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여름 / 한여진 여름에는 슬리퍼 여름에는 슬리퍼 여름 슬리퍼는 여름에만 신을 수 있고 여름 슬리퍼를 신지 않아도 여름은 오지만 그래도 여름 슬리퍼는 꼭 여름에 신기로 하고 여름 슬리퍼를 꺼내기로 한 여름에는 여름 슬리퍼를 신고 강원도로 여름에는 강원도 여름에는 강원도 여름에는 가득찬 강원도를 보러 여름에는 강원도로 여름이 아닌 강원도로 더할 나위 없지만 그래도 여름에는 여름으로 가득찬 강원도에 가서 능소화를 여름에는 능소화 여름에는 능소화 여름에는 능소화 말고도 많지만 여름 능소화는 여름에만 있으니까 여름에는 담벼락에 조용히 붙어 햇살을 닮아가는 능소화를 그러다 능소화 떨어지고 강원도에 폭우 시작되고 슬리퍼에 발 걸려 넘어지는 날에는 여름이 달아나고 여름이 저멀리 달아나는 여름이고 여름이 여름을 따라잡지 못해 뒤처지는 여름이고 그런 여름이 되돌아서서 거기 있으라고 따라오지 말라고 말하며 다시 멀리 가버리는 여름
-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문학동네, 2023.10)
* 한여진 시인 1990년 출생. 연세대 건축공학과 졸업 2019년 <문학동네> 등단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 저는 쉬운 시를 좋아합니다. 특히 좋아하는 시는 잘 읽히는 시이죠. 요즘 젊은 시인들의 난해한 시를 읽으면, 약간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며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하는 푸념을 하기도 하고요. 저는 ‘있어 보이는 시’보다 (사람이 스며) ‘있는 시’가 더 좋습니다. 제가 쓰고자 하는 시도 바로 (사람이) 있는 시이고요. 오늘 읽은 한여진 시인의 시도 전자에 가깝습니다. 있어 보이는 시이죠. 그런데요,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저는 이 시가 참 좋습니다. 그 이유는 일단 여름이라는 계절의 청량함을 좋아하고, 특히나 강원도를 좋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8월 강원도의 땡볕을 걷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초여름 더위와 선선함 그 어느 지점의 다정한 바람을 맞으며 강원도의 해변을 걷는 것은 좋아합니다. 해변을 걸을 때 모래가 슬리퍼 사이로 들어와도 괜찮습니다. 다소 불편하다 싶으면, 슬리퍼를 벗어들고 걸으면 되니까요. 올해는 몇 번 다녀오지 못했지만, ‘여름에는 강원도 여름에는 강원도 여름으로 가득 찬 강원도’라고 강조하고 싶을 만큼 작년에는 참 많이 다녀왔죠. 제가 있는 용인은 강원도, 특히 강릉으로 떠나기 좋은 곳이거든요. 토요일 새벽에 출발하면 두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바다가 좀 질린다 싶으면, 춘천이나 원주로 방향을 틀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강원도는 여름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여름이 아닌 강원도도 괜찮습니다.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는 것도 괜찮고요,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다가 안목해변에서 따끈한 커피 한잔하는 것도 좋습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나이가 들면 강원도 바닷가 어디쯤 가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살고 싶은 곳이 많습니다. 제주도에 가서 살고 싶기도 하고, 저 땅끝 마을인 해남에 가서 살고 싶기도 하지요. 사실 저에게는 방랑벽이 있는데요, 가정을 꾸리고 아이 낳고 살다 보니 용인이라는 곳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나마 이곳저곳 미래에 살 곳을 옮기고 있는데요, 특별히 ‘여름이 좋은 곳’이면 더 좋겠습니다. 내가 따라다니고 싶을 정도로 멋진 여름이 있는 곳으로. 그런 곳이 분명히 있겠죠. 강원도의 어느 지점이 아닐지 짐작해 보는데요. 혹시 그렇게 멋진 곳이 있으면 꼭 알려주세요.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볼 수 있도록. - 시 쓰는 주영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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