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록靑綠 방향 / 추선희
청에 대한 호감이 사라진 적이 없다. 파랗다는 느낌이 나는 색은 모두 좋다. 간혹, 거참 촌스러운 파란 색일세,라고 흉본 적은 있지만 그조차도 애정에서 나온 말이지 거부나 미움과는 상관이 없다. 세상의 모든 나의 청은 적赤과 黃을 이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소유한 가장 큰 그림도 사십호짜리 파란 가로수 그림이고, 처음으로 구입한 베이스 기타도 파랗고, 허리선이 심히 잘록하여 십 년째 옷장에 갇혀 있는 코트도 밝은 파랑이다. 그래도 겨울이 올 때마다 눈으로 쓰다듬으며 참 예쁜 파란색이야, 라고 감탄한다.
이에 더하여, 녹이 마음에 들어온 지도 제법 된다. 꽃보다 나무가 좋아질 즈음이니 흰 머리카락이 솟고 미간에 주름이 패기 시작할 때리라. 사람이 들어앉은 공간의 배경색으로 더할 나위 없는 녹을 싫어할 이는 잘 없다. 직접적으로 생명력을 연상시키므로 그저 끌리는 녹이 배경의 의미를 넘어 전면에 부상했다. 일 년에 한 번도 산에 오르지 않으면서 뻔뻔하게 바다보다 산이 좋다고 말하는 것도 녹 그 자체인 숲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창밖으로 녹이 보이지 않는 서재는 생각하기 싫다.
그러다가, 지금은 청록에 빠져 있다. 십 년이 흘러도 헤어나질 못하겠다. 청과 녹이 합쳐지면서 깊어진 색이 마음을 붙잡아 멀리서도 쉽게 포착된다. 바다와 숲, 하늘과 정원을 합친 듯한, 들판이면서도 동굴인 듯한, 청신함과 어둠이 공존하는 색감에 매료된다. 가을이면 청록색 트랜치코트를 입고 가장 최근에 출간한 책의 간지도 청록이었다. 어쩌다 온 벽이 청록인 카페라도 발견하면 눈이 커진다. 청록색 벽에 흠씬 에워싸여 그 색조가 몸 안으로 흘러들어 나를 물들이길 바란다.
그러다가, 청록에 끌리는 것은 청록이 필요해서임을 알게 되었다. 눈의 잔상에 따른 심리 보색관계 원리에 근거한 색채 심리치료법에서는 내가 청록을 좋아하는 것은 청록이 필요해서, 청록이 부족하기 때문이란다. 우리 몸에는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려는 항상성이 작동하는데 그에 따라 내게 필요한 보색을 찾은 결과란다. 청은 마음을 느긋하게 하는 색으로 평화와 영감, 침착함을 상징하고, 녹은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아 몸과 마음, 영혼을 조화시킨다고 한다. 청과 녹을 향하게 한 심리 보색인 황과 적은 어떤 색인가. 황은 정신과 지성의 상징으로 심리적인 활동을 북돋우며, 적은 남성적인 힘과 관련된 강력한 고무제라고 한다.
이런 관점이라면 청록에 매료된 나는 황과 적의 상태인 바,정신적인 방향으로 지나치게 발달되고 힘이 넘친다는 뜻이다. 황으로 지칠 수 있고 적으로 타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나를 진정시키고 쉬게 하려고 청록이 다가온 것이다.건강이란 몸 그 자체, 몸과 마음, 마음과 마음, 나와 너, 결국 모든 것들이 균형 잡힌 상태이기에 보색을 통한 안정이란 논리가 나름 설득력 있다.
하지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필요해서 그랬다니 살짝 쓸쓸하다. 한낱 청록이란 색에 대한 마음이긴 하나 호감이나 사랑이 아니라 결국 결핍 때문이었다니 혼자 섭섭하다. 결핍과 무관한 호감은 없을까. 결핍이 욕구를 부르지 않는 순간이 있기는 한 걸까. 균형을 잡으려는 심신과 상관없는 움직임은 진정 없는가. 평론가 신형철의 글에서처럼 "무엇을 갖고 있지 않는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아도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나는" 관계는 어디에 숨어 있나. 이런 생각을 들쭉날쭉 해본다.
보통의 우리는 색이든 공간이든, 사람이든 사물이든, 이 마음이든 저 마음이든, 자신에게 부족한 무엇을 향해 흐른다. 빈자리를 채워서 중심을 잡아줄 무엇을 향해 쉬지 않고 흐른다. 알고도 모르는 척, 몰라서 깜짝깜짝 놀라면서 흘러간다. 그 와중에 무엇에 끌리고 누군가와 맹목적인 사랑에 빠지는 것이리라. 그리 착각하는 것이리라.
다가오는 가을에는 굵고 따뜻한 청록색 털실로 무릎 덮개나 하나 짜야겠다. 시린 내 무릎도 덮고, 나의 황과 적도 달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