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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6. 묵상글 (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 복덩이, 행복한 사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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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6.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복덩이, 행복한 사람
오늘은 관상에 관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자기 눈의 들보보다
다른 사람 눈의 티를 보지 말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그래서 볼 거면 행복을 보자고,
볼 거면 악보다 선을 보자고
그래서 행복 관상이란 것을 하자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볼 것이 많고 큰 것도 많은데
왜 남의 눈의 그 작은 티끌을 봅니까?
남의 눈의 티끌을 빼준다고 하니 사랑 때문입니까?
그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욕심 때문이고,
악하거나 어리석기 때문임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왜 그런지 모르지만 자꾸 악에 눈이 갑니다.
그 많은 선을 놔두고 굳이 악에 시선이 갑니다.
프란치스코에 의하면 선을 소유하려다 악을 본다고 하는데
선만 있기를 바라는데 악이 있으니 악이 더 보이는 겁니다.
깨끗한 옷인데 거기에 티 하나 묻으면 그 티가 눈에 거슬리며
눈에 거슬리는 그것을 오히려 계속 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전체 옷에서 티는 99분의 1도 안 되는데 99는 안 보고 1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욕심 때문이고,
100% 선을 욕심내다가 1%의 악을 보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왜 내 눈의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의 티끌을 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사악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죄나 잘못을 가리기 위해 남의 죄와 잘못을 크게 보는 것입니다.
나의 죄나 잘못보다 남의 죄와 잘못이 크다고 생각하기에 시선이
그리로 향하는 것이고 그의 것보다 내 것이 작으니 괜찮다 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자기 행복에 조금이라도 유익이 됩니까?
전혀 유익이 되지 않고 오히려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가벼운 병은 잘도 진단하며 고치라고 하면서
자기의 중병은 괜찮다고 하며 병을 고치지 않으려는 것과 같으며,
구렁에 있으면서도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는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하고 싶은 사람은 나는 행복한지 행복 관상을 하고,
무엇이 나의 행복에 유익하고 해로운지 유익 관상을 해야 합니다.
길흉화복 중에서 길은 보고 흉은 보지 말아야 하고,
그래서 화를 멀리하고 복을 가까이 두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길이나 길조를 좋아하고 흉과 흉조는 싫어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반대 짓을 곧잘 하는데 곧 길은 안 보고 흉을 봅니다.
한자어에서 길(吉)은 좋고, 아름답고, 선한 것을 뜻하고,
흉(凶)은 흉측하다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보기 싫은 것이고 안 좋은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은 복을 받는 사람이 되고,
복을 주는 사람 곧 복덩이가 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복을 받는 사람이 행복하고, 복을 주는 사람이 행복하지요.
그런데 이 말은 또한 복을 받아 행복한 사람이 되고,
남에게 복을 줌으로써 행복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줘도 안 받으면 불행한 사람이고
줄 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주신 복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요
이웃에게 줄 줄 아는 사람이어서 복덩이이고 그래서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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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6.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마태 7,1)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심판하지 않으려면, 먼저 우리 안에 서심판을 하게 하는 것을 제거하라고 하십니다. 곧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들보’를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우선, 자기 눈 안에 있는 ‘들보’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방식, 곧 보는 틀, 보는 관점을 말하다 할 수 있습니다. 곧 심판이 행해지는 데 기준이 되는 ‘준거 틀’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준거 틀’이 복음의 정신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입관, 편견, 세속정신 등의 고정관념이라면, 그것이 바로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 눈의 ‘들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들보를 빼내기만 하면, 다 일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 ‘하느님의 눈과 마음’이 들어서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눈과 마음”이야말로 그것을 빼내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관점, 자신의 눈’을 빼낼 수 있는 길은 바로 우리 안에 심어진 사랑의 빛을 밝히는 것입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빛이 되어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추는 빛으로 상대를 보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호의와 자비’로 상대를 보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위하는 마음’, ‘축복하는 마음’,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구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예수님의 마음의 눈’으로 보는 일입니다.
결국,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그보다 적극적으로 선을 베푸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2-13)
그래서 <루가복음>에서는 병행구문에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7)
결국, 심판을 넘어서는 이 용서와 자비야말로 바로 심판을 벗어나는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심판하는 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2)
이는 타인을 심판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심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됨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가 남에게 하는 것이 곧 자신에게 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결국, 심판은 ‘자기 얼굴에 침 뱉기’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으니,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로마 2,3)
하오니, 주님!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눈에서 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를 빼내 주소서!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
주님!
눈을 뜨고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저는 눈먼 이입니다.
보지 못하면서, 보는 척 하지 말게 하소서!
보지 못하면서, 타인을 인도하지는 더더욱 말게 하소서!
제 눈에서 들보를 빼내주소서.
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것이 제게는 들보이니.
제가 모른다는 것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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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6.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220620 >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입니다. 남의 보기 싫은 모습 때문에 마음이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럭저럭 살아갈 때가 이 꼴, 저 꼴 안 보고 마음이 편했습니다. 차라리 옛날처럼 살아가고픈 마음이 가득합니다. 언제쯤‘저 사람은 왜 저 모양일까?’하는 마음에서 자유로 울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고, 남을 되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자신의 들보를 빼내야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낼 수 있으니 먼저 자신을 점검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두운지라 여전히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지 못하고 남의 약점을 들추어내곤 합니다. 자신은 완벽하고, 다른 사람은 허물투성이처럼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입니다. 이러다가 결국 누군가에게 똑같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더더욱 하느님께로부터 그렇게 심판을 받는다면 지금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입니다. 나에게 관대하고 부드러운 만큼 타인에게도 너그럽고 부드럽기를 기도합니다. 남에게 엄격하기에 앞서 나에게 엄격하고 절제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자기성찰을 한다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자신을 살펴본 후에야 남을 도와줄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진정한 사랑으로 도와줄 수 있습니다. 혹 남보다 내가 낫다는 마음을 가지고 누구를 돕는다면 받는 사람은 고마움보다는 비참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잘 될 수 있도록 충고한다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내 삶의 모범 없이 강요하는 가르침이라면 상처만 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기성찰을 한 후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도움은 기꺼이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옛 말씀도 “자기 몸을 닦은 뒤에 집안을 거느리고, 자기 집안 거느린 뒤에 나라를 다스린다.”(身修而后家濟, 家濟而后國治 -대학-) 고 했습니다. 자기성찰이 모든 행위의 처음과 나중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자기성찰에 충실한 열심과 정열이 주어지길 기대합니다. 잘못된 열심은 영혼을 상처 나게 합니다. 눈먼 최선은 최악을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열심이 더할수록 하느님 앞에 나를 비추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최고보다는 최선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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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6.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보를 하면서 개와 함께 산책하는 분들을 봅니다. 대부분의 개들은 목줄이 있습니다. 주인은 목줄의 길이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목줄이 개를 구속하는 것 같지만 목줄은 개와 주인을 연결시켜주는 도구입니다. 목줄은 지나가는 사람을 개에게서 안전하게 해 주는 역할이 있습니다. 목줄은 개가 다른 길로 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이 있습니다. 목줄은 다른 위험으로부터 개를 보호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개들은 목줄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목줄이 주인과 연결시켜주는 도구임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개와 주인이 서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목줄은 개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개의 목줄과 비슷한 것이 있는데 하늘을 나는 연을 연결시켜주는 연줄입니다. 연줄은 연이 하늘 높이 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연줄은 연이 바람을 타고 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연줄이 끊어지면 연은 곧 땅으로 떨어집니다. 연은 스스로 바람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보면 우리는 무엇인가에 연결된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봅니다. 컴퓨터, 냉장고, 텔레비전, 세탁기, 청소기는 모두 전선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성능이 좋은 제품일지라도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무선으로 작동하는 것들이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주파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혈관이 있어서 에너지를 공급받습니다. 혈관에 이상이 생기면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군대는 계급이라는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회사는 직책이라는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조직과 제도라는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버려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신학적으로 성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들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하느님과 아브라함은 이제 ‘신앙’이라는 줄로 연결되었습니다. 신앙의 줄이 연결되어 있으면 고난이 다가와도, 시련이 다가와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시편 23장은 신앙의 줄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파란 풀밭에 이 몸 뉘여 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이끌어 주시네. 내 비록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두려울 것이 없어라.” 아브라함은 조건 없는 믿음으로 신앙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서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100살에 얻은 아들 이사악도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제물로 봉헌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굳건한 믿음을 칭찬하시고 ‘땅과 후손’을 축복하셨습니다. 신앙의 줄을 강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줄을 약하게 하는 원인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남을 비판하고, 험담하는 것입니다.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않으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비판과 험담은 주로 시기와 질투에서 시작됩니다. 한주간이 시작되는 월요일입니다. 내 신앙의 줄은 하느님과 잘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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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6.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떠남의 여정
-자기인식의 복(福)된, 겸손하고 지혜로운 삶-
오늘 제1독서 창세기가 참 아름답습니다. 아브라함의 멋지고 아름다운 삶이 압축되어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떠남의 여정으로 압축된 아브람의 복된 삶입니다. 첫 대목 다음 부분은 늘 읽을 때마다 신선한 감동이자 충격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집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 일흔다섯이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복덩어리 아브람입니다. 모든 것이 안정되어 편안히 살 수 있게 되었는데 미지의 곳을 향해 떠나라니 어처구니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군말없이 떠납니다. 하란을 떠날 때 일흔다섯이니 제 나이가 일흔다섯입니다. 영원한 현역의 아브람은 내적순례여정중의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의 모범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떠남의 열정에 있음을 봅니다.
안주하지 않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부단한 떠남의 여정에 충실한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고이면 썩습니다. 끊임없이 흘러야 맑은 물이듯 끊임없이 떠남의 내적 여정에 충실할 때 맑은 삶입니다. 정말 우리의 삶은 떠남의 여정으로 요약됩니다. 잘 떠날 때, 떠나야 할 때, 지체없이 떠나는 삶이, 뒷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사람은 떠나도 향기로 남습니다.
마지막 떠남이 죽음입니다. 최고로 복된 떠남이 향기로운 선종의 죽음입니다. 언젠가 갑자기의 선종이 아니라 아브람처럼 영원한 현역으로 하루하루 떠남의 여정에 충실할 때 아름답고 향기로운 죽음일 것이요, 이보다 남은 이들에게 좋은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 잘 떠나는 죽음이 될 수 있도록 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아브람의 떠남의 여정은 홀로가 아닌 “더불어together” 떠남의 여정이었음을 봅니다. 그대로 우리 수도공동체를 닮았습니다. 주목되는 사실은 아브람이 일단 거주하게 될 때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도 두 번 나오며 후반부 대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 아브람은 다시 길을 떠나 차츰차츰 네겝쪽으로 갔다.’
끊임없는 도상중에 있는 떠남의 사람, 아브람입니다. 도착할 때마다 우선 주님의 제단을 쌓으니 그의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확고한지 깨닫습니다. 외적으로 떠남의 여정이지만 내적으로는 하느님 중심에 닻을 내려 정주한, ‘정주의 사람’ 아브람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아브람은 떠남의 사람이자 주님 말씀을 경청하여 순종한 경청의 사람이자 순종의 사람임을 봅니다. 이런 떠남의 여정을 통해 참으로 자기를 아는 자기인식의 겸손과 지혜의 사람, 복된 존재인 아브람이 됐음을 봅니다. 아브람의 삶은 우리 정주수도자들의 롤모델이 됩니다. 우리 역시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음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분명히 합니다.
아브람처럼 미지의 곳을 향해 떠나는 막막한 여정과는 달리 우리의 내적순례여정의 궁극 목표는 분명하니 바로 우리의 본향 천상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러니 떠남의 여정은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이점이 우리에게는 아브람보다 유리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가 177장 2절도 이런 희망과 기쁨을 노래합니다.
“참 기쁨이 넘치는 그곳, 내 주님 계신곳,
내 모든 근심 슬픔을 다 위로하여 주시네.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머무를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
우리 베네딕도회 정주수도자들의 영원한 몰모델인 아브람입니다. 우리의 삶은 안주가 아닌 끊임없는 내적 순례 여정중에 있는 정주의 삶입니다. 바로 이를 요약한 영성이 제가 즐겨 쓰는 산과 강의 영성입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 기다리는 정주의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맑은 강”
전번 봄소풍때 삼척, ‘덕항산’속 환선굴에서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 흡사 강처럼 느껴져 위 시에다 한 대목을 추가했습니다.
“밖으로는 산, 안으로는 강, 산속의 강”
그대로 우리 정주의 삶에 대한 기막힌 상징입니다. 산같이 정주해도 우리는 내적으로 끊임없이 흐르는 강으로 삽니다. 우리 안에는 누구나 하느님 향해 흐르는 강을 하나씩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매일 일과표의 궤도 따라 사는 정주의 삶이 끊임없이 흐르는 강같은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로 이런 삶이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이 됩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의 사람들은 결코 절대로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무지로 인해 자기를 몰라서 심판이지 자기의 한계와 부족함을 아는 겸손과 지혜의 사람은 일체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랜 정주의 삶중 정화과정의 성숙한 열매입니다.
자기 눈에 있는 티는 물론 들보를 잘 알기에 자기수련에 전념할 뿐 절대로 겁 없이 무모하게 남의 눈에서 티를 뽑아내는 만용의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습니다. 오랜 정주의 기도와 회개, 정화과정을 통해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에 도달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베네딕도 수도공동체의 정주의 평화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대로 베네딕도의 정주의 평화가 됩니다.
보십시오. 오랜 정주생활을 통해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에 도달한 우리 수도형제들 절대 누구를 심판하지 않습니다.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끝없는 인내와 기다림의 사랑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사실 심판할 분은 하느님뿐입니다.
정말 주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이 남을 심판하지,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부족과 한계를 잘 알기에 절대로 결코 남을 심판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자기 눈에 티나 들보를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자체가 아브람처럼 이웃에게는 복이 됩니다. 바로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의 복된 사람들, 바로 참된 정주의 열매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눈의 티와 들보를 뽑아주시고 내적 떠남의 순례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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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6.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다리 다친 사람은 축구공을 차기 어려울 것입니다. 팔 다친 사람은 누군가를 힘껏 안아 주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자기 눈에 들보를 간직한 채 누군가의 티를 빼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들보를 저는 조금 큰 의미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물론 들보는 자신의 어둠과 악습과 죄스러운 모든 부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조금 큰 의미로 보자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아픔과 상처, 그리고 슬픔 또한 우리의 들보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내면의 어둠에서, 상처에서 분노와 미움이 자라고 그 분노와 미움은 다른 상처와 아픔, 즉 죄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고백성사를 하다 보면 간혹 이런 분들을 만납니다.
정말 잘해주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따뜻하게 대하고 싶은데, 그런 마음과 달리, 행동과 말이 표독스럽게 나가버려 힘겨워하시는 분들을 만납니다.
이런 분들과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상처를 준 것도 많지만 살아오면서 상처를 받은 것도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상처들이 분노와 미움 혹은 경계심이 되어서 누군가를 상처 준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이런 경우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요? 맞습니다. 들보를 먼저 빼야 합니다. 들보가 우리의 어둠이고 죄라면 그것을 빼내야 하고, 들보가 우리의 아픔과 상처라면 그곳을 잘 어루만져 치유해야 합니다. 이러한 치유도 빼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다리가 다 나으면 공을 찰 수 있고, 팔이 다 나으면 누군가를 안아 줄 수 있습니다.
마음에 사랑과 평화가 들어차기 시작하면 내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도 점점 사랑과 평화를 담아낸 것들이 나가게 될 것입니다.
들보를 빼내세요. 죄라면 멈추고, 아픔이라면 보듬어 주세요. 그러면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밤 시간
이곳 갑곶순교성지는 주말이 되면 많은 분이 방문하십니다.
평일에도 많은 분이 오실 때도 있지만 주말은 특히 순례하시는 분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평일도, 주말도 똑같이 아주 고요한 시간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모든 밤 시간입니다.
여기가 만약 본당(일반 성당)이라면 저녁에도 신자분들의 활동과
기도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저녁 6시가 지나면 늘 항상 고요함과 적막함의 옷을 입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적막해서 적응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매일의 밤 시간이 좋습니다.
고요함은 하느님을 찾게 하고
적막함은 그분의 소리를 듣게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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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6.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터넷에서 제가 쓴 글이나 강의했던 영상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많은 사람이 보고 있으며, 또 매일 올리고 있는 새벽 묵상 글은 하루에 몇만 명씩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 강의를 나가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저는 신부님 잘 알아요. 매일 새벽 묵상 글을 보고 있거든요.”
반갑게 악수로 인사를 나누고 또 사진도 찍지만, 저로서는 처음 보는 낯선 분이십니다. 일방적인 앎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충분할까요? 이 경우 상대방은 계속 저를 기억하시겠지만, 어디선가 다시 만나도 저는 기억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워낙 많은 분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당 신자 중에서도 제 글을 매일 보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미사에 참석하시고 또 성당에서 봉사하시기에 자주 만나서 저도 잘 알게 됩니다. 이 경우 서로 아는 것입니다. 서로가 가까운 친밀감을 느낍니다.
하느님과도 이런 관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추상적이고 일방적인 앎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즉, 그분의 우리에 대한 앎은 완벽합니다. 여기에 반해 우리의 하느님께 대한 앎은 거의 무지가 아닐까요? 그냥 ‘사랑이신 분, 구원해 주시는 분’ 정도의 추상적인 앎일 뿐입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의 일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기도나 묵상을 통해 하느님과 대화를 깊이 또 자주 나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서로에게 친한 벗으로 잘 아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 읽기, 기도뿐 아니라 일상 삶에서도 그분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진짜 벗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의 진짜 벗인지를 묵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친한 친구 5명을 적어보십시오. 혹시 주님의 이름이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말로만 벗이라고 하는 우리, 마음 깊숙이에는 벗이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과 친한 벗의 관계라면,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자주 범하는 남을 심판하는 모습에 대한 것입니다. 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에 대한 험담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남에 대한 험담은 너무나 쉽게 말하곤 합니다. 이런 자세를 통해서는 주님과 진정한 벗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이러쿵저러쿵 말하면서 심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너무하신다면서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4)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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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은 죽음과 함께 소멸한다. 하지만 타인과 세상을 위해서 하는 일은 영원히 남는다(앨버트 파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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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2.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를 보려면>
너를
보려면
너를
볼 때마다
너보다
먼저
너를
보고 있는
나를
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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