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야고보 5,1-6 마르코 10,1-12
오늘 복음은 이혼을 금하는 우리 교회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주요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혼인이 가지는 참된 의미와 신비를 묵상하게 하는
예수님의 소중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완고함’ 때문에 모세가 이혼을 용인해 준 것이지,
본디 하느님 뜻은 그렇지 않다고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창세기의 말씀(1,27; 2,24)을 직접 인용하시면서 태초부터
계획된 혼인의 신비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이처럼 남녀가 혼인을 통하여 이루는 결합은 하느님께서 창조 때 남자와 여자의 인간성 안에
부여해 놓으신 심오한 계획이 비로소 온전히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삼위이신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시듯,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
또한 서로의 사랑을 통하여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게다가 부부의 사랑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가 나누는 사랑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교회를 위하여 온전히 자기 자신을 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부부가 서로에게 내주어야 하는 사랑의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부부 생활이 서로에게 상처받거나 이해받지 못할 때도 많고, 실망도 많이 하기에
순탄한 여정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듯합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주는 사랑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렇지만 부부가 함께 걸어가는 여정에 늘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이기적인 ‘나’를 지우고 ‘우리’로 하나가 되어 가는 시간 속에,
부부의 사랑은 더욱 단단해지고 그 사랑은 서로를
신앙인으로 더욱 성장하게 하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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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야고보 5,1-6 마르코 10,1-12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영화 ‘남한산성’을 보았습니다.
김윤석은 명분을 중하게 여기는 예조판서 김상헌으로 나왔고,
이병헌은 실리를 중하게 여기는 이조판서 최명길로 나왔습니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명분을 위해서 얼음길로 한강을 건너게 해 준 노인 어부를 죽입니다.
그 노인이 청나라 군사를 안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얼음길로 임금이 있는 남한산성을 안내했지만 노인 때문에 임금이 위험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충직하고 능력이 있는 예조판서에게 삶의 기준은 명분이었습니다.
이조판서 최명길은 실리를 위해서는 체면도, 품위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성과 국가를 위해서라면 왕도 기꺼이 청나라 왕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충직하고 능력이 있는 이조판서에게 삶의 기준은 실리였습니다.
살고 싶다는 왕 인조는 명분보다는 실리를 택하였고, 청나라 왕에게 황제의 예를 다하였고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명분에 집착한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을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면서 안식일의 의미와 정신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본인들은 행동하지 않으면서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명분에 집착한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에게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명분 때문에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한 레위와 사제는 참된 이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이를 따뜻하게 돌봐준 사마리아 사람이 참된 이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리를 챙기려했던 요한과 야고보에게
‘영광의 자리는 하느님께서 마련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10제자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모두들 실리를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기 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 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는 실리를 챙기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희생, 헌신, 사랑만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명분과 실리를 이야기합니다.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이혼을 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이웃의 비판과 평가를 걱정하는 명분 때문에 이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함께 했던 배우자를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적당한 명분과 실리와 타협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이 가져야 할 삶의 기준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에게 삶의 기준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결혼하는 것도, 수도자와 성직자로 사는 것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면 좋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끝까지 캐묻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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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우 사도요한 신부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야고보 5,1-6 마르코 10,1-12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마르코 10,2). 이는 매우 도발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혼하려고 혼인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혼인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노력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혼인과 가정 생활을 잘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남편과 아내가, 그리고 자녀들과 함께 가정 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물었어야 정상이었습니다.
질문의 의도가 당신을 시험에 빠뜨리려던 것임을 간파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되물으셨습니다: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마르코 10,3).
혼인에 대한 모세의 율법은 일부일처제를 준수하는 현대 사회의 혼인 질서와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천여 년 전의 규정임을 감안하면 대단히 선진적인
윤리 규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을 때 불가피하게 이혼을 허락하지만, 재혼을 할 수 있도록
이혼장을 써 주고서야 가능하다고 단서를 붙인 것뿐이었습니다(신명기 24,1).
그런데 되물음을 받은 바리사이들은 이 단서 조항을 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은 허락하였습니다”(마르코 10,4).
예나 지금이나 부부간에 일생동안 상호정결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지는
두 말할 필요가 없지만, 설사 불륜이 저질러지는 경우에 이는 남녀 공히 관여되어 있는 범죄인데도
아내의 불륜만 문제를 삼는 것만 보아도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가 얼마나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인 관행이 굳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사이들은 모세도 허용한 이혼을 예수님께서 반대하실 경우, 모세의 권위에
대항했다는 빌미를 잡으려고 함정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네들이 들먹인 모세 법보다도 더 근원적인 근거로서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응수하셨습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고, 남자가 여자와 결합하여
한 몸이 된 후에는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창세기 1,27 / 마르코 10,9).
함정 질문에 방어적으로 응수하시느라고 가장 근본적인 진리만 꺼내 놓으신 이러한
예수님의 뜻과 가르침을 본격적으로 펼치자면 이러합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혼인과 가정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 할 만큼 중요한 인간의 일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일이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하느님의 일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는 세상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혼인과 가정에 있어서도
하느님의 주도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는 이를 근거로 혼인 성사를 거행하고 있는데, 이를 위한 조건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혼인은 남녀의 자유의사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렇게 하여 이루어진 가정은
일부일처제여야 하고, 이 가정의 존엄성은 존중받아야 합니다(혼인의 단일성, 가정의 존엄성).
둘째로, 자유의사로 이루어진 남녀의 사랑과 혼인 속에 이미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므로
한 편의 배우자가 죽기 전에는 갈라설 수도, 갈라놓아서도 안 됩니다(혼인의 불가해소성).
셋째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날 자녀는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축복이므로 자녀에게 하느님을
알려주어야 합니다(신앙 교육 의무). 이는 부부와 자녀들의 행복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기본적인 희망사항이고, 궁극적인 목표는 보람있는 인생을 가족들에게
제공해 주는 가정이 되는 데 있습니다. 가정은 가족들만의 삶으로 영위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교회의 보호와 존중을 받고 있고 또 그래서 세상과 교회를 위해서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정의 보람을 위한 충분조건은 가족들이 거룩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가정이
성화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가정을 교회로 건설해야 합니다.
이는 신앙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은총입니다.
가부장(家父長)인 남편뿐만 아니라 가모장(家母長)인 아내도 가정 교회의 사제입니다.
사제직의 기본은 하느님께 봉헌하는 제사를 지내는 것인데, 가정 교회에서 부부는
자신들과 자녀들의 가정생활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청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혼인 성사에서 약속한 부부간 상호정결 서원을 일생동안 충실하게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서로의 구원을 위해서 성실하게 사랑하고 돌보아주어야 합니다.
또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여 감사드려야 할 의무가 있는데,
이 모든 뜻을 모아서 부부와 자녀들이 함께 기도바치는 가정 기도가 가정 교회의 제사입니다.
요컨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의 축복으로 주신 성은 추악하게 죄로 타락시킬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하며, 하느님께서 주신 천부적인 권리인 가정의 행복은
누구나 누릴 수 있도록 세 가지 필요조건을 채워야 하고, 세상을 당신의 나라로 만들어가기를
기대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가정의 행복에 만족하지 말고
가정 성화의 소명을 다해서 가정의 보람도 성취하기를 바라십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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