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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8장 20-30절
(3) 하나님이 주신 초유의 해석에 대한 예상 반론!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어주신 30절에 대한 해석을 여러분과 나눴습니다. 이제 그 해석을 공고히 하기 위해 예상되는 반론에 답하고자 합니다.
저는 로마서 8장 29절에 나오는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가 양자 됨과 관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거기서 힌트를 얻어서, 30절의 "영화롭게"가 모두가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영화가 아니라 양자 됨을 뜻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29절을 읽으면 쉽게 알 수 있듯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와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의 의미가 겹쳐집니다. 둘 다 예정의 목적에 대해서 쓴 것입니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에 나오는 "본받게"라는 단어 때문에 이것을 성화에 대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화를 포함할 수는 있어도 단지 성화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더글라스 무는 빌립보서 3장 21절과 고린도전서 15장 49절에 근거하여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일"이 미래인 재림 때 일어난다고 옳게 지적했습니다.
빌립보서 3:20-21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고린도전서 15:48-49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참고로, 로마서 8장 29절의 "본받게 하기 위하여"에 사용된 헬라어는 "쉼모르포스"로 "같은 모양의(conformed)"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3장 21절에서 영화를 설명하며 사용한 "형체와 같이"라는 단어도 "쉼모르포스" 즉 "같은 모양의(conformed)"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는 단순히 성화가 아니라 영화를 뜻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한, 무는 이와 병행을 이루는 문구에 나오는 "맏아들"이라는 단어도 이를 뒷받침해준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밀접한 병행 본문들인 빌립보서 3:21과 고린도전서 15:49은 종말론적이며, 종말론이 이 종속 문단에서 바울의 초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이미 누리고 계시는 영광인 그 미래의 영광을 우리가 누리도록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이 절의 마지막 절인 '이는 그 [그리스도] 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가 이 해석을 추인한다고 볼 수 있다. 맏아들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관념(idea)이 우리에게 다시 살아나는 자들의 '첫 열매'라는(고전15:20, 10-11절 참조) 그리스도의 위치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옳습니다. "맏아들"은 부활과 관계가 깊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두 구절에서 예수님을 부활과 관련시키며 '먼저 나신 자'(firstborn) 즉 맏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요한계시록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러므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일"은 재림 날 우리가 부활할 때 일어난다는 무의 주장이 옳습니다.
그렇다고,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영화와만 관계있는 것은 아닙니다. 찰스 하지(Hodge)는 그 일이 현세에서 그리스도가 모범을 보여준 하나님의 뜻을 본받고, 내세에서 영광을 본받는 것(영화)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존 스토트도 견해가 같습니다. 또한 토머스 슈라이너도 그 일을 영화로 보면서도 현재의 성화가 배제되지 않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와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둘 다 궁극적으로는 영화를 뜻함이 분명합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로마서 8장 29-30절과 가장 일치하는 에베소서 1장 4-5절도 연구해보아야 합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서로 내용이 완전히 같은 구절이지요! 둘 다 예정이 주제일 뿐 아니라 예정의 목적을 보여주고 있는 구절입니다. 또,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와 이 구절에 나오는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가 내용상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 문구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보다 더 성화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로이드 존스는 이 문구가 성화를 뜻한다고 보았습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선택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하신 목적은 우리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그 두 말은 다 성화를 가리켜 말하고 있습니다. ... 저는 사도가 두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그 거룩하게 되는 것을 온건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앞에"라는 전치사구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존 스토트도 인정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미래를 염두에 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구절들에도 그것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에베소서 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골로새서 1:22-23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때문에 클린턴 아놀드는 이 문구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1:4d 우리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본문의 부정사구는 선택의 목적이나 목표를 나타낸다. 옛 언약 아래서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거룩하고 정결한 삶으로 부르셨다(레11:44). 이것은 새 언약 아래서도 변하지 않았다(벧전1:16을 보라). 그래서 바울은 서신 후반부를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4:1)라는 권고로 시작한다. 그런데 전치사구("그 앞에")는 바울이 모든 신자가 하나님 앞에 설 미래의 때를 생각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골로새서의 유사한 본문 배후에 있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구가 성화를 포함하기는 하나 궁극적으로 영화를 뜻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참고로, 존 스토트는 물론 길성남 교수님도 이 구절을 그런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이상 설명해드린 것처럼,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와 "그 아들을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뿐 아니라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도 단지 성화가 아니라 영화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반론의 발판이 됩니다. 저는 로마서 8장 30절을 해석할 때, 29절의 "맏아들이 되게 하심이니라"라는 표현에서 양자 됨이라는 힌트를 얻고 30절의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가 양자 됨을 뜻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와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가 궁극적으로 영화를 뜻하는 것이라면, 29절은 목적을 보여준 것이고 30절은 그 성취를 보여준 것이므로, 30절의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도 영화로 해석해야 되는 것 아니냐? 그런데 왜 양자 됨으로 해석했느냐?"
이것은 정당한 반론입니다. 설득력도 강합니다. 제 해석을 무효로 만들수 있는 강력한 반론입니다. 따라서 이 반론에 대해 여러분에게 답해드리고자 합니다.
실제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와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궁극적으로 영화를 뜻합니다. 그래서 칼빈주의자들이 성급하게 그것이 영화를 뜻한다면 당연히 30절의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도 영화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을 말하고 있는 구절이 맞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을 때만 가능합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영화라는 단어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영화밖에 없다고 착각했습니다. 옵션이 하나뿐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미래에 일어날 일이고, 30절은 과거시제인데도 무리하게 영화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여러 세기 동안 우겨왔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른 옵션이 있습니다. 저는 이미 문자 내면의 문맥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통해, 영화뿐 아니라 양자 됨도 영화롭게 됨을 뜻한다는 것을 온전히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옵션이 두 개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굳이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를 과거시제와 다르게 영화로 해석할 이유와 명분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제 그런 해석은 불가능합니다. 꼼짝없이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를 양자 됨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해석이 옳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물론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와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영화를 뜻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양자 됨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같은 장 23절에 이렇게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이처럼 영화가 곧 양자 됨입니다. 또, 칭의처럼 양자 됨도 이미와 아직의 구조입니다(롬8:14-15, 23). 그래서 30절의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가 영화가 아니라 얼마든지 양자 됨을 뜻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29절은 예정의 목적인 아직의 양자 됨을, 30절은 그 목적을 성취해가는 과정인 이미의 양자 됨을 뜻합니다. 실제로 그런 뜻입니다.
먼저, 이 구절들이 그런 뜻이라는 것이 개역개정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나라."
미래시제지요! 그런데 단지 예정의 목적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예정의 궁극적인 목적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에 일어날 영화를 뜻합니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번에는 과거시제지요! 그러므로 이미 일어난 양자 됨을 뜻합니다.
깔끔하지요! 이처럼 29절은 예정이 목적인 영화 즉 아직의 양자 됨을 쓴 것이고, 30절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 즉 이미의 양자 됨까지를 기술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 구절들과 내용이 온전히 일치하는 에베소서 1장 4-5절을 통해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미래시제지요! 그러므로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미래에 일어날 영화를 뜻합니다.
에베소서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과거시제지요! 그러므로, 더구나 문자 그대로 이미 일어난 양자 됨을 뜻합니다.
이 구절들은 서로 병행을 이루고 내용이 온전히 일치합니다. 그런데 약속이라도 한 듯, 앞 구절들은 미래시제이고 뒤 구절들은 과거시제입니다. 게다가, 로마서의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와 겹쳐지는 에베소서의 부분에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가 막히게 딱 들어맞지요! 이것은 저의 해석대로 30절의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가 영화가 아니라 실제로 양자 됨을 뜻한다는 명명백백한 증거입니다.
여러분, 너무 명백하지 않나요! 그러나 아쉽게도 두 가지 반론이 제기 될 수 있습니다.
먼저, 8장 29절과 1장 4절의 뒷부분이 개역개정과 달리 미래시제가 아닙니다. 원어가 과거시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문제는 아닙니다. 부정사이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고 문맥이 시제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미 해석한 대로 두 구절이 영화에 대해 말한 것이기 때문에 미래시제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 문제가 없지요!
다음으로, 에베소서 1장 5절을 직역하면 헤라어직역성경처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슈아 마쉬아흐를 통하여 하나님의 양자로 예정하신 것입니다."가 됩니다. 다른 몇몇 번역본들도 그렇게 번역했습니다.
표준새번역 에베소서 1:5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공동번역 에베소서 1:5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자녀를 삼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예정의 목적이 자녀 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정의 목적에 대해 쓴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양자 됨이 아니라 영화 즉 로마서 8장 23절에 나오는 "양자 될 것 곧 몸의 속량"을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개역개정은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번역을 했을까요?
저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 합당한 근거나 이유가 있나 열심히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다가 6절의 "거저 주시는"이 그 근거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왜냐하면 헬라어로 "카리토오"인데 개역개정이 번역한 것과 달리 과거시제(동직설 과거 능동 3인 단수)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 헬라어직역성경도 "거저 주신"이라고 과거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에 근거하여 우리는 5절의 "자기의 아들들"을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양자 됨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해석이 옳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거저 주신"이라고 과거시제를 쓴 이유가 5절의 "자기의 아들들"이 미래의 양자 됨이 아닌 과거의 양자 됨을 뜻한다는 근거로 볼 수도 있으나, 4-5절이 예정에 대한 말씀들이고 예정도 과거에 된 것이기 때문에 단지 예정을 가리켜서 과거시제를 쓴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것이 맞나? 를 놓고 한참 씨름을 했는데, 어느 순간 다음 절인 7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과거시제)."
또한, 에베소서 1장 6절에 "이는 ...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했는데 11절 이하 14절에 유사한 표현이 반복되고 있음이 보였습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과거시제).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과거시제)."
그런데 주 내용이 이미 얻은 구원(과거)에 대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바로 뒤 구절(7절)과 그 뒤의 넓은 문맥(11-14절)을 볼 때, 6절의 "거저 주신"이 이미 얻은 구원을 뜻하고, 5절의 "자기의 아들들"도 미래의 양자 됨이 아니라 과거의 양자 됨을 뜻한다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참고로, 로이드 존스와 존 스토트는 물론이고 WBC주석에서 앤드류 링컨도 "자기의 아들들"을 처음 예수 믿을 때 양자가 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길성남 교수님은 원어를 직역한 것을 고수하면서도 "자기의 아들들"을 처음 믿을 때 양자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봅니다. 이것은 로마서 8장 30절의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와 에베소서 1장 5절의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의 병행에 근거해서 "영화롭게"가 정확히 양자 됨을 뜻한다는 저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확실히 뒷받침해줍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에 대한 저의 해석은 병행구절인 에베소서 1장 4-5절의 해석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즉 그것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재확인을 위한 것일 뿐이고, 로마서 8장 30절에 대한 자체 해석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저는 로마서 8장의 영광이 영화와 양자 됨 두 가지가 있음을 확증했습니다. 그런데 8장 30절의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과거시제입니다. 그래서 영화가 아니라 양자 됨을 뜻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으로 이미 칼빈의 견해가 틀렸고 저의 해석이 옳다는 것이 100%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에게 설명해드린 로마서 8장 30절에 대한 해석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