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93
2월6일[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연중 제5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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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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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aHCqaTNNIEI (차바우나 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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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영성 생활 안에서 자만이나 방심은 절대 금물입니다!>
이번 주간 첫 번째 독서인 열왕기 상권을 통해 우리는 솔로몬 왕(BC 971~931)의 삶과 신앙, 특히 그의 흥미진진한 흥망성쇠 스토리를 접할 수 있습니다. 그가 다스렸던 시절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가장 잘 나가던 순간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주님을 향한 신앙 뿐 아니라, 탁월한 리더십, 건축과 예술에 대한 깊은 조예 등등,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잠언을 3천 개나 지었으며, 1005편이나 되는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주님께서는 그에게 특별한 지혜와 뛰어난 분별력과 넓은 마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따라서 주변의 많은 임금이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 칭송했고 배우고자 애를 썼습니다.
특히 남쪽에 위치한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을 한번 만난 뒤로 열혈팬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녀가 솔로몬을 찾아온 최초의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정말 항간의 소문대로 지혜로 충만한 사람인가 시험해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잔뜩 준비해온 그녀는 마침내 퀴즈 보따리를 솔로몬 앞에 잔뜩 풀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문제를 내는 족족 그 자리에서 정답을 알아 맞췄습니다. 솔로몬의 탁월하고 비상한 지혜 앞에 스바의 여왕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칭찬에 칭찬을 거듭했습니다.
“임금님의 지혜와 영화는 내가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납니다. 언제나 임금님 앞에 서서 임금님의 지혜를 듣는 이 신하들이야말로 행복합니다. 주 임금님의 하느님께서 임금님의 마음에 드시어 임금님을 이스라엘 왕좌에 올려 놓으셨으니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1 열왕기 10장 7~9절)
놀랍게도 스바의 여왕은 자신이 가져온 금 120 탈렌트, 오늘날 단위로 환산하면 약 4톤의 금과 엄청난 양의 향료, 보석들과 당시 최고급 목재로 손꼽히던 자단나무도 내려놓았습니다.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정적(政敵)들을 하나씩 가차없이 숙청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정적들을 제거한 뒤 측근들을 군대·정부·종교기관의 요직에 앉혔습니다. 또한 여러 주변 국가들과 군사 동맹을 맺음으로써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백일 붉은 꽃 없다더니, 솔로몬의 지혜와 분별력, 부귀영화도 세월 앞에 부질없었습니다. 그 지혜롭고 영특하던 솔로몬도 나이를 들어가면서 분별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과유불급이라고 뭐든 적당했어야 했는데,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그 끝이 참으로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대대적인 건축에 대한 솔로몬의 과욕이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솔로몬이 대대적인 건축 사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동원해야만 했습니다. 장정들은 3개월마다 한번, 1개월씩 강제노동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제성을 띤 행정구역 개편, 이해할 수 없는 세금 징수 방법 등이 백성들의 대대적이고 노골적인 반대에 불을 지폈습니다. 년에 자기중심을 잃어버린 솔로몬은 우상 숭배에 깊숙이 빠져 들어갔습니다.
거듭된 주님의 만류와 경고에도 전혀 ‘말빨’이 먹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상 숭배를 위한 산당을 지었습니다. 잡신들 앞에 향을 피웠고 재물을 바쳤습니다. 결국 왕국이 둘로 분열되고 마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솔로몬이 그토록 급격히 추락하게 되기까지는 아무래도 그가 거느렸던 이방인 아내들의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사리분별력이 흐려진 그는 이미 간교하고 요사스런 이방인 아내들을 감당할 내공을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주님으로부터의 큰 진노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초심을 지속적으로 지니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솔로몬의 인생 전체를 통해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깊은 신심에다 겸손까지 겸비했던 솔로몬,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던 솔로몬이었지만, 잠시 방심하는 틈에 초심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세상 초라하고 부끄러운 말년을 보내다가 쓸쓸히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영성 생활 안에서 자만이나 방심은 절대 금물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주님의 안전한 날개 아래 자리 잡고 있다 할지라도, 절대 자만하거나 방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늘 우리 자신의 발밑을 유심히 내려다보고, 부족함을 헤아리고 가슴을 치며, 겸손하게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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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창조의 협력자>
신발을 판매하는 회사가 새로운 판매처를 찾다가 아프리카로 두 명의 영업사원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곳에서 판매할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두 사람은 아프리카에 도착하여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회사로 돌아와 보고했습니다.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프리카에 가니 그곳 원주민들은 신발을 전혀 신고 있지 않아서 신발을 팔 수가 없습니다.”
사장은 곁에 있던 다른 사원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맞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아무도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신발을 신으면 얼마나 좋고 편한지를 알려 준다면 아프리카의 수많은 사람을 우리의 고객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일한 곳을 탐방하고 왔지만 한 사람은 불가능을, 다른 한 사람은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던 것입니다. 신발은 누구를 통해 아프리카에 생겨날까요? 아프리카 사람들이 신발을 신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창조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만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음을 믿는 누군가가 받아주어야만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창조 이야기가 나오는데, 자칫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냥’ 말씀으로 빛도, 공간도, 사람이 살 육지도 만드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남자 혼자서 아기를 낳을 수 없기에 협조자인 여자를 만들어 주셨듯이, 하느님의 창조에도 항상 협조자가 존재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물!’이라고 외치면 물이 생깁니까? 아무 변화도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옆에 있다가 물을 한 잔 가져다주면 내 앞에 없던 물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하느님은 절대 혼자서 고독하게 창조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창조자를 ‘지혜(소피아)’라고 말합니다. 잠언에 의인화된 ‘지혜’가 창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읽어보면 흥미로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를 지으셨다. 나는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 심연이 생기기 전에, 물 많은 샘이 생기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산들이 자리 잡기 전에, 언덕들이 생기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그분께서 땅과 들을, 누리의 첫 흙을 만드시기 전이다. 그분께서 하늘을 세우실 때, 심연 위에 테두리를 정하실 때 나 거기 있었다. 그분께서 위의 구름을 굳히시고 심연의 샘들을 솟구치게 하실 때, 물이 그분의 명령을 어기지 않도록 바다에 경계를 두실 때, 그분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 나는 그분 곁에서 사랑받는 아이였다. 나는 날마다 그분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 나는 그분께서 지으신 땅 위에서 뛰놀며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잠언 8,22-31)
따라서 오늘 독서에서 ‘말씀’을 통해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줄 첫 번째 피조물이신 온 천지만물과 인간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누군가의 협조 없이 절대 아무것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여 이 세상에 모든 피조물이 태어나도록 그 말씀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신 그 ‘지혜’의 단서가 바로 창세기 1장 2절에 등장합니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땅’은 성경에서 ‘여인’을 상징합니다. 그 여인과 관계되는 것은 하느님의 영인 성령입니다. 성령께서는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물’과 관계있습니다. 여인이 성령으로 가득하여, 그 성령의 열매인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일 때야만 말씀이 열매를 맺어 새로운 무엇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줄 성령으로 가득한 이 첫 번째 피조물인 ‘지혜’를 교회 학자들은 모두 ‘성모 마리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나중에 태어나셨지만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계신 분이신 것처럼, 그분을 낳으신 마리아 또한 시간을 초월하셔야 함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어머니로부터 인성을 받으신 분인데, 어머니가 없이 그리스도를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부 에프렘은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물이 불로 따듯해지는 것처럼, 또 암탉이 달걀을 따듯하게 품어야만 알에서 병아리가 탄생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신 어떤 어머니와 같은 존재를 통해 창조가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암브로시우스는 성령의 도움으로 씨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는 것이 창조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영을 내보내시면 그들은 창조되고 당신께서는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십니다.”(시편 104,30)
그리고 성경의 주보성인인 히에로니무스는 이 구절이 ‘세례’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참조: 교부들의 주해)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창조하실 때 성모님의 ‘믿음’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처럼, 창조는 하나의 ‘열매’입니다. ‘씨’(말씀)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땅’(어머니)이 있어야 하고 ‘물과 따듯함’(성령)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하시는 것은, 말씀이신 당신을 받아들인 성모님을 통해 교회가 탄생, 즉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모든 창조된 것들은 그 안에 무언가가 들어와 열매를 맺게 창조되었습니다. 빛과 공간과 땅이 창조되었다면, 그 안에 해와 달과 별, 새들과, 짐승들이 채워지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인간 또한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누군가를 받아들여야 하는 목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스스로 완전하다고 참 주인이신 ‘말씀’이 들어와 열매 맺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아직 창조가 끝나지 않은 불량품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창조 당하고 창조에 협력하는 인간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태초의 창조의 협력자로서 그분의 깨끗함 덕분으로 성령님을 충만히 지니고 계셨던 성모님의 모델을 닮는 수밖에 없습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가장 완전한 창조의 협력자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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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과달루페 성지순례 마지막 날에 ‘나눔’이 있었습니다. 한 자매님은 작년에 하느님의 품으로 떠난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신앙으로는 아들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하느님의 품으로 옮겨감이라는 것을 믿지만, 현실에서는 아들이 너무나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다들 이번 순례가 얼마나 좋았는지, 이번 순례를 통해서 많은 것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마지막에 저의 차례가 있었습니다. 보통은 다들 수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순례에서는 지난 2020년에 하느님의 품으로 떠난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당시에는 코로나 팬데믹이 심했기 때문에 한국으로 가서 어머니의 장례미사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뉴욕에서 기도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나눔을 하면서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모든 어머니가 그런 것처럼 저를 무척이나 사랑하였고, 자랑스러워하였던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보고 싶은 어머니 생각에 감정이 복받쳐서 눈물이 나왔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런 저의 마음을 보듬어 주셨습니다. 어머니가 천국에서 저를 위해서 기도하신다는 생각이 들었고, 깊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번 성지 순례를 통해서 따뜻함, 순수함, 사랑, 너그러움을 마음에 담아 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상상과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빛을 만들고, 땅을 만들고, 하늘을 만들고, 물을 만들고, 해와 달, 별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정도는 되셔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정도는 되셔야지 만물의 주인이시고,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옷깃만 스쳐도 병이 낫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정말 장난이 아니십니다. 어디가 아픈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언제부터 아픈지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예수님 곁에서 옷만 만져도 모든 병이 저절로 치유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 그 정도는 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넘치는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작은 것들을 하고도,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광개토왕비, 진흥왕 순수비’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업적과 명예가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큰 잘못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들의 업적과 자랑도 아닙니다. 그저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웬만한 잘못들은 다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너희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하얗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뉘우치고, 하느님께, 예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지난 모든 것은 덮어주고 당신의 나라에 다시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가슴이 따뜻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계산하고 따지기보다는 순수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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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53-56: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예수께서 겐네사렛 땅으로 가셨을 때 수많은 사람이 예수께로 몰려왔다. 예수께 한결같이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찾아왔다. 수많은 병자가 자기의 병을 치유 받기 위해서 모여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을 얻으려고 사람들이 예수께 모여들었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모습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인간의 절박한 요구, 사람이 줄 수 없는 무엇을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 그러한 은혜를 받고도 결국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동조한 그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는 그들이었지만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인 것이다. 결국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이 군중 중에는 예수님을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분으로 이용한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복음에서와같이 수많은 군중이 자기 필요성에 의해 예수님을 찾는 것을 결코 비웃을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이 그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그분을 섬기고 따른다고 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만들어 놓은 우상일 수 있다. 그 우상은 나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듯이 우리 안에 잘못 가지고 있는 하느님 상이 무너지게 되면 많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신앙을 버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은 신앙을 올바로 받아들인 모습이 아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나의 편의를 위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그 기계적인 하느님은 버림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하느님은 진정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우리는 가정에 대해서는 어떠한 자세인가? 또 친구와 친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가? 이용하고 또 도움만 받기 위해서 이러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나 않는지?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당에 다니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해서는 어떤가이다.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참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지는 않는지 반성하면서, 우리 자신은 이제 예수님이 필요하고 찾으면서도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성소인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기복적인 신앙이 아닌, 신앙으로 인해 자신이 변화하고 또 세상이 변화될 수 있는 조그마한 실천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거기에서 참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나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삶이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우리 가운데 조금씩 실천되도록 끊임없이 나 자신과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 세상이 변화된다는 것은 먼저 나 자신의 조그마한 것이라도 변화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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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3-56)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사람들이 간청한 것은, 누구든지, 또 무슨 병에 걸렸든지 간에 예수님의 몸이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을 고친다는 소문이(‘기쁜 소식’이) 이미 널리 퍼져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 알면 그곳으로 찾아 가거나, 아니면 자기네 마을로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학수고대 했을 것입니다.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닌 사람들’은 병자들의 가족들과 친지들과 친구들인데, 그들의 그 모습은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사실은 병자들 자신들의 간절함입니다.>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라는 말은 사람들이 모두 병을 고쳤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구원’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구원이 아니라 ‘치유’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병자 자신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병의 치유를 구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모든 희망을 잃고, 죽을 날만 기다리면서 병석에 누워 있었던 사람이 병을 고치고 다시 일어나게 되었을 때의 기쁨은, 구원받은 기쁨과 거의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의 이야기보다 더 놀라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기를 바랐다. 예루살렘 주변의 여러 고을에서도 많은 사람이 병자들과 또 더러운 영에게 시달리는 이들을 데리고 몰려들었는데, 그들도 모두 병이 나았다.”(사도 5,12ㄱ.15-16)
“하느님께서는 바오로를 통하여 비범한 기적들을 일으키셨다. 그의 살갗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그들에게서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다.”(사도 19,11-12) 물론 이 이야기에 나오는 기적들은 사도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허황한 이야기다.” 라고 말하겠지만, 믿는 우리는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 기적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만 기록되어 있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일어날지 모른다는 점은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의 ‘믿음’을 보시지 않고, ‘가엾은 처지’만 보시고 그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믿음보다 먼저입니다. 믿음은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자비에 대한 응답입니다. 병을 고친 사람들 가운데에는 믿게 된 사람들도 있고, 그냥 떠나버린 사람들도 있는데, 복음서의 내용을 종합해서 보면, 그냥 떠나버린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아쉬울 때는 간절하게 주님을 찾다가 그 아쉬운 상황에서 벗어나면 미련 없이 주님을 떠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치유 기적 이야기들에 대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병 자체를 없애지 않으시고 병자들을 고쳐주기만 하셨는가?”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는데, 굶주림 자체를 없애지는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
또 이런 질문을 하는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간절하게 기도해서 병이 낫는 기적을 체험했다고 하는데, 왜 나는 안 되는가? 나의 믿음이 부족한 것인가? 아니면 주님께서 내 기도는 외면하시는가? 아니면 주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가?”
만일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곧바로 종말과 재림이 이루어졌다면, 이 세상은 질병도 죽음도 없는 하느님 나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능력이 부족해서 병 자체를 없애지 못한 것은 아니고,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미루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다음 말을, “주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7)
또 “누구에게는 기적이 일어나는데, 왜 나에게는 안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사랑을 똑같이 주신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믿는다고 해도, 지금 당장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병고를 겪고 있는 병자에게 “이 모든 것은 주님의 뜻이니...”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병고를 비롯해서 인간 세상의 많은 고통들은 아직도 여전히 미스터리(수수께끼)입니다.
우리는 아직 주님의 뜻과 주님의 섭리를 잘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 또 우리가 모두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잃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언제나 항상 희망이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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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부터 교회는 한 주 동안 제1독서에서 창세기의 말씀들을 들려줄 것입니다. 창세기 첫 장은 글자 그대로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첫 장이 그리는 세상은 한마디로 조화롭고 균형 잡힌, 잘 정돈된 세상입니다. 그렇게 느끼게 되는 첫째 이유는 창세기 첫 장에 단 한 번도 부정의 낱말(‘아니오’)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혼돈과 무질서에 맞서시는 하느님께서는 한 번도 부정의 말을 하시지 않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십니다. 창조 이야기의 세상이 잘 정리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 두 번째 이유는 이 이야기 속에 후렴구처럼 이어지는 반복 구문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날”과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가 대표적이고, 또 구약의 십계명이 열 가지 말씀인 것처럼 정확히 열 번 되풀이되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라는 반복 구절도 그러합니다. 열 번(완전 수)의 창조 말씀으로 세상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 이야기를 읽는 사람은 창조주 하느님의 평온함에 놀라고 우리가 그분의 유순함과 평온함을 본받도록 초대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학자들 사이에 완전히 의견 일치를 이루지는 않았지만, 창세기 1장 1절부터 3절을 하나로 묶어,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알리는 위대한 시작으로 보기도 합니다. 첫 절을 시간절로(종속절), 2절은 당시의 정황을 설명하는 삽입구로, 그리고 3절을 주절로 해석하는 견해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 땅은 ‘토후’와 ‘보후’였다(땅은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다). -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빛이 있어라(생겨라).” 이렇게 되면 창세기의 첫 세 구절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세상이 시작되었고, 세상의 혼돈과 무질서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가 “빛이 있어라(생겨라).”라는 첫 말씀으로 이루어졌음을 더욱더 강조하는 구절로 읽힙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를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 같은 신앙을 고백하며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이 세상에 왔다.”(요한 1,9)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 마음을 비추는 참빛이신 하느님의 말씀에 더 세심하게 귀를 기울입시다. 그분 말씀의 빛으로 하루를 더 온유하고 평온하게 살아 봅시다. “주님, 당신이 저의 등불 밝히시나이다. 하느님이 저의 어둠 밝혀 주시나이다.”(시편 18[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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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를 떠나 주님께 데려가는 사랑>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배에서 내리시는 예수님을 ‘곧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그분께서 계신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6,54)
사람들은 온전한 창조질서와 하느님의 선과 온갖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어둠으로부터의 해방을 그토록 갈망하였다. 더러운 영과 질병, 온갖 고통은 바로 하느님의 선을 거스름으로써 초래된 인간의 왜곡된 실상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고통과 무질서, 반생명적인 가치들을 양산하면서도 역설적이게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와 해방과 온전한 선을 갈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찾아오는 병자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주신다.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6,56)
여기서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의 태도에 집중하여 우리가 살아야 길을 짚어보자. 어떻게 병든 이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주목할 점은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의 눈길이 다른 이들의 아픔에로 향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신에 대한 애착과 이기적인 중심성에서 벗어나야 다른 이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들의 아픔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기 이탈’이야말로 영성생활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첫 단계임을 새겨야 하리라! 자신을 벗어나는 그만큼 다른 이들이 보이고 그때부터 참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다음으로 사람들은 병든 이들의 아픔에 눈길을 고정시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치유시켜주실 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알았을 것이고, 그분에 대한 소문을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본적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임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이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과 그분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인이 아니라 도구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예수님이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힘을 지니신 분이심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수동과 경청의 영성’인 듯하다. 무엇이든 먼저 내가 나서서 내 힘으로 해결해보려 하고, 듣기보다는 말하려고 한다. 내 뜻과 내 힘을 앞세우는 것이다. 이런 삶은 주객이 뒤바뀐 것으로 영성생활이 아니라 우상숭배라 아니 할 수 없다.
끝으로 사람들은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6,54) 나아가‘그들은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시기만 하면,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주십사고 청하였다.’(6,56)
그들은 병든 이들을 직접 예수님께 데리고 갔다. 우리는 몸과 마음의 아픔과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하느님의 선과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도록 그들을 예수님께 데려가야 한다.
나아가 이 사회의 반생명적 문화와 창조질서의 파괴, 진실의 왜곡, 사회적 갈등과 부패, 경제 정의의 상실, 인간존엄성에 대한 무감각 등을 그리스도께로, 그분의 복음의 질서 안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 하느님의 창조질서와 자비와 선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있으며, 깨어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가? 말씀과 성체 안에서, 형제자매들을 통해서, 일상사를 통해서 살아계시는 주님 앞에 얼마나 깨어 있는가?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회복하도록 부르는 목소리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투신하고 있는가? 이제부터라도 모든 것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으려 힘쓰고, 또 그분께 ‘너와 나의 질병’, ‘이 사회의 질병’을 데리고 가는 사랑의 소명에 더 헌신적으로 응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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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말’이 많은 세상입니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정반대로 말 한마디가 사람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일도 허다합니다.
인간의 언어는 이토록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역사가 말해 주듯이, 독재자의 한마디가 수많은 민중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하고, 정치인의 잘못된 판단과 말 한마디로 수많은 사람이 실직하고, 노동 인권이 무시되기도 하며, 개발 욕망에 물든 재력가들의 말 한마디에 아름다운 산야가 훼손되고, 부당하게 땅을 잃는 이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절대 악’이 판을 치는 세상일수록 약자들의 목소리는 공허해지고, 그들의 말은 공권력에 의해 희생되기도 합니다.
유스티노 성인(+165년)은 그리스어의 ‘로고스(logos)’가 인간과 신을 매개해 주는 신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여, 그리스도를 영원한 하느님의 말씀, 곧 로고스의 육화로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언어에 담긴 폭력성을 넘어 ‘진리와 생명’을 담은 ‘신의 언어’를 목말라하는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읽는 창세기의 첫 장에서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다.”는 표현은 하느님 말씀이 지닌 창조의 힘에 대한 고백입니다.
말씀은 행위를 낳습니다. 인간의 언어는 선과 악을 낳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보시니 좋았다.”라는 원초적인 생명을 창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생명의 말씀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아보고, 치유받으려고 예수님께 달려간 이들은, 그분의 말씀 속에서 하느님의 치유와 생명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병든 자임을 깨닫는 사람만이 치유를 청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가 하는 말들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분열시키며, 혼란을 가져온다면, 나는 치유를 청할 줄도 모르는 영혼이 병든 사람은 아닌지 되돌아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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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정욱 안셀모 신부 신부님]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병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활동을 보았습니다. 그 활동의 전개를 복음서는 짧게 전해주고 있지만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들어보면 그 분위기를 느끼게 해줍니다.
“예수가 왔다.” “마귀를 쫒아내고, 죽은 이를 살리며, 수천 명을 먹이고, 물 위를 걸으며, 아픈 이를 낫게 해 준 예수가 우리 겐네사렛 지방에 왔다.”
마을마다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외치는 예수님의 소식입니다. 그 소식 자체가 흥분되고 가슴 뛰며 온 마음을 들뜨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그곳이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상관없이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에워쌉니다.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 진짜 병자를 낫게 하는 기적을 행할까 하는 호기심 많은 사람들, 예수님을 자세히 보고 가족에게 동네사람들에게 이야기 해줄 것을 벌써 기대하는 입담꾼들, 누가 가니까 나도 가봐야지 하며 그냥 찾아온 이들, 예수님의 소식을 미리부터 듣고 그분의 말씀에 새로운 희망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가난한 이들, 예수가 무슨 재주로 병을 고치겠냐고 그냥 떠도는 소문일 뿐이야 하는 마음으로 찾아온 방관자들,
이제는 내 몸이 낫게 되겠지 하는 희망을 안고 형제들에게, 가족들에게, 이웃사람들에게 부축 받으며 업혀오고, 들것에 눕혀 찾아온 병자들,
이들이 예수님 주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도움이 가장 절실한 이들이 외칩니다. “당신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 주십시오. 당신은 죽은 사람도 살리고, 우리처럼 아픈 이를 낫게 하신 분이 아닙니까? 그러니 그들에게 베푼 기적을 저희에게도 베풀어 주십시오.”
몸이 불편한 이들에겐 절실한 외침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간절한 외침을 거절하지 않고 많은 이들이 치유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우리 자신은 왜 주님을 찾아왔습니까? 방금들은 복음의 내용처럼 예수님을 찾고자 했던 우리의 삶 역시 복음의 병자들처럼 간절하였습니다.
참된 사랑을 알고자, 죽음이 두려워, 고통 중에 있기에, 인생의 풀리지 않는 의문 안에서, 가족의 건강과 평화를 위하여, 형제와 나눔의 삶을 살고자, 자신의 잘못된 과거사를 이겨내기 위하여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은총 안에서 참된 진리를 얻게 되었고, 나눔의 삶의 의미를 알고, 참된 사랑과 용서의 삶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고, 우리는 새로운 삶을 찾았습니다.
그분은 병자들에게만 기적을 베푸는 분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에게 생명과 죽음의 주인으로 그분 안에 참된 진리와 구원이 있음을 깨닫고 고백하며, 주님의 말씀 안에서 열심히 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주님을 알게 된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치유자이시고, 구원자이심을 말과 행동 안에서 세상에 외쳐야 합니다. 형제와 나누는 사랑을 통하여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아픈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면서 어렵고 힘든 이들과 함께 나누면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 안에 건네사렛 지방에 예수님이 도착한 소식을 전한 사람들처럼 우리가 머무는 그곳에서 신앙인의 삶을 살아야 하며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려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찬양하며 “당신들은 참된 예수쟁이입니다.” 라는 말을 듣도록 말입니다.
여러분 각자는 주님을 위하여 오늘 세상에 어떻게 외치겠습니까? 오늘 이 시간 주님이 주신 시간입니다. 열심히 살아봅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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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
마르코 6,53-56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사랑>
그분과
나 사이에
그분 절실한
나의 벗
정성스레
모셔다 놓고
그분과
벗 사이에서
살며시
사라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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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손이 되어>
신부는 고향 본당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셨듯이(마르6,4) 고향에서 환영받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이 고향 성당으로 인사발령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고향 분들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할머니께서는 그 신부님의 옛날얘기를 꺼내셨습니다. 오줌을 싸서 체를 뒤집어쓰고 동네를 돌던 얘기며 똥을 싸고…… 고집통이고, 어머니 젖이 모자라 당신 젖을 먹고 컸다는 둥…정말이지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할머니께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자꾸 자랑삼아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고민 끝에 하루는 할머니의 가슴을 풀어 제치며 옛날에 내가 먹던 젖인지 확인 좀 해야겠다고 진피를 떨었답니다. 그 이후 할머니 입에서 다시는 신부의 옛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답니다.
고향에서 예수님께서도 환영받지 못했는데 하물며 감히 누가 환영받겠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합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인다면 더 큰 혜택을 입을 것인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옛날이 아무렴 어떻습니까? 지금이 중요하고 또 앞으로 다가올 날이 더 소중한 것이지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긴 과거 때문에 미래를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도착하셨을 때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마르6,54) 그리고 주변 마을까지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마르6,56) 그 동네는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었습니다. 시골의 순박한 마음이 큰 은총을 입게 한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그리스도는 이제 몸이 없습니다. 우리의 몸밖에는. 그분에게는 손이 없습니다. 우리의 손밖에는. 그분에게는 발이 없습니다. 우리의 발밖에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눈을 통하여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발로 뛰어다니시며 선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의 손으로 사람들을 축복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받을 것입니다.”(야고5,15)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앞에 모셔다 놓인 이들은 단순히 병을 치료받은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소중한 마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도 확인받은 것입니다.
굽어진 마음, 오그라든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은 일반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안에서만이 온전하게 치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줄 능력이 있는 분이시지만 육신의 치유자로만 보면 부분을 전체로 보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는 중병이 있다면 예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듯이(마르6,56) 오늘 우리가 구원을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받고 열이 가신 부인은 곧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마르1,31)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용서받아 구원을 얻은 우리도주님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시중을 든다는 것은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지를 알고 그에 맞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동네에도 가야 한다.’ 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마땅히 시중을 들어야 한다’하고 고백할 만큼 내가‘구원받았음’을 확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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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년 넘게 새벽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작년 12월, 몸의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나 힘든 것입니다. 3~4시면 저절로 일어났는데, 그 시간에 눈은 떠지지만 ‘조금만 더’를 마음속으로 대뇌이다가 깜짝 놀라 일어나면 아침 6시입니다. 사실 새벽에 하는 것이 많기에, 이렇게 늦게 일어나면 바빠집니다. 그러면서 20년 넘게 유지하고 있었던 새벽 기상이 왜 이렇게 힘들어졌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결론은 12월에 외부 강의가 많아서 피곤하다는 이유로 운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매일 많은 거리를 걷고 또 헬스도 했는데, 이 모든 것을 피곤하다며 쉬다 보니 일어나는 힘도 줄어든 것입니다. 하긴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정신력은 체력과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의지력이라고 말하는 추상적 능력의 출처는 바로 체력에 있다는 것입니다.
피곤할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운동하지 않아 체력이 떨어지면서 의지력을 비롯한 정신의 힘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피곤하다고 또 시간이 없다고 줄였던 운동이었는데, 사실은 나의 피곤을 없애고 또 시간도 벌어주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요?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피곤해서 쉰다고 그리고 바빠서 쉰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쉰다고 해서 피곤과 바쁨이 실제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과 함께하면서 세상일에 대한 피곤을 줄이고, 더 맑고 건강한 정신으로 시간을 벌어 더 많은 일을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신앙생활이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과 만남의 끈을 놓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주십사고 사람들은 청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과 함께해야 한다고, 어떻게든 예수님과 만남의 끈을 연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받았습니다.
피곤하다고, 바쁘다고, 너무 고통스럽다고 그 밖의 이유를 들어 주님에게서 벗어나려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의 삶은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빠도 운동을 해야 더 많은 일을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 안에서 더 많은 일을 열정적으로 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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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창조와 구원의 하느님>
오늘 독서는 창세기의 시작으로 하느님의 창조를 얘기합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는 얘기인데 그 결과는 단지 치유에 그치지 않고 구원까지 발생합니다.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그러니 오늘 독서와 복음을 합치면 <창조와 구원의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주제를 묵상하니 자연 <연중시기 공통 감사송 3>이 떠오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인류를 창조하셨듯 이 또한 인자로이 인류를 구원하셨나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은 창조와 구원 사이에 인간이 비 구원 상태에 있었음을 전제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창조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구원할 필요가 없겠지요. 예를 들어 아이를 낳았는데 정상적인 아이를 낳았다면 치유가 필요 없듯이.
그런데 낳기는 정상적으로 낳았는데 아이가 크게 다치거나 불치병이 들면 치유가 필요하듯 하느님의 창조는 정상적이었는데 인류가 육체적, 심리적, 정신적, 영적으로 병이 들었다면 치유가 필요하고, 그중에서도 영적으로 병들었다면, 곧 죄를 지었다면 구원이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오늘 창세기는 하느님의 창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원하시는 대로 잘 되었고 그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잘 창조된 인류와 피조물이 인간의 죄로 비 구원 상태에 놓이고, 비 구원 상태에 있는 인류와 세상 구원을 위해 파견된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노래하며 감사하는 것이 <연중시기 공통 감사송 3>입니다.
저는 이 감사 기도를 바칠 때마다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사랑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 사랑을 느낍니다. 우리 인간의 포기하는 사랑과 비교하면서 말입니다.
우리 인간 가운데는 애를 낳고는 내버리는 사람도 있잖습니까? 며칠 전 아이를 팽개치고 놀던 엄마 때문에 아이가 굶어 죽은 사건이 있었고, 그런 뉴스가 요즘 심심치 않게 올라오는데 하느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또 죄지은 사람을 몇 번 사랑으로 충고하고는 말을 듣지 않으면 사랑을 포기하여 구원을 포기하는 데 비해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그렇지 않고 끝까지 구원하시지요.
그러므로 오늘 창세기에서는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되었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복음에서는 환자들을 예수께 데려오려고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이는 이웃의 사랑을 마음에 같이 간직하는 오늘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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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귀향歸鄕>
귀가歸家의 여정
-예수님이 참고향故鄕이시다-
오늘 2월5일은 성 바오로 미키를 비롯한 26명의 신자들이 일본 나가사키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자카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한 날입니다.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치하시 이들의 영웅적 순교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이들중 예수회 사제였던 성 바오로 미키는 예수님과 같은 나이 33세에 순교하였고 성 바오로 미키를 비롯한 26명 순교자들은 일본인 17명, 프란치스코회 6명, 예수회 3명, 즉 일본인들과 유럽인들이었습니다.
특히 감동적인 것은 성 바오로 미키와 23명의 체포된 그리스도인 동료들이 426년전 1597년 1월 3일부터 2월5일까지 27일 동안 교토에서 나가사키까지 1000km 걸어가 모두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걸어가는 동안 교회의 찬양과 감사의 찬송가인 테데움을 불렀습니다. 다른 동료들 25명과 함께 십자가 달려 순교 직전 성 바오로 미키는 당당한 얼굴로 모여있던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했고 복음이 널리 전파될 것을 기원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마지막 설교를 했고, 그의 스승 예수님처럼 사형집행자들을 용서했습니다.
참으로 이들의 영웅적 신앙이 놀랍고 감동적입니다. 이들은 순교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향임을 믿었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영웅적 순교의 죽음도 가능했음을 봅니다. 성 바오로 미키의 영웅적 순교 모습에서 우리의 첫 순교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이 떠오릅니다.
저는 믿는 이들의 삶을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歸家의 여정이라 일컫곤 합니다.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아버지 계신 본향집으로 귀향이라는 것이지요. 고향을 찾는 원초적 본능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바로 이렇게 고향을 찾는 귀향본능에 따라 많은 이들이 수도원을 찾습니다. 자매들의 이구동성의 고백은 친정집을 찾는 느낌이고 많은 분들 역시 고향집을 찾는 느낌이라 말합니다.
어제 저를 찾았던 ‘혼인주례 1호 부부’와의 만남도 참 행복했습니다. 고향집을 찾듯이 수도원을 찾은 부부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부부가 떠나기 전 성덕聖德 점수를 각자 매겨 보도록 했습니다. 100점 만점에 기본점수 20점, 진복팔단 8개 항목 각각 10점 만점에 80점, 그리고 예수님 보너스 점수 10점으로 했습니다. 각자 후하게 점수를 주라 했습니다. 점수를 확인해 보니 자매님은 99점, 형제님은 94점이었습니다.
“99점, 94점 놀랍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성인부부입니다. 오늘 2월5일은 두 성인부부의 수도원 방문 축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격찬의 덕담과 더불어 크게 웃었습니다. 완전히 주님의 한가족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어제 저는 본기도 서두중 “주님의 가족”인 저희를 자애로이 지켜주십사라는 말마디에서 은혜 받았다 고백했습니다. 특히 영성체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체성가 177장을 부를 때는 주님의 한 가족이 된 느낌을 지니곤 합니다.
제가 산티아고 800km 2000리 순례 여정중 성전聖殿에 들릴 때마다 느낌은 꼭 고향집처럼 편안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수도원이 완전 고향집처럼 느껴져 휴가의 필요성을 잊고 지낸지 수십년이 됩니다. 특히 성체성가 177장 2절은 늘 불러도 새롭고 위로와 힘이 됩니다.
“참 기쁨이 넘치는 그곳 내 주님 계신곳,
내 모든 근심 슬픔을 다 위로하여 주시네.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머무를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 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
가사도 곡도 은혜롭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신 곳, 바로 거기가 외딴곳이자 고향집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원고향입니다. 주님의 한 가족이 되어 예수님을 모실 때 비로소 온전한 치유의 구원입니다. 오늘 복음에 대한 영문 주석에서 얻은 통찰이요 그대로 소개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구원된(were healed)’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에소존토(esozonto)’는 단지 육체적 치유 이상의 뜻을 함축한다. 초대교회 어휘중 그 말은 구원의 전적 체험을 묘사한다. 그말은 단지 ‘복지(wellness)’가 아니라, ‘온전함(wholeness)’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귀향(coming home)’이다.”
바로 예수님께 귀향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동창회나 특정한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과정을 수료한 뒤에 모이는 모임을 가리키는 표현도 홈커밍, 귀향입니다. 고향집인 예수님께 돌아와 만날 때 비로소 온전한 치유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매일 미사는 귀향의, 커밍홈의 실현이요 구원의 체험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복음의 고향을 잃어 병든 이들 원고향, 본향 집인 예수님께 돌아와 만나니 모두 치유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6,56)
그대로 예수님께 귀향하여 치유 구원받는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오늘부터 창세기의 시작입니다. 말씀으로의 창조과정을 통해 사람이 살 수 있는 보금자리 집을 마련해 주시는 과정이 참 인상적입니다. 창조과정이 일정한 틀에 따라 반복적으로 이뤄집니다. 한 대목만 소개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라,”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뭍을 땅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다-부르셨다-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이런 틀로 계속되는 창세기 창조과정은 내일까지 계속됩니다. 뚜렷이 경계를 지어가며 참으로 인간이 살 수 있는 보금자리 가정집의 품으로 만들어 주는 과정이 은혜롭고 인상적입니다.
더불어 예전 수차례 인용했던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라는 괴테의 말도 생각납니다. 한계없이 끝없는 욕망대로 살 때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반대도 그대로 성립됩니다. “천국에는 한계가 있다”입니다. 한계가 없는 혼돈 상태를 점차 뚜렷한 경계를 지어 천국같은 살집으로 만들어 주시는 하느님의 참 섬세한 배려의 창조과정입니다.
그래서 한계限界와 경계境界를 뚜렷이 지어주는 수도원 자연환경, 삶의 한계를 지어주는 관례서, 하루 삶의 일과표의 균형과 조화가 무질서의 혼돈이 아닌 질서 잡힌 지상천국을 살게 합니다. 이래서 참 자유로운 삶을 위해 한계에 익숙해지는 자발적 선택의 ‘한계의 훈련’이 정주생활에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귀가의 여정을 사는 우리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 고향입니다. 원 고향, 본향 집인 예수님께 귀향하여 온전한 치유의 구원을 얻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예수님께 귀향하여 한계와 경계가 분명한 균형과 조화의 지상천국의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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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6,56)
오늘 복음(마르6,53-56)은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많은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그들이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미사에 참례하여 성체를 받아모시는 이유이고, 기도하는 이유이며, 말씀을 가까이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살기 위해서, 이제와 영원히 구원받기 위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따라가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영적 육적으로 아픈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우울증과 같은 마음의 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음의 병을 고쳐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그래서 마음이 다시 부활하고, 그래서 몸도 함께 부활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오늘은 '일본교회의 순교자들', 곧 '나가사키에서 장엄하게 십자가 형틀 위에 매달리신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26명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수회 회원이셨던 성 바오로 미키'는 십자나무 위에서 이렇게 신앙고백을 합니다.
"나는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의 길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이 길이 나의 원수들과 내게 폭력을 가한 모든 이들을 용서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국왕을 용서하고 나에게 사형을 집행하려는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하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으라고 간청하는 바입니다."(성무일도서 2독서 中)
그들의 몸과 마음이 끝까지, 십자나무에 달려 죽기까지 예수님께 닿아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도 그들의 모습을 본받아 지금 여기에서부터 구원을 체험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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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 56)
사람이
있습니다.
녹아내리며
받아들이시는
사람의 아들
예수님이
계십니다.
절박한 기도가
절박한
만남으로
이어집니다.
지나온 시간은
주님을 만남으로
은총이 됩니다.
다시
뜨거워지는
마음입니다.
마음의 문(門)을
활짝 여는 것에서
간절한 구원
온전한 사랑은
시작됩니다.
우리보다
더 간절하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무너지고
부서지고
깨어지는
사랑이 얼어붙은
우리 마음을
녹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도망치지 않으시고
오히려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
손을 대어 봅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이
전해져 옵니다.
나의 삶을
다시
바꾸어 놓으시는
주님이십니다.
가슴이 무너지는
사랑이 정녕
구원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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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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