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원 요셉 신부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사도행전 28,16-20.30-31 요한 21,20-25
“너는 나를 따라라”
요즘 저 개인으로서는 늘 둘째, 넷째 주말이 되면 은근히 걱정을 합니다.
왜냐면 초중고 학생들이 2, 4주 토요일은 수업이 없어 학교를 가지 않으니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간다고 주일을 지키지 않는 친구들이 점점 늘어만 가기 때문입니다.
‘가족과 함께 여행하는 시간도 좋겠지만 그래도 주일을 지키면서
가족과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면서 혼자서 걱정을 한답니다.
5월 여러 가지 의미 있는 날들을 보내며 서로에게 기쁨과 감사, 그리고 사랑을 나눴던 이 시간도
벌써 다 지나가고 토요일 주말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새로운 생명과 세상으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시며,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한 새로운 모습으로 영원한 참 기쁨과 행복을 느꼈던 부활의 시기도
이제 곧 다가 올 성령강림 대축일 맞이하며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의 시기는 이제 곧 마치게 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삶안에서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과 함께 살아갈 때 우리에게도 주어질 마지막 그날 안에서
영원한 기쁨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베드로에게 들려 주신 말씀처럼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너는 나를 따라라”하시며, 부활을 체험한 제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살아온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알려진 모든 사건의 증인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세상과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삶 전부를
자신들이 직접 보고, 듣고, 겪었던 삶과 그들의 기록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할 사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그러한 제자들처럼 지금 우리에게 전해진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나 자신뿐 아니라 앞으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순간까지
또한 우리에게도 주어진 사명이기도 합니다.
각각 다른 모습과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삶안에서
예수님과 하느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주님을 따를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랑을 받는 것으로만 만족해서는 안 될것이며,
그 사랑을 고백하고, 전하며, 나누는 삶을 통해 예수님을 따라 살아갈 때
하느님의 사랑이 더욱 완성되어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산교구 신동원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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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사도행전 28,16-20.30-31 요한 21,20-25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오늘 우리는 내일 성령강림대축일을 앞두고 부활시기를 마무리 합니다. 그동안 부활시기 내내
요한복음 13장 후반부부터 시작되는 다락방 고별담화와 예수님의 기도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호숫가에서 나타나시어 아침을 차려
먹이시고, 베드로에게 세 번이 사랑을 확인하신 후에 사명을 맡기시고,
베드로의 장래를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곧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 21,18)라고 하시며, 그가 순교 당하여 죽게 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은 사도 요한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장래에 대한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장래에 대해서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할지라도 ,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요한 21,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오해를 불러일으켜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는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으로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사가는 초대교인들에게 그 진원지를 밝히면서 이러한 소문이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우쳐줍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참 아이러니하고 재미난 내용을 드러내줍니다.
곧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랑을 확인까지도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다른 제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베드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오랜 고향 친구입니다.
그러니 그의 장래가 궁금한 것은 당연할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아마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혹은 찬구를 경계하거나 비교하거나
경쟁하는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여기서 베드로는 요한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곧 “요한을 위해서 묻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요한을 무척 사랑했고, 또한 그들의 친밀한 관계는
사도행전 2-4장과 요한복음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면서,
본문에서 베드로는 전에 최후만찬에서 배신자에 대해 예수님께 직접 묻지 못하고 요한을 시켜서
물었기에, 이제 요한을 위해서 호의로 직접 묻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고 하십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일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베드로는 벌써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목숨을 내놓고까지 따르겠다고 하고서 이미 세 번이나 배신하고 도망가지 않았던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를 호숫가에서 제자로 부르실 때에도,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올라갈 때에도, 부활하시어 나타나셔서도, 오늘 <복음>에서도 여전히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죽을 것입니다. 곧 베드로는 증거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증언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는 활동의 사목직을
요한에게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관상의 역할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한 베드로에게는 교회를,
당신이 사랑하신 요한에게는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주님!
길을 가다가 멈추지 않게 하소서!
멈추다가 떠밀려가지 않게 하소서!
떠밀리다가 뒤로 휩쓸리지 않게 하소서!
휩쓸리다가 가야할 길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을 따라 가게 하소서!
눈길을 돌리느라 옆길로 새지 않게 하소서!
자신을 따르느라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고,
당신만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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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호 라우렌시오 신부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사도행전 28,16-20.30-31 요한 21,20-25
사탄이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최고의 무기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며, 그분과 함께 머무는 것이 구원받는 길임을 보여준 요한.
비록 덧붙여진 부분입니다만, 마지막 부분에서 보여주는 가르침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길을 가다가 예수님 곁에 있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를 봅니다.
그 스스로 주님께 수장이 될 수 있는 영광을 얻었음에도 그의 모습이 사뭇 궁금합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 21)
우리는 나의 삶을 살면서도 다른 이가 어떻게 될런지 궁금합니다.
지금의 삶에 감사하면서 내 삶을 충실히 살아가면 되는 것을 그래도 다른 이가 궁금합니다.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궁금한가 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죠?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 22)
당신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지, 다른 이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최고의 무기는 ‘비교’라고 합니다.
그렇게 비교하는 사이 주님을 따르는 순수성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 됩니다.
그가 팔자 걸음을 걷든, 뒤뚱거리며 걷든, 그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다면,
동료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나의 길을 충실히 걸으면 됩니다.
그가 어떻게 되는가가 아니라 내가 주님을 따르고 있다는 것,
나와함께 하는 이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의정부교구 조성호 라우렌시오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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