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1 창조주일 & 여성주일
창세 1:17-19 / 시편 104:21-35 / 로마 8:19-25 / 루가 12:22-32
창조 세계와 함께 희망하고 행동하기
서구 문명이 들어오기 전, 오랫동안 동아시아인들은 태음력을 위주로 시간을 계산했습니다. 그런데 태음력은 달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날짜의 변화는 알기 쉽지만, 계절의 변화를 알기는 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고대 중국에선 태음력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하는 24절기 개념을 고안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조선시대부터 24절기를 도입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24절기가 오늘날 북경을 포함한 화북(河北)지방을 지나가는 태양을 기준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지형과 약간 차이가 나는 관계로 인해 조선 초기 우리 지형에 맞게 날짜를 약간 조정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오랫동안 24절기를 보고 계절의 변화를 감지했습니다. 그러나 산업화로 인해 온난화가 심해지고 있는 오늘날, 이러한 24절기 역법(曆法)이 점점 무너져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가을을 시작하는 9월의 첫 주일 우리는 창조주일과 여성 선교 주일을 동시에 기념합니다. 1989년 동방정교회 총대주교인 디미트리오스 1세에 의해 9월 1일을 창조축일(The Feast of Creation)로 선포한 이래, 성공회를 비롯해 전 세계 수많은 기독교 교단은 이에 호응하여 한마음 한뜻이 되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9월 1일부터 10월 4일 생태학의 수호성인(The patron saint of ecology)인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 축일까지 창조절(Season of Creation)로 정해 교단을 불문하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를 위해 다함께 예배하고, 기도하며, 실천할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대한성공회도 이 운동에 동참해서 창조 절기 동안 최소한 한 주일을 정해 예배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은 ‘제17차 여성 선교 주일’이기도 합니다. 대한성공회는 여성 선교 활성화를 위해 전국 의회 인준을 거쳐 2008년부터 매해 9월 첫 주일을 여성 선교 주일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대한성공회 여성연합회에선 올해 여성 선교 주일 주제를 “생태적 여성들의 관점으로 본 기후정의”로 정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교회는 창조절이 시작하는 창조축일과 여성선교축일을 함께 기념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천체(天體)가 창조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 첫날에 빛이 먼저 만들어지고 넷째 날이되서야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불이나 태양과 같은 빛의 근원이 있어야 광명(光明)해진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겐 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눈에 보이는 광명보다도 더 근원적인 광명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 빛은 단지 물리적인 광선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빛이란 하느님 자신을 상징하기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사랑, 평화, 은총, 구원도 다 빛을 의미합니다. 그런 면에서 창조 첫날에 언급한 빛과 어둠의 창조는 물리적 질서보다 더 근본적인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의 밝음과 어둠을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창조를 단지 물질적 세계로만 국한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 시대 상황을 비교해 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태음력을 사용했던 바빌론은 달을 신처럼 여겼고, 태양력을 사용했던 이집트는 태양을 신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파라오는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칭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들이 신처럼 여긴 달과 별, 그리고 태양은 하느님이 창조한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히브리인들은 사람의 운명도 태양과 달과 별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주변 민족들과 달리,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섭리 속에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또한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18)”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은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에 애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점은 신들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을 단지 신을 위한 노예나 도구 정도로만 여긴 당시 주변 민족들의 창조 신화와 뚜렷이 구별되는 점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과 달리 세상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로마 8:22-23)”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희망을 인내롭게 기다립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로마 8:19)” 여기서 기다린다고 함은 그저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내와 희망을 품고 주님의 제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달리 표현하자면 행동하는 기다림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신 그런 기다림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의 행동하는 기다림으로 부활로써 죽음의 권세를 이겨냈듯이, 신앙인들도 그 길을 걸음으로써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희망을 잃어버리고, 인내롭게 기다리지 못하고 자포자기한다면 나뿐만 아니라 나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세상 역시 빛을 잃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언급했듯이 우리의 구원은 나 홀로만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다함께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는 창조와 구원을 불가분으로 여기고 있으며, 주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구원 역시 그러하리라는 것을 믿고 희망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어머니 별 지구는 인류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생물이 기후위기, 생물 다양성의 상실 등 창조세계의 고통을 초래하는 우리의 파괴적인 행동으로 인해 울부짖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께서 말씀하신 대로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현대인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불행한 일은 이런 걱정때문에 더 더욱 물질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악순환의 늪에 점점 빠져들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목숨이 음식보다 더 귀하고 몸이 옷보다 더 귀하지 않느냐?(루가 12:23)”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참된 가치는 먹는 것과 입는 것에 의해 평가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먹고 입기 위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목숨과 몸을 주시는 하느님께서 목숨을 부지해 주는 음식과 몸을 가릴 옷도 주실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이러한 하느님께 의지하며 주님이 바라시는 것, 즉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인류는 더 먹고 더 마시는 일에 온통 신경 쓰는 바람에 온갖 난제들 속에 걱정만 한가득 갖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창조 절기와 여성선교주일을 맞아 온갖 걱정을 가득 안고 맹목적으로 달리는 우리를 잠시 멈추고 나와 주변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길 바랍니다. 그리고 태초에 보시니 좋았다고 하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나와 세상을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그 방향을 향하여 인내와 소망을 가지고 다시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세상 만물을 만드시고 선물로 주신 창조주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