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뻐꾸기 시계
- 기후 스님, 호주 시드니
한 때 뻐꾸기 시계가 유행이 된 때가 있었다. 시간마다 사르르 문을 열고 나와서
그 숫자만큼의 “뻐꾹” 소리를 내고는 다시 몸을 감추고 문을 닫는 그 모습이 참으로
귀엽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따뜻한 봄이 올 때 쯤 저 먼 산넘어 어디선가 아련하게 들려왔던 그 뻐꾹새 소리를
집안에서 듣게 되니 신기하였고 새파란 옷을 입은 예쁜 모습을 직접 보면서 자동으로
드나들게 만든 그 기술에 더욱 더 재미있어 하였다.
특히 시골에서 바깥일을 많이 하거나 눈이 침침하고 귀가 좀 어두운 분들이 그 시계를
많이 사랑하였다. 마당이나 집 주변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그 뻐꾹새 소리가 들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숫자를 센다. 모듬 일을 하러간 사람들에게 참이나 점심을 준비할
시간 확인이다. 때문에 그 시계는 안방보다도 부엌 입구나 마루 근처에 거는 이들이
많았고 더러는 대문 입구 마당 벽 쪽에 걸어둔 집들도 더러 있었다.
며칠 전 잔디 밭에서 풀을 뽑고 있는데 청년회 카페쪽에서 그 뻐꾹새 소리가 들렸다.
몇 달 전에 한국에 아주 들어가게 되었다며 어떤 이가 갖다 둔 것을 카페 벽에다 걸어둔
그 시계다. 오가며 그 소리를 자주 들으며 그냥 지나친 적이 여러번 있었는데 그날
따라 뻐꾹새 소리에 문득 고향 생각이 함께 스며들어 왔다.
작은 잡초까지 머리 속의 이를 잡듯 촘촘히 살피다 보니 일념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나는 틈만 나면 호미를 들고 잔디 밭을 헤맨다. 하나됨의 세계는 60여 년이
훨씬 넘는 시간의 간극과 한국과 호주라는 공간적 거리를 하나의 끈으로 엮어내는
마력적 싱그러운 생명력인 것이다.
고향은 우리들의 삶에서 그 어떤 정감으로 다가오고 있는가? 우선은 편안한 느낌을
준다. 특히 시골일수록 그 강도가 더 심하고 어릴 때일수록 그 감흥이 더욱 크게 살아
있다. 순수했던 감성이 자연과 함께 하며 아기자기했던 주변의 모습과 친숙했기
때문이리라.
내 어릴 적 고향은 와룡산 아래 산골로 동네 이름이 산골이 될 정도의 진짜 산골이었다.
70여 집이 한 골짝에 소복하게 모여 살았던 초가집 동네. 석양에 소를 몰고 뒷 동산에
올라가서 내려다 본 고향 정경은 그야말로 아름답게 보였던 한 폭의 동양화 같았다.
해 그름이 되면 이 집 저 집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기 시작한다.
그 때쯤 꼬마들이 함께 모여 노는 소리가 연기따라 산으로 올라온다.
산은 조금 높기 때문에 여러 소리를 한꺼번에 잘 들을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된다.
송아지가 엄마 찾는 울음 소리, 엿장수 가위소리에 놀라서 울부짖는 누렁이의 날뜀,
그 중에도 장 닭이 길게 운율을 넣어 노래 부르는 그 소리는 지금도 내 귓 전에
생생하게 맴돈다. 보고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자연뿐이었기에 그 때의 모습과
느낌들이 오롯하고 선명하게 지금까지도 행복감으로 각인되어 있는 듯 하다.
뻐꾹새 소리가 따뜻하고 포근한 정감으로 길게 남아있는 것도 또한 그 때의 그러한
정서 때문이리라. 당시는 벌거숭이 산이여서 인지 뻐꾹새 소리는 언제나 멀리서
들려왔다. 그것도 모진 추위가 지나가고 진달래나 할미꽃이 필 때쯤 말이다.
기다림은 언제나 마음을 설레이게 한다. 그 가운데서도 봄을 기다리는 동심은
풍선처럼 들떴다. 겨우내 방안에서만 놀아야 하는 따분함에서 벗어나 뒷동산에
올라갈 수 있는 희망이 기다린다. 그곳엔 갖가지의 꽃들을 만날 수가 있고
고란이나 토끼 등 산짐승을 볼 수도 있다. 그런 마음에 군불을 지피는 선두주자가
바로 그 뻐꾹새 소리가 되다보니 그렇듯 반갑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또한 한국의 새들은 그 음정이 대부분 감미롭다. 아련한 달밤에 들려오는 소쩍새는
불륜으로 인해 궁중에서 쫒겨난 공주의 그리움의 설화가 숨겨져 있고 초여름에
숲 속에서 떼지어 노래하는 꾀꼬리들의 합창은 그 노란 모습의 몸 값을 올리려는
숨김의 도도함이 감춰져 있다.
찬바람이 일게 되면 따뜻한 곳으로 이주하며 인사를 나누는 기러기들의 달 빛
여행시의 노래도 엿들을 수 있으니 조국의 새들의 노래소리는 뻐꾸기와 함께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한 정감으로 무지개 색상으로 남아 있다.
힘들고 괴러웠던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그 추운 겨울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갈 때의
일이나 얼음을 지치다 발이 빠져서 동상에 걸렸을 때의 그 고통도 지금은 아름다웠던
추억의 한 편린으로 남아 있는 걸 보면 우리의 마음이야 말로 참으로 간사스러운 것 같다.
수 년 전 시내로 가는 기차속에서 뒷 좌석에 앉은 두 사람의 한국 여성이 자기는
강원도 골짜기에 살았던 옛 고향 이야기할 때가 제일 행복감을 느낀다고 말하는
소리를 엿들으면서 마음 속으로 공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특히 남의 나라에 와서
살다보니 그 농도가 더 한지도 모르겠다. 뻐꾸기 시계 소리에 그 옛날 코흘리개
때의 고향의 동심이 살아나고 귀 밑에 해묵은 서리가 점점 더 그 부위를 확장시켜
가는 요즘에 언뜻 언뜻 어머니의 떡을 싸온 치마 자락이 엿보이는 것을 보면
나도 이제 철이 좀 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 노래 부르지만 어릴 적 옛 고향만큼은 못 되는 것 같고
손에 손에 핸드폰을 들고 화상 통화를 하면서 참으로 살기 좋은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오가다 만난 나그네에게 등 넘어 사는 사돈댁 안부를 전해 달라는 그을린
얼굴 모습에서 더 풋풋한 인생의 정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일까? *
출처: 뉴질랜드에세이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