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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우리 죄를 사하소서/ 마태복음 6:12
(설교자: 마경훈목사)
오늘도 주기도를 나누겠습니다. 오늘은 용서가 주제입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용서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영국의 웰링턴이라는 아주 유명한 제독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아주 골치 아픈 부하가 있었는데요. 그는 상습적으로 탈영을 하고, 매사에 문제투성이였습니다. 웰링턴은 그가 도저히 구제 불가능이라고 판단하여 사형을 내리기로 마음을 먹고 그 부하를 불렀습니다. “내가 너에게 지금까지 안 해본 것이 하나도 없다. 교육도 하고, 상담도 하고, 처벌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일도 시키고, 해볼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했지만 너는 변하지 않았고, 반성하지도 않으니 결국 사형을 받아야하겠다.” 이 때 어떤 지혜로운 부하가 제독에게 말했습니다. “각하, 각하께서는 이 병사에게 한 가지 시도하지 않은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웰링턴 제독은 그 부하의 충고를 받아들여 탈영병을 무조건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탈영병은 그 후에 다시 탈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새사람이 되어 훌륭한 부하가 되어 충성했습니다. 용서의 힘, 용성의 능력입니다.
용서라는 말은 상대의 잘못 혹은 상대의 죄가 전제 됩니다. 우리교회가 토요일마나 어르신들을 모시고 실버예배를 드립니다. 제가 실버예배 시간에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제가 복음을 전하면서 좀 미안 한 것이 있습니다. 연세 드신 어르신들에게 죄와 죽음을 많이 말하는 것입니다. 매 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죄와 죽음을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려니 죄를 다루지 않을 수 없고, 천국과 지옥을 말하다보니 죽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도 주제가 용서이니 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는다는 말은 우리가 죄를 가지고 있는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정통신학에서는 죄를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①원죄입니다. 원죄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죄책과 부패성을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모든 인류의 뿌리였으므로 그들을 조상으로 해서 태어난 모든 후손들에게도 그들이 받은 죄의 죄책이 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임한 죽음과 부패성도 그대로 후손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출생부터 죄인입니다. ②자범죄입니다. 원죄의 부패성을 가진 사람들이 삶 속에서 짓는 죄입니다. 원죄는 원인이고 자범죄는 결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고 태어난 후에는 죄를 범하기 때문에 성경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죄는 성경에 나오는 단어로 보면 다섯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①‘하말티아’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과녁을 벗어났다는 뜻으로써,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기준에 이르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양궁 선수들이 과녁을 향해 활을 쏘는데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빚나갈 때가 있죠. 그런 것처럼 하나님이 그려주신 과녁대로 살지 않고 옆으로 빗나갔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난 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②‘파라바시스’라는 단어입니다. 넘어설 수 없는 선을 넘어섰을 때 쓰는 말입니다. 중앙선을 넘어서면 마주 오는 차와 충돌합니다. 예전에 스케이트 시합을 하는데 어떤 선수가 실수로 중앙의 선을 넘어서 다른 사람이 달려야 하는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선수는 실격패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넘어서서는 안 될 어떤 규범과 한계가 있습니다. 그 넘어설 수 없는 선을 넘어서는 것이 죄이고, 그 선을 잘 지키며 살면 선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선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③‘파라프토마’라는 단어입니다. 미끄러진다는 의미입니다. 말이나 감정이나 행동을 잘 조절하지 못하고 순간적 충동에 이끌리어 실족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다 연약해서 실수하고 넘어지고 죄를 짓습니다.
④‘아노미아’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불법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옳은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어기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옳은 것은 하나님의 의이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⑤‘오펠레이마타’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쓰인 단어입니다. 이 말은 무언가 지불되고 갚아져야 할 ‘부채’, 다시 말해서 ‘빚’이란 뜻입니다. 채무를 졌다는 말입니다. 빚을 진 자는 빚을 다 갚을 때까지는 그 빚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은 “사람이 자기의 죄를 자백하지 않는 것은 갚아야 할 빚을 갚지 않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후진국보다는 선진국에서 사는 것이 더 좋습니다. 제가 선교지를 가 봐도 불편한 것이 많습니다. 잠자리 불편하죠. 음식도 잘 안 맞고, 치안도 불안하죠. 도로도 형편없고, 교통수단도 수준이 많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선진국에서 사는 것이 좋지만 선진국이 가진 힘든 문화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선진국일수록 빚을 많이 질 수밖에 없는 사회 시스템입니다. 자동차를 사든지 집을 사든지 은행에서 빚을 내야 하는 시스템입니다. 카드를 사용하면 자기도 모르게 빚이 늘어납니다. 선진국에서 사는 사람은 평생 빚지고 이자내면서 사는 것입니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처럼 죄는 반드시 처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반드시 값을 지불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죄가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력은 강력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죄는 처리해야 합니다. 죄의 부정적인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죄와 관련된 몇 개의 성경 구절을 보겠습니다.
시 38:4입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죄는 인생의 무거운 짐입니다. 여러분이 믿을지 모르겠으나 제가 몸무게가 50kg 대 때였을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아내를 만날 때는 58kg이였습니다. 제가 아내를 만난 다음에 다 좋았는데 하나 안 좋은 것이 있습니다. 몸이 망가졌습니다. 비만이 된 것입니다. 제가 50kg 때에는 턱걸이를 잘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중고등학교 체력장에서 턱걸이는 20개가 만점이었습니다. 저는 20개 하고 힘이 남아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도 힘듭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제 몸에 그때보다 30kg 이상의 짐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이 찌면 피곤합니다. 왜냐하면 몇 십 kg의 짐을 지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무거운 죄 짐을 지고 살기 때문에 인생이 고단합니다. 군대에서 완전군장을 하고 훈련을 하면 너무 힘듭니다. 무더운 여름에는 더 힘듭니다. 훈련을 마치고 내무반에서 군장과 전투복을 벗고 군화를 벗으면 날아갈 것 같습니다.
죄가 인생의 짐입니다. 원래 사람은 죄 짓기 전에는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삶의 짐이 없었습니다. 죄지은 후부터 옷을 입기 시작했고 인생의 무거운 짐이 생긴 것입니다. 인생을 복되게, 행복하게 살려면 영적인 짐인 죄를 처리해야 합니다. 무거운 옷을 벗듯이 죄의 짐을 벗어버리고 가벼워져야 합니다. 죄가 짐입니다.
창 3:10입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신앙생활이었죠. 그런데 아담이 죄를 범한 후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아오시니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의 낯을 볼 수 없었습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습니다.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하셨는데, 반대는 마음에 죄를 품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롬3:23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시 32:3입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다윗이 죄를 범한 후에 죄를 처리하지 않고 있을 때의 형편입니다. 그는 죄로 인한 마음의 고통으로 종일 신음하였고 뼈가 쇠하였습니다. 정신과 육체의 쇠약함입니다. 죄 때문에 정신과 건강에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렘 5:25입니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대인들의 허물과 죄가 그들에게 찾아오는 좋은 것을 막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좋은 것들은 앞의 문장으로 볼 때 농사를 짓는데 있어서 중요한 늦은 비와 이른 비를 말하는 것으로, 그들의 죄 때문에 환경적인 저주, 경제적인 저주가 왔다는 것입니다.
롬 6:23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여기서 사망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단절, 육적인 죽음, 영적인 죽음 등 총제적인 저주입니다.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사망을 당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다가 내세에서는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며 영벌을 받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생명체가 몸에서 부패물을 배출하는 것으로 죄 사함을 설명했는데 공감이 갑니다. 우리의 몸은 매일같이 죽은 세포들을 몸 밖으로 밀어냅니다. 이것을 ‘때’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은 다음에는 소화를 시키고 난 찌꺼기를 항문을 통해서 배출합니다. 똥입니다. 이런 배출물을 우리는 몹시 더럽고 지저분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몸에서 배출물이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은 세포가 때로 빠져나가지 않고 계속 몸에 남아있으면 우리의 몸은 금방 병들고 말 것입니다. 음식을 먹고 난 후에 배설물을 내보내지 못하면 몸 안에 똥이 가득하게 될 것이고 결국은 똥독에 올라서 사망할 것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생기는 대로 처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죄의 독으로 고통 하다가 사망할 것입니다. 몸에 생겨나는 부패물들을 배출해야 하는 것처럼 영의 부패물인 죄도 배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죄를 처리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헛수고입니다. 먼저는 망각입니다. 죄를 잊어버리고 오늘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윤리와 도덕적인 방법을 택합니다. 인간다운 삶의 규정을 만들고 그것을 철저히 지킵니다. 어떤 이들은 죄를 금욕으로 처리하려고 노력합니다. 어떤 이들은 선행으로 죄를 대체하려고 합니다. 선을 쌓으면 죄가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살인죄를 범했다고 가정합시다. 그가 선한 일로 살인죄를 없애려고 하면 살인죄가 없어질까요? 어떤 이들은 지식이나 영적 체험을 통해서 죄를 없애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어떤 노력과 공로로도 죄를 없이 할 수 없습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닌 인간적인 노력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죄를 처리하려면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설교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죄 사함을 받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보혈의 능력입니다.
성경은 비유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설교하실 때에도 많은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예수님의 비유를 정리해놓은 글에 보니 37가지의 비유가 나오더군요. 예수님은 심오하고 신성한 진리를 쉽게 이해하고 기억하도록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실제로 일어난 흥미로운 사건들과 구약의 율법과 제사제도 등을 참된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한 비유로 사용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질병 치료의 기적 중에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나아만 이야기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나아만은 아람 왕의 군대 장관으로 왕이 인정하는 크고 존귀한 자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이방의 군대 장관이었지만 여호와께서 그가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큰 용사였습니다. 하지만 나병환자였습니다. 어느 날 나아만의 아내를 수종드는 어린 소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아만은 많은 예물을 준비하여 엘리사의 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니와보지도 않고 사람을 보내서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말했습니다. 나아만은 화가 나서 돌아섰습니다. 그는 자기 지체가 높기 때문에 엘리사가 맨발로 뛰어나와서 자기를 영접하고 자기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자기를 천대했다고 생각하고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가 볼 때 요단강은 작고 물도 깨끗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자기 나라에 있는 강들은 요단강보다 훨씬 나아보였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엘리사의 집을 떠났습니다. 그때 나아만의 종 중에 한 사람이 나아만에게 말했습니다. “장군이시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명했다면 행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물며 씻어 깨끗하게 하라는 간단한 말도 못 행할 것이 무엇입니까?” 나아만이 종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병거에서 내려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나아만의 나병 치료 사건은 역사 속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이지만 영적인 진리를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그 사건 속에는 숨겨진 진리가 있습니다. 엘리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나아만은 죄인 된 인간을 보여줍니다. 나아만의 나병은 죄로 인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의 모습입니다. 나아만이 나병을 치료 받은 요단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미하고, 나아만이 말했던 다메섹의 다른 강들은 죄 사함을 위한 인간의 다른 수단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아만의 나병이 치료된 것은 그의 세상적인 공로나 지위 그리고 많은 예물이나 인간적인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서 씻었을 때 치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죄가 없어지고 사람이 거룩해지는 것도 어떤 다른 이유 때문이 아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신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분의 보혈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사람들이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제사법대로 짐승 제사를 드렸습니다. 죄가 있을 때는 번제, 속죄제, 속건제의 방법으로 아주 세밀하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9장에 보면 그런 것들은 비유입니다. 그런 것들은 육체의 예법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입니다. 그 개혁할 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실 때입니다. 히 9:11,12에서는 구약의 제사를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는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구약의 짐승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직 자기의 피로 단번에 드리신 영원한 속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찬식도 일종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성찬식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떡은 주님의 살이며 포도주는 주님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떡이 주님의 살이 되고, 포도주가 주님의 피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셔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사해주시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비유입니다. 마 26:28을 보면 예수님은 잔을 나누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성찬식의 포도주가 무엇을 보여줍니까? 예수님이 흘리신 보배로운 피입니다. 그 피는 죄사함을 얻게 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의 죄를 사하시려고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요일 1:7에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합니다.
2.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님에게 자기의 발을 씻기실 수는 없다고 고집 부렸습니다. 베드로는 너무나 황송해서 고집을 부린 것입니다. 주님이 더러운 자기의 발을 씻어주신다니 베드로가 거절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도 일종의 비유적인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놀라서 주님에게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요 13:10에서 주님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유대인의 풍습에 잔치 집에 초대받은 사람은 집에서 몸을 깨끗이 씻고 갑니다. 그러나 잔치 집으로 오던 길에 발에 먼지가 묻기 때문에 잔치 집 하인이 주는 물로 발을 씻고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이것도 비유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청을 받은 자녀들은 이미 십자가의 은혜로 온 몸과 영과 혼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러나 의인이 된 후에도 발을 씻듯이 자신의 삶에서 범한 죄를 순간마다 회개해야 합니다. 발에 묻은 먼지를 씻어내는 것처럼 우리의 죄를 씻는 방법은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요일 1:9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우리 죄를 사해주십니다. 아주 간단한 방법이지만 하나님은 보혈의 능력을 보시고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것입니다.
2001년에 미국에서 ‘티모시 맥베이’라는 청년이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 청년은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파범인데, 그 청년 때문에 168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수백 명이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6년 동안 들어간 경비는 천문학적인 숫자입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수백 명의 유가족들은 평생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그를 사형시킨 날 미국의 모든 언론의 헤드라인에는 “그는 참회 없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자기의 죄를 참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이 가서 그 죄를 용서받으라고 기도를 해주려고 해도 참회 없이 그냥 죽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참회 없이 죽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셨으니 그 피의 능력을 믿고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안 됩니다. 사 1:18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서 하나님과 변론하자고 하십니다. 어떤 내용의 변론일까요? 죄의 처리 문제입니다. 우리가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과 변론할 자격이 없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으면 그분의 공로로 하나님과 변론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변론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저의 죄 때문에 마땅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저의 죄사함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의 능력을 믿습니다. 저는 자격이 없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를 의지하여 죄사함을 구합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변론하면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죄로 우리를 심판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되게 하시고,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씀에 보면 사람이 자기 죄를 자백하여 죄사함을 받은 경우와 죄를 처리하지 못한 경우의 결과를 말씀합니다. 사 1:19입니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죄사함 받은 사람은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약속입니다. 사 1:20입니다.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죄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큰 죄도 용서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면 다 용서해 주십니다. 십자가에 달릴 정도로 흉악한 강도도 주님에게 회개하는 말 한마디를 했더니, 주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죄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은 죄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믿고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하느냐 하지 안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자기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자백하면 하나님은 어떤 죄도, 아무리 많은 죄도 다 용서해주십니다. 한 번은 베드로가 주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사실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일곱 번씩이나 용서해주시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입니다만 주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마 18:22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씩이라도 해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490번 용서하고 491번째에는 죽여 놓으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무한대의 용서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그렇게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주님 자신은 어떠실까요? 물론 주님도 우리가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우리를 그렇게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3.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기도문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죄사함의 원칙이 뭡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기도를 가르쳐주신 후에 14,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이 진리는 너무나 중요하지만 사람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한 비유를 드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임금님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약 12조입니다. 여러분은 뉴스에서 하도 억, 조를 많이 들어서 12조가 얼마나 되는지 감이 잘 안 오실 겁니다. 오만 원짜리 지폐가 2억 4천 만장입니다. 임금은 그가 갚을 능력이 없는 것을 알고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그가 임금에게 엎드려 말했습니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임금은 그를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임금에게서 나간 후에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약 2천만 원 되는 돈입니다. 그는 그를 붙들어 목을 잡고 말했습니다. “빚을 갚으라”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나에게 참아 주소서. 내가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런데 그는 빚 진 자기 동료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은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는데, 너는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는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마 18:35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려주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인생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고 타인과의 관계가 회복 되므로 주어지는 복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를 통해서 행복한 인생을 살다가 죽은 스위스의 안드레아라는 할머니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분은 남편이 사망하자 세상을 증오하며 싸움을 일삼는 외고집 늙은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할머니가 나타나면 슬금슬금 피했습니다. 왜냐하면 욕을 잘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싸움을 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가 ‘용서’에 관한 책 한권을 선물해주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그 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고 또한 자신이 상처를 준 사람에게는 찾아가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삶에 기적 같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늘 분노로 짜증만 냈던 마음은 사랑과 기쁨으로 넘쳤습니다. 갑자기 할머니 마음속에 막힌 사랑의 샘물이 솟아났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을 안드레아에서 행복한이라는 뜻의 해피로 바꿨습니다. 이후에 해피 할머니는 마음이 기쁘고 즐거우니 생기가 넘쳐서 88세에 알프스 정상에서 행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날아 프랑스 잡지의 표지 인물이 됐습니다. 놀랍게도 90세에는 단독으로 경비행기를 몰고 곡예비행을 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할머니는 용서함으로 남을 비판하는 습관을 완전히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 할머니는 사망하기 전에 재산을 사회에 헌납했고, 자기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13세기 작품 예수님의 초상화마저 자기에게 용서를 가르쳐주어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준 책의 저자에게 주었습니다. 용서함으로 삶이 완전히 변화된 할머니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인 죄를 처리하는 비결을 나눴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이겨보려고 많은 노력을 하지만 진짜 중요한 노력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죄사함을 받는 세 가지 하나님의 방법을 나눴습니다.
1. 보혈의 능력입니다.
2.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3.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하여 죄를 처리하고 복되고 형통한 삶을 살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