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
산길 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
송춘희의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가사 처럼
그 옛날 인적이 없었던 산길 백리 수덕사에
사연을 두고 있었던 사람들도 수 없이 많았겠지만
나는 수덕사에 올 때마다 언제나 두 여인이 떠오르게 된다
한 분은 <청춘을 불사르고 >의 저자 김일엽 스님이고
또 한 분은 수덕여관에 머무르던 신여성 여류화가 나혜석이다
<일엽스님.1962년도에 발간된 "청춘을 불사르고" 의 머리단 표지>
이 사진은 내가 소장하고 있는 일엽스님의 45년전 원본 책자를 폰카로 직접 찍은 것이다
왼쪽사진은 출가했을 당시이고 오른쪽 사진은 출가전 모습이다
< 이 사진은 얼마전 선물로 받은 一葉禪文 이란 책자에 있는 사진을 폰카로 직접 찍은 것이다. 2001년 수덕사 발행 >
일엽스님은 1896년생으로 본명은<金元周>
평남 용강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던 일엽은
조실부모한 후 23세에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3.1 운동후 일본에 건너가 동경영화 학교에 다니다
이내 귀국하여 잡지 <新女子>를 창간하고
시인으로서 신문화운동,신여성운동에 적극 참여 하였다 한다
신여성 일엽은 당시 사회적 국민윤리에 도발을 하는 대담한 글과 처신으로
세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숱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한다
그 당시 일엽은 구 시대의 낡아빠진 세습 속에서
억압받고 주눅들었던 여성들을 대변하여
투철한 자기 정신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냈던 분이다
그런 치열한 정신으로 구 시대의 낡은 세습의 벽을 허물고자
안간힘을 다 하였으나 여자라는 인간적인 한계와
그 당시의 완고했던 현실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고뇌 할 수밖에 었었다
활화산처럼 활활 뜨겁게 타오르던 정열이 다 소진되어 허탈해 하고 있을때
수덕사의 만공선사라고 하는 선지식을 만나게 되었고 만공선사로부터
영원히 꺼지지 않고 사는 큰 가르침을 얻게되어 불가에 입문하게 되었다 한다
여기서 한창 젊은 정열이 넘쳐흐를 때 일엽이 쓴
"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 " 라는 글을 하나 옮겨 보기로 한다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살아서 이 몸도 죽어서 이 혼까지도
그만 다 바치고 싶어질까요
보고 듣고 생각는 온갖 좋은 건
모두 다 드려야만 하게 되옵니까 ?
혼마져 합쳐진 한 몸이건만
그래도, 그래도,
그지없이 아쉬움
그져 남아요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
1928 년 4월 壽松洞 旅舍에서
<1962년 文宣閣에서 발행한 일엽 인생회고록 "청춘을 불사르고" 에서 발췌>
1928년 이라면 그 당시 일엽의 나이 33세 되던 해이다
그러니까 33세에 출가를 했다면 이 글을 쓴 그해에 곧바로 덕숭산 수덕사로 입산했다는 이야기다
<김일엽의 "청춘을 불 사르고" 란 책. 1962년에 초판을 발행했다 >
이 책은 원래 내가 소장하고 있던 책이 아니라 어느 이삿집 일을 도와주고 얻어온 책이다
오래된 고서 한 20여권을 얻어 왔는데 그 중 김일엽의 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문선각에서 발행을 했고 이중 케이스로 되어 있으니까
그때 당시 저 책값이 200원이지만 지금으로 치면 만원도 훨씬 넘는 가격일것이다
그러니까 45년 동안 물가가 50십배도 훨씬 더 올랐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까 이 책은 김일엽의 대표적 저서이자 그 당시 베스트 셀러였던 초판 발행본 원 본이다
청춘을 불사르지 못하면 생사을 초월한 영원한 청춘을 얻을 길이 없다는 일엽 스님의 말씀은
요즘에도 구도의 길을 가고자 하는 비구니 스님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고서에서 발췌한 김일엽의 시 한편 또 올려본다
으서져라 껴안기던 그대의 몸
숨가쁘게 느껴지던 그대의 입술
이 영역은 이 좁은 내 가슴이
아니었나요 ?
그런데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 고운 모습들을 싸안은 세월이
뒷담을 넘는 것을 창공은 보았다잖아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던 불같은 정열을 토해내고 난 뒤에 찾아오는 허망함을
이렇게 노래한 33세<혹은38세 였다고 하기도함>의 일엽은 수덕사 만공스님을 만나
발심하여 見成巖<견성암>에서 머리를 깍았다 한다
지금 수덕사 대웅전 아래쪽에는 歡喜臺<환희대>라는 작은 절집이 있는데
여기가 곧 그 옛날의 견성암이라 한다
그때 일엽이 33세라면 만공의 세수는 58세라는 이야기가 되고
38세 였다면 만공의 세수는 63세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시대 배경은 한창 일본제국주의가 진행되던 1928년쯤 되는 일이고
그때 덕숭산 수덕사로 가는 길은 유행가 가사 말대로 산길로 백리를 걸어야 했을 것이다
<수덕사 견성암>
수차례 오가긴 했으나 마침 찍어놓은 사진이 없어 수덕사 싸이트에서 잠시 빌려온 사진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부속 암자이다
수덕사의 동안거와 하안거를 치르는 정혜사로 가는 길목에 있다
견성암은 1900년대초 만공스님 당시 수덕사 위쪽에 있는 정혜사 오른편 위의
작은 산채에서 시작했다 하는데 그 당시에는 조촐한 규모의 초가집이었다 한다
그 이후로 비구니 선방이 들어서면서 비구니들의 수행처로 이름났다 하고
일엽 스님도 이 곳에서 수도를 했던 장소라 한다
이 곳 견성암<요즘의 歡喜臺>은 한국 최초의 비구니 선방이었다 한다
그러니까 수덕사 산내의 견성암은 창건될 당시에는 초가집에서부터 시작해
함석집, 그리고 기와집으로 증. 개축을 거듭해 오다
1960대에 이르러 오늘날의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석조건물로 자리를 잡았다 한다
그러니까 1900년대초 만공스님 당시 창건한 이래 거의 60년만의 일이다
현재 견성암 입구에 걸려 있는 글씨도 만공스님의 친필이라 한다
견성암이 비구니 수행처로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던 기틀은
법회, 일엽스님등이 상좌들에게 법게를 내려 암자가 발전할수 있었고
또 비구와 비구니 출가자와 재가자를 차별하지 않는
만공스님의 가풍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만공은 젊은 여자의 벗은 허벅지를 베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하여서
<七仙女臥仙>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일화가 있는데
어찌 비구니 선방을 창건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만공스님은 흔연히 법도를 넘어섰다는 호기 때문에 존경 받았다한다
그의 일화 가운데 여색과 관계되는 일화를 이야기 하자면 지금 상황처럼
오해가 생기지 않을까 저으기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견성암을 누가 언제 무엇때문에 歡喜臺<환회대>로 바꾸었는지
거기에 얽힌 내력을 알 수는 없으나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연애끝에
훗날 자신이 쓴 인생 회고록처럼 청춘을 불사르다 간 곳이였으니
견성암에서 환희대로 바뀌어진 이름이 엉뚱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 제2부에서 계속 -
첫댓글 나는 벗은 허벅지를 베먼 잠이 안 오던디... 역시 도사님들은 다른갑그마~! 세파가 맹글아 낸 여걸 이약을 잘 챙기 오싯네 이~! ^^
지는 여정네 발목쟁이라도 함 베고 자 봤으면...^_^
잘 읽고 옮겨 갑니다!
모르고 있었는데...덕분에 알게 되었으며 잘 읽었습니다.
견성암에서 시주를 하러 갔다가 하루를 잠자고 일엽스님 맏상좌 이신 수좌스님에게서 옥향로를 받아온십년 전일은 생생하고, 그 옥향로에 여직도 향을 오롯이 피우건만, 그 시절 인연들은 사라져 갔습니다 시절인연에 합장하며 좋은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