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 처음 올라섰던 날. 저의 첫 대사는 “기사님, 이거 형곡동 가죠?” 였습니다.
8살짜리가 낯선 어른에게 먼저 말 걸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조연이었고, 주연인 엄마 손에 붙들려 주연께서 가시는대로 이끌려 다니기만 했습니다. 지금 이 글 읽는 여러분들처럼요.
무대 배경이 여자 목욕탕이거나 동네 시장일 때, 조연에게는 대사조차 없었습니다.
주연 여배우의 대사는 이런 식이었습니다.
“얘가 등치만 컸지 아직 유치원생이에요.”
입구에서는 그렇게 억지로 무사통과 됐지만, 온탕에 부랄 담그고 있다가 같은 반 기 센 여자 반장과 눈이 마주치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났고, 그 친구도 지금쯤 제 생각 하면서 어떤 다른 싸이트 게시판에 글 쓰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제목은
<내 인생 최초의 변태새끼>쯤 되겠죠. ^^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더 이상 조연이고 싶지 않았나봅니다.
그날 역시 엄마 손에 이끌려 백화점에 갔다가 무슨 일로 인해 제가 땡깡을 부리기 시작했고,
저는 혼자 집에 가버리겠다고 독립선언해버린 것이죠. 조연생활의 마지막날이었습니다.
맨날 엄마손만 잡고 다녔으니 집에 가는 버스 번호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모르면 묻는 것이 당연하듯, 8살 짜리 꼬마아이의 첫 대사는 ‘질문’이었습니다.
질문을 꺼내기 전에 마음 속에 두 가지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감히 어떻게 어른한테 먼저 말을 걸어? 혼나면 어쩌지?>
&
<모르면 물어볼 수도 있는 거 아닐까? 꼭 아는 사이여야만 말 걸 수 있는 건가?>
둘 중에 하나를 택합니다.
“기사아저씨, 이거 형곡동 가는 거 맞죠?”
초성이의 첫 주연 데뷔날이었습니다.
엄마가 주연인 줄 알았던 관객들은 아무 말 없던 조연이 갑자기 무대 앞으로 바짝 나와서 대사를 말하기 시작하니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무대에 주연으로 서고자 하는 마음, 욕심.
그것을 감지한대로 실천하는 것.
남의 손에 이끌리거나 남의 대사를 듣고 고개 끄덕이는 조연 역할만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대사를 읊고자 하는 것. 말하며 무대 맨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제 인생 최초의 <자의식>입니다.
8살짜리 꼬마의 자의식은 그 때부터 깨어나서 한참동안 활개를 치고 다녔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선생님이 시켜야 발표하는데, 이 녀석은 자기가 먼저 손들어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의 자의식은 사춘기 때 극도로 과잉되죠.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예쁘다고 할까, 아니면 못생겼다고 할까.
학교 졸업하면 뭐먹고 살지? 내 적성은 과연 무엇일까,
등등, 온통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자의식이 깨어나서 연극의 주연 자리를 꿰어찬 것 까지는 좋은데, 이 때부터 다른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이 ‘다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배우들은 반짝 빛나고 무대의 뒤편으로 조금씩 물러나게 되죠. 결국 도로 조연 신세에 머물게 됩니다.
하지만 소수의 배우들은 이 문제를 훌쩍 뛰어넘거나, 금새 해결합니다. 자기 역할과 대사에 대한 생각만을 너무 많이 하는, 이른바 ‘자의식 과잉’ 상태에서 벗어나서, 다른 사람의 캐릭터와 대사, 그리고 극 전체의 흐름과 통일성에 대한 생각을 떠올릴 줄 아는 능력이 이들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타자의식>이 깨어나는 순간입니다.
타자의식이 있는 배우들은 자기 대사만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대사와 자신의 대사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타자가 대사를 읊을 차례가 되면 한 발 뒤로 물러서 줄 줄 압니다. 연극 무대가 2시간 내내 주연 혼자서 일방적으로 발표하는 것이 아님을 그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를 보좌하던 조연들이 극의 흐름에 따라서는 부분적으로 주연이 될 수도 있음을 너무 잘 알고 있지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이 무대의 주연으로 생각하듯, 저 사람도 자기 자신을 이 무대의 주연으로 생각하겠구나.” 하고, <타자>에게도 ‘자의식’이 존재함을 상상해볼 줄 아는 능력이 있으니까요.
결국은 상상력이 모든 것의 처음이자 끝인가 봅니다.^^
‘자의식’이 깨어났고, 거기다가 ‘타자의식’ 마저 상상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여덟살짜리 꼬마는 어느덧 서른살 아저씨가 되어버렸구요.
그렇게 두 가지 비결로써 무대의 분위기를 잘 이끌어온 배우는 과연 더 이상 부족함 없이
이대로 탄탄대로의 연기생활을 살게 될까요?
그는 또 다른 과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어느 날,
새로운 대본을 받았는데,
도무지 그가 해낼 수 없는 역할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상황이 대본에 적혀 있습니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감정을 표현해내야 되게 생겼습니다.
이 것은 배우가 처음 겪어보는 고통입니다.
기존에는 대본을 고를 때 이런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는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감정만 연기했습니다.
대본 속 캐릭터의 감정이 자기가 일상 생활에서 경험해 본 감정일 때만, 그는 역을 수락했었습니다.
8짜리 꼬마는 버스 기사에게 질문했습니다. 제 발로 혼자서 집에 가고 싶었거든요.
꼬마아이는 더 이상 엄마랑 같이 여탕에 들어가기가 싫었습니다. 같은 반 여자애 만나서 느낀 창피함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8살 이후로 엄마는 그의 손을 잡아끌지 않았습니다. 30년간 그의 등을 떠밀어 무대 맨 앞에 나서게 한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정>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주연배우는 ‘자의식’에 대해서 단단히 착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사가 있으면 무대 맨 앞에 나가서 큰 소리로 멋있게
말하기만 하면 연극의 주인공이 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른 조연들이 연기할 차례가 되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예우하며 자기는 뒤로 한 발 물러서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 높은 경지의 상상력을 요구하는 대본을 읽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 새로운 내용의 대본을 아무리 읽어 보아도 그 상황에 딱 맞는 <감정>을 떠올릴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힌 것입니다. 자의식이 강하다는 것은 가마꾼의 우람한 근육과도 같은 것입니다. 가마 안에 <감정>이 들어와 앉지 않으면 가마꾼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결코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수동적으로도 충분히 떠올릴 수 있었던 감정을,
이제는 능동적으로 상상해내야만 무대에서 배우 노릇을 할 수 있는 상황.
다시 말하면,
가마 안의 주인님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던 가마꾼이 스스로 여행을 떠나야 하는 상황.
그리고 아무 것도 상상해내지 못한 채 막연하게 무대 앞에 나갔다가 연극 전체를 망쳐버리는 비극을 맞이하기도 하고. 관객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동료 배우들이 그를 무대 밖으로 내쫓습니다.
그는 생소한 감정 하나 조차 마음대로 상상해내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실망했고,
결국 스스로 겸손해지게 됩니다.
기존의 ‘자의식’이란 능동적인 정신활동이 아니었습니다.
감정에 등 떠밀려 무대로 나섰을 뿐인 지극히 수동적인 정신활동이었습니다.
그는 화가난 관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난 빈 객석에 앉습니다.
풀이 죽어서 축 처진 어깨로 한 숨을 푹 내쉬며 마찬가지로 텅 빈 무대에 시선을 걸쳐놓았습니다.
관객들의 눈에 난 어떻게 보였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봅니다.
손에 쥐고 있던 대본은 땅바닥에 내려 놓고자합니다.
큰 글씨로 쓰여진 제목이 첫장에 이렇게 인쇄되어 있습니다. <단전호흡>
대본을 손에서 그만 내려놓고
배우는 객석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서
무대 위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상상해 봅니다.
무대에 선 자기 자신의 모습을요.
무대 위의 배우는 객석의 그와 똑같은 자세로 무대 위의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위치만 다를 뿐, 객석의 그와 똑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객석의 배우가 바라봅니다.
그리고 무대의 배우에게 질문합니다.
“초성아, 네가 능동적으로 느껴보고 싶은 게 뭐야?”
가마를 어깨에 짊어진 가마꾼이 가마 안에 앉아있는 자에게 질문합니다.
“초성아, 네가 지금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지?”
객석의 배우가 던진 질문에 무대의 배우가 대답합니다.
“단전호흡의 감각을 느껴보고 싶어. 그런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어.”
그 대답을 듣고 객석의 배우가 말합니다.
“앞서가시는 분들의 글에 의하면, 난 그저 몸통의 바닥면만 상상하면 된대.
그럼 나머지는 네가 다 알아서 할 거래.“
무대의 배우가 멈칫합니다.
“그게 다라고? 정말 그것만 하면 돼?”
“그게 다야. 나는 몸통의 바닥의 촉감을 느끼고, 숨은 네가 쉬고.
네가 거기서 숨을 쉬면, 난 그걸 여기서 구경하기만 하면 된대.“
“분업이구나.”
“초성이와 초성이가 서로 분업하는 건가봐. 그렇다면, 초성에 네가 쉬는 숨에 대해서, 나 초성이는 관여하지 않을게”
“알겠어. 그럼 네가 어서 단전바닥을 상상해 줘.
숨은 내가 알아서 쉴 테니 넌 절대 참관해서는 안 돼. 거기서 그냥 보기만 해.“
“그래. 한 번 믿어봐.”
무의식이 무대에서 연기하고, 그것을 의식이 관람하고.
어쩌면 둘만의 리허설은 생각보다 시간이 꽤 오래 걸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매일 연습이 끝날 때마다 무대의 배우와 객석의 배우는 서로에게 박수를 쳐줄 것입니다.
두 배우는 단전호흡의 성공여부보다,
서로 의기투합할 수 있게 된 점이 더욱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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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님, 꾸벅하고 배꼽인사 드립니닿ㅎ(_ _)ㅎ
어른을 위한 동화같은 얘기네요. 근데 중간에 '큰 글씨로 쓰여진 제목이 첫장에 이렇게 인쇄되어 있습니다. <단전호흡>'부분에서 분위기가 좀 달아가버렸다는 느낌.
어른들을 위한 동화... 예측불허의 과찬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그무엇도 이루어지질 않는다지요^^ 껍질을 깨는 아픔을 겪지 않으면 싹을 티우지 못 하며 또 하늘을 날으는 기쁨을 알수 없답니다 초성님의 뜻 이루시길요^^
여백님의 바램, 모니터를 통과해서 제 눈을 통해 제 배바닥에 닿았습니다ㅎㅎ 오늘도 방금 금강보수련을 했어요. 그런데 최근2년 동안 겪었던 허리통증과 두통증세가 전혀!없었습니다. 지금 저 이 점이 대해 무척 고무되어있어요^!*
초성님 글넘 멋져요.
금강보와 호흡으로 우리도 다른 차원의 삶을 살수 있음 얼마나 좋을까요.. 꾸준히 계속 수련하는수 밖에요...
네, 큰나무님께서 어떤 글에 3차원 그 이상의 삶에 대해 써주신 적이 있죠^^
글 독특하셨네요 초성님. 경험담 잘 봅니다.드리고, 계속 고고고 하시길요 ^^
오오~스틴님ㅋㅋ 오스틴님의 수련근황도 무척 궁금하여요~~
초초~성님ㅎㅎ
요즘 같음.. 수련근황이 아닌 휴식근황이네요. 부끄럽습니다 젊은 분들 열심 수련기를 보다보면요.. ㅠ.ㅠ
그래도 덕분에 동기부여 많이 되어.. 그나마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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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사조차 저의 무의식이 쓴 것인데 사는동안님께서 언급해주시니 그제서야 제 의식도 저 말을 실감할 수가 있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어라....
이 젊은 친구
범상치 않는 친굴세 ^^
저같은 호흡둔재도 드무니 범상치않은 것이 맞나봐요ㅎ
호곡....요렇게 이쁜 글을...
큰나무님의 그늘 아래에서 자란 풀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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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분업, 협업 입니당^!^
<내인생최초의변태새끼>..... 대박!!!
일부분 각성...
초성....
잘생기고...
예의바르고...
술도 잘마시고...
궁금한것도 많고...
.......... 보고싶네...^^**
모를님, 저도 제가 몹시 보고싶습니다!
형곡동~~가요??이거 작년에 제가 버스기사아저씨한테 묻고 햇는걸요!!ㅎㅎ치매걸린 엄마가 그곳에 계셧엇거든요!!언제나 주연~....이신 초성님 글 아침에 대충읽고 출근준비합니다 갓다와서 ,,그 단전연극을 다시 구경꾼으로 천.천.히 새겨볼랍니다!!ㅋㅋ늘 이게 맞나??ㅎㅎ이렇게 나에게 불성실한 한순간들뿐이여서..^^
멋진글 잘읽었습니다.
연극하는 제가 부끄러워지는 글 솜씨네요 멋진글 반성하게 하는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