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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어청도
전라북도 군산시 고군산군도에 딸린 섬 어청도는 면적 2.07km2, 해안선 길이 10.8km, 88가구 215명(2014년)이 사는 섬이다. 군산항 서쪽 72km의 해상에 있으며, 서해 최남단의 어업전진기지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주봉인 당산(198m) 정상에는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한 봉수대가 있다. 지명유래를 보면 물이 거울과도 같이 맑다 하여 '어청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자의 맑을 청(淸)이 아닌 푸를 청(靑)자를 쓰고 있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BC 202년경 중국의 한고조가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후 패왕 항우가 자결하자 재상 전횡이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망명길에 올라 돛단배를 이용하여 서해를 목적지 없이 떠다니던 중 중국을 떠난 지 3개월 만에 이 섬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날은 쾌청한 날씨였으나 바다 위에 안개가 끼어 있었는데 갑자기 푸른 산 하나가 우뚝 나타났다고 한다. 전횡은 이곳에 배를 멈추도록 명령하고 푸른 청(靑)자를 따서 어청도(於靑島)라 이름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어청도는 내륙인 군산항에서 뱃길로 72km, 중국 산둥반도와는 300km 떨어진 섬으로 서해중부 해역의 서쪽으로 가장 먼 거리에 있다. 군산에서 어청도로 가는 도중에 중간 기착지인 연도에 배를 대고 난 다음에 만나는 섬이다. 평일에는 하루에 한번만 배가 다니지만 주말에는 두 번 다닌다. 이 여객선을 타면 군산항에서 2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어청도는 바로 이웃해 있는 충남 외연도와 매우 가깝다. 행정구역이 달라서 그리 많은 교류는 없었지만 예전에는 객선이 다녔다. 이 섬은 어업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유인 등대와 해군기지가 있어 군사적 요충지로도 꼽힌다. 어청도는 서해 영해기선(領海基線)기점에 위치한 섬이다. 영해기선은 한 국가의 통치권이 미치는 영해(領海)가 시작되는 선을 말한다. 이 기준선을 직선기선이라고 부르며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이를 선포했다. 어청도를 가보지 않은 사람들도 그 이름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라디오 일기예보에서 서해 먼 바다의 날씨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곳이다. 그만큼 서해 어업의 중심 섬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어청도는 중국과 우리나라 서북단 한계선에 있는 섬이다. 6.25전쟁 때는 군량미를 보관하던 섬이었다. 지도를 보면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황해에 조그맣게 표시돼 있다. 오늘날 어청도가 이렇게 전략적, 영토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섬이 된 것은 지도에도 나타나 있듯이 지정학적인 위치와 천연적인 좋은 항구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215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한 달에 2~3차례 정도 풍랑이 심하게 불면 근해에서 조업하던 어선들이 모여들어 파시가 형성된다. 1973년도에는 192가구 962명, 초등학생이 196명일 정도로 꽤 많은 사람들이 사는 섬이었다. 어획량이 많던 때는 군인 가족 200명을 포함하여 이 작은 섬의 유동인구가 2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또한 어청도는 생태계의 보고이며 수많은 철새들이 날아든다.
일본군의 전략적 요충지, 어청도
풍선이 다니던 당시, 군산에서 돛단배로 약 20시간 정도 걸리는 이 섬을 왜 일본인들이 일찍이 눈독을 들였을까. 어청도는 고기들의 밭으로 일본인들이 들어와 거문도나 나로도처럼 항구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100여 년 전, 일본의 대륙 침략의 교두보였던 것이다. 실제 어청도에는 19세기말부터 이미 일본인들이 살았다. 1885년경에는 일본의 잠수부들이 고래를 잡기 위해 기항을 했다. 또한 1898년에는 인천에 살던 20여 호의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일본촌을 만들었다고 한다. 1907년경에는 40가구 약 200여 명의 일본인들이 정착해 살았다고 한다. 현재도 일본식 가옥이 몇 채 남아 있어 일본인의 거주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 외에도 아직도 일본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동굴에 남아 있는 채굴 흔적이다. 이 섬의 초등학교 앞에는 해군전용 성당이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동굴이 있다. 잘박거릴 정도의 물이 고여 있는 이 동굴은 일본인들이 금을 캐려고 채굴한 것이다. 이밖에 어청도에는 고만고만한 크기의 금 채굴을 위한 동굴이 몇 개가 더 있다. 일본인들은 1933년부터 2년 동안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린 후 돌을 리어카에 싣고 와 선착장과 축대를 쌓았다. 바람이 불어 파도가 거칠어져도 안전하게 배를 댈 수 있도록 선착장을 만들었다. 1903년 일본우편 취급소가 설치 개설되고, 심상소학교(1909년)는 일본인 어민 자녀들을 위하여 설립했다.
어업조합(1917년)이 서해안 전 지역에서 두세 번째로 설치됐다. 1912년 세워진 유인 등대도 인천 팔미도 등대에 이어 두 번째이다. 이처럼 일본인들이 공을 들인 섬이다. 일제의 통감부가 발행한 '한국수산지'(1908년) 중 어청도에 관한 기록이 있다. '조선인 65호 297인이 살고 있으며 일본인 40여호 200인이 살고 있다. 조선 사람들은 대개 어업에 종사하며 일본인의 직업은 어업 26호, 그 외에 교육자 요릿집 목욕탕 약국 과자점 두부제조업 등이 있다.'
어청도에는 구한말에서 해방이 될 때까지 일본 청주를 제조하는 술도가와 일본식으로 만든 유곽까지 있었다고 한다. 일본이 어항 개발과 등대를 설치하며 이 멀고도 먼 어청도에 공을 들인 이유는 해산물 수탈과 아울러 한반도를 거쳐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항로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어청도는 청일해전 때 아주 중요한 항구 역할을 했다. 일본 함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조선의 바닷길을 장악할 계획으로 1892년부터 한반도 연안을 측량하기 시작했다. 청일전쟁(1894~1895) 이후에 중국으로 가는 항로의 중요성 때문에 생긴 어청도 등대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3월에 정략적인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우리나라 서해안의 중앙에 있는 이 등대는 남북항로를 항해하는 모든 선박이 기준을 삼고 이용하는 유인등대이다. 대한민국의 중요한 등대들은 대부분 1920년 이전에 건설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다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일본은 주요한 섬인 어청도와 거문도, 나로도 등에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바다에서 나오는 해산물을 수탈해 갔다. 일본은 수많은 어민들과 자본을 대량으로 투입해 주요 어장을 아주 쉽게 손아귀에 넣었다. 어업령과 다양한 법적 장치를 만들어 일본인 어부들에게 이익을 보장해 주었다. 통조림, 미역, 김, 멸치 등 건어물 등 엄청난 수산물을 일본으로 공출했다. 1930년대 일본의 정어리 어획고는 세계 1위였는데 그 때의 남획으로 거의 멸종되었다. 1940년대 초에는 정어리가 이미 바다에서 사라진 뒤였다. 일제가 정어리를 기름으로 만들어 화학공업을 부흥시키고, 군수물자라는 명목으로 무차별적으로 포획한 결과였다. 어청도는 이래저래 아픔이 많은 섬이다.
어청도 행정구역 변경의 아픔
어청도는 조선왕조 말엽 충남 보령군 오천면에 속했으나, 1914년 일제하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연도, 개야도, 죽도와 함께 전북 군산에 편입되었다. 이 섬들은 비록 군산시에 속해 있으나 군산의 섬들보다는 충남 보령의 외연도, 호도, 녹도 등과 가깝다.
그 당시 뭐가 뭔지 잘 몰랐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지만 지금 생각하면 보령시는 땅을 칠 일이었다. 어청도는 충남 보령시 외연도와 15km 떨어진 곳이다. 이미 옛일이 되어 버렸지만, 보령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그 유명한 황금 어장터가 고스란히 전북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1992년 당시만 해도 두 개의 낙도 국가보조항로를 다니던 여객선 두 대 중 하나는 군산항을 출항하여 어청도를 거쳐 충남의 외연도, 녹도, 호도에 닿은 후 보령 대천항으로 갔고, 다른 하나는 대천항에서 출항하여 호도, 녹도, 외연도를 거쳐서 어청도에서 군산으로 들어가곤 했다. 낙도 보조항로선인 두 대의 여객선이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전북과 충남을 오간 것은 아마도 과거 어청도가 충남에 소속된 섬이었기에 주민들이 군산보다 더 가까운 대천에 생활 터전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지금은 이 항로가 폐쇄되어 더 이상 다니지 않지만 어청도 사람들에게는 추억의 항로인 것이다. 전북의 어청도와 충남의 외연도는 이웃한 섬이나 교류가 거의 없다. 행정구역이 충남에서 전북으로 바뀌면서 오랫동안 다니던 뱃길도 끊어졌다. 과거 유신시대 정권의 실세였던 김종필이 선거구를 조정한다는 명분으로 전북에 소속된 금산을 충남으로 가져가면서 그 대가로 어청도 연도 개야도 죽도를 전북에 넘겼다. 당시 금산의 인삼세가 충남 세수원의 40%를 차지했다고 하니 수지가 맞은 장사였겠지만 정작 외딴섬 어청도의 주민들만 행정구역을 달리하게 되었던 셈이다.
역사는 그렇다. 언제나 이론적으로 정리되지만은 않는다. 그러나 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일본인들이 처음 발을 디딘 19세기 말에는 어청도가 인천부에 속했다. 그렇다면 말이 된다. 인천의 세가 군산을 압도하고 있었으니 배를 이용하여 가는 길에 대천을 들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배경을 따라 가보면 과거 어청도는 군산과의 교류는 그리 많지 않았던 곳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심 산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