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잠은 잘잤냐 오늘 점심은 잘먹었냐
군대리아 먹을려나, 아님 맑은두부국 깍두기 콩나물무침 맛김?? ㅋㅋ 정말 이 애증의 식단은 아직도 나오는지 모르겠네 ㅋㅋ 김밥천국 밑반찬 ㅋㅋ
오늘은 11.10.19 13시 40분
아마 오늘이 마지막 편지일수도 있다.
최하사의 편지 ㅋㅋㅋㅋ
최이등병 편지 이후 많이 써보는 편지구만 ㅋㅋㅋㅋㅋㅋ
이등병시절 보낸편지 벌써 2년전이다 아... 까마득하구만.. 2009년 9월 ㅋㅋㅋㅋㅋㅋ참
그때 나도 한창 ㅃ이 칠때인데 어쨋든 정말 날씨가 춥구나... ㅋㅋㅋ
진짜 얼마안남았다고 느낀다. 그럭저럭 나도 요즘 잘되가는 친구도 있고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어쨋든 지금까지 ㅡㅡ 고무신 게시판에서 편지 쓴거아냐 어쨋든 좀 움쭐함... 곰신 친구들 편지 길게쓰드라고 나도 질수 없지
길게썻지 ㅋㅋ 남의 글을 인용했긴 햇지만 ㅋㅋㅋㅋㅋㅋ
요즘 무슨 훈련받는지 궁금하군 이제 유격 들어가나 끝났을려나 전술학 이런거는 그나마 좀 편하니까
어쨋든 다시 각잡힌 최병장을 보고싶군 몸도 더 좋아졌을라나 아님 더 빠졌을라나
요즘 나도 계속 턱걸이 한다 맨처음에 하나도 제대로 하기 힘들었는데 요즘엔 3개로 한다 언더그립으로 오버그립은 아직 무리 데스
어쨋든 킥복싱도 하고... 살을 일단 빼야 겠더라 ..너무 불었다.....
어쨋든 너하고 중앙 알바할때 외꼰 에게 창씨개명을 권하고 뒤에서는 매국노라고 욕하던 시절이 그립군 ㅋㅋㅋ
그 외꼰은 잘지내나 모르겠네 ㅋㅋㅋ 화장실갔다가 안오는 꼰대 ㅋㅋㅋㅋㅋㅋㅋ 김차장한테 욕먹은 꼰대 ㅋㅋㅋㅋㅋ
어쨋든 아 맞다 오대근은 너 제발 다리 부러져서 걍 나왔으면 좋겟다고 자꾸그러더라 놀사람없다고 ㅋㅋ 대근이도 곧 군대가는구나 ㅋㅋㅋ 어쨋든 나중에 손편지를 쓰든 뭘쓰든 연락하자 마지막편지는
-----------------------------------------------------
이미 스승은 돌아가신 후였지-고죽은 후회와도 비슷한 심경으로 석담선생의 문하로 돌아오던 날을 회상했다. 평생을 쓸쓸하던 문전은 문하와 동도들로 붐볐다. 그러나 누구도 고죽을 반가워하기는커녕 말을 거는 이도 없었다. 다만 운곡선생만이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관상명정(棺上銘旌)은 네가 써라. 석담의 유언이다. 진사니 뭐니 하는 관직은 쓰지 말고 다만 <石潭金公及儒之柩>라고만 쓰면 된다"
그러더니 이내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그 뜻을 알겠는가? 관상명정을 쓰라는 건 네 글을 지하(地下)로 가져가겠다는 뜻이다 석담은 그만큼 네 글을 사랑했단 말이다. 이 미련한 작자야……"
석담과 고죽, 그들 사제간의 일생에 걸친 애증(愛憎)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제서야 고죽은 단 한 번이라도 스승의 모습을 뵙고 싶었으나 이미 입관이 끝난 후여서 끝내 다시 뵈올 수는 없었다…….
"선생님, 이젠 가보시지 않겠읍니까?"
자신의 족자를 펴들고 하염없는 생각에 잠긴 고죽에게 초헌이 조심스레 말했다. 고죽은 순간 회상에서 깨어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봐야지"
그러나 다시 네번째 화방을 나설 때였다. 갑자기 눈앞이 가물거리며 두 다리에 힘이 쑥 빠졌다.
"선생님, 웬일이십니까?"
초헌이 매달리듯 그의 팔에 의지해 축 늘어지는 고죽을 황급히 싸안으며 물었다.
"괜찮다. 다른 곳엘 가보자"
고죽은 그렇게 말했으나 마음뿐이었다. 이상한 전류 같은 것이 등골을 찌르며 지나가더니 이마에 진땀이 스몄다. 그러다가 다섯번째 화방에 들러서는 정신조차 몽롱해졌다.
"이제 그만 돌아보시지요. 가봐야 이제 선생님의 작품은 더 나올 게 없을 겝니다"
화방주인도 그렇게 권했다. 그러나 고죽은 쓰러지듯 응접소파에 앉으면서도 초헌에게 이르기를 잊지 않았다.
"너라두 나머지를 돌아보아라. 만약 나온 게 있거든 이리로 연락해라"
초헌은 그런 고죽의 안색을 한동안 살피다가 말없이 화방을 나갔다.
"작품을 거두어 무엇에 쓰시렵니까?"
한동안을 쉬자 안색이 돌아오고 숨결이 골라진 고죽에게 화방주인이 넌지시 물었다. 그것은 몇 달 전부터 화방골목을 떠도는 의문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고죽은 그 누구에게도 내심을 말하지 않았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다 쓸 데가 있네"
"그럼 소문대로 고죽기념관을 만드실 작정이십니까?"
기념관이라-고죽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가슴속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쓸쓸함이 일었다. 내가 말한들 자네들이 이해해 주겠는가.
"그것도 괜찮은 일이지"
고죽은 그렇게 말하고는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저거 진품인가?"
분명 진품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가 가리킨 것은 추사를 임모(臨謀)한 예서족자였다. 書法有長江萬里 書藝如孤松一枝-원래 병풍의 한 폭이니 족자가 되어 떠돌 리 없었다.
"운봉(雲峰)이란 젊은이가 임서한 것인데 제법 탈속한 격(格)이 있어 받아두었읍니다"
화방주인도 그렇게 대답하며 그 족자를 바라보았다.
"그렇구먼……"
고죽은 희미한 옛 사람의 자태를 떠올리듯 추사란 이름을 떠올리며 의미없는 눈길로 그 족자를 한동안 살폈다. 한 때 그 얼마나 맹렬하게 자기를 사로잡았던 거인이었던가.
석담선생의 집으로 돌아온 고죽은 그 뒤 거의 십 년 가까이나 두문불출 스승의 고가를 지켰다. 한편으로는 외롭게 남은 사모(師母)와 늦게 들인 스승의 양자(養子)를 돌보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수업에 들어갔다. 이미 다 거쳐나온 것들로 여겨 온 여러 서체를 다시 섭렵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모공정(毛公鼎), 석고문(石鼓文)으로부터 진(秦), 한(漢), 삼국(三國), 서진(西晋)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금석 탁본들을 새로이 모으고, 종요(種繇), 위관(衛瑾), 왕희지 부자(父子)로부터 지영(智永), 우세남(虞世南)에 이르는 남파(南派)와 삭정(索靖), 최열(崔悅), 요원표(姚元標)등으로부터 구양순(歐陽詢), 저수량(緖遂良)에 이르는 북파(北派)의 필첩을 처음부터 다시 살폈다. 고죽이 만년에 보인 서권기로 미루어 그 동안의 학문적인 깊이도 한층 더해졌음에 틀림이 없다. 문밖에서는 해방과 동족상잔의 전쟁이 휩쓸어 가고 있었으나 그 어떤 혼란도 고죽을 석담선생의 고가에서 끌어내지는 못했다.
그 서결을 통해서 석담 문하에 들어선 고죽이 추사와 새롭게 만나게 된 것도 그 기간 동안이었다. 그 거인은 처음 한동안 그가 힘들여 가고 있는 길 도처에서 불쑥불쑥 나타나 감탄을 자아내다가 이윽고는 온전히 그를 사로잡고 말았다. 일찌기 경험해 보지 못한 일로, 그것은 특히 스승 석담에 대한 새삼스런 이해와 사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생전에 스스로 밝힌 적은 없었지만 분명 스승은 추사의 학통을 잇고 있었다. 아마도 스승은 그 마지막 전인(傳人)이었으리라. 그리고 스승이 가르침에 있어서 그토록 말을 아낀 것은 그와 같은 거인의 가르침에 더 보탤 것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추사도 끝까지 고죽을 사로잡고 있지는 못했다. 스승 석담이 일찌기 그를 받아들일 것을 주저했으며, 생전 내내 경계하고 억눌렀던 고죽의 예인적인 기질이 승화된 형태이긴 하지만 차츰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먼저 고죽이 끝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추사의 예술관이었다. 예술은 예술로서만 파악되어야 한다고 보는 고죽의 입장에서 보면 추사의 예술관은 학문과 예술의 혼동으로만 보였다. 문자향(文字香)이나 서권기는 미를 구현하는 보조수단 또는 미의 한 갈래일 수는 있어도 그것이 바로 미의 본질적인 요소거나 그 바탕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추사에게 그토록 큰 성취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다만 그 개인의 천재에 힘입었을 뿐이었다. 거기다가 그의 서화론이 깔고 있는 청조(淸朝)의 고증학(考證學)은 겨우 움트기 시작한 우리 것(國風)의 추구에 그대로 된서리가 되고 말았으며, 그만한 학문적인 뒷받침이 없는 뒷사람에 이르러서는 이 땅의 서화가 내용 없는 중국의 아류로 전락돼 버리게 한 점도 고죽을 끝까지 사로잡을 수 없던 원인이었다. 결국 추사는 스승 석담처럼 찬탄하고 존경할 만한 거인이기는 하지만 예술에 있어서의 노선(路線)까지 따를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화방주인의 예상대로 초헌은 한 시간쯤 뒤에 빈손으로 돌아왔다. 나머지 여섯 곳을 다 돌았지만 밤 사이에 나온 고죽의 작품은 없었다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고죽은 말리는 그를 억지로 앞세우고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그 책임자를 달래 그곳에 있는 권학문(勸學文) 한폭을 되거둬들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국 거기서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융통성 없는 관장과 언성을 높이다가 혼절해 버린 것이었다.
고죽이 눈을 뜬 것은 오후 늦게였다. 자기 방에 누워 있었는데 주위에는 몇몇 낯익은 얼굴들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둘러앉아 있었다. 고죽은 천천히 눈을 돌려 그들을 살펴보았다. 무표정한 초헌 곁에 두 사람의 옛 제자가 앉아 있고 그 곁에 운 흔적이 있는 추수가 앉아 있다가 눈을 뜬 고죽에게 울먹이는 소리로 물었다.
"아버님,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고죽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고 계속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추수 곁에 다시 낯익은 얼굴이 하나 앉아 있었다. 고죽에게는 첫번째 수호제자(受號弟子)가 되는 난정(蘭丁)이었다. 뻔뻔스러운 놈…… 그를 보는 고죽의 눈길이 험악해졌다. 난정은 고죽이 석담선생의 고가에 칩거할 초기부터 나중에 서실을 연 직후까지 거의 십 년 세월을 고죽에게서 배웠다. 나이 차가 불과 십여 년밖에 안되고, 입문할 때 벌써 사십에 가까왔으며, 또 나름대로 어느 정도 글씨를 익힌 상태였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호까지 지어 준 어엿한 제자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발길을 뚝 끊더니 몇 년 후에 스스로 서예원을 열었다. 고죽은 자기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난 제자가 서운했지만, 기가 막힌 것은 그 뒤였다. 난정이 스스로를 석담선생의 제자라고 내세우면서 고죽은 단지 사형(師兄)으로 그와 함께 십여 년 서화를 연구했다고 떠벌리고 다닌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고죽이 불같이 노해 그의 서예원으로 달려갔다. 함부로 배분(配分)을 높인 제자를 꾸짖으러 간 것이었지만 결과는 난정을 여러 사람 앞에서 시인해 준 꼴이 되고 말았다.
"어이구, 형님 웬일이십니까?"
수많은 문하생들 앞에서 그렇게 빙글거리며 시작한 그는 끝까지 "아이구, 형님"이요, "우리가 함께 수련할 때……"였다. 그리고는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을 욕한 고죽을 석담선생이 살아 있을 때 몇 번 드나든 것을 앞세워 모욕죄로 법정에까지 불러들였다. 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아버님, 이분께서 아버님의 대나무 두 폭을 가져오셨어요"
난정을 보는 눈이 험악해지는 것을 보고 추수가 황급히 설명했다.
"선생님께서 거두어들인다시기에……제가 가진 것을 전부 가져왔읍니다"
그렇게 더듬거리는 난정에게도 옛날의 교활함은 보이지 않았다. 그도 벌써 육십에 가까운가---못 보고 지난 십여년 사이에 눈에 띄게 는 주름을 보며 고죽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가슴속의 응어리는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알았네. 가보게"
잠시 후 간신히 끓는 속을 가라앉힌 고죽이 힘없이 말했다.
"그럼…… 여기 두고 가겠읍니다"
난정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렇게 말하며 어두운 얼굴로 방을 나갔다. 잠시 방 안에 무거움 침묵이 흘렀다. 다시 추수가 그 침묵을 깨뜨렸다.
"재식(在植)이 오빠에게서 전화가 있었어요"
"언제 온다더냐?"
"밤에는 도착할 거예요. 윤식(潤植)이에게도 연락할까요?"
"그래라"
고죽이 한숨처럼 나직이 대답했다. 재식이는 죽은 본처에게서 난 맏아들이었다. 원래 남매를 보았으나 딸아이는 6·25때 죽고 그만 남은 것이었다. 윤식이는 마지막으로 데리고 살던 할멈에게서 난 아들로 고죽에게는 막내인 셈이었다. 재식이는 벌써 마흔셋, 부산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고, 윤식이는 갓스물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별로 자상한 아버지는 못 되었지만, 통상으로 아들들을 생각하며 언제나 어린 윤식이가 마음에 걸렸다. 겨우 열세살 때 어머니를 잃고 이복누이인 추수 손에 자라난 탓이리라. 그러나 그날만은 웬지 재식의 얼굴이 콧마루가 찡하도록 그립게 떠올랐다. 찌들어 가는 중년남자로서가 아니라 거지와 다름없이 떠도는 걸 찾아왔을 때의 열여섯 소년인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몇십 년을 거의 잊고 지낸 본처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죽이 운곡선생의 중매로 아내를 맞은 것은 스물두살 때의 일이었다. 운곡선생의 먼 질녀뻘이 되는 경주 최문(崔門)의 여자였다. 얼굴은 곱지도 밉지도 않았지만 마음씨는 무던해서 고죽의 기억에는 한번도 그녀가 악을 쓰며 대들던 모습이 없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은 처음부터 그리 행복한 것은 못 되었다. 고죽의 젊은날을 철저하게 태워 버린 서화에의 열정 때문이었다. 신혼의 몇몇 날을 제외하면 고죽은 거의 하루의 전부를 석담선생의 집에서 보내었고, 집에 돌아와서도 정신은 언제나 가사(家事)와는 먼 곳에 쏠려 있었다. 생계를 꾸려 가는 것은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다. 수입이라고는 이따끔씩 들어오는 붓값이나 석담선생이 갈라 보내는 쌀말 정도여서 그녀가 삯바느질과 품앗이로 바쁘게 돌아도 항상 먹을 것 입을 것은 부족하였다.
그래도 고죽이 석담 문하에 있을 때는 나았다. 정이야 있건 없건 한지붕 아래서 밤을 보냈고, 아이들도 남매나 낳았으며, 가끔씩은 가장(家長)으로서 할 일도 해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죽이 석담의 문하를 떠나면서부터 그나마도 끝나고 말았다. 온다간다 말도 없이 훌쩍 집을 나선 그는 그 뒤 십 년 가까운 세월을 떠돌면서 처자를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아직 살아 있는지 이미 죽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고죽에게 있어서 아내와 아이들은 거북살스러워도 참고 입어야 하는 옷 같은 존재였다. 하나의 구색(具色), 또는 필요만큼의 의무였으며----그것이 그토록 훌훌히 아내와 아이들을 떨치고 떠날 수 있었던 이유였고, 또한 한번 떠난 후에는 비정하리만치 깨끗하게 그들을 잊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실제로 아내는 몇 번인가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고죽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고죽은 뒷날 스스로도 잘 이해 안 될 만큼의 냉정함으로 그녀를 따돌리곤 했다. 어린 남매를 데리고 어렵게 살아가는 그녀에 대한 연민보다는 자기 삶의 진상을 보는 듯한 치욕과 까닭 모를 분노 때문이었으리라. 단 한 번 딸을 업고 그가 묵고 있는 여관을 찾아온 그녀에게 돈 7원과 고무신 한 켤레를 사준 적이 있는데, 그것도 아내와 자식이었기 때문이기보다는 헐벗고 굶주린 자에 대한 보편적인 동정심에 가까웠다. 그때 아내의 등에 업힌 딸아이는 신열로 들떠 있었고, 먼지 앉은 아내의 맨발에 꿰어져 있던 고무신은 코가 찢어져 자꾸만 벗겨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나마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견디다 못한 아내는 결국 고죽이 집을 나선 지 오 년 만에 어린 남매와 함께 친정으로 의지해 갔다. 고죽이 매향과 살림을 차리던 그 해였다. 그리고 다시 이듬해는 친정오라버니가 있는 대판(大阪)으로 이주해 버린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듣기로는 그곳에서 오빠의 권유로 개가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데려가기로 하고 친정에 맡겨둔 남매를 끝내 데려가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소문은 사실임에 틀림없었다. 고죽이 다시 재식 남매를 거두어들인 것은 오대산에서 내려와 석담 문하로 돌아온 몇해 후였는데, 그때 재식은 벌써 열여섯, 그 밑의 딸아이는 열 한 살이었다.
고죽은 그가 아내를 돌보지 않은 것에 대해 한 번도 미안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듯이 자기와 아이들을 버리고 떠난 그녀를 결코 원망하지 않았다. 그것은 평생 동안 수없이 그를 스쳐간 모든 여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매향처럼 살림을 차렸던 몇몇 기생들이나 노년을 함께 보낸 두 할멈은 물론 서화로 맺어졌던 여류(女流)들도 지속적인 열정으로 그를 사로잡지는 못했던 것이다. 상대편 여자들이 어떠했건 고죽의 그런 태도만으로 그의 삶은 쓸쓸하게끔 운명지어져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내가 진정으로 열렬하게 사랑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일생을 골몰하여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사이 하나 둘 빠져나가고 초헌만 목상처럼 앉아 있는 병실을 힘없이 둘러본 고죽은 다시 짙은 비애와도 흡사한 회상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물론 그것은 서화였다. 이미 보아 온 것처럼 그에게는 애초부터 가족이나 생활의 개념이 없었다. 소유며 축적이란 말도 그에게는 익숙한 것이 아니었고, 권력욕이나 명예욕 같은 것에 몸달아 본 적도 없었다. 언뜻 보기에는 분방스럽고 다양해도 사실 그가 취해 온 삶의 방식은 지극히 단순했다. 자기를 사로잡는 여러 개의 충동 중에서 가장 강한 것에 사회적인 통념이나 도덕적 비난에 구애됨이 없이 충실하는 것, 말하자면 그것이 그를 이해하는 실마리이기도 한 그의 행동양식이었다. 그런데 가장 세차면서도 일생을 되풀이된 충동이 바로 미적(美的) 충동이었고, 거기에 충실하는 것이 그의 서화였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것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었단 말인가. 고죽은 다시 자족적인 기분이 되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직도 그것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다는 것인가…….
스승 석담과의 관계에서 알 수 있듯이, 고죽의 전반생(前半生)은 두 개의 상반된 예술관 사이에 끼어 피흘리며 괴로워한 세월이었다.
동양에서의 미적 성취, 이른바 예술은 어떤 의미로 보면 통상 경향적(傾向的)이었다. 애초부터 통치수단의 일부로 출발한 그것은 그 뒤로도 끝내 정치권력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때로는 학문적인 성취나 종교적 각성에 의해서까지도 침해를 입었다. 충성이나 지조 따위가 가장 흔한 주제가 되고, 문자향이니 서권기니 하는 말과 마찬가지로 도골선풍(道骨仙風)이니 선미(禪味)니 하는 말이 일쑤 그 높은 품격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는 것이 그 예일 것이다.
물론 서양에 있어서도 근세까지는 사정이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랜 기간 예술은 제왕이나 영주(領主)들의 궁성을 꾸미거나 권력이며 부(富)에 기생하였고, 또는 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데 바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형성과 더불어 그들의 예술은 주체성을 획득하고 팔방미인격인 동양의 예술가와는 다른 그 특유의 인간성을 승인받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술을 강력한 인접가치로부터 독립시키고, 예민한 감수성이나 풍부한 상상력 같은 이른바 예술적 재능도 하나의 사회적 가치로 평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고죽이 태어날 때만 해도 시대는 아직 동양의 전통적인 예술관에 얽매어 있었다. 예인(藝人)은 대부분 천민(賤民)계급에 속해 있었으며, 그들의 특질은 역마살이나 무슨 <-기>로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예술의 정수는 여전히 학문적인 것에 있었고, 그 성취도 도(道)나 선정(禪定)에 비유되고 있었다. 그리고 석담선생은 아마도 끝까지 그런 견해에 충실했던 마지막 사람이었다.
서구적인 견해로 보면 고죽은 타고난 예술가였다. 그러나 석담선생의 눈에는 천박하고 잡상스런 예인 기질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고죽의 개성이 보다 약했거나 그가 태어난 시대가 조금만 일렀다면, 그들 사제간의 불화는 그토록 길고 심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죽은 자기의 예술이 그 본질과는 다른 어떤 것에 얽매이는 것을 못 견뎌했고, 점차 시민사회로 이행해 가는 시대도 그런 그의 편에 서 있었다. 정말로 그들 사제간을 위해 다행한 것은 스승의 깊은 학문에 대한 제자의 본능적인 외경(畏敬) 못지않게, 스승에게도 제자의 타고난 재능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어 늦게나마 화해가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석담선생의 문하로 돌아왔다고 해서 고죽의 정신적인 방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시 십년 간의 칩거를 통해 고죽은 스승의 전통적인 예술관과 화해를 시도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추사에의 앞뒤없는 몰입과 어쩔 수 없는 이탈이 바로 그 과정이었다.
그 뒤 다시 이십 년-나름대로 끊임없이 연마하고 모색해 온 세월이었지만 과연 나는 구하던 것을 얻었던가. 그러다가 고죽은 혼절하듯 잠이 들었다.
고죽이 이상한 수런거림에 다시 눈을 뜬 것은 이미 날이 저문 후였다.
"곧 통증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막아 드리지요"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며 이불을 젖혔다. 정박사였다. 이어 살갗을 뚫고드는 주사바늘의 느낌이 무슨 찬바람처럼 몸을 오싹하게 했다. 방안에 앉은 사람들의 수가 늘어 있었다. 고죽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버님, 절 알아보겠읍니까? 재식입니다"
주사바늘을 뽑기가 무섭게 언제 왔는지 맏아들 재식이 울먹이며 손을 잡았다. 열 여섯에 거두어들인 후로도 언제나 차거운 눈빛으로 집안을 겉돌던 아이, 그 아이가 첫번째로 집을 나간 날이 새삼 섬찟하게 떠오른다. 제 이름이라도 쓰게 하려고 붓과 벼루를 사준 이튿날이었다. 망치로 부수었는지 밤톨만한 조각도 찾기 힘들 만큼 박살이 난 벼루와 부채살처럼 쪼개 놓은 붓대, 그리고 한웅큼의 양모(羊毛)만 방 안에 흩어놓고 녀석은 사라지고 없었지. 그 뒤 그가 군에 입대할 때까지 고죽은 속깨나 썩였었다. 낙관도 안 찍은 서화를 들고 나가기도 하고, 금고를 비틀어 안에 든 것을 몽땅 털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제대하고 돌아와서부터 기세가 좀 숙여지더니, 덤프트럭 한 대 값을 얻어 나간 후로는 씻은 듯이 발길을 끊었다. 그가 다시 고죽을 보러 오기 시작한 것은 마흔 줄에 접어든 재작년부터였다.
"윤식이도 왔어요"
추수가 흐느끼는 윤식의 손을 끌어 고죽의 남은 손에 쥐어 주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보기 흉할 정도로 부어 있었다. 각각 어미가 다른 불쌍한 것들, 몹쓸 아비였다. 이제 너희에게 남기는 약간의 재물이 아비의 부족함을 조금이라도 메꾸어줄는지…… 고죽은 이미 그들 삼남매를 위해 유산을 몫지어 놓았었다. 근교에 있는 과수원은 재식의 앞으로, 서실 건물은 윤식이 앞으로, 그리고 살고 있는 집은 추수에게, 그러고 보니 나머지 동산(動産)으로 문화상(文化賞)이라도 하나 제정할까 하던 계획을 취소한 것이 새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무관하게 지내온 사회라는 것에 대해 삶의 막바지에 와서 그런 식으로 아첨하고 싶지는 않은 탓이었다.
"이 사람들, 진정하게. 사람을 이렇게 보내는 법이 아니야"
둘러앉은 사람들 중에서 어떤 여자 하나가 흐느끼는 삼남매를 말렸다. 그리고 그들을 대신하여 고죽의 두 손을 감싸쥐면서 가만히 물었다.
"절 알아보시겠어요?"
벌써 약효가 퍼지는지 고죽은 풀리는 시선을 간신히 모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옥교(玉橋)라는 여류 서예가였다. 고죽의 첩(妾)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 정도로 한때 몰두했던 여자였는데, 지금은 근교에서 자신의 서실을 가지고 조용히 살고 있었다. 알지, 알고말고…… 그러나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혼곤한 잠이 먼저 고죽을 사로잡았다.
금시조가 날고 있었다. 수십 리에 뻗치는 거대한 금빛 날개를 퍼득이며 푸른 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날개짓에는 마군(魔軍)을 쫓고 사악한 용을 움키려는 사나움과 세참의 기세가 없었다. 보다 밝고 아름다운 세계를 향한 화려한 비상의 자세일 뿐이었다. 무어라 이름할 수 없는 거룩함의 얼굴에서는 여의주가 찬연히 빛나고 있었고, 입에서는 화염과도 같은 붉은 꽃잎들이 뿜어져 나와 아름다운 구름처럼 푸른 바다 위를 떠돌았다. 그런데 그 거대한 등 위에 그가 있었다. 목깃 한가닥을 잡고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매달려 있었다. 갑자기 금시조가 두둥실 솟아오른다. 세찬 바람이 일며 그의 몸이 한곳으로 쏠려 깃털 한올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점점 손에서 힘이 빠진다. 아아…… 깨고 보니 꿈이었다. 꽤 오랜 시간을 잔 모양으로, 마루의 괘종시계가 새벽 네 시임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통제의 기운이 걷힌 탓인지 형용할 수도 없고 부위(部位)도 짐작이 안 가는 그야말로 음험한 동통이 온 몸을 감돌고 있었지만, 정신만은 이상하게 맑았다.
문병객은 대부분 돌아가고 없었다. 남은 것은 벽에 기대 잠들어 있는 재식이 형제와 책궤에 엎드려 자고 있는 초헌뿐이었다. 고죽은 가만히 상체를 일으켜 보았다. 뜻밖에도 쉽게 일으켜졌다. 허리의 동통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러자 문득 자기가 할 일이 남았다는 것을 상기했다.
"상철아"
고죽은 조용한 목소리로 초헌의 이름을 불렀다. 미욱해 보이는 얼굴에 비해 잠귀는 밝은 듯 초헌은 몇 번 부르지 않아 머리를 들었다.
"서, 선생님, 무슨 일이십니가?"
잠이 덜 깬 눈에도 상체를 벽에 기대고 있는 고죽이 이상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황급히 일어나 고죽을 부축하려고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고죽은 손짓으로 그를 저지한 후 말했다.
"벽장과 문갑에서 그간 거두어들인 서화를 꺼내라"
"네?"
"모아놓은 내 글씨와 그림들을 꺼내 놓으란 말이다"
그러자 초헌은 일어나서 시키는 대로 했다. 여기저기서 꺼내 놓고 보니 이백 점이 훨씬 넘었다. 액자는 모두 빼 없앴는데도 제법 방 한구석에 수북했다.
"아버님, 뭘 하십니까?"
그제서야 재식이와 윤식이도 깨어난 눈을 비비며 궁금한 듯 물었다. 고죽의 행동이 거의 아픈 사람 같지 않아서, 간밤에 정박사가 한 말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고죽은 대답 대신 초헌에게 물었다.
"이 방의 불을 좀더 밝게 할 수 없겠느냐?"
"스탠드가 어디 있는 것을 보았는데…… 한번 찾아보겠읍니다"
여간해서는 고죽이 하는 일을 캐묻지 않는 초헌이 그렇게 말하며 밖으로 나가더니 잠시 후에 스탠드 하나를 찾아왔다. 방 안이 갑절이나 밝아지자 고죽은 다시 초헌에게 명했다.
"지금부터 그걸 하나씩 내게 펴보이도록 해라"
초헌은 여전히 말없이 고죽이 시키는 대로 했다. 첫장은 고죽이 삼십 대에 쓴 것으로 우세남(虞世南)의 체를 받은 것이었다.
"우백시(虞伯施)의 글인데, 오절(五節=덕행, 충직, 박학, 文辭 등)을 제대로 본받지 못했다. 왼쪽으로 미뤄 놓아라"
그 다음은 난초를 그린 족자였다.
"이미 소남(所南=정사초)을 부인해 놓고 오히려 석파(石坡=대원군)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구나. 산란(山蘭)도 심란(心蘭)도 아니다. 왼쪽으로 미뤄 놓아라"
고죽은 한 폭 한 폭 자평(自評)을 헤나갔다. 오랜 원수의 작품을 대하듯 준엄하고 냉정한 평이었다. 글씨에 있어서는 법체(法體)를 본받은 경우에는 그 임모(臨謀)나 집자(集字)의 부실함을 지적하고, 그리고 자기류(自己流)의 경우에는 그 교졸(巧拙)과 천격(賤格)을 탓하면서 모두 왼편으로 제쳐놓았다. 그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옛법의 엄격함에다 자신의 냉정한 눈까지 곁들이니, 또한 오른편으로 넘어갈 게 없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그 작업은 아침해가 높이 솟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중에 정박사가 몇 번이고 감탄했던 것처럼 거의 초인적인 정신력이었다. 아침부터 몰려든 사람들로 고죽의 넓은 병실은 어느덧 발디딜 틈 없이 빽빽해졌다. 그러나 엄숙한 기세에 눌려 누구도 그 과도한 기력의 소모를 말릴 엄두를 못 냈다. 고죽도 초헌 외에는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열 시가 넘어서야 분류가 끝났다. 결국 초헌의 오른쪽으로 넘어간 서화는 단 한 폭도 없었다.
"더 없느냐?"
마지막까지 간절한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의 작품을 검토하고 있던 고죽이 더 이상 제자의 무릎 앞에 놓인 서화가 없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이상하게 불안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초헌이 무감동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고죽의 얼굴에 일순 처량한 빛이 떠돌더니 그때까지 꼿꼿하던 고개가 힘없이 떨구어지며 그의 몸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무슨 끔찍한 일이라도 당한 줄 알고 몇 사람이 얕은 외마디소리와 함께 고죽 주위로 모였다. 그러나 고죽은 그 순간도 명료한 의식으로 내면의 자기에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결국 보이지 않았다. 나 역시 일생에 단 한 번이라도 그걸 보고자 소망했지만, 어쩌면 그 소망은 처음부터 이룰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실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이 일을 미루어 온 것인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고죽이 그의 일생에 걸친 작품에서 단 한 번이라도 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그 새벽의 꿈에서와 같은 금시조였다. 원래 그 새가 스승 석담으로부터 날아올 때는 굳센 힘이나 투철한 기세 같은 동양적 이념미의 상징으로서였다. 그러나 고죽이, 끝내 추사에 의해 집성되고 그 학통을 이은 스승 석담에게서 마지막 불꽃을 태운 동양의 전통적 서화론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그 새 또한 변용되었다. 고죽의 독자적인 미적 성취 또는 예술적 완성을 상징하는 관념의 새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미 생애 곳곳에서 행동적으로 표현되긴 하였지만, 특히 후인을 지도하면서 보낸 마지막 이십 년 동안에 뚜렷이 드러나게 된 고죽의 서화론은 대개 두 가지 점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그 하나는 전통적인 견해가 글씨로써 그림까지 파악한 데 비해 그는 그림으로써 글씨를 파악하려는 점이었다. 만약 글씨를 쓴다는 것이 문자로 뜻을 전하는 과정에 불과하다면 서예란 일생을 바칠 만한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붓으로도 몇달이면 뜻을 전할 만큼은 되고, 더구나 연필이나 볼펜 같은 간단한 필기구가 나온 지금에는 단 며칠로도 충분하다. 그러므로 서예는 의(意)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情)에 있으며 글씨보다는 그림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특히 서예가 상형문자인 한문을 표현수단으로 사용하는 동양권에서만 발달하고 표음문자를 쓰는 서양에서는 발달하지 못한 것도 그 까닭이다. 그런데도 글씨로만 파악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림이었던 문인화(文人畵)까지도 문자의 해독을 입고 끝내 종속적인 가치에 머물러 있었다-이것이 고죽의 주장이었다.
그 다음 고죽의 서화론에서 특징적인 것은 물화(物畵)와 심화(心畵)의 구분이었다. 물화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서 거기다가 사람의 정의(情意)를 의탁하는 것이고, 심화란 사람의 정의를 드러내기 위해 사물을 빌어오되 그것을 정의에 맞추어 가감하고 변형시키는 것인데, 아마 서양화의 구상(具象) 비구상에 대응되는 것 같다. 고죽은 전통적인 서화론에서 그 두 가지가 묘하게 혼동되어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 구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서화가에 있어서 그 둘의 관계는 우열의 관계가 아니라 선택적일 뿐이며, 문자향이니 서권기 같은 것은 심화에서의 한 요소이지 서화 일반의 본질적인 요소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고죽의 금시조는 그런 서화론의 바다에서 출발하여 미적(美的) 완성을 향해 솟아오르는 관념의 새였다. 죽음을 생각해야 할 나이에 이르면서부터 고죽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서원(誓願)의 하나는 자기의 붓끝에서 날아가는 그 새를 보는 일이었다. 그는 그것으로 자신의 일생에 걸친 추구가 헛되지 않았으며 괴로웠던 삶도 보상될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그는 끝내 그 새를 보지 못했다. 그가 힘없이 자리로 무너져내린 것은 단순히 기력을 지나치게 소모한 탓만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이나 친지들은 고죽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는 채 오 분도 되지 않아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처럼 상체를 일으키더니 뚜렷한 목소리로 초헌을 불렀다.
"이걸 싸서 밖으로 가지고 나가거라. 장독대 옆 화단이다"
"?……"
좀체 스스의 말을 되묻지 않는 초헌도 그때만은 좀 이상한 모양이었다.
"나는 저것들로 일평생 나를 속이고 세상 사람들을 속여 왔다. 스스로 값진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당연한 듯 세상 사람들의 감탄과 존경을 받아들였다"
"무슨 말씀을……"
"물론 그와 같은 삶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것들에서 솟아오르는 금시조를 보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것으로 내 삶이 온전한 것으로 채워질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설령 내가 그 새를 보았다 한들 과연 그러할지 의문이다"
"……"
"자, 그럼 이제 시키는 대로 해라. 이것들을 남겨두면 뒷사람까지도 속이게 된다"
그러자 초헌은 말없이 서화 꾸러미를 안고 문을 나섰다. 스승의 참뜻을 알아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더는 영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인지도 알 수 없지만,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그런 초헌을 말리러 나서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고죽을 감돌고 있는 이상한 위엄과 기품에 압도된 탓이었다.
"문을 닫지 마라"
초헌이 나가고 누군가 문을 닫으려 하자 고죽이 말했다. 그리고 마당께로 걸어가고 있는 초헌을 향해 임종을 앞둔 병자답지 않게 높고 뚜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다. 모두 내려놓아라"
방 안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장독대 곁 화단이었다. 몇 포기 시들어가는 풀꽃 옆에 초헌이 서화 꾸러미를 내려놓자, 고죽이 다시 소리높여 명령했다.
"불을 질러라"
그제서야 방 안이 술렁거렸다. 일부는 고죽을 달래고 일부는 달려나와 초헌을 붙들었다. 무두가 쓸데없는 소란이었다. 자기를 달래는 사람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고죽이 돌연 벽력 같은 호통을 쳤다.
"어서 불을 붙이지 못할까!"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초헌이었다. 그 역시 까닭 모르게 노한 얼굴이 되어 잠깐 고죽을 노려보더니, 말리려는 사람을 거칠게 제쳐 버리고 불을 질렀다. 뒷날 고죽을 사이비(似而非)였다고까지 극언한 것으로 보아, 그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석담선생적(的)인 기질이 고죽의 그 철저한 자기부정(自己否定) 또는 지나친 자기비하(自己卑下)에 반발한 것이리라. 마를 대로 마른 종이와 헝겊인데다가 개중에는 기름까지 먹인 것도 있어 서화더미는 이내 맹렬한 불꽃으로 타올랐다. 신음 같은 탄식과 숨죽인 흐느낌과 나지막한 비명들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어떤 사람에게는 고죽 일생의 예술이 타고 있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처절한 진실이 타오르고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죽의 삶 자체가 타는 듯도 보였다. 드물게는 불타는 서화더미가 그대로 그만한 고액권 더미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반 세기 가깝게 명성을 누려 온 노대가, 두 대통령이 사람을 보내 그의 서화를 얻어가고, 국전 심사위원도 한 마디로 거부한 고죽의 전적(眞蹟)들이 한꺼번에 타 없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고죽은 보았다. 그 불길 속에서 홀연히 솟아오르는 한 마리의 거대한 금시조를. 찬란한 금빛 날개와 그 험한 비상을. -고죽이 숨진 것은 그날 밤 8시경이었다. 향년 72세--------여기서 줄이도록하마 훈련열심히받아라
그리고 편지 전해주시는 근무자 분께 항상 감사하고 죄송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특전사 화이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