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명이 주는 두 가지 상징적 의미
이 영화의 제명(題名) 자체부터가 상징적이다. 관객들은 영화 제명의 뜻을 영어사전에 나오는 ‘stalker'의 의미, 즉 ’남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사람‘이나 혹은 ’슬그머니 접근하는 사람‘의 의미로 수용하거니 해석했다면 심한 당혹감에 빠질 수가 있다. 그들은 아마 이 영화를 아름답거나 고혹적인 여성의 뒤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사이코패스 정도로 생각하여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심리 스릴러쯤으로 생각했을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런 영화는 아닌 것 같아 무척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류의 심리 스릴러라면 어느 정도의 일관성 있는 스토리가 있어 관객들의 이야기 욕구에 대한 갈증을 풀어줄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제명인 ‘스토커’는 그런 뜻이 아니라 이 영화의 히로인인 18살 여고생 인디아의 패밀리 네임이기 때문이다. 즉 여주인공 이름인 ‘인디아 스토커’에서 패밀리 네임인 스토커를 따오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 스릴러이긴 하지만 일관된 스토리가 구체적으로 전면에 배치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스토리가 있긴 하지만 그것이 시적인 상징과 비약 속에 감춰져 있어 논리적인 연결이 어렵다는 뜻이다.
만약에 박찬욱이 이런 소재와 주제를 한국영화로 만들었다면 상업적인 흥행에 있어서 철저하게 외면당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의 내용들이 한국적 현실에서 괴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영화 속 인물들의 행동이 설득력이 없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제작 단계에서부터 제작자나 투자자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해 영화화하기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다양한 내용과 양식들이 허용되는 헐리웃이니까 이런 영화가 버젓하게 관객을 찾아가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영화제명인 ‘스토커’가 패밀리 네임이란 뜻이지만 ‘슬그머니 접근하는 사람’의 뜻으로도 충분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여주인공 인디아(미아 바시코브스카 분)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거나 슬그머니 접근하는 뜻으로서의 ‘스토커’는 누구일까. 여기에도 두 가지 상징적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 하나는 인디아의 아버지가 사고로 죽은 날 느닷없이 찾아온 삼촌 찰리(매튜 구드 분)를 나타내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열여덟 살 여고생 인디아의 혈관 속을 흐르는 스토커 일가의 잔인한 유전자일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어른이 되기 위해 성장통을 겪는 인디아의 심리적 망상일 수도 있다.
상징과 은유가 난무하는 교차편집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에서 ‘교차편집’을 의도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교차편집이란 별개의 두 장면을 교차로 편집하여 보여줌으로써 두 장면의 연결점을 연상하도록 하는 편집기법을 말한다. 이 영화에서의 교차편집을 몇 가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디아가 욕실에서 샤워를 하면서 수음하는 장면이 있다. 인디아는 샤워를 하면서 자신의 손으로 음부를 자극하여 성적 쾌감을 얻는다. 이 장면에 대한 교차편집은 별개의 장면이 사용되는데, 그것은 자신을 곤경에서 구해 준 같은 학교의 남자친구 윕이 찰리 삼촌에 의해 목이 꺾여 신음하다가 죽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인디아가 샤워를 하는 장면과 윕이 숲속에서 목이 꺾여 살해당하는 장면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물론 물리적인 연관성은 있을 수 있다. 윕이 인디아가 보는 앞에서 살해당하고, 그 후에 인디아는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기 때문에 표면적 사건의 연결성은 보인다. 그렇지만 두 장면 사이의 연결점은 언뜻 쉽게 연상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분히 인디아의 심리적 풍경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인디아의 통과의례에서 타나는 망상으로 인해 그녀는 윕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연상하며 성적 쾌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심리적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상징과 비유가 많다. 비유 중에서도 직유보다는 은유가 많이 쓰이고 있다. 인디아가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 거미 한 마리가 다리를 기어올라 치마 속으로 숨어드는 장면은 인디아에게 살인적 본능을 부추기는 찰리 삼촌의 접근이나 그녀에게 다가오는 가족의 잔인하고 끔찍한 유전자를 은유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인디아가 아버지의 서재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메트로늄 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리는 장면이 있다. 인디아는 그 소리에 쫓기듯 아버지의 서재로 숨어든다, 이 장면에서 들려오는 메트로늄 소리는 인디아가 서랍을 열어 찰리 삼촌과 아버지 리처드의 유년기의 끔찍한 악몽과 삼촌의 정신적 질환에 대한 비밀을 알아채는 데에 대한 심리적 초조와 압박에 대한 은유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인디아가 열여덟 살이 되는 생일 날 그녀의 아버지 리처드가 뜻밖의 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찰리 삼촌이 집으로 찾아온다. 찰리 삼촌은 위기를 당할 때마다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준다. 삼촌이 찾아오고 나서부터 인디아의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사라진다. 학교 친구 윕이 그녀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삼촌에게 살해당하고, 냉동고 속의 고기더미 속에서 삼촌에게 살해당한 고모 할머니의 시신을 발견하는 망상을 꾸기도 한다. 그리고 평소에 말이 없던 그녀는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게 된다. 마지막에는 찰리 삼촌이 어머니 에블린(니콜 키드만 분)을 살해하려는 대목에서 엽총으로 삼촌을 쏘아 죽이고 그녀는 집을 떠난다. 그녀는 과속을 단속하는 교통경찰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유유히 떠난다.
그렇다면 이 영화 속의 찰리 삼촌의 살인은 실제인가, 아니면 인디아의 성장통에서 빚어진 끔찍한 망상일까. 실제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실제가 아니라면 한 소녀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성장통으로서의 통과의례가 이처럼 잔인할 수 있을까 하고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모든 구속과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앞으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무거운 책임을 진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또한 이 영화 속의 모든 살인이 인디아의 망상이 아니라 실제라면 어떨까. 그것은 그녀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잔인하고 끔찍한 가족의 유전자는 그녀 자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디아에게는 불가항력적인 숙명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불가해한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
박찬욱 감독의〈스토커〉는 한 소녀의 고통과 공포에 찬 끔찍하고 잔인한 성장통을 애기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불가해한 인간존재에 대한 성찰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에 나타난 감독의 세계관은 다분히 비관적이다.
그러면서도 소녀의 시기를 지나 어른이 된다는 통과의례에서 그들은 내면적으로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 성장통을 겪고 있는지, 이 영화는 그들의 그러한 전쟁에 가까운 심리적 요동과 황량한 내면적 폐허를 상징과 은유로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에서의 상징과 은유는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만약 이 영화에서 시적인 상징과 은유를 제거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통속적인 엽기 영화에 불과할 뿐이다. 인디아의 어머니 에블린은 인디아에게 “넌 도대체 어떤 아이냐?”하고 공포에 가까운 질문을 던진다. 즉, 자신이 낳은 딸이지만 인디아가 어떤 존재인지를 걷잡을 수 없다는 말이다.
박찬욱의 헐리웃 진출작인〈스토커〉는 일단 성공적이다. 김지운의 헐리웃 진출작인 〈하스트 스탠딩〉이 대중적 스토리텔링에 적중하고 있다면, 박찬욱의 이 영화는 불가해한 인간존재에 대한 작가주의적 시각에서 일단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징과 비유라는 시적인 영상과 교차편집의 예술적 의도가 너무 과도하여, 대중적 재미성을 추구하는 일반 관객들에게 오히려 박찬욱에 대한 거부감을 심어 주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상업적 흥행이 난무하는 헐리웃에서 자신의 영화적 세계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감독의 고고한 예술적 자존심에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첫댓글 인간을 끊임 없이 따라 다니는 스토커는
대체 누구일까요?
게임이나 마약과 술. 그리고 담배.
이것 또한 스토커가 아닌지.
이 글을 읽으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김문홍 선생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박찬욱의 그런 점이 한국보다 미국 대중에게 더 어렵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다시 <스토커>를 생각합니다.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