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밖에 구원이 있다? 없다?
1코린 12,31-13,13; 루카 7,31-35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2023.9.16.; 이기우 신부
오늘은 아직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카다콤베(Catacombe. 지하무덤) 교회 시절에 교황으로서나 주교로서 이단을 거슬러 신앙 진리를 지키다가 치명한 성 고르넬리오와 성 치프리아노, 이 두 분의 초기 교회 순교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두 분 다 이단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순교하였는데, 치프리아노(Cypriano, 200/210?~258)는 고르넬리오(Cornelio, +253)의 교황직을 옹호하다가 치명했습니다.
치프리아노 성인은 북아프리카에서 출생하여 문학과 수사학 등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고 나서 늦은 나이에 사제가 되었으나, 서품 전에 배운 실력을 십분 발휘하여 라틴 문학의 대가로서 신앙과 교회를 옹호하는 수준 높은 호교론 작품을 많이 남긴 교부입니다. 여기에는 환경과 상황의 배경이 있습니다. 3세기경의 서북 아프리카 교회는 로마 교회를 훨씬 능가하는 뛰어난 신학자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아우구스티노(Augustino, 354~430) 와 테르툴리아노(Tertuliano, 160~220) 등이 그 대표적입니다. 이 신학자들은 당시의 교회를 이끌어간 아버지라는 뜻에서 오늘날까지도 ‘교부(敎父)’라는 경칭(敬稱)으로 불리웁니다. 이들은 당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그리스도교에 고대 그리스의 정신적 유산들에다가 로마인들이 계발해 낸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합하고 자신들의 자부심까지도 발휘해서 고대교회를 풍요롭게 가꾸어 나갔습니다.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어 열정적으로 사목활동을 펼치던 치프리아노는 255년 경에 마뉴스라는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신자가 열교(裂敎)나 이단 교회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았다가 나중에 가톨릭교회에 되돌아오려 할 때 다시 세례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묻는 편지였습니다. 이 편지에 치프리아누스는 이렇게 답장을 써 보냈습니다. “이단자들이 가톨릭교회 ‘바깥’에서 받았다고 주장하는 세례는 목욕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톨릭교회 ‘바깥’에서는 성령께서 활동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 ‘바깥’에는 성령도 없고, 유효한 세례도 없으며, 세례의 은총도 없고, 그 열매인 구원도 없다. 곧, 노아의 방주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멸망했듯이,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 그러므로 교회 ‘바깥’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가톨릭교회 ‘안’에서 반드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 이후 ‘교회 바깥에 구원이 없다’는 치쁘리아노의 말은 격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격언이 로마법을 본받아 제정된 가톨릭교회법에 들어와서는 법적인 조문이 되어버리더니, 나중에는 가톨릭교회의 세례를 받지 못한 모든 영혼은 지옥에 갈 것이라는 확신(?)으로까지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영화 ‘미션’에 나오는 선교사들이 그 오지에서 평화스럽게 살던 원주민들을 목숨 걸고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던 동기가 바로, 단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가톨릭교회의 세례를 주어서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8세기까지 유럽 가톨릭교회의 영성이 그 지경이었습니다. 그 영화에는 그처럼 나름 고귀한 선교사명을 띠고 목숨 바쳐 헌신한 선교사들만 나오는 것이 아니지요? 가톨릭 신자라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대표한다는 외교관들이 겨우 원주민들을 사냥해서 노예로 팔아버리는 악행을 버젓이 저지르는 장면도 나오고, 또 그들 나라의 힘에 비해 교황청의 힘이 약했는지 기껏 현지에 파견된 추기경은 진실을 뻔히 확인하고도 그들이 사악한 노예사냥꾼들에게 희생당하다가 끝내 몰살당하는 것을 그냥 지켜보고도 교황청에 달랑 편지 한 통 써서 보냅니다. 선교사들은 용감했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원주민 아이들은 선교사들에게서 받은 금도금한 십자가와 바이올린을 강물에 내버린 채 밀림으로 들어가 버리지요. 원래 밀림에서 살던 그들을 나오게 한 사람들은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강물에 내버려진 십자가와 바이올린처럼, 이 어처구니 없는 ‘확신’의 만행도 강물에 쳐박혔고 더불어 유럽 백인 우월주의를 반영한 제도주의적 교회관도 쓰레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부터는 이 말을 아주 조심스럽게 씁니다. 제도적인 의미의 교회만이 아니라 사랑을 행하는 모든 이들을 다 품은 영적인 의미의 교회라는 뜻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치프리아노의 말은 틀림이 없으되, 교회라는 영역을 더 넓게 보게 된 것이지요. 교회를 복음적 가치가 실현되는 영역으로 이해하시면 틀림없습니다. 치프리아노의 말이 현실성을 얻으려면 그 교회는 사도직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기복신앙이 대세인 공동체로는 어림없지요.
우리가 행하는 사도직은 교회를 현존시키는 활동이요 복음적 가치를 증거한다는 점에서 교회를 확장하는 활동입니다. 이미 사도직을 행하는 사도들의 삶 자체가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황청이 교회의 중심이 아니라 사도직을 행하는 모든 현장이 다 교회의 중심들입니다. 마치 수많은 동심원들이 호수에 얼마든지 가능하듯이 그렇습니다. 사랑의 돌멩이를 세상이라는 호수에 던지기만 하면 사도직이 생겨나고, 사도직이 생겨나기만 하면 그를 중심으로 사랑의 파문이 퍼져 나갑니다.
그래서 사도직이 교회의 중심입니다. 사도직을 행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의 증인입니다. 간판에 ‘교회’라고 써 붙였다고 해서 다 교회가 아닙니다. 사도직이 행해져야 교회입니다. 또 그 사도직을 행하기 위한 성체성사가 봉헌되어야 예수님의 유언을 계승하는 진정한 교회입니다. 성체성사야말로 수난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서로 섬기는 자세로 세상에 진리를 증거하라고 세우신 부활의 성사입니다. 서로 섬기는 자세와 세상에서 진리를 증거하는 일이 십자가일 수도 있겠으나, 그 십자가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 불어 넣어주시는 부활의 힘으로 능히 짊어질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와 사도직이 있는 한, 교회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