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안녕들 하셨습니까?
지난번에 예언자 1회를 했죠.
마지막 부분에 선지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러기에 야훼 하느님이 선지자에게 명령을 내렸을 때 어느 선지자라도 선뜻 ‘네’ 하고 대답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그 책임감이 무거웠겠습니까?
그리고 지난번에 얘기하다가 말았던 요나, 이제 야훼 하느님이 시키는 대로 해서 멸망할 줄 알았는데
하느님께서 니네베 멸망을 철회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났었다고 그랬죠.
아무튼 성경에는 요나의 니네베 성 때와 같이 하느님의 예언이 철회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단 예언이 철회되면 제일 곤란한 것은 선지자겠죠.
그래서 사람들한테 조롱받게 됩니다.
이런 일로 번민했던 선지자 중에는 예레미야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선지자가 된다는 것은 고달픈 겁니다.
그렇지만 선지자들은 실로 다양한 예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예언이 성취되었죠.
지난번에 보았던 바빌론 이야기 기억나십니까?
예를 들어서 바빌론은 당대 번영했던 큰 도시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크게 번영했지만, 악의 온상이기도 했죠.
그 바빌론 성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외칩니다.
‘야훼의 말씀이다.
보아라, 나는 너의 큰 적이다.
내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바위에서 굴릴 것이고 너를 불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다.
바다가 바빌론에 넘칠 것이고 많은 파도가 바빌론을 덮을 것이다.
성읍들은 황폐하고 마른 땅과 사막과 주민이 없는 땅이 될 것이니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실 바빌론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이것 말고도 많은 예언을 하였지만 참 강한 말투였습니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바빌론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어느 누가 이 예언을 믿었겠습니까?
한창 번영하고 있을 때 이 예언은 웃음거리였을 것입니다.
그 예언을 듣고 누구 하나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음녀라고 불릴 만큼 타락했던 성 바빌론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멸망하였죠. 그리고 현재는 사막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땅속에 묻혀 있다 그러죠.
그런데 바빌론 도시를 다시 파내려 해도 지하수 수맥 압력이 워낙 높아서 곤란하다 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그대로 된 겁니다.
그러면 말이죠.
선지자들의 많은 예언 중에서 전 인류를 위하여 한 중대한 예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선지자들이 한 예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깊이가 있고, 또 주님을 믿고 있는 우리에게 절실하게 와닿는 예언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탄생에 대한 예언은 기원전 몇백 년 전에 예언이 됐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그리스도는 탄생하고 십자가에 달리셨고요.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신약을 반복해서 읽었다고 해도 예언자들의 예언을 모르고 있다면,
사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죠.
전에도 몇 번 얘기했지만, ‘구약 안에 신약이 숨어 있고, 신약 안에 구약이 나타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약 안에 신약이 숨어 있고 또 신약은 구약을 완성한다.’
이 말은 뭡니까? 신구약이 하나 돼야만 비로소 분명하고 확실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신약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만 수백 번을 읽고 들었다고 해도,
구약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얘기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면 그건 반쪽만 알고 있다는 얘기겠죠.
이사야서는 어찌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중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예언 중에서 가장 가슴을 울게 하는 예언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사야서 53장입니다.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소식을 누가 곧이들으랴?
야훼께서 팔을 휘둘러 이루신 일을 누가 깨달으랴?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
6절로 내려오면은요.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
그렇다, 그는 인간 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른 일도 없었고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었지만,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혔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저는 이 53장을 여러 번 읽었죠.
그리고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졌고, 어떤 때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53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정말 뚜렷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얼마나 부당한 고통을 받으셨으며, 불우하고 고독한 일생이었던가!
오직 묵묵히 인간의 죄를 어깨에 메고 십자가에서 최후를 마치시는 그 모습이 생생하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
53장을 읽고 그리스도 사랑의 일생에 감격하지 않을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서는 결국 신약과 구약이 함께 ‘예수님이야말로 그리스도이시고 구세주이심’을 가르치는 책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혹시 신약 성경에서 의문이 생기면 구약 성경을 읽으면 그 답이 나올 겁니다.
몇천, 몇백 년 전 선지자를 통해 하신 예언을 하느님은 확실하게 이 세상에 성취시키셨죠.
메시아를 보내신 겁니다.
예언이 성취됐다고 하는 것이 단순한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죠.
분명히 하느님이 존재하기 때문에 분명히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취된 겁니다.
이것을 알게 된 우리들은 더더욱 겸허하고 열심히 구약 성경을 읽어봐야 할 겁니다.
그리고 생명을 걸고 명리를 버리고 예언했던 선지자들의 그 고난과 파란만장한 그 일생을 생각하면서
그 신앙을 배워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제가 살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 저에게 참 큰 힘을 주었던 성서 구절을 여러분과 한번 공유하고자 합니다.
이사야서 40장 29절에서 31절이죠.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청년들도 힘이 빠져 허덕이겠고 장정들도 비틀거리겠지만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나리라.
날개 쳐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
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저는 참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나리라.’
이보다 훌륭한 성경의 가르침이 어디 있을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들은 매일매일 많은 것을 소망하고 살고 있지요.
병이 치유되기를, 또 승진되기를, 또 애인이 생기기를, 또 아름다운 집을 지어서 한번 살아보기를,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하기를, 여러 가지 등등.
소망하는 대상에 따라서 초조하기도 하고 사람을 밀쳐내는 흉한 짓도 할 때가 있죠.
또 질투도 하고 옹졸해지기도 하고 가지각색의 심정이 됩니다.
그러나 주를 사모한다는 심정을 갖는 자들에게는 이런 생각이 있을 수가 없을 겁니다.
거만한 자에게 겸손한 마음을 주시고, 탐욕스러운 자에게는 자선을 베푸는 마음을 주신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나리라.’
사제생활을 하면서 다리가 꺾일 때마다,
그리고 그 짐의 무게 때문에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제 머릿속에 수백 번 외웠던 것이 바로 이겁니다.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나리라.’
여러분들 구약성서의 예언서를 읽으시면.
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는가에 대한 답을 아주 선명하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예언서에는 그렇게 나오죠.
인간은 죄를 범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요. 또 죄를 짓고도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존재가 또한 인간입니다.
우리들이 죄를 용서받고 또한 죄에서 구출 받는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태어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용서한다고는 되어 있지만, 그 율법을 도저히 지키지 못하는 것 또한 우리 인간들입니다.
율법에는 뭐라고 나옵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또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해라.’
이렇게 요약이 되어 있지.
그런데 여러분들 이것 지킬 수 있습니까?
이 율법은 아무도 지키지 못합니다.
글자 그대로 이것을 어떻게 지키겠습니까?
우리들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정직하게 보면 자기중심적인 사랑입니다.
늘 자기중심인 생활밖에는 하지 못한다는 얘기죠.
아침부터 밤까지 개인주의적인 생활을 합니다.
이사야는 ‘너희 손이 피에 더러워졌고 무지한 피를 흘리는 데는 어찌 그렇게 빠르냐?’ 이렇게 맹렬한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꼭 찌르는 말이죠.
‘나는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죽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 있게 얘기하실 수 있는 분들도 성경 구절 앞에 있으면 참 많이도 사람을 내가 죽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존재라는 뜻일 겁니다.
그 누가 아직 사람에게 상처 입힌 일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혀로 사람을 찌르고, 또 눈으로 사람을 찌르고 쏘아보고, 마음속으로 항상 사람을 판단하고 찌르고 있는 존재,
영적으로도 살인을 수백 번 했던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늘 냉랭하고 쌀쌀맞고 냉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사야는 또 이런 얘기를 합니다.
‘악을 선하다고 하고 선을 악하다고 하고, 어둠으로 광명을 삼고,
또 밝음으로 어둠을 삼으며 쓴 것을 단 것으로 삼는 자는 화가 있을지라.’
오늘날이 꼭 그러하지요.
선과 악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고, 어떤 것이 빛인지 어떤 것이 어둠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혼돈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 어둠을 이길 수 있는 방법, 제가 늘 참 많이 얘기하죠.
‘혼란스러울 때는 전통으로 돌아가라.’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단 것이 쓰고 쓴 것이 답입니다.
가치관의 변질 정도가 아니라 뭐가 뭔지를 모르고 사는 세상이 됐죠.
무서운 세상이 됐습니다.
예언서 강의는 세 번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강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 강의의 핵심은 그거였죠.
모든 선지자의 가장 중요한 예언은 뭐였다고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에 대한 것이었다고 그랬습니다.
특별히 이사야서 53장에 대해서 제가 강조를 했고요.
또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 읽었던 이사야서 40장 29절에서 31절은 여러분들도 꼭 한번 줄을 그어가면서 읽어보기를 바랍니다.
이사야서 나머지 부분을 조금 더 얘기 드리면서 예언서는 끝이 나고요.
그리고 아마 마지막 시간이 될 것도 같고, 아니면 그것도 두 번으로 나눠질 것도 같은데, 빠졌던 것,
아모스서나 말라키서, 또 잘 안 읽어보는 구약 성경이 있죠?
신학교에서도 신학생들이 그 성경 읽으면 혼이 나는 이상한 성경이 있습니다.
바로 ‘아가서’입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좀 야한 부분이 많이 있지요.
어떻게 성경에 올랐을까 할 정도로 얼굴이 화끈거리는 내용들이 있지만 그래도 분명히 성경입니다.
그래서 그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남사스럽다고 무조건 안 보는 것이 대수가 아니라,
그래도 그 뜻을 한번 좀 짚어드리고 싶습니다.
아가서의 의미, 그리고 또 출애굽에서 좀 못다 한 얘기, 그다음에 아모스 이야기, 말라키 이야기,
이렇게 하면 한두 번 정도 더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렇게 해서 구약성서 끝을 맺고요.
그러고는 제가 조금 더 준비해야겠죠.
그래서 당분간은 그냥 주일 강론만 진행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뭔가 좀 준비되면 다시 평일에도 두 번 정도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여러분과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저는 이것 내일 나갈 강론이지만 오늘 미리 녹음합니다.
왜냐하면 부산에서 모레 피정 지도가 있어서 내일은 부산에 미리 하루 전날 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기도 부탁드립니다.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피정 다니고 그러는 것이 참 굉장히 꾀가 납니다.
그리고 피정 지도 나가는 게 좀 싫습니다.
좀 쉬고 싶다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그런 유감에 흔들리지 않도록, 부산 피정,
내가 늘 얘기하듯이 내 생애 마지막 피정 강론하듯 그런 마음으로 머물다 올 수 있게끔 기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해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