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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보다 크신 자비
요나 3:10-4:11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창조절 제4주일이다. 요즘 지역마다 축제가 열린다. 어제 오후 군포 모아락 마을축제에 초대받아 다녀왔다. 육개장 먹으러 오라고 여럿을 불렀다는데, 어쩌다가 초대에 응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군포와 안양의 경계인 안양천 변에 있는 한무리교회와 인근 네 개 지역아동센터 그리고 가난한 아이들에게 도시락 나누는 일을 하는 헝겊원숭이운동이 함께하는 자리였다. 구군포교 다리 아래에서 열렸다.
이른 저녁으로 먹은 육개장이 맛있었다. 나더러 회장으로서 축사를 부탁하기에 억지로 마다하였다. 날이 일찍 저물어 마지막 순서인 관악단 아이들이 악보가 보이지 않을까 호들갑을 떨었다. 만약 축사 몇 마디했다가 아이들의 원망을 살 뻔하였다.
점점 어두워지자 앞선 순서인 어른들이 레퍼토리를 자발적으로 줄여주었다. 세 곡 부를 것을 두 곡만 부르고, 서둘러 무대를 비켜 주었다. 아이들은 희미하게 보이는 악보를 보고 겨우 연주를 마쳤다. 첫 곡은 아프리칸 노엘이었다. 노래말처럼 예수님이 함께 하실 변두리 동네의 마을잔치였다.
아직 이런 공동체가 존재하는구나 싶었다. 주님의 평화가 은혜가 우리가 맞을 추석 명절잔치에도 함께 하시길 빈다.
1)
선지자 요나 이야기가 흥미롭다. 그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 잔치가 불만스럽다. 지극히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요나를 보면 선지자가 이렇게 막가도 되는가 싶다. 요나 같이 부적격자로 보이는 인물에게 사역을 맡기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다.
요나 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불순종과 불평보다 앞서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주제로 한다. 삐딱한 요나의 행실을 통해서도 오롯이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다.
하나님은 제멋대로 구는 요나일 망정 선지라고 부르시고, 지극히 선히 대하신다. 하나님은 요나같은 인간을 통해 교훈을 주신다. 실은 하나님은 요나보다 못한 ‘요 나’(나 자신)를 그렇게 대하신다.
본디 선지자 요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이방 민족 니느웨 성 백성을 향해 회개하라는 선포였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를 향해 회개하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뜻이 못마땅하였다. 니느웨는 멸망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달아났다.
사실 요나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2).
그럼에도 요나의 비뚤어진 선민의식으로 볼 때,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이 니느웨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니느웨 성 백성이 회개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신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요나는 니느웨 성이 어찌 되는가 살펴보려고 성읍 동쪽에 앉아 자기를 위해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았다. 몹시 뜨겁고 더운 날이었다.
하나님은 요나가 강렬한 햇볕에 지치지 않도록 박 넝쿨로 가려 주셨다. 요나는 하루 종일 박넝쿨이 만든 그늘 덕분에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박 넝쿨이 시들자 요나는 그늘이 없어 뜨거운 동풍에 정신이 혼미할 정도다. 오죽하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8)라고 불평한다. 얼마나 흥분했던지 박 넝쿨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다고 고집을 부린다.
세상에! 이렇게 속 좁고, 성질이 급한 인간이 있을까 싶다. 그가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놀랍다.
박 넝쿨 하나에도 목숨을 운운하는 요나가 무려 12만 명의 인간이 살고 있는 니느웨 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진심을 이해할 리 없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11).
하나님은 속 좁고, 불평이 많고, 용렬한 요나와 달리 잃은 양 한 마리라도 찾기까지 찾으시는 분이다. 하물며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를 보시고 그들을 내치실 리 없다. 그들이 지닌 특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가 지극하신 덕분이다.
2)
‘요나’서의 주제는 세계 만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준다. 네 장에 불과한 짧은 예언서 요나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미 복음서의 주제이다. 요나는 사람들의 생명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잘 담겨있다.
본디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해야 하는 선지자인데,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자 그는 불순종하였다. 그래서 서쪽 바다 끝으로 도망쳤다.
결국 바다에 풍랑이 일어 배 안에 탄 사람들이 몰살할 위기에 처하였다. 마침내 뱃사람들은 제비뽑기를 통해 요나가 부정을 저질러 그들이 재앙을 당하게 되었다고 믿었다. 요나도 자신의 부정을 시인하였다.
‘이 폭풍과 재앙은 내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한 때문이다.’
그는 원인제공자로서 바다에 던져질 위기에 처한다. 그럼에도 선원들은 비록 요나의 혐의가 드러났지만, 그를 바다에 던지길 주저하며 배를 뭍에 대려고 애썼다. 행여 요나가 무죄할 경우, 자신들이 그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질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욘 1:14)
그들은 하나님께 뜻을 묻고, 여호와를 향해 부르짖었다. 자신들이 죽을 위험에 처했음에도, 뱃사람을 포함한 무리는 사람의 목숨에 대한 경외감을 지녔다. 요나의 생명 경시보다 백번 양반이다.
이런 꿈같은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인간의 불신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계획대로 행하신다는 것이다.
요나 이야기는 배경이 주전 5-4세기이다. 그 당시 유다 민족은 이방 민족들과 관계를 멀리하고, 배척하였다. 반면에 이방인들은 유대교 신앙에 귀의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이 늘었다.
이러한 역설적 상황에서 이스라엘뿐 아니라 만백성과 모든 사람을 구원에 초대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예언서 요나에 담겨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고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면 편견을 버려야 한다.
첫 번째 요구를 거절했던 요나에게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도망쳤던 요나에게 다시 순종할 기회가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애초에 불순종하다가 호되게 당한 요나는 이번에는 순순히 순종한다.
그러나 지극히 소극적이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4).
니느웨는 큰 성읍이다. 걸어서 사흘 길이 걸리는 만만찮은 규모였다. 그러나 선지자는 겨우 딱 하루 동안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며 다녔다. 사십일 후에 일어날 심판을 선고하였다.
선지자 요나는 니느웨의 거리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지만, 이 성읍이 회개할 것을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고, 그들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전혀 기대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뜻밖의 회개’가 일어난 것이다. 요나는 건성으로 경고했는데, 니느웨 사람들은 위로 왕으로부터 아래로 백성과 짐승에 이르기까지 회개하였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욘 3:5).
임금이 앞장섰고, 심지어 짐승들까지도 회개의 모양을 내게 하였다. 왕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다. 성경에서 재는 인생의 무상함을 상징한다. 죽음의 선고 앞에 선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 그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재를 뒤집어쓰는 회개이다.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욘 3:8).
니느웨 사람들은 즉각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또 악한 길에서 떠났다. 그들은 40일이란 심판의 유예기간을 회개의 적극적 기회로 삼았다. 하나님의 남겨두신 ‘희망의 여지’를 자신들이 살아날 기회로 깨달았던 것이다.
마침내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에 응답하셨다. 악한 길에서 돌이킨 니느웨 성읍 위에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다.
3)
요나는 하나님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니느웨가 멸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하나님은 왜 그들을 회개시켜 구원시키려고 하시는가?
요나는 니느웨 성이 회개한 것에 대해 분노한다. 불손한 선지자는 니느웨 성을 심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그랬다. 자기만 의롭다고 고집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죄인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무슨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그때 예수님은 증거, 곧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불순한 의도를 파악하시고, ‘요나의 표적’에 대해 말씀하신다(마 12:38-41).
사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요나보다 못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유다교의 지도자로 으스댔지만, 하나님의 계획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뭉갤 그런 위인들이다. 그들은 불순종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자기의 편견과 고집을 내세워 요나처럼 행동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해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내게 믿음이 있다면 영적인 눈이 열려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불신한다면 아무리 놀라운 기적을 보더라도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기적이나 표적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에 대한 겸손한 믿음이다.
예수님은 불순종하는 그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그들은 겉으로는 종교적으로 경건한 척 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척하지만,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사람들일 뿐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무심하시다. ‘자기 의’가 강한 사람들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각별한 관심을 느끼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편견이나 기준과 다르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을 누구나 품어 주신다. 죄인의 회개를 가장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자기 의’가 아닌 ‘자기 죄’를 고백하는 사람을 눈여겨 보신다. 무엇보다 사람이 잘못된 길에서 돌아올 때, 하나님은 가장 기뻐하신다.
내게 적용한다면 어떨까? 하나님은 왜 나를 부르시고, 선택하셔서,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을까? 요나만큼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제 멋대로인 ‘요 나’를 구원하시길 원하셨을까? 편견과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그들뿐 아니라 나 자신이기도 하다. 내가 주장해온 의는 얼마나 독선적인가?
요나가 하나님을 몰라서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모세 이래로 이스라엘 백성의 공통된 고백을 기억한다.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신 하나님’(2)이다. 하나님은 그런 자유의지로 죄인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
사실 분노는 남을 향해서만 있지 않다. 분노는 자기 자신을 향할 때가 더 많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만나는 과거, 현재, 미래가 가시나무처럼 까칠하다.
하나님은 니느웨 성을 구원하시듯, 요나에게 끝까지 인내하시듯, 죄인인 내게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기에 나는 기도할 수 있다.
“주님, 잠시 스치고 지나가 버릴 한낱 삶의 괴로움과 소음에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내 마음을 지켜주소서.”
주님은 내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아낀단다.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11).
하나님은 방탕하여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함께 살면서도 마음으로 불순종한 큰 아들과 화해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나와 함께 구원의 명절을 맞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명절은 그 은혜와 자비와 사랑이 언제나 내 인생을 품고 계심을 믿고, 감사드리는 절기이다.
하나님의 분노보다 크신 자비와 사랑이, 화해와 용서의 은총이 ‘요 나’와 우리 가족 그리고 세상 가운데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