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대구에서 세례를받았을때에 어느 수도공동체의 도움을 받았다
공장생활에 잘 적응하지못해서 냉담기간을 가졌다
서울로 직장을 옮긴후에 몇년간의 냉담기간을 접고
공소에서 견진을 받았다.
서울서 의왕시 연립에 갈려면 버스를 타덜도 내려서 20분동안 걸어들어가야
했다. 아침 일찍 출근때에나 늦게 집으로 들어갈떄에도 그러했다.
서울에 올라와서 대우통신 소래공장에 근무하면서 kaist를 중심으로 하는
전용라인의 영향을 받아서 그 라인안에 있는 한국경제에서 하는 케이텔망을
이용하는 동아리 모임인 천주교친목모임인 '하늘나라'을 알게되었다.
케이텔은 무료이고 전용선없이 전화선을 이용하는 모뎀으로
온라인 모임을 했다.그당시는주로 온라인모임이 주였고 간혹 오프라인 모임도
가졌다.
전화선은 아무리길게 해도 한통화로 하다가 차츰 시간단위로
전화요금을 부과하는 바람에 전화요금에 부담이 되는 젊은층이
대거 그만두었다
그떄에 서울교구 청년성서모임의 소개를 받았다.
그당시는 6개월단위로 창세기와 탈출기를 하였다.
우리나라는1970년대에는 쪽성경이라고 해서 지금과 같이 한질의 성서책이
없었다 그러나 제2차바티칸공의회의 영향으로 개신교와 함께 한질의 성서번역본을
내었는데 그것이 공동번역성서이다.
공동번역성서가 나온지 20여년이 되었지만 우리는서영공부를 할떄에는
창세기모임시에는창세기쪽성서를 이용했다
쪽 성서와 찰고지와 같은 문제지를 갖고 다녔다.
하늘나라 모임은 마리아니스트 성바오로수도회 예수회등의 수도회의
수사님과 신부님이 이끌어나가셨다
그때에는 우리나라에는 성서를 파일형태로 갖지 못하고 있었다
사제관에서 본 파일형태의 성서는 전부 영어번역본이었다
예수회수사님은 왜관분도수도회의 부탁으로 성서전권을 파일로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하늘나라회원들의 도움을 받아서 전부 다 입력작업을 했다
저는 짧은분량인 여호수아를 맡았다 어떤이는 분량이 많은 창세기를 맡기도 하였다.
요즈음은 정통교회나 천주교회는 신자수가 감소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단교회는 성황이었다. 그들의 모임은 대형체육관을 빌려서 성황이었다
인터넷 유투브에 나오는 여러가지 신앙강론이 어느것이 옳은것인지 알수가 없었다
우리들이 이런것에 빠지는 이유는 성서를 읽기 않기 떄문이라고 하였다.
청년성서모임은 소단위 그룹모임이고 과정은 창세기 탈출기와 마르코복음이었다.
매주 한차례식 육개월간 모여서 해당 성서귀절을 읽고 문제를 풀었는데 그 문제는
지식적인 부분과 생활묵상적인 부분으로 나누었다
그 과정을 할때마다 노트에 기록했으며 그노트를 모아서 봉사자가 연수신청을 하면
참석해서 마치게되면 그 과정 수료가 된다
그 수료가 끝나면 같은 과정에서 그룹봉사자가 되고 그룹봉사를 맡고
그 그룹에 참석한이가 연수를 마치게되면 봉사자는 교구에서 하는 행사에서
봉사자 뺏지를 받게 된다는 것인데
봉사자는 일년에 두차례에 재교육과 연수피정을 받게됩니다
그곳을 통하여 선배봉사자의 경험을 듣게 되고 신부님의 강론을듣게 됩니다
저는 이를 통해서 여러 본당에 파견되어서 말씀봉사자로 활동하게 됩니다
성서형제회는 헌장을 통해서 성서연구와 파급을 위해 애써라고하였지만
제가 청년성서모임에서 했던 어떤것도 이루지 못하였다.
봉사자가 그룹원의 연수신청을 위해서 그동안 작성한 그룹원의 노트를 가지고
교구담당 수녀와 신부님의 점검을 받아서 할수가 있었다.
그때에 신부님은 수고했다면서 여러신앙서적에다 친필로 격려의 글과 싸인을
넣어서 선물로 주셨다.
여러 일련의 피정이나 교육은 여러 수녀님이나 신부님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1972년에 설립된 청녀성서모임이 20주년행사를 하던 1992년도에는 저는 그 모임에
합류하기 이전이었다.
그때에 분명 교구 지도신부님이 계셨고 일년에 여러차례하는 연수회지도를
그 신부님 혼자서 하시게 됭서 어려움이 많았다. 교구에서 권장하는 모임인데도
서울교구 반이상의 본당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 신부님의 동료나 후배들을 개인 인맥을 이용해서 부탁해서
참여하게 하셨다.
이모임을 가능하게 한 것은 교구가 아니라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원에서였다
그 수녀원에서 연수회가 있을때에 참여하셔서 지도해주는 지도수녀님이 계셨다.
우리도 이런 노력이 필요하지 않는가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