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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생 22명뿐인 미니 학교
“소랑국민학교 교사 정정길. 원도분교 근무를 명함. 1963년 11월 3일. 완도교육장”
어느 날, 교육청으로 나오라는 연락이 있어 나갔더니 원도분교로 가라는 발령장을 주었다.
원도분교를 너무 오래 비워 두었으므로 누군가 가서 뒷수습을 하고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옳은 말이었고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발령장을 받으니 착잡했다.
갓 결혼한 아내를 데리고 그 깊은 섬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경찰이 행패 부리던 청년을 잡아가긴 했으나 그가 언제 풀려나 전보다 더 심한 횡포를 부리게 될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불쌍한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양심과 교육청에서 제시한 조건이 나로 하여금 원도분교로 가게 만들었다.
원도분교에서의 근무 기간은 내년 2월 말까지인데 그 후에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교육장이 책임지고 전출시키겠다는 약속이었다.
아내는 첫 임신 탓인지 입덧이 유난히 심했다.
회장이 제공해 준 어선에 세 뭉치의 이삿짐을 실었다.
오전 8시, 소랑도 주민들과 아이들의 전송을 받으며 출발해서 오후 5시를 좀 넘겨 원도에 도착했다.
배가 부두에 닿자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어 이삿짐을 옮겨 주었다.
배에서 내리자 곧바로 회장댁으로 가서 저녁을 먹으며 궁리가 많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숙제를 스스로 만들기에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마을 유지들과 분교 운영과 시설물 보수 등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손님들이 다 돌아가자 우리 내외는 걱정이었다.
짐을 풀어 제자리에 놓을 일이며 방 덥힐 군불 지피는 일, 내일 아침 밥 지을 물 걱정 등이었다.
둘이서 한숨만 내쉬고 있는 숙직실에서 도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들어서자 자모 몇 분이 일어서면서,
“선생님, 마루에 쌀 한 가마를 가져다 놨으니 식량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족할 때쯤이면 또 가져다 드리겠습니다.”고 했다.
그리고 이삿짐을 제자리에 챙겨 놓아주었으며 군불도 뜨뜻하게 지펴 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다음날 아침 손바닥만한 운동장에 아이들을 모아 놓고 내 소개를 하며 부임 인사를 했다.
그 자리에는 마을 사람들도 모두 나와 있었다.
학생들은 1학년 6명, 3학년 10명, 5학년 6명이 전부였는데, 옷차림이 남루하기 그지없었다.
찢어진 검정 고무신 뒤축에 검정 헝겊을 대어 흰 실로 기워 신은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미처 꿰매지 못해 찢어진 고무신을 그대로 신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또 아이들 손등에 덕지덕지 낀 때를 얼마나 심하게 벗겼는지 살가죽이 벗겨진 아이들도 있었다.
나중에야 안 일이었지만 어느 학부형이 내가 아주 엄한 선생이라고 소문을 내는 바람에 학부모들이 아이들 복장을 갖추고 몸을 씻기느라 거의 밤을 새웠다고 한다.
아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묻고 점검하면서 내 마음은 착잡했다.
이 아이들을 위해 이 섬에 오래 근무할 수 없도록 이미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조건으로 내년 3월이면 내가 원하는 곳으로 떠나게 될 것을 생각하니 부끄러운 심정이 들었다.
나는 1학년을 아내에게 맡겼다.
아내는 교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혼자서 두 교실을 오가며 3개 학년을 가르치다 보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도 효과가 없을 것이 분명했다.
비록 교사 자격증이 없고 학습 지도 능력도 모자라긴 하지만 아내가 아이들을 열심히만 가르쳐 준다면 그것이 오히려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아이들을 맡겼던 것이다.
우리 내외는 분교 폐쇄 기간에 못한 수업을 보충하려고 있는 힘을 다했다.
식량, 반찬 제공해 준 주민들의 애정
원도에 부임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저녁이었는데 밥상이 예사롭지 않게 푸짐했다.
굴, 해삼, 전복, 소라, 홍합, 미역 등이 밥상에 그득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해안에서 생산되는 모든 어획물은 마을의 공동 재산으로 개인이 함부로 채취할 수 없다는 불문율을 미처 아내에게 일러주지 않은 데서 비롯된 실수였다.
저녁에 회장을 찾아가 아내의 잘못을 사과했더니 오히려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이 섬의 단 한 분뿐인 선생이 잡수신다면 얼마나 잡수실 거냐며 마을 회의를 통해 선생님에게만은 어획을 무한정으로 인정하기로 결정했지만 아직 알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반찬을 마을의 공동 재산에서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어느 날 오후, 이장이 느닷없이 학교 종을 쳤다.
종소리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아이들이 모두 모였다.
이장은 아이들에게,
‘너희들 동뫼(마을 공동 소유의 산)에 가서 장작을 한 짐씩 해 와라.’며 산으로 보냈다.
나는 이장에게 종을 쓰려거든 사전에 나와 협의하도록 당부하고, 아이들에게 장작을 해 오라는 이유를 물었더니,
‘아까 여편네가 사모님께 갔더니 불을 때면서 연기가 몹시 나서 눈물을 찔끔거리셨다더군요. 그래서 좋은 장작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아이들을 보냈습니다.’고 했다.
이처럼 식량, 반찬, 연료를 마음에서 제공하겠다고 하니 아이들을 소홀히 가르칠 수 없었다.
교육청의 지원은 눈꼽만큼도 없는 마을 주민들은 있는 힘을 다해 교육에 열을 올리며 나를 도와 주고 있었다.
며칠 후 회장과 이장이 찾아와 밤에 마을 주민 회의를 하기 위해 교실을 쓰겠노라고 했다.
저녁을 먹고 나자 회장과 이장에 우리 내외에게 교실로 나오라고 했다.
교실에 들어서자 마을 주민들은 우리 내외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두 교실을 막은 칸막이를 떼어내고 두 줄로 길게 책상을 마주 붙여 늘어놓은 위에 음식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는데, 그 양이 많기도 하거니와 정성들인 흔적이 너무 역력해 눈물겨울 정도였다.
인절미와 삶은 쇠고기, 막걸리 항아리가 유독 눈에 뜨였다.
전복. 해삼, 소라, 홍합, 미역, 대하, 문어가 그릇마다 그득하고 해초로 만든 음식이 푸짐했지만 그건 별로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만큼 원도에선 쌀로 만든 음식이 귀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또 해안이 모두 절벽이고 온통 바위투성이라 소를 기르기도 어려운데 귀한 소를 잡아 통째로 내놓았으니 이만저만한 환대가 아닌 것이다.
이미 섬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된 막걸리는, 내가 원도 분교로 부임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을, 이장이 얻어듣는 길로 고구마로 담갔다가 이제야 항아리를 열었다는 것이다.
우리 내외의 자리는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는 두 노인의 좌석보다 높았는데, 겨우 스물다섯 살인 나와 두 살 손아래인 아내가 앉기에는 부적당했다.
나는 계속해서 거절했지만 마을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겨우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한 노인이 일어서더니,
‘여러분, 우리 섬에 학교가 생긴 이후 처음으로 말하기도 싫고 심히 부끄러운 꼴을 여러 사람에게 보이고 말았습니다.’라며 마을 사람 모두가 각성하고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통이나 수난도 다 겪을 준비가 되었으니 아이들을 잘 가르쳐 주고 원도 주민을 위해 애써 달라.고 당부했다.
나도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그날 모임은 화기애애한 가운데 밤이 이슥하도록 계속되었다.
회장은 우리 내외에 대한 식량, 반찬, 연료 제공을 공식적으로 발표했고, 내가 공적인 일로 섬을 나갈 때는 마을의 共同 渡船을 내주겠다고 했다.
共同 渡船이란, 마을을 동, 서, 남, 북 넷으로 나눠 차례를 정해 사공을 선발하여 마을의 공용선을 운영하는 방법이다.
회장은 또,
‘선생님이 아이들 공부를 안 가르치고 섬에만 있어 주어도 감사하기 그지없겠습니다.’고 했다.
이 얼마나 한이 맺힌 소원인가.
그 후 보름 동안 주민들이 수고를 하여 교실 창에는 우리가 다시 끼워졌고, 흙을 개어 허물어진 벽을 발랐으며 마루 구멍도 꼭꼭 막았다.
다 삭은 교실 지붕도 새 함석을 얹어 말끔하게 고쳤다.
주민들은 아내의 입덧을 고쳐주겠다며 3년 묵은 수탉과 나이를 모를 만큼 오래 묵은 백도라지를 고와 먹였다.
그러나 차도가 없자 초도의 진료소에서 세파민이라는 주소 약을 사오는 등 우리 내외에게 쏟은 원도 사람들의 정성은 보통이 아니었다.
거센 풍랑 속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11월 25일께였다.
북쪽의 먼 수평선에서 한 가닥 흰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봉화와 비슷한 것으로, 급한 일이 있으니 나더러 본교로 빨리 나오라는 신호였다.
인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부르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출발하려고 회장을 찾았더니, 날씨가 심상찮으니 사나흘 기다리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내일 오후엔 분명히 큰바람이 일고 비가 많이 내릴 날씨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궁금하기 짝이 없어 사나흘씩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내가 배를 띄워 줄 것을 간청하자 회장은 마지못해 양보하였다.
다음 날 아침 8시, 원도를 출발하였다.
북쪽의 본교로 향하는 뱃길은 순탄했다. 오후 2시, 소랑도에 도착해 본교에서 일을 끝내고 오후 3시 경, 원도를 향해 출발했다.
두어 시간쯤 달렸을 때 남쪽 하늘에서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더니 마침내 빗방울을 뿌리기 시작했다.
풍랑도 함께 일기 시작했다.
우리가 탄 돛단배는 홍수에 밀리는 가랑잎처럼 파도가 치는 대로 이리저리 밀려 다녔다.
역풍, 역류에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바다를 휩쓸기 시작했다.
파도가 점점 거세지고 빗방울이 굵어졌다.
날은 어두운데 갈 길은 아득했다.
앞으로도 얼마나 시달려야 할는지, 무사히 원도에 돌아갈 수나 있을는지 초조하기만 했다.
파도의 꼭대기에서 골짜기로 배가 내리꽂힐 때 배 난간을 꼭 붙잡지 않았다가는 곧장 바다로 빠지고 만다는 사공들의 말에 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본교에서 수령한 각종 물품은 사공들이 미리 배 밑창에 깊숙히 들여놓아 안심이었다.
네 명의 사공들은 손발이 척척 잘도 맞아 보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파도 속을 잘도 헤쳐 나갔다.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었고, 자칫 실수라도 하는 순간이면 사공들과 나는 그 넓은 바다로 수장되는 일이 빚어진다.
밤이 깊어지자 추워졌다. 빗방울은 갈수록 굵어졌고 바람도 훨씬 거세어졌다.
비와 바람과 파도에 시달리기 얼마였을까.
저 멀리 수평선에서 작은 점 같은 것들이 깜박거렸다.
사공들은 그 불똥을 보자 배에서만 쓰는 등에 불을 붙여 돛대 높이 매달고 원도가 그리 멀지 않았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사공들은 안간힘을 다해 노를 저었다.
원도에 도착하니 새벽 4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산더미 같은 파도 속을 가랑잎 같은 돛단배가 13시간 동안 헤쳐온 것이다.
회장의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다.
겨우 살아 돌아온 우리 일행을 맞은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환호작약해야 당연할 터인데 모두들 침통해 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나를 피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한 자모가 빨리 숙직실로 가 보라고 재촉했다.
숙직실에서는 자모 몇 분이 기절해 쓰러진 아내를 간호하고 있었다.
내가 숙직실에 들어서는 순간 아내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벌떡 일어났다. 순간 간호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아무리 응급 처치를 해도 깨어나지 않아 주민들의 애를 태우던 아내가, 내가 돌아오자 금세 의식을 회복한 일을 두고두고 화제로 삼았다.
우리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위기를 맞고 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집에 있는 등불을 모두 갖고 나와 마을 뒷산으로 올라가 줄줄이 늘어서서 등대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비바람이 기승을 부리자 마을 사람들은 돌아오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등불을 나무에 걸어 두었다가 내일 날이 밝으면 시체나 찾아보자고 했다는 것이다.
애타게 생환을 기다리던 아내는 기어이 졸도를 하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이 그러고 있는 시간에 우리는 원도에서 내 건 등불을 발견했던 것이다.
‘마음 상하기 전에 빨리 떠나시오’
겨울 방학이 끝나고 원도를 떠날 날이 가까워지자 마음이 심란했다.
아이들을 위해서나 주민들의 고마운 마음을 생각하면 더 있어야겠지만, 이 외진 섬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는 싫었다.
어느 날 낮, 라디오에서 교사 이동 소식을 보도하는 가운데 내가 전출된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 방송은 나뿐만 아니라 원도 사람 모두가 들었다.
이장, 회장이 먼저 쫓아왔고, 곧이어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주민들은 집단 민원이라도 일으킬 기세였지만 회장이 한사코 만류하고 나섰다.
마을 사람들은 내가 적어도 2년은 더 있어 줄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실망감에 빠져 일절 말이 없었으며 그 겉에서 아이들은 훌쩍거리고 있었다.
내 가슴속에서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꼭 떠나야 하는가를 마음속으로 묻고 또 물었다.
2월 26일.
마침내 원도를 떠나는 날이었다. 배에 짐을 실으니 비바람이 또 몰려왔다.
회장은 안심하라며 곧 가라앉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더 마음 상하기 전에 빨라 출발하라고 재촉했다.
분교를 폐쇄할 때 못질하는 걸 보며 울던 아이들이 내가 떠나는 날에도 서럽게 울었다.
거친 파도를 헤치고 금일 선착장에 도착했다.
사공들과 헤어지면서 맛본 빗물이 짭짤했다.
빗물이었을까, 눈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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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듯한 느낌입니다.
63년도 같으면 제가 초딩1학년쯤으로 기억되네요 ... 그 시절 교육열기가 많지 않았지만 원도라는 지역 주민들은 일찍 깨우쳐 자식교육에 대단한 후원을 하셨네요 ... 선생님도 그렇지만 그 주민들의 정성을 높이 사고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