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년 康翰年 (1880~1940)】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소속되어 청산리대첩에 참여"
1880년 12월 17일 아버지 강태철(康兌喆)과 어머니 김씨(金氏)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신천(信川)이고, 본적은 전라북도 옥구군(沃溝郡) 임피면(臨陂面) 읍내리(邑內里)이다. 본명은 강기영(康璂暎)이며, 이명으로 강한년을 사용하였다. 임피면 일대는 강씨 일족이 명문거족으로 집성촌을 이루었는데, 조부 강희로(康熙老)는 용양위대호군지중추부사(龍驤衛大護軍知中樞府使)를 지냈으며, 부친은 한말에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을 지냈다. 형제들도 모두 상당한 재력가였다. 맏형 강기묵(康璂默)은 약 1만 석의 유산을 소유하였으며, 진사(進士)를 지냈다. 둘째형 강기승(康璂昇)도 약 2,000석의 유산을 소유하였으며, 청송군수(靑松郡守)와 영국 공사관의 서기관 등을 역임하였다. 셋째형 강기안(康璂晏)은 1,000석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군산의 구암학교 보통과(普通科)를 수료하여 근대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둘째형 강기승의 영향으로 완고한 집안 분위기와 달리 개화의 필요성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군산시 구암동으로 이사하여 양옥(洋屋)을 짓고 선교사와 교분을 맺기도 하였다. 1907년 장남 대현(大鉉)을 낳은 김씨와 사별하고 1909년 10월경 배헌(裵憲)의 누이와 재혼하여 장녀 수남(秀南)과 아들 구현(九鉉)을 낳았다.
1913년 처남 배헌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퉁화현(通化縣) 하니허(哈泥河)에 있던 신흥강습소(후일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흥강습소가 극심한 재정난에 처한 것을 알고 1914년 가을 배헌과 함께 귀국하여 옥구에 있는 본인 유산 중 500석 거리의 토지를 처분하여 학교 재정을 도왔다. 이때 부인 배씨도 남매와 함께 남편을 따라 만주로 이주하였다. 1917년 신흥강습소를 수료한 후 동교 학우단(學友團)의 재정부장(財政部長)으로 활동하였으며, 당시 한인(韓人) 마을을 돌며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계몽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독립군이 사용할 무기의 구입과 군량의 확보에 힘을 기울였다. 이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소속되어 청산리대첩에 참여하였다.
학우단에서 함께 활동하던 처남 배헌은 귀국 후 『동아일보』 이리지국장과 신간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48년 5월 10일 전북 이리에서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으로 당선되었다. 1933년 봄 차남 현구가 만주로 건너와 지린(吉林)에서 상봉한 후 그를 도왔다. 1938년 2월경 폐병이 들자, 치료를 위해 하얼빈의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였으나 1940년 4월 20일 사망하였다. 하얼빈 근처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아들은 1943년 국내로 돌아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