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코털의 반란
이 친구의 또 하나 이해 못 할 점은, 턱밑에 난 털이다. 가꾸는 털이라면 봐줄 수도 있다. 얼굴은 해말끔하게 해 놓고, 송송 나 있는 턱 밑 털은 건드리지 않는다. 괴짜가 아닌데도 괴짜같이 취급된다. 유독 그 털에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요즘 털들은 개성이 독특하고, 지성적이라서 소홀히 다룰 수가 없다. 불평등한 처우에 불만을 터뜨린다. “자는 왜 안 깎고 우리만 깎느냐, 우리가 다리 밑에 주워 온 자식이나!” 대충 뭐 그런 민원을 낸다. 맞는 말씀이다. 깎으면 다 깎아야지, 한쪽 편만 봐주면 불평등하다. 질서 확립 차원에서 문제가 생긴다.
궁금해서 생각해 봤다. 왜, 코털을 무성하게 키우고, 턱밑 수염은 그냥 둘까? 차별이다. 차별은 반란의 씨앗이 된다. 그래서 깎으려면, 양털 깎는 것처럼 홀딱 깎아야 한다. 민망해서 말을 해 줄 수 없다. 이쁜 숙녀 이빨에 빨간 고춧가루가 끼여 있다, 당신은 어쩔 것인가! 상황이 비슷하다. 그럴만한 사유가 있어 그럴까, 혹시나 턱 밑 상처가 있어 가리려고 한 것일까? 그럴 상처는 없었다. 그럼, 뭐 때문에 그럴까. 내 경우는 턱밑은 수월하다. 오히려 코밑 털이 조심스럽다. 코 쪽 피부가 좀 민감해서, 조금 세게 밀면 헐어버린다. 겪어보면 알겠지만, 흉한 상처가 오래간다. 그래서 일본 남자들은 코밑수염을 기르는 건지 모르겠다. 코밑수염 하면 또 있다. 전쟁광이자 수많은 유대인을 참혹하게 학살한 히틀러의 콧수염이다. 일인과 그를 생각하면 기르고 싶지 않다.
턱 아래 털을 그냥 둔 것은, 칼 면도기가 귀찮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땐 전기면도기다. 이리저리 문지르면 해결된다. 하지만, 뒷맛은 개운치 않다. 칼 면도기의 상쾌한 맛을 느낄 수 없다. 칼맛을 한번 들이면 좀체 그만둘 수 없다. 그만큼 매끈하게 절삭 된다. 전기면도기하고 비교가 되는 건 사실이다. 요즘 나온 칼 면도기에는 전기 장치가 되어 있어, 누르기만 하면 달달 떨면서 부드럽게 잘라 준다. 면도기도 점점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뭐든 따지고 보면 상대적이다. 코털이든, 턱털이든 자기 맘대로 하지 않는다. 코를 막든, 염소수염을 기르든, 늘 상대를 의식한다. 관습의 굴레에서 표나지 않게 사는 게 익숙해 졌다. 그래서 무개성이 됐고, 획일적이 됐다. 그래야 뒷말이 없다. 아마도, 그 친구는 판에 박힌 삶을 거부한 건지도 모른다. “나는 누가 뭐래도 내 쪼 대로 살고 싶다. 간섭은 싫다!” 분명 튀는 용모였다. 나는 나대로 살고 싶다는 욕구의 발로 같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해보지 못하면 후회할 것이다. 그런 마음에서 나온 용기라면 난 그의 용모를 존중한다. 2026.8.21.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