하게 되어 대구에 와서 몇 해 있었다. 자주 만나게 되었고 두 가족이 그가 근무하는 학교의 수련관에서 여름에 함께 모여 피서도 하였다. 그 후 그는 서울 로 가서 근무하던 S대학에서 퇴임하게 되었다.
박 목사를 가끔 만나보면 사심이 없는 목회자다. 작은 교회든 큰 교회든 그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목회하며 굳이 큰 교회를 욕심 내지 않았다. 그는 교회도 잘 다스리는 선한 목자였으며 자녀들도, 아들 둘 딸 하나를 반듯하게 키웠다. 딸은 우리나라 명문 여대 E대학을 마치고 선교사의 사모가 되어 영국에 있으며 큰아들 내외는 중등학교 교원이다. 둘째 아들은 모 기업의 사원으로 근무한다.
남 장로 역시 장로가 되어 교회를 바로 세우려고 자신을 버리는 모범 신자이다. 자녀들도 잘 키워서 딸은 목회자의 사모로 보내고 아들은 장로님과 함께 있다.
나 역시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큰 딸은 권사의 가정으로 출가하여 아들 둘을 키우는 평범한 주부가 되었고 아들은 나와 함께 생활한다.
군 생활을 마치고도 전우애를 이어가기는 해병대가 최고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구호아래 그들은 제대하고 지역별로 똘똘 뭉쳐서 목소리를 높인다. 기수에 따라 선후배가 확실한 해병대의 특수한 군 생활은 제대 후에도 선후배로 연결된다.
어떤 지역에는 해병전우회가 지역의 방범활동에 앞장서기도하고 지역의 어려운 일에도 도움을 주는 미담 사례가 더러 있다.
육군은 병력은 많아도 해병대처럼 기수가 분명한 것은 아니다. 훈련소도 여러 군데 있으므로 출신 지역이 다르다. 제대하고 나면 응집력도 약하다. 허지만 우리 삼총사는 다르다. 비록 육군 출신이지만 끈끈한 정이 평생을 이어갈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시작이다. 석 달 마다 서울 부산 대구에서 돌아가면서 초대하여 만나기로 약속되었다.
만나서 이야기 하니 40년 전 일이 어제 일 같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신 하사 극장 수류탄투척사건, 김 신조 무장 공비 일당남침 사건 등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이러한 사건 때 마다 고생이 심했다.
특히 울진 삼척 무장공비 사건 때는 함께 근무하던 전우가 몇 명 희생되었다. 평소에 있었던 무장간첩 사건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일종의 국지전으로 보는 것이 옳았다. 120명의 무장 공비들의 침공은 전투라고 보아야 될 것이다.
그 후 군 복무기간은 조금 씩 단축되다가 김 신조 사건이 터지고 소리 없이 3년으로 늘어났다. 남 병장은 관계없이 전역되고 박 상병은 한달 정도 더 군 생활을 하였지만 나는 완전히 3년을 채우고 제대 하게 되었다.
내가 교사로 근무할 즈음에 김 신조가 우리 교회에 와서 간증을 하게 되었다. 집회를 마치고 김 신조와 목사관에서 차를 마시면서 ‘내가 당신 때문에 군 생활이 늘어져서 골탕을 먹었다.’ 고 했더니, 나처럼 이야기 하는 사람을 자주 만나는데 가장 골탕을 먹은 사람은 김일성이라고 웃으면서 능청스럽게 둘러대었다. 자신은 자수한 것이 아니며 청와대를 까부수러 왔으나 실패하고 체포당하여 전향하게 되었다고. 김 신조는 북에서 온 선교사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듣고 보니 그 말이 의미가 있었다. 그 후 김 신조는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삼총사 둘을 대구에 초대하였다, 다음은 박 목사가 부산으로 그리고는 서울로 남 장로가 초청하기로 약속되었다. 만나서 지난 아름다웠던 군 생활을 비롯해서 육군 삼총사의 이야기꽃을 피울 것을 생각하니 만날 날이 기다려진다.(2012.7.18 재회의 날)
첫댓글 내일 서울 만나러 갑니다. 기다려집니다. 육군 3총사 화이팅!
군 생활에서 만난 인연으로 44년이란 긴세월 변치않는 우정이 정말 부럽읍니다. 좋은 만남 좋은 우정이 영원하시길 기원드리며 잘 다녀오십시요.
신우애(信友愛)와 전우애로 똘똘 뭉치신 세 분의 우정이 존경스럽습니다. 오랜 세월 변하지 않고 마음이 하나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모두 복받으신 분들이십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교수님의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쉽지 않은 귀한 만남의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같이 생사고락을 함께한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오는 대단하십니다! 세상의 좋은 벗은 인생을 더욱 값지게 하는 것 같습니다. 잘 다녀오십시요!^^
저역시 전투경찰로 제대하고 40여년째 이어져오는 모임이 있습니다. 만나면 늘 생사고락을 나눈 전우애를 부르짖습니다. 요즘은 부부모임이 되어 여자들이 더 좋아하지요. 제 일처럼 공감하면서 잘 읽었습니다.
군에서 만난 우정. 계급차이가 있음에도 정으로 맺어진 대단한 관계. 오래 오래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잘 지내시리라 여겨져 박수를 드립니다. 최상순드림
군에서 병장과 상병은 사병사회에서는 고참이고 부러운 존재들입니다. 일병이 그런분들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것은 교수님의 천성이 있어 가능했다고 생각됩니다. 축하드리며 혈연같이 오랫동안 친교 바랍니다.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대체로 군대에서는 인간의 선한 의지보다 추악한 인간상을 노출하는 경우가 많은 곳입니다. 삼총사가 맺어진 것은 교회라는 사슬이 연결고리가 되어준 결과라고 봅니다. 여하튼 좋은 인연이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시궁창 속 연곷처럼 아름다운 모습에 찬사를 보냅니다.
군대생활을 해보지 못한 저이지만 작은 아들이 유사시 간첩교육도 받는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내려 앉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94년 서울 불바다라면서 금방 전쟁이 터질것처럼 시끄러울때 부대폭파라는 임무를 안고 대구에 왔을때 낙엽속에 파묻혔다는 훈련실습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료들과 오랫동안 연락을 하며 지낸다고 하더랍니다.고생한 군생활이 더 뜨거운 정을 나누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