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일다 / 김명리
삼만 년 전부터 분홍
분홍 터번을 두르고
무화과를 팔고 있던 당신을 기억해
당신이 떠오르면 내가 잠기던 욕조
무화과 속에 들어 있던
은두(隱頭) 꽃차례로 피었다 지는
아주 작은 욕조를 기억해
입술에 뺨에 무화과 즙 바르고
사랑을 나누고
사랑을 뿌리치던 옛날 옛적
끝없이 발가락을 간질이던
형형색색의 물고기 떼
급전직하로 해풍에 휩쓸리던
물소리, 그 물소리를 기억해
꽃넝쿨 사이로
잔잔히 분홍 일던 슬픔
톱니자국 가득한 흘러간 시간들의 육체
제비꽃 꽃잎 속 / 김명리
퇴락한 절집의 돌계단에 오래 웅크리고
돌의 틈서리를 비집고 올라온
보랏빛 제비꽃 꽃잎 속을 헤아려본다
어떤 슬픔도 삶의 산막 같은 몸뚱어리를
쉽사리 부서뜨리지는 못했으니
제비꽃 꽃잎 속처럼 나 벌거벗은 채
천둥치는 빗속을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내 몸을 휩싸는 폭죽 같은 봄의 무게여
내가 부둥켜안고 뒹구는 이것들이
혹여라도 구름 그림자라고는 말하지 말아라
네가 울 때, 너는 네 안의 수분을 다하여 울었으니
숨 타는 꽃잎 속 흐드러진 암향이여
우리 이대로 반공중에 더 납작 엎드리자
휘몰아치는 봄의 무게에
대적광전 기우뚱한 추녀 또한 뱃고동 소리로 운다
화석 - 시간의 미라들 / 김명리
원시 포유류가 삼킨 아기공룡뼈 화석이 공개되었다 마치
곤히 잠든 시간의 미라를 보는 듯하다 어느 새 일억 삼천만 년이
흘렀다고 한다
일억 삼천만 년의 고요가 한 가닥 미풍처럼 시간의 홈통 속으로
흘러드는 동안 봄 하늘 매지구름 속의 올벚나무 가지에는
일억 삼천만 마리 새소리의 화석
피할 수 없는 세찬 물보라로 내 마음 지상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동안 유천(幽天)의 싸늘한 먼지티끌 속으로 빗장뼈 흩날리며
날아오르는 일억 삼천만 마리 새 핏자국 화석
천하의 가을이 꽃빛 지운 내 나뭇가지 위에서 덜컹거린다
내 괴로움 한때 내 몸에서 흘러나온 은하였으니, 봐라, 붉디붉은
해의 화석이 만추의 푸른 밤하늘에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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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리 시인
1959년 대구 출생
1984년 《현대문학》등단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시집
『물 속의 아틀라스』
『물보다 낮은 집』
『적멸의 즐거움』
『불멸의 생이 여기 있다』
『제비꽃 꽃잎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