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그녀가 틀림없었다!
전화를 받고, 오랜만에 청수원에 갔을 때,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있었다.
“왠 아이예요?”
“그 인간 아이예요. 서울로 도망간 술집 아가씨 잡으러 간다고 저에게 맡기고 갔어요.
이젠 완전히 지 마누라 취급한다니까요. 엄마 없는 아이가 불쌍해서 봐주는 거지, 누가 자기 좋아서 그러는 줄 아는가 봐요.”
화가 난 듯 그녀는 얘기했지만, 내 눈에 비치는 그녀는 썩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혹시 그녀가 초등학교 동창 놈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혼자 제대로 아이도 못 키우는 인간이 마누라는 왜 때려서 내보냈는지.......그 놈의 성질 때문에 그 인간은 무슨 일 낸다니까요."
"남편에게는 요즘도 전화가 와요?“
“요즘 통 연락이 없네요. 한 때 불나게 전화가 오길래, 난 또 정신이라도 차렸나 생각했는데, 역시 틀려먹은 인간은 할 수 없어요.”
“왜요?”
“저 보고 돈 좀 빌려 달래요. 어디서 여자도 못 구해서 혼자 사는지, 목소리가 힘이 하나도 없었어요. 불쌍한 인간이죠.”
창밖에, 장마가 시작되어 조금씩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언뜻 슬픔이 스쳐가는 듯 보였다.
그녀의 남편 이야기에, 나는 시골에서 혼자 사시는 아버지가 생각났다. 내가 아버지를 모시겠다고 결단코 우겨보아도 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아버지는 항상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아니,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미안한 것이 당연한 것 인지도 몰랐다. 가끔씩 아내가 용돈이나 반찬거리를 드리러 시골에 가도, 무엇하나 당신 스스로 당당하게 요구 하시는 법이 없었다.
자식들이 주는 것이 황송한듯 미안한 듯 받기만 할 뿐이었다. 아버지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씻을 수 없는 지난 과거를 남동생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집안 재산 다 탕진하고 같이 살림하던 여자에게서 마저 버림 받고 아버지가 나타났을 때, 남동생은 아버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 역시 그런 아버지가 측은하기만 할 뿐 부자의 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장남으로서 의무감만으로 시골 선산 밑에 아버지를 위한 작은 집을 지어드렸을 뿐이었다.
어머니와 결혼을 하고 시골의 천석지기 집안의 아들로 빈둥대고 놀던 아버지가 노름을 시작하고 집안 재산 거덜 내고 여자와 바람이 나서 살림을 차려 어머니 가슴에 대못 하나를 박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보다도 어머니를 더욱 괴롭힌 것은 바로 춘삼이었다.
춘삼이는 전쟁고아로 시골에서 밥을 얻어먹으며 헤매다가 할머니가 거두어들인 아이였다.
아버지보다는 네 댓살 아래였고 할머니는 아들처럼 때로는 집안의 일꾼처럼 그렇게 키우셨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큰댁에 들어와서 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해에 집을 나갔으니 이 십 년은 족히 큰댁 식구들과 살았다.
아버지와 큰댁 큰형은 나이가 동갑이었는데, 춘삼이는 큰형과 아버지를 똑같이 형이라 부르며 컸다고 한다.
조카와 아저씨를 형이라 부르는 이상한 관계가 아무 무리 없이 유지할 수 있는 데에는 할머니의 힘이 컸다.
머리 속에 유교의 전통적인 가족질서가 뿌리 깊이 박혀 있는 할머니가 어떻게 그런 이상한 가족의 상하관계의 호칭을 허락하신 것이 지금도 불가사의하다.
큰형과 아버지가 어릴 때 같이 크면서, 호칭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는 것에 비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의문은 큰형과 아버지가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강릉으로 나가서야 큰댁 식구들이 이해하기 시작했다. 혼자 남은 춘삼이의 외로움과 서운함이 그를 가출하도록 만들었고, 가출한 춘삼이를 몇 번이나 수소문하여 잡아 온 사람은 영락없이 할머니였다.
그를 자기 아들이나 손자처럼 키울 수 없는 할머니의 아픈 마음이 그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유교적 가족관계의 호칭마저도 무시하게 된 것 같았다.
어릴 때, 유독 춘삼이는 나만 데리고 놀았다. 산으로 데리고 가서 산딸기며 머루며 온갖 먹을 것을 따주었고 호칭에 있어서도 나만은 예외였다.
우리 사촌형제 통 털어서 '춘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다른 사촌형이 춘삼이라고 부르면 어른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머리를 쥐어 박히고 온갖 놀이에서 제외를 시켰다.
아마 그 이유는 내가 형제들 중 유독 할머니를 많이 닮아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언뜻 생각나는 부분은 있었다. 어쩌면 어머니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아버지는 노름에 미처 집을 거의 나가 있었다. 어머니는 신혼 시절을 남편 없이 서럽게 시집살이를 했을 것이다.
아마 그런 어머니를 춘삼이는 마치 누나처럼 따랐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때 우리 집안에서 피가 섞이지 않은 두 사람이 비슷한 동류의식을 품은 것은 당연할 지도 몰랐다.
지금 생각해 봐야 춘삼이가 어머니에게 보낸 시선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아버지가 돈을 가지러 가끔씩 집에 들러 어머니를 때리거나 당신의 여자관계로 두 분이서 말다툼이라도 할라치면 화풀이로 언뜻 언뜻 춘삼이 얘기를 꺼낸 것을 직접 나도 들은 기억이 났다.
놀면서 춘삼이는 입버릇처럼
"네 눈은 엄마 같아"
하고 종종 얘기 했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춘삼이의 말 속에 엄마라는 것이 할머니를 얘기 했는지 어머니를 뜻 했는지는 지금도 아리송하기만 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아버지를 따라 시내로 나오게 되었다.
그런 춘삼이가 얼마 후 집을 나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기를 지탱해준 큰 그늘이 없어져서 그가 시골 큰댁에 눌러 있을 이유가 없어진 때문임이 분명했다.
춘삼이가 없어졌다고 해서 어머니는 춘삼이와의 뜬금없는 염문에서 자유로워 진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집안에서 말 많은 인간들의 입방아 거리였고, 그 단서를 늘 상 제공해 준 것은 영락없이 아버지였다.
“누님, 부새우 어디서 파는 지 알아요?”
“왜요?”
“아버지가 편찬으시다길래 조금 사다 드릴려구요.”
“제가 조금 드릴테니 아버님께 갖다 드리세요. 아버님, 혼자 사신다면서요? 적적하시겠네요.”
그녀는 아버지의 과거를 몰랐다. 차마 그 이야기까지 그녀에게 하기는 싫었다.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로만 남게 하고 싶었다. 그것은 내 자신의 꺼져가는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했다.
“묵호에서 저를 어떻게 아세요?”
나는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고야 말았다.
“알고보면 사장님과 무척 가까운 사이일 수도 있어요”
점점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틀림없는 그녀였다. 나의 첫경험의 그녀. 묵호의 창녀촌에 있었던 그녀.
내 사춘기의 일탈이었던 그곳 묵호.
그곳을 스치고 지나갔던 그녀와 나.
밖으로 나오자 빗방울이 꽤 굵어져 있었다.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될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