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자시절
성전 스님 불교방송(BBS) ‘행복한 미소’ 진행
행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아련한 그리움을 만난다. 그것은 이미 내 생의 어느 페이지에 기록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행자생활은 출가 이전에 만나야 했던 큰 이별과 아픔들을 곱씹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이 세상 모든 아픔들까지도 지나면 모두 추억이 된다는 것을. 그것은 어쩌면 살아 있는 자들을 향한 축복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내가 행자생활을 한 곳은 고운사였다. 나는 그곳에서 4개월을 살았다. 내 인생에서 그토록 열심히 산 나날은 없었을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도량석을 돌고 또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밭에 나가 일하고...... . 고되다 못해 가혹한 나날들이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열심히 일했다.
불만도 없었다. 나는 그것을 수행이라고 굳건히 믿었다. 몸이 고될수록 더 많이 번뇌를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게송을 읊으며 산길을 걷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것이 내가 걸어가야 할 길임을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다. 그리고 큰스님이 너무 좋았다. 큰스님께서 어디 출타하고 돌아오시면 내게 건네던 말씀들은 이 길이 내게 얼마나 운명적인가를 일깨워 주었다. “그놈 중상이야. 우리 열심히 수행하자. 알았지!”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나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하곤 했다. “그래. 큰스님 말씀처럼 나는 중이 되어 살 수밖에 없는 놈이야. 나는 죽어도 중이 되어야 해. 왜? 이미 날 때부터 중이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나를 규정해 버리고는 했다. 큰스님의 그 사소한 한 마디로 나를 그렇게 규정해 버린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얼마나 상투적이고 흔한 말인가. 그러나 그때 큰스님의 그 말씀을 나는 내 운명 전부의 무게로 받아들였다. 아마 큰스님 말씀처럼 중의 운명을 타고 나긴 했나 보다.
일이 수행이라는 생각과 큰스님에 대한 흠모의 마음으로 나는 내 운명의 길을 열심히 걸었다. 한눈 팔지 않고 매일 1080배를 해 가면서도 그 길에서 나는 즐거웠다. 땀범벅이 되어 몸에서 쉰내가 나도 나는 이 몸이 이제 법체가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즐겁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큰스님께서 계를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6개월은 고사하고 4개월도 안 된 내게 계라니...... . 깜짝 놀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좋기도 했다. 나의 성실성을 인정받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토록 흠모하던 큰스님이 나를 인정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계를 받으라는 큰스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사형 될 스님이 찾아왔다. 계를 받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이곳에서는 6개월이 되기 전에 계를 받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곳의 원칙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갑자기 어중간해진 나의 자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계를 받기 위해서 행자생활을 열심히 한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소할 수도 있는 그 문제가 체기처럼 가슴을 눌렀다. 며칠을 그렇게 체기의 나날을 보내다가 새벽예불을 보기 전에 길을 떠났다. 왠지 그곳이 인연처가 아니라는 결론이 자꾸만 나를 압도해 왔기 때문이었다.
새벽길을 걸어 나오는 길에 돌아갈까, 하고 몇 번이고 발길을 돌리고만 싶었다. 이제 어디로 가나, 하는 걱정도 있었고 큰스님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냥 견디고 살 걸 하는 후회의 마음이 왜 그리 내 발목을 잡던지… . 새벽길을 걸어 나오면서도 그 다음의 행선지가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내 생의 두 번째 막막함이었다. 첫 번째는 출가를 결심하고 나서던 길에서 만난 막막함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이런 생각도 있었다. 출가는 어차피 떠남의 연속 아닌가. 떠나기를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출가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 행자의 오만 같은 것도 있었다.
세 시간여를 걸었던 것만 같다. 그렇게 걸어서야 나는 비로소 마을을 만날 수가 있었다. 마을 앞에 서서 나는 비로소 고운사가 얼마나 오지의 절인가를 알 수가 있었다. 세연을 떠나 잊고 살기에는 고운사가 적지였던 것이다. 나는 다시 내가 걸어 나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길은 산에 가리어 자취조차 없었다. 산 너머 너머에 있는 절, 고운사. 나는 문득 그 절과 큰스님의 모습이 그리웠다.
그리고 법당에서 땀범벅이 되도록 절을 하던 나 자신의 모습까지도 문득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세 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모든 것이 그리움으로 다가서는 것은 내가 그곳을 다시 찾아가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었다. 그 예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나는 아직 고운사를 찾지 않고 있다. 왜일까. 가고자 하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그 절을 찾지 않는 것은. 그리고 뵙고자 하면 언제나 뵐 수 있는 큰스님을 아직 찾아뵙지 않는 것은. 그것은 어쩌면 내 생에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그 시간들을 그냥 그리움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을 어느 집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어느 집은 아직 불마저 밝히지 않고 있었다. 조용했다. 하루에 서너 번 다니는 버스가 들어오기에도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어떡하나, 하고 망설이다가 나는 걷기 시작했다. 단촌에서 의성까지 그냥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걷지 않으면 그냥 다시 발걸음을 돌릴 것만 같았다. 한 번 나온 길을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 이 막연한 막막함보다도 더 싫었기 때문이다. 길은 아직 어렴풋이 새벽의 어둠을 물고 있었고 인적은 자취가 없었다. 아무도 없는 길을 걸으면서 나는 읊조리기 시작했다. “길을 떠나간다. 길을 떠나간다. 내가 길이 될 때까지 길 떠나간다.” 그냥 즉흥적으로 읊고 노래했다. 그렇게 길을 걷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길을 걸으며 그냥 즉흥적으로 읊조리는 이것은 내 오랜 습관이다. 그 막막한 길도 나는 그렇게 읊조리며 걸었다. 나는 생의 어느 순간에도 그렇게 읊조리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눈물을 보이는 것보다 이 즉흥의 음유가 더 큰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얼마를 걸었을까.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까지 당도했다. 무작정 가장 먼저 떠나는 버스를 탔다. 빨리 이별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어차피 행선지도 없는 것, 어디로 가든 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내 걸어온 길을 지나쳐 갈 때 나는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큰스님과 내 출가의 첫 피안 고운사를 향해서.
성전 스님 강원도 영월 출생. 1989년 태안사에서 청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뒤, 해인사 승가대학을 졸업했다. 월간 『해인』 편집장과 『선우도량』 편집장, 대한불교조계종총무원 기획국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불교방송(BBS) 프로그램 ‘행복한 미소’의 진행을 맡아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음성에 실어 보내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행복하게 미소 짓는 법』, 『빈 손』, 『유혹』, 『지금 후회 없이 사랑하라』 등이 있다.
첫댓글 수행자의 길이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때 가끔 행자시절의 어려움을 생각하면 다시금 힘을 낼숟 있다고 들었어요...이렇게도 모진 그리움을 외로움을 다 잘라버려야만 진정한 수행자의 길로 갈수있는거 겠지요..스님의 행자시절이 그려집니다..코끝이 찡해오네요
저는 항상 미용을 스님의 정진 모습과똑같다고이야기를해요...처음 미용실에 취직하면 바닥쓸고 심부름하고 제일 견디기힘든것은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였어요,,,저도 스님의책 관심을 읽고 스님도 나와같은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이드렀고 지금20년이흐른 싯점은 그힘든 과정을 잘견디워왔구나저 자신을 대견스럽게생각합니다..그러나 지금도 긴장합니다 후배들이 있기때문에....스님! 인생은 자기와의 쌍무이란것을 최근 깨달았습니다.힘들두고 외롭더라도 성직자로서 저는 미용사로서 서로의길에서열심히 정진해야 겠네요
아련한 그리움 묻어나지만 힘든 행자시절..처음부터 큰 스님이 되는 법은 없겠죠..고뇌하시던 그시절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으신 스님 가슴이 찡합니다. 해후님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스님께서 행자 생활을 하였던 그 곳 고운사를 몇해 전에 지나오는 길에 들렀습니다.. 무척 아름다운 절이라고 할 수 있고 아주 조용했습니다.. 다음에 고운사를 찾으면 스님의 발자취를 꼭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