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세계 / 박세미 두 손은 잠들면서 두 눈동자를 협곡에 내던진다 눈동자는 신체에서 가장 멀어지기를 원한다 강물은 눈동자를 운반한다 입구를 만들기 위해 동굴을 침식한다 덕지덕지 붙어 있는 오늘을 씻어내고 동굴로 굴러 들어가 본다 1985년식 철산주공아파트 8단지를, 보도블록 언덕을, 벚나무의 검은 가지를, 자전거 보관대 꼭대기에서 점프하는 아이를, 쿵, 하고 동굴이 무너질 때 아이가 울고 있는 것을 본다 눈동자는 2020년 늙은 엄마의 뒷모습을 비추어 아이에게 보여준다 울음을 그치고 아이는 미래에 잃어버릴 눈동자를 본다 멀어지는 기차가, 자꾸만 쏟아지는 이삿짐이, 땡볕에 말라가는 화분이, 여전히 울고 있는 어른이 보인다 입구로 들어가 입구로 나온다는 것 멀리 갈수록 가까워진다는 것 절벽과 절벽의 사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동굴에서 나왔을 때 보았던 강의 하류에는 그동안 씻겨 간 오늘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눈동자는 감길 줄 몰라서 협곡 위 가장 구체적인 두 손을 본다
- 시집 『오늘 사회 발코니』 (문학과 지성사, 2023.11) -------------------------------------------
* 박세미 시인 1987년 서울 출생. 강남대 건축공학과 졸업. 한양대 대학원 건축학과 석사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당선 시집 『내가 나일 확률』 『오늘 사회 발코니』 . 김만중문학상 신인상 수상 ************************************************************************************** 서울 지하철은 1호선부터 9호선까지 있습니다. 이 노선 말고도 인천으로 이어지는 인천 1·2호선이나 분당·수원·인천으로 이어지는 수인분당선, 춘천까지 이어지는 경춘선 등 많은 노선이 있습니다. 다수의 노선은 기점과 종점이 다릅니다. 서울지하철 1호선의 기점은 서울역이고 종점은 청량리역입니다. 서울지하철 9호선은 개화역이 기점 중앙보훈병원역이 종점입니다. 서울 지하철 중 기점과 종점이 같은 노선이 하나 있습니다. 2호선 본선(을지로 순환선)입니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깜박 졸면 처음 탔던 지하철역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되돌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다시 시작할 수 있다’라는 응원의 메시지로 들린다면 힘을 낼 수 있지만, 희랍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는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라고 말했듯이 ‘다시 시작’이라는 말은 그 내부에 모순을 담고 있습니다. 인생은 단 한 번이며,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에 도달하기란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일 수 있지만, 장년 이후의 실패는 그것으로 끝이라고. 실패의 후유증은 혹독합니다. 재기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즐겨보는 웹툰에 ‘회귀물’이 많습니다. 회귀물이란 기억을 간직한 채 과거로 돌아가 ‘먼치킨’이 되는 이야기를 말합니다. 먼치킨이라는 용어도 처음 들어보시는 분들이 많을 텐데요, 한국 판타지 소설에서 등장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캐릭터를 먼치킨이라고 합니다. 회귀물의 먼치킨은 자신의 기억과 능력을 바탕으로 큰 성공을 거둡니다. 예를 들면, 드라마 <재벌 집 막내아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재벌 집 막내아들>의 진도준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진도준이 미래의 기억을 잃은 채 회귀 했으면 어떠했을까요. 그의 인생은 이전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순환세계에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그 순환을 기억하지 못하는 까닭은 이전의 삶을 잃어버리기 때문일 것이고요. 불교에서는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인연이라는 단어도 불교에서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인연의 인(因)은 원인을 의미하는 단어이고요, 연(緣)은 연결됨을 의미합니다. 인연이란 단순한 만남이 아닌, 원인 행위가 있는 만남을 의미합니다. 불교에서의 원인이란 단순한 사건이 아닌, 특정한 시간과 공간과의 만남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의 시공간이란 현생의 시공간이기보다 끊임없이 반복된 전생의 인연을 얘기하는 것이고요.
제가 불교의 사상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인(因)이 결과를 만들어내는 직접적인 힘이라는 것은 긍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의 화자도 얘기하죠. ‘동굴에서 나왔을 때 보았던 강의 하류에는 / 그동안 씻겨 간 오늘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라고요. 어제의 나는 오늘의 인연을 쌓았으며 오늘의 나는 내일의 인연을 쌓고 있습니다. 지금 생의 나는 후생의 나를 위해 어떤 인연을 쌓고 있는 것일까요. 이러한 생각만 해도 내일의 하루를 열심히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사는 세계가 순환세계가 아닐지라도.
- 시 쓰는 주영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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