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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온(伯溫) 劉基(유기)
憶昔揚州看月華 억석양주간월화
滿城絃管滿人家 만성현관만인가
可憐今夜中秋月 가련금야중추월
獨照寒蛩泣細紗 독조한공읍세사
생각난다 그옛날 양주에서
밝은 달 구경하던 일이
양주 성안에 어느집이나
음악소리 가득하였다.
가련하구나!
오늘 밤 중추명월이
명주 창문가에서 우는 귀뚜라미 비추는 것을 본다.
憶昔 억석=오래전에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함
揚州 양주= 옛날, 구주(九州)의 하나. 장쑤(江蘇) 성에 있는 도시의 이름.
看=볼 간.
月華월화=달에서 비쳐 오는 빛
滿城만성=성안 가득.
絃管현관=현악기,관악기.
滿만=가드할 만.
人家 인가=사람이 사는 집.
可憐가련=가련, 가엾음.2.귀여움, 사랑스러움.
今夜금야=오늘 밤.
中秋月 중추월=음력 8월
獨照 독조=홀로 비추다.
寒=찰 한.
蛩=귀뚜라미 공, 그리마 공. 메뚜기 공.
그리마(house centipede)는 그리마과(Scutigeridae, 그리맛과)에 속하는
지네나 노래기와 같은 벌레와 생김새가 유사하며,한국에서는 돈벌레 또는
"쉰발이/신발이"로 부르기도 한다
泣=울 읍.
細紗세사=가는 명주의 창문. 紗=깁 사, 미미할 묘. 엷은 견직물의 하나.
劉基(유기)
유기는 명나라 개국공신의 한 사람으로 명나라 건국 후 어사중승과 태사령을 역임했다.
그는 원나라 말기인 1311년 절강성 처주(處州)에서 태어났고,
자는 백온(伯溫),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뛰어난 모사가로 ‘과거 500년을 알았고
미래 500년을 알았던 인물’로 평해지며, 중국 민간에서는 그에 관한 다양한
전설적인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천문, 지리, 역법, 군사 등 많은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 제갈량에 비견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제갈량이 후한 말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리는 삼국 구도를 정립했다면,
유기는 원나라 말기의 혼란을 잠재우고 천하를 하나로 통일했다고 여겨진다.
유기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학문을 하는 데 있어 그 범위에 구속되지 않아
천문, 경학, 술법(術法), 병법에도 정통했다.
원나라 문종 때 스물세 살의 나이에 진사과에 합격해 강서 지역에 파견되어
고안현승, 강절유학부제거 등의 고위 직책들을 거쳤으나
정치적 반대 세력들에게 여러 번 배척당해 사직했다.
당시는 원나라 말기로 황제는 무능했고 뇌물을 받지 않는 관리가 없을 정도로
조정은 부패했다. 원나라 조정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동남 지역에서는
반란이 빈번했다. 1348년 절강성의 방국진(方國珍)이 해상 반란을 일으켰다.
원 조정은 유기를 보내 방국진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했다.
그러나 방국진은 원 조정에 뇌물을 주고 위기를 벗어나려 했고,
부패할 대로 부패한 원 조정은 방국진을 받아들이는 데 더해
그를 관직에 제수하기까지 했다. 반란군 소탕을 원했던 유기는
조정의 결정에 반대했으나 오히려 부패한 조정 대신들의 모함으로
지방의 하급 관리로 좌천되었다.
그 후 강남 지역의 반란이 끊이지 않고 더욱 심해지자 원 조정은 유기를 다시 등용했고,
그는 반란군을 소탕하며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위기를 넘기자 그는 다시 병권을 빼앗기고 강등되었다.
이러한 처사에 분개한 그는 1354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에서 은거 생활을 하면서 그는 《욱리자(郁離子)》 두 권을 지었다.
이 책은 ‘우언(寓言)을 통해 당대 상황을 비판하고 현실의 모순을 진단함으로써
해결책을 제시하는 산문집’으로 그의 정치적 견해와 철학적 관점 등이 담겨 있다.
1356년 훗날 명나라를 건국하게 될 주원장이 남경을 점령했다.
주원장은 유기의 명성을 듣고 그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세력이 되어 줄 것을 간청했다. 관직 생활에 염증을 느낀 그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이미 원나라의 세력이 기운데다
오랜 은거 생활도 좋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주원장의 거듭된 초청을 받아들인 그는 1360년 〈시무십팔책(時務十八策)〉을 올렸다.
이에 기쁨으로 흥분을 감추지 못한 주원장은 그에게 예현관을 지어 하사하고,
자신의 책사로 삼았다.
1363년 소주의 장사성(張士誠)과 남경의 진우량(陳友諒)이 연합하여
주원장을 공격해 왔다. 이에 유기는 병력이 많고 간교한 진우량을 깊숙이 유인해
매복 공격으로 격파한 후 장사성을 칠 것을 진언했다.
그는 장자성을 먼저 공격하면 진우량은 이를 기회로 주원장을 칠 것이지만,
전력을 다해 진우량을 먼저 공격하면 장사성은 방어만 할 뿐 섣불리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여 양자강 이남을 평정한 후 북쪽을 도모하면
대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니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주원장은 유기의 의견을 받아들여 진우량의 군대를 격파하고 동남부를 차지했다.
이후로도 유기는 주원장에게 많은 묘책을 제시해 그가 천하를 통일하고
명을 건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68년 주원장은 황제로 즉위해 명나라를 건국했다.
명을 건국한 후 주원장은 그 공에 따라 공신들에게 작위를 수여했다.
유기는 어사중승 겸 홍문관학사에 임명되었다.
유기는 명예와 이익을 탐하지 않고 겸양한 자세를 취했다.
이때 유기가 받은 봉록은 240석이었는데 이는 다른 개국공신들이 받았던
봉록 4천 석에 비하면 매우 적은 양이었다.
명이 건국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대 좌승상 이선장(李善長)이 파면되었다.
주원장은 유기에게 승상의 자리를 제안했지만 주원장이 휘하의 개국공신들을 불신하여
숙청의 기회를 노리고 있음을 알았던 유기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극구 사양했다.
주원장이 승상의 자리에 양헌, 양광양, 호유용 세 명을 거론하자 유기는 그들 모두
이상적인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진언했다. 특히 호유용은 성격이 경박하고
받은 것은 반드시 되갚는 성미 때문에 재상이 되면 분란만 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후에 이를 알게 된 호유용은 유기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명나라 건국 초기 주원장의 측근인 회서(淮西)파가 득세하면서 강직하고 엄정했던
유기는 끊임없이 견제당하고, 시기와 질투를 받았다.
이에 유기는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유기가 고향에 내려와 있는
동안 담양(淡洋)이라는 오지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무정부 상태에 익숙해 있던 백성들이 관청의 법령에 구속감을 느껴 일으킨 사건으로,
유기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던 호유용은 이것을 기회로 유기를 모함했다.
당시 승상이었던 호유용은 유기가 담양 지역의 어느 묘지에 왕기(王氣)가 충만해
그곳을 조상의 묘소로 세우려 했는데, 백성들이 반발하자 관청을 속여
백성들을 진압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에 주원장은 유기를 남경으로
불러 올렸고, 유기는 주야를 가리지 않고 달려 남경으로 향했다.
주원장은 황위에 오른 후 공신 세력을 견제하고,
공신들의 반란을 방지하고자 대거 숙청 작업을 했다. 이러한 상황을 안 유기는
주원장에게 사실을 고하고 용서를 구하고자 했으나 주원장의 의심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유기는 화병이 들고 말았다.
유기가 주원장의 총애를 잃었다고 확신한 호유용은 호의를 가장하여 의원을 데리고
유기를 방문했다. 호유용이 가져온 약을 마신 유기는 병이 악화되어 귀향길에 올랐다.
그러나 채 고향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도중에 사망했다.
유기와 관련해서는 전설적인 일화가 많이 전한다.
“오늘은 등이 위로 불을 비추지만, 내일은 등이 아래로 비출 것이다.
오늘은 살아 있는 소가 땅을 갈지만, 내일은 쇠로 된 소가 땅을 갈 것이다.”라는 예언은
마치 그가 타임머신을 타고 오늘날의 상황을 미리 보고 온 것 같다.
또한 그가 지었다고 하는 예언서 《유백온소병가(劉伯溫燒餠歌)》에는
원의 운명이 다하고 명이 흥성하리라는 것뿐만 아니라 약 700년 후의
신해혁명과 항일 전쟁 등이 모두 예언되어 있다고 전한다.
그의 또 다른 저서로는 《성의백문집(誠意伯文集)》,
명리학 저서 《적천수(適天髓)》, 병법서 《백전기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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