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2월 24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4-15)
“Can the wedding guests mourn
as long as the bridegroom is with them?
The days will come
when the bridegroom is taken away from them,
and then they will fast.”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단식을 사회 정의와 연결시키고 있다.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은 불의하게 억압받는 이들을 풀어 주고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결코 단식을 단죄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지상에서 당신께서 하느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시기는 잔칫집의 흥겨운 때와 같다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요한의 제자들은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사실 바리사이파는 단식을 엄격히 지켜 왔는데, 그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이 적군에게 불타 버린 것을 기억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당한 이 국가적 재앙과 수모를 비통해 하면서 단식을 지킨 것입니다. 국가적 재앙을 슬퍼하며 애통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단식의 의미는 퇴색되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단식한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사람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단식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신앙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몰아세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그릇된 종교적 태도를 지적하십니다.
그리스도교는 기쁨의 종교이며 그것은 이미 이사야 예언서에서도 약속되어 있습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이사 62,5). 혼인 잔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이미 벌어졌습니다. 혼인 잔치는 메시아 시대를 상징하고 신랑은 예수님이시며 친구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 지금은 축제의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누리면 됩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 앞에 닥칠 수난을 암시하시는 첫 번째 말씀입니다. 신랑을 빼앗기게 되면 신랑의 친구들은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즐기시는 단식은 이사야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사순 시기를 지내고 있는 우리가 지켜야 할 단식이 과연 무엇인지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여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당신의 제자들도 단식을 할 것이라고 일러 주십니다. 그 말씀은 당신께서 제자들을 떠나고 나면 제자들이 슬퍼서 단식을 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신 삶을 통해 보여 주실 진정한 단식을 제자들이 실현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단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며, 굶주린 이들, 헐벗은 이들을 따뜻이 돌보고 보살피는 것’이라고 전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삶이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참된 단식’인 것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떠나신 다음, 제자들은 이런 참된 의미의 단식을 그들의 스승처럼 삶을 통해 실현했습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마태 25,40)이라는 말씀대로, 가난한 이들, 고통 받는 이들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따라서 신앙인에게 단식은 ‘고행’이 목적이 아닙니다. 고통 받는 이들,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들을 깊이 기억하고, 그들을 돕는 것이 참된 단식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특별히 ‘보잘것없는 이들’ 안에서 ‘신랑이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스승님의 제자라면 더욱 단식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군요?’ 하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답변을 주십니다. 꼭 ‘선문답’ 같습니다.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신랑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신랑은 혼인의 주인공입니다. 그가 있기에 혼인식은 잔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분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감정을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머지않아 주님의 수난과 죽음이 있으니, 그때 가서 단식해도 늦지 않다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단식을 예수님과 연관시켜 보라는 말씀입니다.
단식은 음식을 절제하는 행위입니다. 당연히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왜 단식하는지에 대한 답변이십니다. 복음은 ‘예수님 때문’이라고 알려 줍니다. 그분의 수난에 ‘동참하고자’ 단식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십자가를 보기에 단식해야 합니다. 주님의 억울함에서 우리의 억울함을 위로받기에 단식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의 단식이 아니라면 그저 ‘고통스러운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단식은 종교적 의식이었고, 일상사였습니다. 속죄와 보속을 위한 강제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단식을 당신 수난에 참여하는 길이 되게 하셨습니다. 평범한 단식을 은총을 얻는 방법으로 승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통은 동일하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은 똑같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느님을 비방하고 모독하지만, 선한 사람은 그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찾으며 그분을 찬양합니다. 사람에게는 무슨 고통을 당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당하는지가 문제입니다. 똑같은 미풍에도 오물은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거룩한 기름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깁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고통을 묵상하며 단식과 금육을 지키는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가슴 깊이 묵상하면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십자가를 예수님과 함께 기쁘게 지고 갈 수 있는 지혜를 청합시다.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도들처럼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음을 기뻐하며 이 사순 시기를 무겁게만 지내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크기
-권태문 신부-
‘선생님과 제자들은 왜 단식을 하지 않느냐’는 요한의 제자들의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즉,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그 기쁨을 나누고 즐겨야 한다는 것과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그들 모두 단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말씀을 통해, 단식의 행위는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어야만 그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손님들이
단식을 할 때, 그 안에는 신랑을 향한 애절한 그리움과 사랑이 녹아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경험하는 여러 유혹들과 갈등을 이겨내려는
우리의 극기와 절제 안에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극기와 절제는 성경 안에 나타난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교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사랑이 담긴
극기와 절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우리 자신을 더욱 순결하고 겸손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 이유로 극기와 절제의 행위는 그 안에 담긴 사랑이
척도이지, 그 행위의 강도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있다면, 현실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어려움들은 큰 장애가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완전한 사랑이신 그분과 일치시켜 줄 것입니다. 이 점을 굳게 믿고,
우리 마음 안에 당신을 향한 사랑이 충만하도록 그분께 간절히
기도하기 바랍니다.
오늘도 실패 !
- 노성호 신부-
발목이 좋지 않아 수술을 받은 작년 6월 이후 내 몸은 점차 D라인을 그리며 변하더니 이제는 더 무거워져서 행동이 굼뜨고, 어떤 옷을 입어도 맵시가 나지 않는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다이어트. 그런데 식욕은 여전하고, 한 끼를 굶으면 그 다음에는 한 번에 세 끼 정도를 몰아서 먹는다.
아주 근사한 변명이 되겠지만, 사실 세상과 단절하고 벽을 쌓지 않는 이상 지금 내 상황에서 다이어트나 단식을 실천하기란 그리 녹록지 않다. 교우들과 친교를 나누는 자리나 친한 벗들과 함께하는 자리, 오랜만에 손을 내밀며 다가오는 정겨운 이웃의 손길을 모두 마다해야 하는데, 그것은 너무 인정 없어 보인다. 못 간다는 핑계를 대는 것도 한두 번이고, 모임에 계속 빠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 그리고 내가 그들과 앞으로 언제까지 함께하게 될지는 하느님만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 지금 자신들 앞에 이 세상 누구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분이 계신데, 그분과 함께 있음에 마냥 즐겁고 복될 텐데,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 나 또한 그렇다.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주시는 매일의 예수님을 만나는 날이 지속되는 한 나의 다이어트, 나의 단식은 계속 연기될 것이다. 나도 제자들처럼 지금은 신랑과 함께하고 싶다. 그러다 언젠가 때가 되면 나도 단식을 해보련다.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이사 58, 8– 9)
단식, 무욕의 사랑을 위하여
-김찬선신부-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왜 단식을 하는가?
단식의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
살을 빼기 위한 단식에서부터
Hunger strike까지 현실적인 이유로 단식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보다 좀 더 고상한 단식도 있겠습니다.
개돼지처럼 먹는 것에 환장이 들린 사람이 되지 않고
본능적인 욕구(欲求)를 초월한 사람이 되고자 단식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본능적인 욕구를 초월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능적인 욕구를 초월한 사람이 되어 있는
그런 자신에 만족하기 위해서 단식할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지요.
단식이란 欲이 생기지 않도록 欲求를 들어주지 않는 것인데
욕구를 초월한 자신에 대한 고차원적인 만족을 위해서
식욕을 채우는 저차원의 만족을 희생하는 것일 뿐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고상한 탐욕을 채우는 만족이나
식욕을 채우는 만족이나 자기만족인 것은 마찬가지고,
어쩌면 고상한 탐욕을 채우는 만족이 식욕을 채우는 만족보다
하느님께서 더 역겨워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가 질책하듯 고상한 척 하지만
속은 온갖 탐욕으로 가득 차 있고
그 탐욕을 채움으로써 만족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만복감, 포만감으로 참된 만족이 대리 만족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된 만족은 아무리 고상할지라도 그런 것들로 대리 만족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만족은 어떤 욕이든,
욕을 구하지 않을 때 참되고
욕을 버릴 때 완전하며
사랑 때문에 욕을 구하지 않을 때 더 참되고
사랑 때문에 욕을 버릴 때 더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그럴 수만 있다면
이웃을 진정 사랑할 때
그래서 이웃을 참으로 만족케 할 때 욕은 올라오지 않고
하느님을 진정 사랑하면 욕이란
저 속에서부터 아무런 낌새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도 완벽하게 만족시키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우리 사랑이
욕을 너무도 완벽하게 틀어막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식이란 무욕한 사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기 위해서,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우리 집에 맞아들이기 위해서,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기 위해서
우리는 이번 사순절에도 단식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식탁 옆에
굶주리는 이웃을 위한 돼지 저금통,
특히 북한의 굶주리는 이들을 위한 돼지 저금통이 놓여있어야겠습니다.
단식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비움
- 김미자 수녀-
사순절 동안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 단식을 실천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율법에 따른 의무 단식일은 속죄의 날, 단 하루뿐이었지만(레위기 16장), 바리사이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권장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완벽하게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는 하느님을 위해 할 일을 다 했다고 자부하면서 은근히 드러내려 했습니다.
단식은 하느님과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육신의 극기와 비움을 통해 마음의 가난을 얻게 됩니다. 육체의 욕구를 극기함으로써 우리 내면은 하느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유혹을 극복하게 됩니다. 또한 굶주림을 느껴 봄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고, 단식으로 절약한 것을 나눔으로써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단식과 자선과 기도는 전통적인 신앙 표현으로 하느님께만 보이기 위한 것이며, 사람들한테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 드러내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처럼 단식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 라고 물을 팔요는 없습니다. 단식은 지극히 개인적인 신심행위이며,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거나 강요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만남을 잘 준비하기 위해 선행을 한 가지씩 실천해 봅시다. 부활의 기쁨은 차고 넘칠 것입니다.
마음의 포화 지방 -김성웅신부- 대개 우리는 혈관 속의 콜레스테롤이 혈관을 막아 고혈압을 유발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해로운 콜레스테롤뿐만 아니라 건강에
유익한 콜레스테롤도 있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제시되는 바와 같이, 단식에도 유익한 단식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해를 끼치는
단식이 있습니다. 마음과 생활양식에 쌓인 포화 지방을 빼는 단식은 우리의
영적인 건강을 돕지만, 반면 이타적인 마음과 행동 등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이로운 콜레스테롤을 제거하는 단식은 영적인 건강에 해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단식의 예는 한 끼의 식사를 거르면서 모을 수 있는 식비를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며 그들과 더욱 긴밀한 연대의 끈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런 단식은 자비와 애덕의 실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는
화해의 성사적 의미를 지닙니다. 곧 단식이라는 눈에 보이는 표징을 통해
우리 마음 안에 쌓인 죄스런 포화 지방을 걸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식을 통한 침묵 속에서 나 자신을 더욱 맑은 눈으로 돌아보고, 내 안에
포화 지방처럼 쌓인 교만이나 탐욕이나 질투심이나 매정함이 없는지 성찰하고
그에 대한 쇄신의 은총을 청하는 시간이 진정 필요합니다.
욕망을 갈망으로
-김찬선신부-
수녀원 연 피정 지도를 위해 광주에 내려와 있습니다.
오는 길에 장성에 있는 우리 형제들에게 들렸는데
그곳 교육관에서 단식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우리 형제들 몇도 그 교육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교육은 저도 옛날에 받은 적이 있습니다.
죽은 제 친구 최 요한이 간 경화 치료를 받을 때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어 마지막 수단으로
단식 치료 교육을 제가 같이 받은 것입니다.
단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무언가 다른 목적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처럼 단식 그 자체가 목적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바보스러운 것이고
오늘 예수님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질책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면 단식의 목적은 무엇이어야겠습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건강입니다.
역설적이지만 단식이 건강을 위해 좋습니다.
물론 적절하고 올바른 단식이어야겠지만
단식을 하면 육신적으로나 영신적으로 건강해집니다.
영적인 면에서 단식은 우선 영적 잡초를 제거해줍니다.
잡초란 마땅히 가야할 곳으로 가는 영양분을
가로채고 빼앗아가는 풀을 말하는 것이니
영적인 잡초란 우리의 잡스런 욕망들이 되겠습니다.
잡스런 욕망이란 하느님으로만 만족해야 할 우리의 만족들을
이 세상 것들로 대리만족하려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 것들이 우리에게 대리만족을 주는 것은
그것들도 선하신 하느님이 만드신 선들이기 때문인데,
문제는 이런 아랫선이 지상선이신 하느님의 선을 대신하고
불완전한 선이 완전한 선이신 하느님의 선을 대신하며
일부선이 전체선이신 하느님의 선을 대신하고
불충분한 선이 충만한 선이신 하느님의 선을 대신합니다.
단식은 대리만족하게 하는 이런 것들에 대한 욕망을 없애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단식은 이렇게 잡스런 욕망을 제거함으로써
영혼을 맑게 하고 갈망을 자라게 합니다.
배가 부르면 인간은 다른 만족을 구하고
그래서 잡스런 여러 욕망들이 자라지만
단식을 하게 되면 다른 욕망들은 사라지고
오직 먹고 싶은 욕구만 남게 되듯
단식은 욕망을 정화시켜 하느님께 대한 갈망만 남게 합니다.
색시가 오롯이 낭군을 기다리듯
신랑의 친구들이 오직 신랑에 집중하듯
단식으로 욕망이 정화된 영적인 갈망은 이제
하느님의 사랑을 애타게 찾고 그 사랑만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순시기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다음 권고를 마음에 새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최고 선이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홀로 선하시고 홀로 자비로우시고 홀로 양순하시고
홀로 부드러우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홀로 인자하시고 홀로 무죄하시고
홀로 순수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 것도 마음에 들어 하거나 만족하지도 맙시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기를!
아무 것도 우리를 하느님과 떼어놓지 못하기를!
아무 것도 우리를 가로막지 못하기를 기원합시다!”
그리스도인의 단식 -전삼용신부- 학생 때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연습장에 까맣게 써 가며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왜 그냥 눈으로 보고 암기하면 안 될까?’라고 생각할 때 선생님이 답을 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머리로만 기억하는 게 아니란다. 몸도 기억을 한단다. 그래서 속으로만 외우는 것보다 입으로 소리를 내고 손으로 써보면 더 잘 기억하게 되는 거야.”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몸이 기억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신기하게 들렸습니다. 저의 한 친구에겐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데 많은 과일 속에 복숭아 향만 들어있어도 몸에서 이상한 반응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알레르기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랍니다. 마치 살아오면서 배탈이 났거나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음식들을 몸이 거부하여 잘 먹지 못하는 것처럼 알레르기도 그렇게 안 좋은 기억을 몸이 기억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악기를 배울 때나 운동을 배울 때 처음엔 머리를 써가면서 연습합니다. 그러나 나중엔 머리를 쓰면 더 안 되고 그냥 몸에 배인 실력으로 할 때 더 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 일일이 생각하며 걷고 눈을 깜빡이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몸에 배어있는 것입니다. 상어와 같은 물고기들은 뇌를 빼 내도 계속 헤엄쳐서 갑니다. 닭은 머리가 잘려도 얼마 동안은 뛰어다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능력은 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몸에 배어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느끼며 감사해하는 것도 머리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조금이라도 그 수난을 체험할 때 그 감사가 몸에까지 새겨집니다. 단식은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써 몸에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배고파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식을 꺼릴 것입니다. 몸이 원하질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단식을 며칠 한 적이 있는데 이틀 동안 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밥과 물을 먹지 않으니 온 뼈마디가 쑤셔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신앙인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는지를 느끼게 되고 그 분께 대한 고마움이 뼛속까지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단식은 그저 육체를 절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단식하는 목적은 몸 안에 그리스도의 수난의 기억을 새겨놓는 일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영적으로만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몸까지 주님을 찬미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 요한의 제자들이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들은 그저 단식을 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줄 알았나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시지 고통 받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 몸을 절제하면 영이 맑아지는 것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육과 영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이 메마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도 극기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제자들도 단식하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으로 불렸고 제자들까지 단식 같은 것은 시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식의 새로운 의미를 가르쳐주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예수님이 신랑이시고 교회가 신부입니다. 혼인잔치에서 신랑과 함께 있으면서 단식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오히려 잔치를 준비한 사람에게 실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당신을 빼앗긴 후, 즉 신랑을 빼앗긴 후 그리스도인들은 그 분의 수난을 기억하기 위해 단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기 위한 단식이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단식이 아닙니다. 단식은 사실 그리스도교보다도 다른 종교들에서 훨씬 많이 합니다. 그런 단식들은 육체를 이기고 영을 충만하기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단식은 필수불가결하게 그리스도의 수난을 몸으로 기억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는 단식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 주어지는 모든 육체적 영적인 고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을 잃게 되면 제자들도 단식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한 것처럼 단식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하는 단식이기에 가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막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작하자마자 쇠파이프에 얼굴이 긁혀서 얼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상처가 생겼었습니다. 그렇게 돈을 벌면서 처음으로 느꼈던 것이, 이렇게 돈 벌기가 어려운데,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벌어서 우리를 키우셨나하는 감사의 마음이었습니다. 얼굴에 난 상처와 함께 조금 더 부모의 고마움을 알게 되고 성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단식도 작은 고통으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증가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습니까?"
-양승국신부-
<사제로서의 참된 단식>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단식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단식의 핵심이자 목적은 다른 무엇에 앞서서 예수 그리스도 당신 자신임을 명확히 밝히고 계십니다.
진정한 단식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에 행하는 단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우리를 향한 수난과 희생, 죽음을 묵상하기 위한 단식이 참된 단식입니다. 단식을 하는 사람들의 의식은 더욱 예수 그리스도께로 집중되어야하며 그분이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에 관심이 모아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단식은 단식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실을 거두는 단식이어야 합니다. 단식의 결과가 이웃사랑으로 연결되어야 그 단식은 참된 단식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세상 안으로 더욱 투신하고 그 세상을 위해 철저히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 그것이 사제로서의 참된 단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된 단식에 대해서 묵상하다가 "기쁨과 희망"이란 아름다운 소식지 3월 1일자에 실린 한 수녀님의 글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사제가 곁에 있어도 우리는 사제가 그립다"는 제목의 수녀님 글은 얼마나 저를 부끄럽게 했는지 모릅니다.
수녀님의 글은 사제로서 참된 단식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주고 계셨습니다.
"한국 교회의 구조와 한국인의 의식구조 안에서의 사제상은 우리가 익히 듣고 그려온 착한 목자상과는 거리가 먼듯하다. 어느 틈엔가 굳어진 목에선 겸손함이 그립고, 강론 준비도 제대로 안되는 건 고사하고 주일미사에 어렵사리 나와 주님 안에 평화를 얻고자 하는 신자들을 야단쳐서 보내지 않으면 다행이다.
신자들의 바람을 추려보면 성체 앞에 기도하며 머무는 사제의 모습이 그립고, 만나면 먼저 인사해주는 겸손하고 따뜻한 모습이 그립고, 자신과 신자들의 영성의 깊이를 더해가기 위해 공부하고 연구하는 모습이 그립고, 자기 관리가 되는 사제가 그립고, 말이 통하는 사제, 들을 귀가 큰 사제가 그립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사제들과 함께 살면서도 진정한 사제가 그립다.
다른 무엇보다도 사랑 때문에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어놓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전공한 사제가 진짜 그립다."
"성서와 함께" 3월호에 보니 또 다른 수녀님께서 사제로서의 참된 단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잘 소개하고 계십니다.
어느 모임에서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사제가 자신의 소중한 체험을 나누어 주었답니다.
"제가 술에는 정말 자신이 있는 사람입니다만, 사제 생활을 시작하면서 두 가지 목표를 세웠는데, 하나는 술을 끊는 것과 또 하나는 저녁 10시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사제관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본당 소임이 이동되어 신자들과 송별회를 하던 중, 술을 안마시고 말짱하게 앉아 있다가 10시가 가까워져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아우성치는 교우들을 뒤로 한 채 사제관으로 돌아와 잠을 자던 저는 병자성사를 요청하는 전화를 받고 달려가면서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송별회라는 명분으로 술을 마시고 더 앉아 있었더라면 본당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큰 오점을 남길 뻔 했으니 말입니다. 병자 성사를 받은 그 교우는 그 날 새벽에 운명을 했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양승국신부-
<불쌍한 성인(聖人)>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란 말씀을 바꿔 말하면 “기뻐해야 하지 않겠느냐?”가 아닐까요?
그토록 오랜 세월 목이 빠져라 기다려왔던 ‘주인공’, ‘VIP 손님’, ‘그분’, ‘신랑’, ‘메시아’이신 주님이 오셨는데, 그분이 우리 사이에 함께 자리 잡고 계시는데, 더 이상 무슨 단식이며, 준비며, 여타 프로그램이 필요하겠냐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남아있는 일이란 좀 더 그분 가까이 다가가서 앉는 일입니다.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입니다. 일생일대의 행운의 순간이 찾아왔음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일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는 일입니다.”(필립비 4장 4절 참조) “항상 기뻐하는 일입니다. 늘 기도하는 일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감사하는 일입니다.(1데살 5장 16-18절 참조)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의 말씀입니다.
“성인(聖人)이 슬퍼한다면, 그는 불쌍한 성인입니다.”
돈보스코 성인의 말씀입니다.
“악은 기뻐하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기쁨 속에 주님을 섬기십시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쁨은 기도입니다. 기쁨은 굳셈입니다. 기쁨은 사랑입니다. 기쁨으로 우리는 생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기쁘게 베푸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기쁘게 베푸는 분은 더 많이 베푸십시오. 하느님께, 그리고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감사 표시는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기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말초적, 육체적, 순간적 기쁨을 넘어섭니다.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 헌신하는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한 영혼이 자신을 극복하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보고 느끼는 보람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나의 작은 봉사로 세상이 조금이나마 밝아지고 자그마한 평화라도 깃드는데서 느끼는 기쁨입니다.
고통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인식하는데서 찾아오는 기쁨입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마음은 넓게 위는 작게
-김찬선신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이든 신자들은
사순 시기가 되면 단식에 대한 강박감 같은 것이 있을 겁니다.
제가 어렸을 때 그때 어른들은
사순시기가 되면 단식과 금육은 물론
술 담배를 하던 분은 술과 담배를 끊고
부부생활도 하지 않고
자녀들 결혼도 사순시기는 피하여 시켰습니다.
그런 것을 보고 커서 그런지 저도 잘 실천은 못해도
사순시기에는 어떤 단식을 할까 매번 생각하게 됩니다.
이번에도 무엇을 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재의 수요일 미사를 주례한 형제가 한 말이 썩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음은 넓게 위는 작게!”
이 짧은 명구는 오늘 독서와 복음이 얘기하는
사순절 단식의 의미를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남이 한다고 따라하는 단식은 소용없고
마음에 없는데 하라니까 억지로 하는 단식도 소용없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는 단식은 더더욱 소용없다 합니다.
이런 단식은 살을 빼기 위해 하는 단식보다도 더
나를 위해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하기에 아무 소용없습니다.
살을 빼기 위한 단식은 육신을 건강하게 하기라도 하니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단식이 유익한 단식이고 바람직한 단식입니까?
그것은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 단식이고,
그러니까 사랑을 증진시키는 단식입니다.
먼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증진시키는 단식입니다.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이 있을 때는 즐거워하며 먹고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하듯이
우리도 하느님이 부재중일 때는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키우기 위해 단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단식은 이 세상에 안주하던 Mode에서
하느님 갈망의 Mode로 바뀌도록
총동원령을 내리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마른 땅이 비를 기다리듯이
우리 영혼이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게 하는 것입니다.
단식은 두 번째로 이웃 사랑을 증진케 합니다.
위를 작게 하고 마음을 넓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배를 채우려 하지 않고
남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려는 넓은 마음을 갖게 합니다.
우리의 쌀 한 줌 나누기가 바로 이 단식의 의미지요.
우리는 이런 쌀을 聖米, 거룩한 쌀이라고 합니다.
똑같은 쌀이지만 내 배를 채우지 않고
더 굶주린 다른 사람의 배를 채우는 사랑의 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하느님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단식은 도무지 의미 없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판단
-최의영신부-
신학생 때의 일입니다. 매년 사순 시기가 시작되면, 이번에는 어떤 방법으로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할까 하며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고백하기 부끄러운
경험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해는 매일 십자가의 길 기도를 두세 번씩
봉헌하고 성당에서 또는 학교 뒷산에서도 장소를 번갈아가며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쳤는데, 어느 날인가 저는 ‘판단’이라는 아주 몹쓸 악에 빠졌습니다.
아주 추운 날 홀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던 중 문득 웃고 떠들고 있는
다른 동료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저들은 왜 나처럼 수난에 동참하지 않는 걸까?
왜 저들은 나처럼 기도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는 걸까?’ 등등의 근거 없는
판단으로 타인을 판단하고, 나 스스로를 힘들게 하면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처럼 말입니다. 물론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다른 동료 신학생들 역시 각자 나름대로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면서 일과 학업에 충실하며 기쁜 부활을 맞이하였을 것입니다.
판단이라는 악은 결국 자신만 힘들게 하여 부활의 기쁜 삶에서 멀어지게 하는
원인입니다. 판단은 주님께 맡겨드리고, 우리는 그저 매일의 삶을
주님과 함께 살아가야겠습니다
한 식구(食口)가 되라
- 이인옥-
어떤 종교단체든지 단식뿐 아니라 여러 가지 수행방식을 두고 누구의 방법이 더 옳은지, 누가 더 잘 수행하는지, 누구는 왜 하지 않는지 따지며 경쟁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단식보다 먼저 익혀야 할 것은 맛있게, 즐겁게, 감사하게 먹는 것이다. 좋아하지 않고 입에 맞지도 않는 음식,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는 양식이라면 일정 기간 끊는다고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음식을 먹으며 사람들과 오순도순 나누는 친교를 즐겨보지 않았다면 단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음식을 맛나게 먹는 것이 먼저고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는 마음이 먼저고 함께 음식을 나누는 ‘식구(食口)’가 더 중요하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늘 즐겁게 먹고 마셨다. 그러면서 그때가 바로 혼인잔치 날이라고 하셨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자식들이 모여 맛있게 음식을 먹을 때면 늘 그날이 당신 생일이라고 하셨다. 전쟁을 겪어본 어른이기에 매일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이 큰 축복임을 아셨다. 2대 독자로 외롭게 자란 아버지한테는 식구들이 모두 모여 화목하게 먹고 마시면, 그날이 바로 잔칫날이었던 것이다.
요즘 밥을 굶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다. 그런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단식을 수행의 한 방편으로 행하는 것은 너무 사치스럽다. 우리의 양을 덜어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실제적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우리가 모두 한 식구로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단식의 진정한 이유여야 하지 않을까?
-박철현신부-
하느님께서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과 피조물이 살아가는데 가장 귀중하고 가장 필수적인 것일수록 나누기 쉽고 또 쉽게 나눠 쓰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공기, 물, 햇볕, 흙, 그리고 불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이것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들은 누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개개인도 그런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개개인이 하느님께 가장 귀중하고 가장 필수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 존재의 목적은 자신을 비우고 그 자리에 하느님의 사랑을 채우는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 앞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존재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독서의 말씀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유다인들은 대속죄일에만 의무적으로 단식을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과 경견한 유다인들은 자주 단식을 했습니다. 특히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장이 서는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을 했는데 그 본래의 뜻을 저버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단식을 하는 본래의 뜻, 그것은 바로 보잘 것 없고 굶주리며 떠돌면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 이웃을 위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것을 외면한 단식은 겉으로는 가장 거룩한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필요 없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마음에 모시고 행하는 이웃사랑의 실천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입니다. 자신이 행하는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가장 귀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새벽을 열며
이번 사순시기에 스스로 결심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런 결심을 하자마자 그 결심을 지키지 못할 유혹들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하긴 지난 재의 수요일에도 그랬지요. 단식과 금육을 해야 하는 날인데, 그날따라 왜 이렇게 배가 고프고 또한 고기 먹을 일이 생기던 지요. 생각해보니 유혹은 우리들 곁에서 결심을 잘 지킬 수 없도록 항상 우리를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도 생긴 것이 아닐까요?
사실 유혹을 이기는 것만큼 기분 좋은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유혹을 이기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저는 요즘 새벽에 수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수영장 가기가 정말로 싫습니다. 우선 추운 새벽에 차가운 물속에 들어간다는 것이 싫습니다. 또한 새벽부터 힘들게 수영하는 것도 반갑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이미 돈을 지불했으니 어떻게 합니까? 그냥 가야지요. 수영장으로 가면서 이러한 다짐을 합니다.
‘다음 달에는 절대로 안 한다. 이렇게 힘든 운동을 왜 하는 거야? 그냥 자전거나 열심히 타자.’
그런데 그 유혹을 이기고 수영장에서 아침 운동을 하고 나면, 기분이 너무나 좋아집니다. 그리고는 이러한 마음이 생기지요.
‘이렇게 상쾌한데, 한 달만 더 해볼까?’
화장실도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하지요? 마찬가지로 저에게는 수영장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기분이 이렇게 다르더군요. 그런데 유혹을 이기기 전과 이긴 후의 기분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오늘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질문을 던집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을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기 죄의 회개를 위해서, 그리고 이로써 메시아이신 구세주를 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올바른 행동이었습니다. 희생과 극기를 통해서 오실 분을 준비하는 것. 그러나 그들은 유혹에 빠졌습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음식을 먹지 않아서 쇠약하게 되면서까지 회개와 기다림의 표시로 단식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느님은 우리의 삶 안에서 흥을 깨는 분이고, 힘든 일만 부과하는 분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가난한 사람들과 먹을 것을 함께 나누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잔치를 벌이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바로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사랑의 실천을 더욱 더 원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당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만일 단식과 금육을 하면서도 굶주리는 이웃을 모른 체 하고 가진 것을 움켜쥐고 나누지 않으려고 한다면, 우리들 역시 하느님을 잘못 이해하는 유혹에 빠진 것입니다. 그 유혹을 극복하고, 사랑의 실천을 제대로 했을 때의 마음은 과연 어떠할까요? 하늘을 날듯이 기쁠 것입니다.
침 운동을 해보세요. 기분이 끝내줘요~~~
빠다킹신부
정성어린 예물
-이정호신부-
통계에 따르면 개신교 신자들의 증가율보다 천주교 신자들의 증가율이 훨씬
앞섰다고 합니다.개신교 신자들이 제자리걸음을 걸을 때 천주교 신자들은
두 배 가까운 수가 증가하였다고 하네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십일조를 비롯한
지나친 헌금에 대한 강조가 개신교에 대한 호감을 감소시킨다고 합니다.
사실 천주교에서는 헌금에 대해 그리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형편대로
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
봉헌함에 넣는 경우도 있고 봉헌시간에 옆사람에게 빌려서 봉헌을 하기도 합니다. 얼마를
내건 형편에 달린 일이겠지만 그 정성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빼앗길 때 애통한 마음으로 단식하게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저 교회에 돈을 내는 것이 봉헌이 아니고 단지
밥을 굶는 것이 단식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겠습니다. 사랑을 품고
정성을 다해 예수님을 바라보고 닮고자 하는 자세에서 봉헌이나 기도, 자선,
단식하고자 하는 정성이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순시기에 드리는 우리의 준비는 정성을 다한 것이 되어야겠습니다.
사랑의 단식
-정순옥 수녀-
신랑과 함께 기뻐하는 모습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수녀회에 입회하여 얼마 안 되었을 때 부총장 수녀님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한국 공동체에 프랑스 수녀님 세 분이 계셨는데 그 중에 종신서원을 하고 한국에 오신 지 1년여 지난 가장 젊은 수녀님에게 부총장님의 방문과 만남은 아주 특별한 것 같았습니다. 부총장님의 방문을 받은 수녀님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른, 부족한 것이 없을 정도로 행복해 보였습니다. 바라던 것이 이루어진 순간에 체험하는 충만함은 잠시라 해도 소중한 것입니다.
이주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은 종종 시간을 다툴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망 사건이나 급한 일이 생기면 식사할 겨를도 없습니다. 함께 일하는 수녀님들, 특히 안 신부님이 끼니를 거르고 늦은 시간까지 일하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을 닮았다는 생각과 함께 헌신에 감동을 받습니다. 식사할 겨를도 없으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지친 예수님이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인에게 물을 청하신 것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고을에도 가야 한다며 제자들을 재촉합니다. 이것은 음식을 먹는 일보다 하느님의 일(선행)을 우선으로 삼는 사랑의 단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순시기에 교회는 예수님의 단식을 따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온 세상 교회가 사순절 동안 금욕과 단식을 한 결과 고통 받는 사람들과 나눔의 연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옛말에 ‘서러움 중에 가장 큰 서러움이 배고픈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북한과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생각하며 음식을 낭비하지는 않는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애덕이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것이 기적입니다.
“단식의 궁극 목적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친교이다.”
- 서정웅 신부 -
2006년 9월 (공지영 소설) 송해성 감독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불우한 성장기를 보내며 밑바닥 인생을 살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만을 기다리는 비운의 청년 사형수와 부유하고 화려하게 보이지만, 마음 속 깊은 상처로 인해 세 번의 자살을 시도하며 세상과 사람에 대해 냉소적이 되어버린 ‘골칫덩이’ 대학 강사와의 만남을 통해, 인간 존재의 소중함을 깨달아 가는 참 감동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제가 알고 있는 (2000년 8월 부산교도소 성령세미나 안수식을 겸한 강의에서 알게 된), 또 다른 아픔을 겪고 있는 한 수인이 생각나서 그 친구의 빠른 석방을 바라며 ‘편지 한 통’을 먼저 소개할까 합니다.
신부님 보십시오!
지면으로 첫 인사를 올림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신부님께 글을 올리게 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오라 성령세미나 안수기도를 위해 오셔서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그 중에서 신부님의 어린 시절 어려웠던 가정 환경을 말씀해 주신 것이 저의 마음에 너무 와 닿고 이해할 수 있어 신부님께라면 저의 고통받는 죄인의 심정들을 다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용기 내어 조심스레 펜을 들어 봅니다. 저의 무례함을 용서해 주세요.
저는 지금 부산교도소에 수감 된 죄인 ○○○입니다. 저는 세상에서 아주 큰 죄 존속살인이라는 폐륜적 범죄를 저질러 15년형을 선고받고 수용되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 할 수 없었던 고통과 실연들을 가슴에 묻어둔 체 지금은 하느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위 동료들의 차가운 시선을 느끼고 누구에게 저의 속사정 하나 털어놓을 수 없어 혼자가 되어 버린 저 자신을 원망도 많이 했었습니다. 파탄이 나버린 가정에서 무엇을 바라며 또 무엇에 기대어 살아야 할까 하며 생각하니 너무나 눈앞이 캄캄했었습니다. 요즘은 하느님께 의지하며 저의 잘못을 반성하며 용서해 주시길 바라며 기도를 생활화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가정 폭력으로 하루가 멀다 않고 술 취하신 아버지의 그때의 화나신 얼굴이 아직도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지병으로 고생하시고 계신 어머니와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 아버지의 심한 구타로 인해 정상적이지 못한 모습으로 태어난 동생이 저에게 있습니다. 제 나이 그때 21살이었을 때 아버지의 심한 폭력과 외도를 참지 못하고 어머니께서는 가출을 하셨고 남겨진 동생들은 성하지 못한 몸으로 밥 많이 먹는다는 이유로 추운 날씨에 밖으로 내몰려야 했었습니다. 생계유지로 군대 입대도 연기한 체 일자리를 알아보고 들어오면 집안은 언제나 초상집이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내연의 여자를 집으로 들이시기도 하고 동생들에게 인사도 시켜 정말 날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아버지가 맞는가 의심도 들기도 했었습니다. 어머니를 가출하게 만든 아버지와 내연의 여자는 동거를 하셨고 저의 가정은 처참히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매번 술 취하신 아버지의 매질은 계속 이어졌었고 그런 환경 속에 태어난 저 자신이 너무 싫었습니다. 아버지의 그런 행동들은 어린 시절부터 보며 자라서 저도 술만 취했다면 그동안 받은 울분을 다스리지 못해 자해도 하고 싸움도 많이 했었고 어머니가 가출하기 전에 한 번은 울고 불며 모두 죽자며 칼을 들고 난동을 부린 적도 있었는데 자식의 고통을 아시는지 울며 매달리시는 어머니 때문에 무마 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모질게 살면서의 소원은 가식 없는 웃음이 있는 TV 드라마 속의 가족이 되어보는 것이 저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의 소원은 그냥 무시 된 채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것이 되어 지금 제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아무래도 하느님께서도 저의 죄는 용서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폐륜아로 낙인찍힌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갈까요?
저의 잘못으로 아직도 고통받는 저의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에게 너무나 미안해 접견을 할 때에는 고개 들기가 힘들어 집니다. 가출하신 어머니는 돌아오셔서 다행이지만 동생들을 데리고 험한 길을 걸어가셔야 되는 힘든 모습을 저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체 지켜봐야 되는 것이 너무 가슴이 아파 옵니다....... 신부님 ! 저의 답답한 마음 조금이라도 이해를 해 주실 것이라 믿고 무작정 편지를 올리오니 많은 이해 바라오며 바쁘신 와중 저의 편지를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자매님, 수녀님, 동료들에게도 상의하지 못하고 고통받는 저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저 대신 돌아가신 저의 아버지를 위해 기도 한 번 해주십시오. 제가 기도는 계속하고 있지만 폐륜아의 기도는 들어주시질 않을 것 같습니다. 신부님 ! 종이 몇 장에 제 마음을 다 담을 수 없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아쉬운 마음은 여기서 접어두고 두서 없는 못난 글 여기서 줄일까 합니다. 겨울 날씨 감기 조심 하시구요 건강 유의하십시오. 그럼 다음 서신까지 안녕히 계십시요. 2000년 12월9일 예비자 ○○○올림.
인도 켈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고통이 있습니다. 굶주림에서 오는 고통, 짐 없음에서 오는 고통, 온갖 질병에서 오는 물질적인 고통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외로운 것, 사랑 받지 못하는 것, 바로 곁에 아무도 없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고통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라고요
애청자 여러분, 조금 전 읽어드린 편지 내용의 친구는 지금 하느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 예수님 사랑 받는 제자, 친구가 되어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단식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구약에서는 ‘종말론적 구원’을 ‘혼인 잔치’라는 상징(비유)으로 서술했는데(이사야 61.10, 62.5) 예수님께서는 당신으로 인해 구약이 실현되어 종말론적인 구원이 이룩되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함께 하는 기쁨의 시기에는 단식이 적합하지 않다고 대답하십니다.
이사야 58. 6-8에서는 ‘하느님(야훼)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억울하게 묶인 이들을 끌러 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
애청자 여러분, 한편에서는 물질적인 풍요 속에 낭비를 일삼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기아와 빈곤 속에 허덕이고 있는 현대 사회 속에서, 자신의 배고픔을 통한 이웃 사랑과 나눔의 실천으로 우리도 작은 예수, 또 다른 예수가 되어 봅시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양승국신부-
<슬픔을 기쁨으로, 울음을 춤으로 바꾸시는 주님>
부끄럽게도 새로 나온 성경, 오늘 처음으로 펼쳐보았습니다. 새로운 번역을 위해 그간 애쓰셨던 많은 신부님들, 평신도신학자들, 봉사자들의 땀과 노고가 고스란히 배어있더군요. 번역이 훨씬 부드러워졌고, 본문에 대한 이해나 의미 파악도 한결 쉬워졌습니다. 경제도 안 좋은데 만만치 않은 가격에 부담스러워하실 분들에게는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새 성경을 읽으면서 한 신부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새 성경의 번역 전담자이셨던 신부님, 그 골치 아프고 고된 성서번역 작업에 한 평생을 거셨던 신부님, 아마도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해 작고하신 것이 분명한 존경하는 임승필 신부님의 얼굴. 오늘 성서를 봉독하는 내내 신부님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전에는 ‘전도서’라고 칭했는데, 새 성경에서는 ‘코헬’이라고 부르는 성서 3장 1절 이하에 이런 표현이 있더군요.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오늘 복음에서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라고 묻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없지 않으냐?”
‘코헬’ 작가의 표현처럼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슬퍼할 때가 있으면 기뻐 뛸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구간 탄생을 기점으로 슬픔의 시기는 지나가고 기쁨의 때가 왔습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으로 인해 이제 절망과 비탄의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눈물 흘릴 때가 아닌 것입니다.
코헬의 저자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기쁨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상기시킵니다. 따라서 삶을 기뻐하고, 현재 이 순간 존재의 기쁨을 만끽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너는 기뻐하며 빵을 먹고
기분 좋게 술을 마셔라.
하느님께서는 이미 네가 하는 일을 좋아하신다.
네 옷은 항상 깨끗하고
네 머리에는 향유가 모자라지 않게 하라.”
그러나 항상 기뻐만 할 수가 있나요. 좀 살만하다, 이것이 행복이구나, 하면 어느새 다가오는 것이 고통입니다. 십자가입니다. 불행입니다.
그러나 성서가 우리에게 강조하는 기쁨은 고통 속에서도 미소 짓는 기쁨입니다. 언제 사형에 처해 질 지 모르는 절박한 감금상태에서도 행복해했던 사도 바오로의 기쁨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던 참혹한 옥살이 가운데서도 그리스도 신자들을 위해 편지를 쓰셨는데, 그 고통 속에서도 되풀이해서 강조하신 단어가 ‘기쁨’이었습니다.
극심한 고통,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바오로 사도의 기쁨의 비결이 무엇이었겠는지 묵상해봅니다.
바오로 사도의 기쁨은 하느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내어맡김을 통한 기쁨이었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이미 형성되어 있기에, 내가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이기에, 더 이상 그 어떤 위협도 두렵지 않았던 기쁨이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모두 찰나적인 기쁨입니다. 잠시 지나가는 기쁨입니다. 뜬구름과도 같은 기쁨입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 안의 기쁨이야말로 참 기쁨이며, 영속적인 기쁨입니다.
시편 작가의 표현처럼 우리가 고통 속에서도 꾸준히 기도하며 기쁨을 간직할 때, 언젠가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울음을 춤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우리의 좌절을 희망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고
저의 자루옷 푸시어 저를 기쁨으로 띠 두르셨습니다.
이에 제 영혼이 당신을 노래하며 잠잠하지 않으오리다.
주 저의 하느님, 제가 당신을 영원히 찬송하오리다.”
(시편 29장 12-13절)
참된 단식
-강영구신부
예수님, 당신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물러나 40일간 단식하셨습니다. 당신은 40일간의 재계齋戒와 斷食을 통해서 하늘의 소리를 듣고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자 하셨습니다.
斷食과 재계齋戒는 비움과 낮춤이며 자기 포기입니다. 당신은 그 빈자리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인간 본래의 모습을 꿰뚫어 견성見性하셨습니다.
광야에서 하느님의 뜻(天命)을 깨닫고 시정市井으로 내려오신 이후로 당신이 단식하셨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린다.”(루가7,34)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자주 단식하며 기도하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시아파 사람들은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당신의 모습이 대단히 불경스럽고 못 마땅했습니다.(루가5,33-36)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를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내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 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며/ 제 골육을 모른 체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너희의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이사야52,6-8)”
예수님, 당신은 먹고 마시기를 즐긴 불한당不汗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으로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변두리 인생들에게 천국을 선물하셨습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단식하는 저희들도 단식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를 마련하고 이웃과 형제들에게는 사랑을 나눠줄 수 있도록 축복하소서.(一明)
지금은 단식할 때... 그러나 기쁜 굶주림
-정욱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 눈에 두드러지는 것은 ‘단식’이란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바리사이파들은 단식을 생활화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그토록 많은 말씀을 하시면서도 왜 하느님께 드리는 정성의 대표적인 모습인 단식은 하지 않는가에 대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직접 묻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단식하신 모습은 복음 속에서 찾아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복음에서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단식’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잔칫집에 온 사람들과 같이 어느 집에서건 식사하시는 모습은 찾아보기가 쉽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한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요한의 제자들이 먹고 마시기만 하는 예수님께 언제 하느님께 정성을 드리는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스승은 먹지도 않고 극기와 인내의 힘겨운 삶을 살고 있었으니 더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식의 모습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사람들의 허기짐에 대해 걱정을 하시고, 오히려 그들을 먹이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이 곳곳에서 발견될 정도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예수님을 여러 날을 허기진 채 따라다닌 사람들을 걱정하셔서 생겨난 사건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를 오히려 먹이려 하셨고, 그렇게 그 자리에 늘 함께 하시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주님은 단식하지 않으셨다는 결론을 내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지난 수요일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예식이 있는 날 주님이 하신 단식에 대한 가르침 하나를 기억하게 됩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얼굴을 하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얼굴에 그 기색을 하고 다닌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단식할 때에는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라. 그리하여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보여라.”
이 말이 예수님께서 숨은 곳에서 단식하셨다는 이야기의 근거 또한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단식은 한 사람이 자신의 곡기를 끊고 하느님께 그 생명의 소중함을 하느님 앞에서 느끼고, 그 정성을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개인적인 신심의 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식은 남들에게 드러나는 정성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일행이 단식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알려지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인 듯싶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예수님의 일행들은 단식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잔치에 온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이란 숨은 것도 보시는 하느님께 자신이 받은 소중한 생명의 깨우침에 감사와 그 소중한 생명의 정성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시기는 하느님과 함께 있기에 곡기를 끊고 정성을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께 정성을 드리기도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다가오시어 사랑을 주셨고, 우리가 기도드리기 전에 그분이 우리의 삶을 함께 나누고 계시기에 우리가 드리는 정성은 그 순간 하느님의 더 큰 사랑에 묻혀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며 삶을 함께 하시는데 단식이 필요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길 날이 되면 단식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얼마 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생명을 이기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빼앗겨 버리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세상은 하느님께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래서 사랑이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남겨진 제자들은 단식해야 할 시기에 접어듭니다.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남겨진 지금 이 시대의 우리에게도 단식은 필요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세상은 주님의 사랑의 생명을 허락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순절, 특별히 세상이 버린 주님의 생명을 안타까워하는 이 시기에 정성어린 단식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가르침, 단식은 보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내 생명의 교류와 일치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기쁘게, 사랑하며 단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셨던 그 한 끼의 정성에 담긴 생명에 감사하며 웃으며 하느님께 우리 한 끼의 생명을 나누는 사랑의 단식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단식은 고통스런 것이 아니라, 선행을 하듯, 자선을 하듯, 기도를 하듯 기쁘고 행복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생명을 나누는 것, 그리고 그 몫을 주님처럼 다른 배고픈 이들과 나누는 것이 단식이니 말입니다.
† 단식은 절제를 절제는 겸손을 준다. †
-박상대신부-
사순절에 필요한 덕목 중에 하나가 바로 단식이다. 단식은 절제를 말하며 절제는 겸손을 가져온다. 단식(斷食, fasting)은 본래 일정 기간 동안 종교·수행(修行)·의료의 목적으로 모든 음식섭취를 끊는 일이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단식은 그 종교의 기본적 수행에 속하는 덕목이다. 요즘은 자신이나 단체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수단으로, 또는 건강이나 늘씬한 몸매를 가지기 위한 수단으로 단식이 널리 이용되며, 도교에서는 장생불사(長生不死)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이기도 한다.
단식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이슬람교의 라마단(Ramadan)을 손꼽을 수 있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9월에 해당하는 절기로서, 이 기간에 모든 무슬림은 일출에서 일몰까지 해가 떠 있는 동안에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는 철저한 단식규정을 지킨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단식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바, 온 이스라엘이 죄를 벗는 제7월(티쉬리달, 현대력으로는 9월)의 10일에 모든 사람이 단식과 안식을 지켜야 했다.(레위 16,29; 사도 27,9 참조) 유배생활 이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뜻으로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단식하였고, 신약(新約)시대의 직전에는 세례자 요한이 금욕생활을 하였고 그의 제자들도 스승을 본받아 자주 단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마르 1,6; 마태 11,19; 루가 18,12)
따라서 세례자 요한과 그의 제자들이 행한 금욕생활과 단식은 메시아의 도래를 위한 것이며, 도래한 메시아가 예수님이라면 그것은 곧 예수님을 위한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혼인잔치에서의 신랑에 비유하신다.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동안에 신랑이 손님들과 단식을 하거나 곡(哭)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이 와서 슬퍼하거나 아무 것도 먹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술과 음식, 여흥과 춤, 기쁨과 웃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활을 바로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기간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이 때는 결국 새로운 시대의 개벽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하느님나라의 시대이며, 새로운 계약의 시대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선물인 구원의 시대이다. 이 때는 이사야가 예언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이사 65,17; 66,22) 시대이며, 에제키엘이 말하는 묵은 심장이 도려내 나가고 새로운 심장이 심겨지는(에제 36,26) 그런 시대이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주야를 단식하셨듯이(마태 4,2) 예수께도 단식은 있으며, 우리에게도 단식은 필요하다. 단식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준비로는 꼭 필요한 수행이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시기에 행하는 단식은 더 큰 의미로 다가오며, 신랑을 잃게되는 그때는 더욱 더 큰 슬픔과 단식이 있을 것이다.
오늘 금요일에 벌써 성금요일 십자가상 한 장면이 번득 눈앞을 스치는 듯하다. 단식이 자선과 기도와 더불어 사순시기의 중요한 수행덕목이긴 하나 '단식'이라는 수행자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단식은 분명히 '음식섭취'를 중단하거나 조절하는 일이다. 그러나 요즘같이 물자가 풍요로와 먹는 일을 낙(樂)으로 삼고, 단식을 몸매관리의 방편으로 이용하는 시대에 단식의 정신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단식의 정신의 절제이다. 절제(節制)는 방종에 흐르지 않도록 감성적 욕구를 이성으로 제어하는 일이 아닌가? 절제는 9가지 성령의 열매(갈라 5,22) 중의 하나로서 어쩌면 단식보다 더 중요한 덕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방치하는 무절제함의 피해는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부분에 드러나고 있다. 그 중에서 자연생태계의 파괴는 참으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자연의 파괴는 생명의 위협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인간세상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자연이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 따라서 창조질서와 생명을 보전하는 일과 현대 물질문명의 편리함을 절제로서 관리하는 일은 비단 사순시기뿐 아니라 일상(日常)의 덕목으로 제고(提高)되어야 할 일이다. 이는 곧 신앙인 모두가 부여받은 사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절제된' 삶을 사는 것이다.
1991년에 개최된《창조질서 보존 및 완성을 위한 공청회》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오늘날 만연된 자연파괴는 인간의 오만과 탐욕에 보다 근원적인 원인이 있다"고 하였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오만과 탐욕의 감성적 욕구를 제어하는 데는 겸손함이 약이다. 겸손은 절제의 정신으로 닦이고, 절제는 식탐을 조절하는 수행으로도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니 단식 또한 겸손의 시작이요 생명사랑의 첫걸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