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만난 지 6개월 정도 된 날이었다. "내 거야!" 아이가 큰 소리로 내 말을 따라 했다. 처음이었다. 그동안 아이와 치료실에서 한 것은 언어 치료라기보다는 앉기 훈련이나 지시에 따르는 행동 훈련에 가까웠다. 처음 만났을 때 아이는 멋대로 치료실을 뛰어다녔고,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힘으로 빼앗았다. 앉으라는 지시를 듣거나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뒤로 벌렁 드러누워 나에게 눈을 흘겼는데, 그 표정은 무섭기까지 했다. 만 네 살이 조금 안 된 아이의 상황은 심각해 보였다. 나는 이 아이가 오는 날이면 밥을 두 공기씩 먹었다. 이리저리 뛰는 아이를 쫓아다니고, 자리에 앉도록 하고, 말도 유도해야 했기에 평소보다 몇 배 많은 체력이 필요했다. 아이 또한 새로운 규칙을 지키고 지시에 따라야 하는 시간이 적지 않게 힘들었을 것이다. 여섯 달이 지나는 동안 아이는 말을 한두 마디 한 적은 있어도 내 말을 따라 하거나 새로운 단어를 배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긍정적인 신호가 전혀 보이지 않아 속상했다. 아이가 오는 날이면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무능해서 그런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무거운 공기와 책임에 짓눌렸다. 그날은 아이와 인형 뺏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는 "내 거야!"라고 외치며 인형을 가져가는 게 정말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크게 웃으면서 "내 거야!"라는 말을 따라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조금씩 말이 늘기 시작했다. 여전히 뛰어다녔고 자기 마음대로였지만, 내 말을 듣는 날이 늘어났다. 드러누워 나를 째려보는 행동도 줄었다. 그렇게 내가 먹는 밥의 양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하루는 치료를 끝내고 어머니에게 아이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이야기 했다. 어머니도 아이가 집에서 말도 많이 하고 이전보다 자신을 많이 따라 준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선생님, 사실 저 그동안 되게 힘들었어요. 이제야 한시름 놓았어요." 어머니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그동안 애지중지 키워 온 아이가 치료실만 오면 괴성을 지르며 울 때 어머니의 가슴은 얼마나 미어졌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이 아이에게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았기 때문인지, 그동안 나름대로 힘들었기 때문인지 나도 눈물이 터졌다.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는 말없이 울었다. 그 후 아이의 상태가 점점 더 좋아져 어느새 대화도 할 수 있게 됐다. 아이와 함께한 순간들이 머릿속에 마치 영화처럼 남아 언제든 재생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런 기적 같은 순간을 모든 아이에게 선물할 수는 없어도 이따금 누군가의 인생에 중요한 순간을 만들어 줄 수 있음에 감사하다.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의 언어 재활을 돕는 나의 일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우정수 | 언어 재활사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움으로써 일어선다. _ 로버트 잉거솔
가장 행복한 삶의 분량
독일 문호 괴테는, “가장 쓸모없는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고 언술했다. 그러고 보니 필자 역시 매사에 감사함을 자주 잊는 삶을 살아온 듯하다. 이 요인 중엔 자만도 한몫했다면 지나치려나. 무엇보다 타인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결여돼서 일지도 모른다. ‘너+나’가 있기에 ‘우리’가 있잖은가. 아무리 유명세를 떨치고 싶어도 이를 인정해주는 ‘너’가 없으면 제아무리 높은 명성도 부질없다.
가령, 어느 식당이 맛 집으로 소문이 나기까진 그곳을 찾아준 손님들에 의해서다. 어느 식당은 이런 고객 덕분에 몇 시간씩 줄을 서야 그 집 음식을 맛볼 수 있을 정도다. 이렇게 식당이 그 음식 맛을 많은 이들로부터 호평을 받기까진 분명코 남다른 비결이 있을 법하다. 물론 그곳 주인의 맛있는 음식을 요리하기 위한 노력이 첫째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질 좋은 식자재로 맛있는 음식을 요리하였어도 이 맛을 찾는 손님이 없다면 그야말로 파리나 날릴 판 아닌가.
언젠가 경기도 광명시를 찾아갔을 때 일이다. 비지장과 청국장을 맛있게 만드는 곳으로 소문난 곳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이곳을 찾았을 때 손님을 배려하여 식당 출입구에 비지를 한 뭉치씩 비닐봉지에 담아 수북이 쌓아놓은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식사를 마친 손님들이 필요한 만큼 갖고 가라는 취지에서란다. 그곳 주인에게 “왜 이곳 식당에서도 필요한 비지를 이렇듯 인심 쓰느냐?”라고 물었더니 주인은 식당을 찾아주는 손님들께 고마워서란다. 그러고 보니 이 식당 주인은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식당을 찾아주는 손님들에게 감사함을 잊지 않는 매우 겸허한 자세를 지닌 사람이었다.
올 한 해 벌어진 사건, 사고를 대하노라니 새삼 이 주인의 살가운 정이 떠오른다. 윤리와 도덕을 저버린, 인간으로선 행할 수 없는 일들이 부지기수로 벌어져서이다. 돈을 노리고 자신의 친부를 잔인하게 살해 및, 어린 친딸을 창문 밖으로 던져 살해하는가 하면, 일면식도 없는 10대 소녀를 새벽에 살해하지를 않나….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하늘보기 두려운 일들이 연일 뉴스를 도배했다. 이로보아 현대는 인간관계에 가장 절실한 따뜻한 정이나 사랑, 감사함 따위는 상실한 세태가 분명하다.
어디 이뿐인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모른다. 무조건 조금치라도 자신이 불편하거나 불이익을 당한다 싶으면 타인은 물론이려니와 부모 가슴에도 칼끝을 겨누는 세상이다. 이는 감사함을 잃어서가 아닐까 싶다. 부모가 누구인가. 희생과 헌신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또한 자신은 못 먹고 못써도 자식 위해선 오로지 좋은 것만 먹이고 입히는 게 부모 마음 아니던가. 이런 부모마저 자신의 그릇된 욕망에 의하여 외면을 하니 자연 타인이 베푼 은혜, 친절 따윈 가볍게 여기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예로부터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고 했을까.
문득 괴테의 언술을 논하노라니 프랑스 화가 밀레(1814-1875)가 1859년 완성한 만종(晩鐘 55×66cm·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에 담긴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도 밀레는 이 그림을 통하여 사랑과 노동, 그리고 신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 건강해서 땀 흘려 일할 수 있고 보람을 느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그래 이 그림 속 부부는 밭일을 하다말고 멈춰 서서 들려오는 종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두 손 모아 경건한 마음으로 감사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미국의 어느 미술 평론가는‘만종’을 ‘사랑과 노동, 그리고 신앙을 그린 인생 성화(聖畫)’라고 까지 극찬했을까.
감사함이란 고마움을 나타내는 말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부모의 가없는 사랑도 자식으로서 보답해야 한다. 타인이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역경과 좌절에 주저앉았을 때 누군가 건네 온 관심과 말 한마디는 일확천금을 안겨주는 일만큼 고마운 일이다. 타인이 보내온 사소한 친절과 배려에도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은 마음 자락이 넉넉한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신뢰를 가질 줄 알고 진심을 바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인도 시인 타고르의 말처럼, “감사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임을 깨달으련다. 그리곤 밝아오는 새해 2025년도엔 “미세먼지 없고 화창한 날씨만으로도 행복한 하루였노라.”라고 평소 소소한 일에도 감사하는 겸손한 마음을 지니며 살아야 할까 보다.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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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동트는아침 님 !
행복하고 포근한
연말 보내시길 소망합니다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되시길...
반갑습니다
목자 님 !
고운 소감주셔서
감사합니다 ~
다가오는 2025년 새해는
하시는 모든 일에 행운과
평안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