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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50년 불교50년-③불교음악
[2004년 08월 10일 화요일]
전통불교음악 범패의 뒤를 이어 20세기초부터 서양식 기보법에 의해 작곡된 곡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대불교 음악이다.
현대불교음악의 효시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여러가지 설이 제시되고 있다. 최근 동국대 도서관에서 발견된 《대각교의식》(1927)이란 책자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인 용성스님(1864-1940)이 짓고 대각교중앙본부가 발행한 책이다. 이 책에는 '왕생가'와 '권세가'의 악보가 수록돼 있다.
그러나 그 두 해전인 1925년 조선불교교무원에서 출판된 《은중경》도 서양악보에 의해 기술되어 있었다.
그리고 1931년 사월초파일에 발행된 《석문의범》하권에는 가곡편에 20가지의 노랫말이 실려있다.
'참선곡' '회심곡' '사월파일 경축가' '불전화혼가' '산회가'의 가사가 실려 있으나 악보가 게재되지 않아 '회심곡' '참선곡' '사월파일 경축가'외에는 어떤 선율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불교의식에 범패를 대신하여 현대불교음악 즉 찬불가를 보급시키는데 주목할만한 활동을 한 인물로 조학유스님을 빼놓을 수 없다. 스님의 확실한 생몰연대는 알려지지 않으나 그가 음악공부에 뜻을 두고 일본유학까지 갔었으며 학도병으로 태평양전쟁에 참가하여 전사했다는 구전은 그의 활동이 1940년 이전에 집중적으로 이뤄졌음을 추론케 한다. 1960년대에 찬불가 운동을 펼쳤던 운문스님은 조학유스님이 해인사스님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전한다.
조학유스님은 수많은 노랫말을 지었으며 이중의 대표곡이 '찬불가'이다. 조학유스님은 찬불가의 노랫말을 짓는데 그치지 않고 1927년 발행된 <불교>지 10월호에 자신이 지은 찬불가를 총정리하여 게재, 찬불가의 폭넓은 대중화를 꾀했다.
조학유스님이 이 잡지에 기고한 짧은 글은 당시 불교음악의 현황과 동시대 불교인들이 불교포교에 기울인 노력을 읽을 수 있게 한다.
불교의식과 부처님일대기 유치원용 찬불가 등 5종 40-50편의 찬불가를 모아 수록한 이유를 조학유스님은 제방불자들에게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종래에 불교창가라고 기종이 있었으나 다만 가사뿐임으로 각처에서 주곡이 불일하여...(중략)...통일을 숙망하든 바이나 아직 보이지 아니함으로 갑갑함을 부득이하야 본 찬불가를 술케 된바이나 원래 사계에 대한 작곡의자식은 넉넉지 못함으로 타교회에서 사용치 않는 각종의 호곡을 인용하고 다소의 첨삭을 가하야 편술한 바이오니 여러분의 양해를 비는 바입니다..."
오늘의 불교음악인들은 나름의 관점에 따라서 현대찬불가의 효시를 이들중 하나에서 들고 있으며 아직까지 통일된 의견은 나오지 않고 있다.
다만 현대찬불가의 이러한 출발에서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찬불가가 그 위치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종책이나 교계의 규제없이 개인적인 작업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현대찬불가의 이처럼 서글픈 출발은 해방 후 50년이 흐른 오늘도 계속 이어진다. 이론적 근거없이 개인적으로 출발한 찬불가제작은 오늘날까지 '찬송가풍의 찬불가'문제는 둘째치고 '어떤 노래가 찬불가인가'하는 기본적인 개념정의조차 합의되지 않는 현실을 만드는데 가장 큰 원인이 됐다.
6.25전쟁을 앞뒤로 한 10여년의 공백기를 거친 후 찬불가 보급운동은 1960년대초 재개됐다.
1962년 강원도 정선에서 활동하던 포교사 김정묵씨가 찬불가집을 펴냈다. 여기에는 '삼귀의'등 1백37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용성스님이 지은 '대각교가'에서부터 소천스님의 '구국송' '금닭의 노래' 권상로 박사의 '신불가'등 당시 불려지고 있던 찬불가를 한데 모은 책이다.
김정묵씨는 책을 펴내며 "나는 신불교운동에 뜻을 두고 신불교운동의 교재로서 먼저 이 찬불가 책을 내는 바이다. 이 책에 수록된 노래들은 대개가 각 포교당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을 수집 편찬한 것이다"고 밝혔다.
김정묵포교사 편찬의 이 찬불가집은 인기를 모았는지 10년동안 초판 2천부 재판 3천부가 다 나간 후 프린트 5백부를 보내달라는 요구에 3판까지 펴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 김정묵포교사는 3판을 내며 "이 책에 수록된 노래가 어디가 잘못 되었는지도 모르고 그대로 세상에 보내는 바이다. 한번도 악보는 물론 가사도 고치지 못한채 그대로 세상에 보내게 됨을 심히 미안히생각하는 바이다"고 했다.
현대찬불가의 효시를 정하는 문제의 의견을 달리하던 이들도 찬불가의 발아기를 1960년대로 보는데엔 이견이 없다. 운문스님 때문이다.
진주 연화사와 서울 조계사 등지에서 어린이와 청소년포교를 벌이던 스님은 대중포교를 위해서 음악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경전 구절로 노랫말을 지어 평소 친분이 있던 추월성(본명 한득민) 김찬우, 정민섭씨 등에게 작곡을 의뢰했다.
운문스님의 찬불가는 오늘날 찬불가의 바탕이 됐다. 운문스님은 어린이를 위한 동요찬불가와 합창곡을 많이 지었으나 효과적인 보급수단을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
여러해를 노력한 끝에 1964년 12월 《불교동요집》을 펴냈다. 원래는 어린이와 어른들이 같이 배우고 부를 수 있는 《성가집》을 발간할 계획이었으나 여러가지 형편상 《성가집》은 뒤로 미루고 《불교동요집》을 내놓았다.
여기서 운문스님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본다.
"1955년부터 어린이포교를 시작했습니다. 내가 포교승이 된것은 불교정화운동이 그 전기가 되었습니다. 불교정화가 일단락되어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은 가람을 수호하고 포교를 해야했습니다. 청소년포교에 30년 목표를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목포 정혜사에서 코흘리개들을 모아 시작했습니다. 군중이 모여있는데는 불가불 음악이 필요해서 무리하게 시작했는데 가사는 내가 짓고 곡은 흔히 부르는 노래를 갖다 붙였습니다. 그게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포교를 하자니 찬불가가 필요했고 종단차원에서의 대안은 없던 상황이므로 요즘 흔히 얘기하는 '노래가사 바꿔부르기'를 시도했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시작된 운문스님의 불교음악 개척은 쉽지가 않았다. 《블교동요집》은 3천부를 찍었다. 한권 값이 당시돈 1백원. 스님은 《불교동요집》을 팔아 《성가집》을 발간하려 했다. 그런데 조계사 뒷방에 쌓인 《불교동요집》은 잘 나가지 않았다. 책이 팔리기를 기다리던 운문스님이 직접 나서야 했다. 아는 도반과 큰절 화주보살들에게 10권-30권씩 보내 시주를 요청했다. 하루는 법주사에 있던 추담스님이 조계사에 들르자 책을 주고 그에게 3천원을 받아냈다.
추담스님은 운문스님에게 "돈은 낼 수 있으나 책이 아무짝에도 쓸데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 저기 보낸 책에 대한 책값을 치러준 곳은 기장 부안사 한곳뿐 이었다고 한다. 돈과 함께 부쳐온 편지에서 장안사스님은 "다시는 이런 책을 보내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3천권의 교계 최초의 불교동요집은 그렇게 없어졌고 운문스님이 단 한권소장해 놓고 있다.
운문스님은 조계사에서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연화합창단을 구성, 부처님오신날 기념 불교음악발표회를 열기도 했다.
운문스님은 무려 3백곡의 불교가사를 썼다. '청법가'와 '산회가' '예불가'등 지금 불자들이 자주 부르는 많은 찬불가가 당시운문스님이 지은 노래이다. 적지않은 불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보현행원'도 바로 운문스님이 지은 곡이다.
지금은 북한산 한 자락의 작은 절에서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운문스님은 자신의 지난 활동이 후회반 자랑반이라고 회고했다. 전국 어디를 아무때나 가도 스님이 지은 노래를 들을 수 있는데 대해서는 긍지를 느끼지만 " 음악공부를 안한 사람이 찬불가를 쓰다보니 방향과 내용을 생각 안하고 시작하게 됐다"는 반성도 한다.
해방50년 불교50년-④불교음악
[2004년 08월 10일 화요일]
KBS TV의 개국 직후 운문스님은 어린이합창단을 이끌고 TV에 출연케 되었다. 당시 약 5만세대가 TV를 시청했다. 5만명 이상의 대중 앞에서 찬불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운문스님은 매우 신이 났었다고 했다. 스님의 음악공연녹화를 마친후 담당PD가 스님에게 고언을 했다.
"기독교음악이 양곡입니다. 불교음악도 양곡이면 시청자들은 이 두 종교의 음악이 같다고 평가할 것입니다. 불교음악은 서양과 동양의 음악이 잘 절충된 곡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스님은 작곡을 의뢰할 때 민요풍으로 해달라는 주문을 잊지 않았다.
1960년대에 불교음악계에 활동하던 이는 추월성 이찬우 김주영 김희조씨등이다. 당시 경희대 음대에 재학중이던 이찬우씨는 대각사에서 운문스님은 만나 어린이법회를 지도하며 불교 대신에 귀의했다. 신학대교수이며 음악가인 김주영씨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나 "예술이라면 어디에서든지 (활동)하겠다"는 취지 아래 불교합창단을 지도했다.
훗날 그는 호산나합창단과 한국일보소년소녀합창단을 창립, 지도했다. 예그린예술단 단장 김희조씨는 부인이 신실한 불자였던 인연으로 불교음악과 인연을 맺었다. 지휘자이며 작곡가였던 그는 70년대 중반부터 찬불가의 국악화를 주장했다. 그는 77년 한 불교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불교음악을 해야겠다고 찬불가 등을 기성작곡가에게 맡기면 어쩐지 교회냄새가 난다...(중략)...젊은이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무조건 영합하는 식으로 보급해 보리면 나중에 취소할 수도 없고 곤란해 진다"고 주장하는 등 불교음악의 체계적 보급의 중요성에 일찌감치 눈을 떴다.
60년대에 들어와서 대학불교연합회와 청소년교화연합회등 전국규모의 불교청년.청소년단체가 생겨남으로 불교음악의 필요성은 더욱 증대됐다. 산중 중심의 불교 대신 새 형태의 대중집회가 성행했으므로 여기에는 찬불가의 보급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졌다.
1963년 7월 14일 불교문화예술원에 음악분과위가 설치됐다. 65년 칠보사어린이무용합창단이 창립됐다. 창단 이후 꾸준한 활동을 보인이 단체는 1975년부터 초파일이면 청와대에서 찬불가를 불렀다. 1980년 어린이합창단으로서는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찬불가발표회를 가졌으며 이어 미국 순회공연을 갖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조계사어린이합창단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70년대를 넘기며 '찬불가'란 용어가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1970년 조계종 총무원이 주최한 '찬불가 공모'는 한국불교가 찬불가 사업에 공식적인 관심을 나타낸 최초의 일이었다. 이 공모에서 최영철의 '삼귀의'와 '사홍서원'이 채택되어 전국적으로 법회의식에서 통일되어 부르게 됐다.
1970년대를 불교음악인들은 찬불가의 개화기로 꼽는다. 60년대 보다더 많은 음악인들이 불교음악보급에 동참하고 선구적 활동을 펼친 합창단들이 창단되었으며 다양한 내용의 현대불교음악이 수록된 찬불가집도 선보였기 때문이다.
서창업 김용호 정민섭 최영철 김동진 김규환 등의 작곡가와 운문스님외에 석주스님 광덕스님 김어수와 같은 포교일선에 선스님과 포교사들이 찬불가보급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 시기의 특기할만한 활동으로 문서선교회에서 발행되는 <자비의 소리>가 벌인 찬불가보급운동이 있다. 포교사 겸 작사가 반영규씨가 1970년 부터 15년동안 혼자 힘으로 한달에 한번 발행했다. 그는 <자비의 소리>에 73년부터 별지에 성가시리즈를 추가했다.
30절지를 반으로 접어서 표지를 만들고 안쪽에 새로 작곡된 불교노래의 악보를 인쇄해서 무료로 배부했다. 뒷면에는 불교노래를 새로 지어서 널리 보급하는 취지를 밝히고 수록된 노래의 작곡자 프로필과 <자비의 소리> 주소가 표기됐다. 처음에는 주소를 넣지 않았으나 포교지나 악보를 구하고 싶어도 연락처를 몰라 어려움이 많다는 호소가 적지않아 주소를 밝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악보가 있어도 악보를 읽고 가르칠 사람, 반주에 필요한 풍금조차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하소연도 함께 줄을 이었다. 궁여지책으로 동덕여자고등학교 불교반(지도법사 김재영) 학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서 퇴계로에 있던 한 작은 녹음실에서 녹음한 카세트테잎을 무료로 보급했다. 그러나 당시엔 녹음기도 귀한 때라 보급에 차질을 빚기도 했다.
반영규씨는 새 불교노래룰 짓기위해 한 작곡가를 찾아냈다. 바로 서창업씨다. 76년 4월 반영규 작사 서창업 작곡의 찬불가를 모은 찬불가집(춘추각)이 발간됐다. 이 책에는 지금도 널리 불리우고 있는 '홀로 피는 연꽃' '밝은 태양' '오! 이 기쁨'등이 수록돼 있다. 이 책의 출판이 계기가 돼 테너 김화용씨가 최초의 LP레코드판 <불교가곡집>을 서라벌레코드사에서 녹음 출반했다.
당시만 해도 이름있는 연주가의 불교음악 참여는 전무한 실정이었다. 김화용씨의 음반은 불교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자비의 소리>반영규씨, 동덕여고 김재영법사, 테너 김화용씨, 바른불교회 김래동법사, 국제불교도협의회 김안수씨 등에 의해 불교음악의 새 활로를 제시하는 음악법회 '붓다의 메아리'가 발족됐다.
붓다의 메아리는 중고등학생을 중심으로 한 청소년들에게 바른 불교를 널리 펴고자 서울지도자연합회를 결성하여 이미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청소년교화연합회와 공동으로 매달 개최됐다.
서울시내 중고등학교의 불교반 학생들이 한달에 한번 모두 모여서 새 찬불가를 배우고 초대손님에게 그의 불교관과 신앙관을 경청했다. 최영철씨가 이 모임을 위해 찬불가 '붓다의 메아리'를 작곡했다.
불자결혼식.장례식에 참가해 불교노래 부르기, 교도소 소년원 지방의 사찰법회공연 찬불가집 보내기운동 전개 등으로 음악포교에 적지않은 성과를 올렸다.
비슷한 시기에 조계합창단 서울불청합창단이 활동했으며 수많은 합창단이 창단됐다. 1979년부터 매년 찬불가 경연대회가 실시됐다. 어린이 청소년 일반부로 나눠 등수를 메기고 시상식을 가졌다. 지방에서는 전세버스를 대절해 참가하는등 열기가 대단했으며 경쟁도 치열했다. 회를 거듭할수록 본래의 경연 목적은 뒷전으로 밀리고 일등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으로 잡음과 부작용이 생겨 대회가 중단됐다.
이 무렵 서창업씨는 각 합창단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불교음악연구원을 설립해 조계종 총무원에 등록했으나 여러가지 어려움으로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한다.
1980년 불광바라밀다합창단이 창립돼 찬불가 발표회를 가졌다. 83년 작곡가 김용호씨가 그때까지 제작된 노래를 총망라한 찬불가집 《새찬불가》를 펴냈다. 서창업씨의 곡을 비롯한 1백18곡이 수록된 이 찬불가집은 86년 제3판에서는 1백82곡이 게재되었다.
80년대초 피아노반주 일색이던 찬불가발표회에 새로운 시도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중앙가릉빙가합창단이 창단공연에서 교계 처음으로 관현악 반주를 선보였으며 초파일 봉축 연합합창제에서 한마음선원 합창단이 국안반주를 시도했다.
1985년 한국무지카라는 음악전문프로모터가 두번의 불교창작음악회를 마련해 주목을 끌었다. 1984년 정부기교수(중앙대)가 초파일송가 '파랑새 울고'를 발표해 큰 반향을 얻었다. 우리나라 고유의 오음계를 바탕으로 하여 쓴 이 노래는 불교음악의 성숙도를 한단계 높인 작품으로 꼽힌다.
앞서 발표된 서창업씨의 '반야심경'은 이전에 선보인 찬불가들보다 연주시간이 훨씬 긴 대곡으로 불교음악의 대곡화에 테이프로 끊은 작품으로 기록된다.
그외 이길상 김정수 박이제 강창식 변규백 박범훈씨가 80년대에 불교음악계에 뛰어들었다.
비구니 수법스님이 연주단체 '불교성악동호인회'를 결성했다. 수법스님의 뒤를 이어 시명스님 범조스님 병오스님이 불교음악활동에 나서 격조높은 무대를 선사했다.
80년대 후반엔 보다 대중성을 지향한 찬불가가 속속 발표됐는데 찬불가요가 바로 그것이다. 유승엽 강승식 송결 조영근씨등의 대중가요 작곡가들이 이러한 움직임을 이끈 이들이다.
1988년 불교음악사에 의미있는 불사가 이뤄졌다. 대한불교진흥원에서 《통일법요집》을 발간했다. 《통일법요집》발간을 계기로 당시까지 제작된 찬불가가 내용상으로 간략하게나마 분류 정리됐다.
1991년 불교음악사에 한 획을 긋는 사업이 시작됐다. 불교방송이 찬불가1백곡 제작을 서원하고 찬불가 5개년계획을 발표했다. 91년부터 매년 연말 신작찬불가 발표무대 '음악공양의 밤'을 개최하고 이를 계기로 악보와 가사집을 제작, 전국사찰에 보급했다. 불교방송은 귀의.찬탄.발언.예배.참회.회향.절기 등 10개 분야의 의식찬불가만 집중하여 작사 및 작곡을 의뢰했다.
불과 30년만에 불교음악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전국의 수많은 사찰에 합창단이 창립되고 찬불가는 무려 1천곡을 헤아리게 될 정도로 양적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불교음악의 대중화는 아직 본 궤도에 오르지 못한 형편이다. 의식에서 몇몇 찬불가가 불려지고는 있으나 불교노래는 여전히 불교합창단에 의해서만 불려질 뿐 불교대중의 일상적인 삶속에서 함께 한다고는 볼 수 없다.
합창곡과 발표회 위주의 찬불가제작이 낳은 결과다. 생활찬불가와 청소년을 위한 찬불가의 개발이 시급하다.
찬불가로 통칭되고는 있으나 가사나 멜로디가 전적으로 가요풍인것, 혹은 가곡풍, 교가풍, 동요풍인 음악적 양식의 혼용 또한 빠른 시일내 제작과 쓰임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삼귀의례'만 해도 대여섯 사람의 작곡가가 각기 다른 곡을 만들어 쓰고 있으며 '사홍서원'도 두가지가 되는등 찬불가 제작의 통일성 없는 출발은 불교대중으로 하여금 혼란을 불러 일으킨다.
왜색찬불가와 찬송가풍 찬불가 시비는 불교음악인들 사이에서 늘상 끊이지 않아 왔다. 그러나 불교음악의 지난 반세기사를 돌아보면 알 수 있듯 조학유 스님에서부터 현대불교음악의 개척자들은 자신의 '행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불교음악발전에 끼친 영향과 노력까지 외면 되어서는 안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반세기동안 가장 외롭고 쓸쓸한 길을 걸으며 불교음악의 찬란한 불을 지핀 이들에게 돌아가는 댓가치고 그런류의 끊임없는 비판은 너무 가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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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 어려웠던 시절입니다. 이런 눈밝은 선각자, 스승님들이 계셨기에 우리가 오늘날 보듯 이런 당당한 찬불가를 부를 수 있게 되었겠지요. 이런 하해와 같은 은혜를 우리 불자님들이 부디 아셔야 할텐데...
모두모두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