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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음(陰)이 있으면 반드시 양(陽)이 있으며 서로 갈마드는 것을 작용으로서의 도라 한다.
一陰一陽之謂道
이 속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여기서의 ‘도’는 본체로서의 도가 아니라 응용으로서의 도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하기를, 중국문화를 말함에 있어 두 가지 문제가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데 하나는 ‘천(天)’자요 하나는 ‘도(道)자’라고 합니다. 중국문자는 육서(六書)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예컨대 ‘도’자는 어떤 때는 형이상을 말하고 어떤 때는 형이하를 말하는데, 형이상의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不可說]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신무방이역무체(神无方而易无體)’, ‘신(神)은 방위도 없고 형상도 없어서 존재하는 곳도 존재하지 않는 곳도 없으며, 역은 고정된 본체가 없다’라고 합니다.
어떤 때는 형이하적 법칙도 도라고 하며, 심지어는 우리가 걸어 다니는 길도 도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하나의 ‘도’자나 ‘천’자에는 여러 가지 정의(定義)가 있습니다. 상고의 문화를 연구하며, 예컨대 우리가 노자의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를 읽어보면, 하나의 ‘도’자가 서너 번이나 사용되고 있는데, 어떤 때는 명사로 사용되고 어떤 때는 동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동사와 명사의 의미는 서로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서를 읽을 때는 어떤 특정 문자들에 대해서 판에 박힌 의미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역경』에서 말하는 이 한마디는 응용으로서의 도입니다. 우주간의 어떠한 것도 모두 ‘일음일양(一陰一陽)’합니다. 예컨대 남자가 있으면 반드시 여자가 있습니다. ‘지위도(之謂道)’에서의 이 道는 하나의 법칙입니다. 정면이 있으면 반드시 반면이 있습니다. 우주 간의 만사만물에 오직 정면만 있거나 혹은 오직 반면만 있기는 불가능합니다. 명말청초에 대문호로서 정판교(鄭板橋)와 함께 유명했던 이어(李漁)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는 말했습니다, ‘세상은 본래 공연 중인 하나의 무대이다. 수천 년 이래로 여기서 연극하는 사람은 오직 두 사람뿐이다. 하나는 남자요 하나는 여자이다.’ 이 한마디는 정말로 훌륭합니다. 수천 년 이래로 이 세상 무대 위에서 역사는 바로 극본이요 연기자는 오직 두 사람뿐입니다. 하나는 남자요 하나는 여자입니다.
음양이 짝이 되어 어울려야 세계를 형성한다
수도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한 마디 명언이 있습니다, ‘만물은 양 하나만으로는 생겨나지 못하고, 음 하나만으로는 자라지 못한다[孤陽不生, 孤陰不長].’ 음이나 양 단독으로는 성취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음양이 배합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한마디 말은 후세의 외도(外道)의 사람들에게 도용되어서, 수도에는 ‘일음일양’이 필요하기 때문에 남녀가 어떠어떠해야 비로소 도를 이룰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것은 허튼소리로서 믿을 수 없는 것이니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주의 법칙은 확실히 이와 같이, ‘일음일양’하며 하나가 부족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정치철학을 가지고 얘기해 본다면, 민주정치는 바로 ‘일음일양’입니다. 당신의 한 파가 있으면 나의 한 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필연적입니다. 만약 단순히 일색(一色)이라면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사람마다 목소리가 똑같고, 얼굴이 똑같으며, 생각이 똑같고 동작이 똑같고,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어서 모두가 똑같은 얼굴 똑같은 방식이라면 이 세상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다들 사흘도 살지 못해 싫증이 날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사람이 형형색색이기 때문에 말타둠도 하고 질투도 하고 소란도 피우고자해서 하루 종일 내내 할 일이 있습니다. 사람이란 태어나면서부터 바로 이런 일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도 이해하게 됩니다.
모순과 균형
이 음과 양을 서로 조화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선(善)이요, 이 둘을 이루는 것은 도의 본체 기능인 성(性)이다. 어진 자는 도를 보고 인(仁)이라 하고, 지혜로운 자는 도를 보고 지혜[知]라 하고, 보통사람들은 도를 날마다 사용하면서도 알지 못하니 군자의 도는 드물다.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仁者見之謂之仁, 知者見之謂之知, 百姓日用而不知, 故君子之道鮮矣.
‘일음일양(一陰一陽)’은 비록 정(正)이 있고 반(反)이 있지만, 정과 반을 조화한 것이며, 모순의 통일이 아니라 균형입니다. 일음일양이 조화 균형에 도달하면 도를 얻고, 불균형이면 도를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계지자선야(繼之者善也), 성지자성야(成之者性也)’입니다. 이것은 바로 공자의 특수한 곳입니다. 왜, ‘사람이 처음 타고난 본성은 착하다[人之初, 性本善].’라고 말할까요? 선(善)에는 무슨 좋은 점이 있을까요? 왜 모든 종교들은 모두가 악(惡)을 제거하고 선을 행하라고 제창할까요? 왜냐하면 선의 작용이 ‘일음일양’의 균형을 완성하기 때문입니다. ‘일음일양(一陰一陽)’이란 곧 ‘일선일악(一善一惡)’입니다. 선이 있으면 반드시 악이 있고, 악이 있으면 반드시 선이 있습니다. 옳음[是]이 있으면 반드시 그름[非]이 있으며, 그름이 있으면 반드시 옳음이 있습니다. 천지간의 선악시비(善惡是非)는 어느 것이 맞을까요? 모두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도덕 또한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도덕과 예의는, 어떤 때에는 도덕적인 것이, 시간과 공간이 바뀌어서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비도덕적인 것이 되어버립니다. 심지어 또 다른 시점에서는 오히려 죄악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선악시비, 도덕흑백은 절대(絶對)가 없는 것이며 모두 인위적인 것입니다. 하나의 절대를 말하면 바로 상대(相對)가 되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절대란 상대로부터 나온 것으로, 상대에 대해서 말해야 비로소 절대라는 개념을 산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형이상의 것은 모조리 석가모니에 의해 다 설해졌는데, 이른바 ‘불가설, 불가설(不可說, 不可說)!’, ‘불가사의(不可思議)!’입니다. 그러나 이 어르신께서도 이미 잘못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불가설’이라고 분명히 말했지만 그는 이미 말했습니다. 뭐라고 말했을까요? ‘불가설!’이라는 한마디를 말했습니다. 형이상이란 바로 이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형이하는 절대적인 것이 없습니다. 오직 인위적으로 그것을 조정할 뿐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계지자선야, 성지자성야(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라고 했습니다. 이 ‘善’자에 대해서는 공자의 학생인 증자가『대학』을 저작할 때, ‘至’자를 하나 덧붙여 ‘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지극한 선[至善]이라고 할까요? 지극한 선은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입니다. 선한 존재가 하나 있다면 곧 악한 존재가 하나 있으며, 선이 지나치면 곧 악으로 변합니다. 예컨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관심이 도를 넘으면 최후에는 당신을 몹시 마음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사랑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사랑 받는 것이 행복합니다.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약 행복이 너무 지나치면 또 조금도 행복하지 않게 됩니다. 당신이 나에 대해 무엇이든 관심을 가진다면 나는 싫어할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것도 너무 과분하면 좋은 일이 아닙니다. 선이 과분하면 바로 악이 됩니다.
이 우주 간은 상대적인 법칙이기에, 선악 · 시비 · 이해가 모두 상대적입니다. 왜 이와 같을까요? 당신은 ‘살아 있는 것이 정말 귀찮다!’ 고 말합니다. 그렇게 귀찮다면 당신은 살아가지 말고 죽는 게 좋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죽으면 오히려 좋습니다. 한 번 죽으면 만사가 끝나니까요,’ 저는 말합니다. ‘만약 당신이 저쪽에 도착해서 저쪽의 고통과 귀찮음이 여기보다 더 많은 것을 발견했다면, 역시 되돌아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형씨, 당신이 나더러 당신을 위해 되돌아올 것을 보증하는 담보를 서라며, 당신 대신 내가 입국비자를 받으라고 하면 나는 정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떤 학우가 상심하고는 나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차라리 죽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죽어버리면 정말로 해탈할까요?’ 그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먼저 그런 사실이 있는지 자료를 조사해서 증명해보아야 합니다. 만약 죽은 뒤의 세상이 이곳보다 훨씬 더 귀찮다면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잘 생각해보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입니다. 당신은 저 세상이 이 세상과 마찬가지로 귀찮다는 것을 정말로 압니까? 어떻게 그것을 귀찮지 않게 할까요? ‘잘 이어나가야[善繼]’합니다. 어떻게 그것으로 하여금 ‘잘 이어지게[善繼]’ 할까요?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공자는 말하기를, ‘계지자선야(繼之者善也)’라고 했습니다.
성(性)과 정(情)
다음에는 한마디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성지자성야(成之者性也)’ 중국문화에서는 오직『역경』과『예기』에서만 성(性)의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물론 이 성은 남녀 간의 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성(人性) 천성(天性)과 같은 형이상의 본체로서의 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뒷날 명심견성(明心見性)을 말했는데, 성은 본체를 대표합니다. 중국문화에서는 처음에는 단지 두 층 즉, 성(性)과 정(情)으로 나누었는데, 성은 본체를 대표합니다. 예컨대 종교인들은 그것을 상제(上帝)나 혹은 여래(如來)라고 부르는데, 이런 것들은 이미 인간의 입장을 떠났습니다. 중국문화는 이런 것들을 떼어내 버렸으며, 이것이 바로 성, 본성입니다. 이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닭이 먼저 있었을까요 달걀이 먼저 있었을까요? 남자가 먼저 있었을까요 여자가 먼저 있었을까요? 모든 것이 나오는 근원이 되는 그것을 성(性)이라 하고, 그 성이 일으킨 작용을 정(情)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바로 성과 정의 구분입니다.
이 우주만물의 기능은 앞에서 우리가 말했는데, 종교가들은 그것을 하느님이라고 하고 여래라고 합니다. 중국문화에서는 공자에 이르러『예기』와 마찬가지로, ‘성지자성야(成之者性也)’라는 이 보고를 제시했는데, 바로 본체 기능의 성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일음일양(一陰一陽)’의 정(情)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풍수를 얘기할 때, 산세는 주위를 둘러싸야 하고 물은 앞으로 낮게 흐르는지[來山去水]를 중시하며 그런 형세여야 비로소 정이 있다합니다.
예전에 어떤 학우가 말했습니다, ‘저의 집 풍수는 좋습니다. 산도 있고 물도 있으며 집안의 많은 사람들이 모두 돈을 모아 외지로 이사 갔습니다. 현재는 나이든 할머니 한 분만 집을 지키고 있는데, 선생님 한 번 어떤지 봐 주시겠습니까?’ 좀 살펴보고는 저는 말했습니다, ‘과연 좋군, 산도 있고 물도 있고, 그러나 자네의 이곳은 쓸모가 없네! 자네는 산도 있고 물도 있어 좋다고 하지만, 오는 산은 공손하지[拱] 못하고 가는 물은 정이 없다네. 그래서 자네 혈육은 흩어지고 사분오열되어 이사 가지 않으면 안 되었네. 늙은 할머니 한 분만 계시는 것을 보면 혈육 간의 정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지.’
한 번은 친구 집에 가서 제가 말했습니다, ‘자네 집이 참 좋군!’ 그가 대답했습니다, ‘그럼, 집 앞에 화원도 하나 있지 않은가! 화원이 있을 뿐만 아니라 큰 분수지(噴水池)도 하나 파서 만들고 고기도 기르고 있다네.’ 저는 말했습니다, ‘자네 얼른 저 분수지를 다시 메워 버리게. 메워버리지 않으면 안 되네. 좋은 풍수 하나가 자네에 의해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졌네, 파내서 나쁘게 되었어!’ 여러분 아직 기억하고 계십니까? 과거 정부청사 전면에 좌우로 하나씩 연못을 판 적이 있었습니다. 이미 그것으로도 좋지 않은데 거기다가 분수까지 설치하고 저녁에는 조명까지 비추었습니다. 마치 한 쌍의 백랍 벌레 같았습니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철거하였습니다만, 이런 문제들은 함부로 장난하듯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미신하지 않는다고 하겠지만, 그게 색깔을 늘어놓고 당신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당신은 절대 미신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렇다고 그것을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이 하기에 따라 바꿀 수도 있습니다. 저는 아예 남들이 위험하다고 하는 곳만 찾아서 삽니다. 어느 곳에 귀신이 있다고 하면 저는 꼭 그곳을 찾아가 머물 곤 합니다. 기회를 이용해 귀신이 무슨 모습인지 좀 보고 싶습니다. 귀신도 사랑스럽습니다! 사람보다 사랑스럽습니다. 귀신 몇 명과 친구로 사귈 수 있다면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귀(鬼)는 어떻게 나타나며, 신(神)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3세(三世)의 유정(有情)중생과 무정(無情)중생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이것들의 근본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른바 ‘성지자성야(成之者性也)’ 이 한마디 말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재가자이든 출가 수도자이든, 여러분들이 도를 이루려고 한다면 여기서 공자가 말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이해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루고자 한다면, 단지 정좌하고 기공 수련에 의지하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습니다. 선행의 성취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이른바 ‘계지자선야(繼之者善也)’입니다.
진정으로 도를 이루고자 한다면 반드시 명심견성(明心見性)해야 합니다. 즉 ‘성지자성야(成之者性也)’인 것입니다. 공자의 이 부분은 도를 전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공자는『역경』을 연구한 결과 이른바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이해했습니다. 만물은 양 하나만으로는 생겨나지 못하고, 음 하나만으로는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음양합일(陰陽合一)의 균형 상태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공덕이 있어야 비로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공덕이 없으면 여전히 이런 기연(機緣)이 없습니다.
방문팔백(旁門八百) 좌도삼천(左道三千)
우리는 앞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 계지자선야(繼之者善也), 성지자성야(成之者性也).’를 얘기했습니다. 이 두 마디 말은 후인들에 의해 모독[汚蔑]되었습니다. 모독되어도 심각하게 모독되었습니다. 중국 어느 일파의 수도자는 정통적인 노장(老莊)과 차별이 있습니다. 도교의 정통적 수도자를 단도파(丹道派) 혹은 단정파(丹鼎派)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신선의 장생불사의 도를 수련하는 파입니다(이것은 후세에 그들에게 붙여진 명칭입니다). 정통 단도파는 다시 남종 · 북종과, 동파 · 서파의 네 갈래로 나누어집니다. 이 밖에도 이른바 방문(旁門) 8백과 좌도(左道) 3천이란 것이 있습니다. 방문 중에는 소위 채보파(采補派)라는 것이 있는데, 남녀 간의 성 관계를 통한 수련법을 전문적으로 말하며, 남성을 위주로 하는 것을 채음보양(采陰補陽)이라 하고 여성을 위주로 하는 것을 채양보음(采陽補陰)이라 합니다. 이 일파는 상당한 수준의 방문이며 상당한 수준의 사문(邪門 비정상적인 것/역주)입니다. 그렇지만 도가 속에는 이런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대단히 많습니다. 여기에다 티베트로부터 들어온 불교의 밀종에는 원대(元代) 이후로 이른바 쌍수법(雙修法)이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이런 것들이 모두 큰 비밀이었지만 지금은 이미 공개되어 전 세계 도처에 공개된 도상(圖像)이 있습니다. 이 부류의 도파와 관련된 서적은 그 기본 이론이 바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와 ‘성지자성야(成之者性也)’를 방패막이로 삼고 있는데. 정말 엉망진창입니다.
하지만 이런 서적들은 보고 이해하기가 정말 쉽지 않으며, 그 속에는 매우 많은 학술용어들이 있습니다. 현재 홍콩에도 전문 도관(道觀)이 있고, 동남아 각지에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관념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이른바 ‘채보(采補)’란 본래 도가의 명칭으로, 천지정화(天地精華)의 기(氣)를 채취하여 자기 육신의 생명을 보양(補養)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장자가 말한 ‘천지의 정신과 서로 왕래(與天地精神相往來)’한다는 의미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에 의해 잘못되어 남녀 간의 성 관계로 여기고 하게 된 것입니다. 현재 대만의 수많은 남성들이 이 부류의 공부를 수련하고 있는데, 조전두(弔磚頭)나 제항문(提肛門) 같은 것 등등이 모두 이 일파의 것입니다. 이것은 좌도방문보다도 더 낮은 수준이며 한 층 더 어긋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구체적으로 여러분에게 말해드리니, 여러분은 분명히 하여 이후 도교서적에서『역경』의 음양 남녀의 설법을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거든 그것이 이 도파에 의해『역경』속의 말이 잘못 사용된 것임을 알기 바랍니다. 이런 것들을 알아야 남을 그르치지 않고 자기도 그르치지 않습니다.
이런 방문좌도들은 말이 근거가 있고 확실히『역경』도 말하고 있지만 ‘성지자성야(成之者性也)’의 ‘성(性)’자를 남녀 간의 성으로 여깁니다. 이와 같이 견강부회하다니 정말 두려울 정도로 오해한 것입니다. 비단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이런 부류의 도서들이 많은데, 그것들은 또 강조하기를 우리들의 조상인 황제(黃帝)가 바로 이 수련법을 이용하여 성공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고대의 여러 신선들이 모두 육신을 닦아 성취하고 전 가족이 날아올랐다고 합니다. 도서에서 이것을 ‘발택비승(拔宅飛升)’이라 하는데, 집이나 정원까지도 모두 그를 따라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집안에 있는 고양이나 개, 쥐나 개미까지도 모두 같이 신선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취할 수 있었던 사람은 물론 얼마 되지 않았으며 오직 황제만이 정호에서 용을 타고 떠나갔다고 합니다[鼎湖龍去]. 도서에서 이렇게 말하는, 이 일파는 잘못된 관념이 크고 큽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잘못된 상대론
이제 우리 되돌아가 얘기겠습니다.『역경』의 이른바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란 결코 도가의 방문에서 말하는 남녀 간의 음양이 아니라, 우주의 체(體)와 용(用)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체는 고요해서 움직이지 않으며[寂然不動], 그것이 일으키는 작용이 바로 ‘용(用)’과 ‘상(象)’입니다. 모든 현상은 저마다 정면과 반면의 상대적인 두 역량에 의해 형성되므로, 천하의 만사 만물은 모두 상대적입니다. 어떤 사람은『역경』을 말하면서 여기에 이르면, 말하기를 이게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허튼 소리 말아요! 상대성이론은 상대성이론입니다. 중국인들은 대부분이 생각하기를 나와 당신이 상대적인 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라고 하는데, 이런 과학 관념은 웃음거리입니다.『역경』이 말하는 이 상대란 우주간의 만사 만물의 상대성을 가리킵니다. 서양의 논리적 관점에서 본다면 바로 모순입니다. 이 모순은 당연히 최후에는 하나로 통일되고 중화(中和) 됩니다. 하지만 서양의 유물론 학자의 모순의 통일은 반면적(反面的)관점이지만, 중국의 상대성은 중화적이며 또 정면(正面)으로부터 바라본 것입니다. 논리를 배우거나 철학을 배움에 있어 이 개념을 특히 분명히 해야 합니다. 현재 일반적인 동서양의 응용논리는 모두 헤겔의 사상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대다수가 정반합(正反合)의 모순 통일을 말하면서, 동양의 정면적인 상대적 중화는 잊어버렸습니다. 중화가 있으면 곧 분화(分化)가 있습니다. 이 균형의 존재가 바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입니다. 음이 극에 도달하면 양이 생기고, 양이 극에 도달하면 음이 생깁니다. 여기서 말하는 도는 본체의 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用]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주 만유의 온갖 현상[象]과 그 작용[用]이 모두 두 개의 상대적 역량에 의해 생긴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의 심리에 대해 말하더라도 상대적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막 고요해졌을 때 나쁜 생각이 곧 일어납니다. 우리가 번뇌와 고통이 극점에 이르렀을 때는 또 고요하기를 바랍니다. 음으로써 번뇌와 고통을 대표하고 양으로써 고요하고 평온함을 대표해보면, 절대적으로 고요한 때도 없고 절대적으로 번뇌하는 때도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음이 극에 도달하면 양이 생기고, 양이 극에 도달하면 음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인 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상이 어떻게 변화하더라도 도(道)의 본체는 움직이지 않습니다[不動]. 이 원리를 이해하고 장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계지자선야(繼之者善也)’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선악(善惡)은 음양을 대표합니다. 선이 있으면 반드시 악이 있고, 악이 있으면 반드시 선이 있어서, 선악 두 개는 반드시 상대적입니다.
이제 종교적인 문제를 하나 제기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천주교나 기독교가 서양 종교인 줄 알고 있겠지만, 5대 종교의 성인들은 모두 동양인들이지 서양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나 모세는 모두 동양인입니다. 세계적인 종교는 모두 동양에서 발생했지만 뒷날 서양으로 전래되어 거기에서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의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곧 마귀라는 존재가 있어서 하느님과 마귀는 반드시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서양 종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느님은 만능(萬能)이겠지만 제가 볼 때에는 마찬가지로 불능(不能)입니다. 마귀 하나조차도 어찌해볼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대단한 솜씨를 갖고 있는 만큼 마귀 또한 그만큼 대단한 신통을 갖고 있습니다. 이 도리는 무엇일까요? 선이 있으면 반드시 악이 있어서 반드시 상대적입니다. 선악과 시비는 모두 인위적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진정한 선악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진정한 시비(是非)가 있을까요? 역시 없습니다! 모두『역경』과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이 달라지면 선악시비(善惡是非)의 기준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의 이 사회는 요즈음 여학생들이 여름에 어깨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다니는데, 만약 몇 십 년 전에 이렇게 입었다면 사람이 놀라 까무러치지 않은 게 이상하였을 겁니다! 이게 사람인가? 요괴인가?. 그러나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한다면 이 사람은 바로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입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선악시비는 절대적인 표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이상의 도에는 선악시비가 없고, 형이하의 용(用)에는 선악시비가 있게 됩니다. 이른바 음이 있으면 양이 있다는 이 도리를 이해하고 난 뒤에는 선악시비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세계에서는 선악이 또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양(陽)의 일면을 써야합니다. 적어도 당신이 음을 쓰던 양을 쓰던 간에 ‘계지자선야(繼之者善也)’를 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최선의 출발점으로 하여 음을 잘 활용하든 양을 잘 활용하든 상관없이 모두 성공하는 것도 마치 선종의 육조(六祖)가 ‘바른 사람이 사법(邪法)을 사용하면 사법 역시 정법(正法)이요. 바르지 못한 사람이 정법을 사용하면 정법 역시 사법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이 때문에 ‘계지자선야, 성지자성야(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인 것입니다. 선(善)의 대업을 완성하는 것은 사람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인성의 최고점입니다. 이 몇 구절들을 귀납해보면, 당신은 공자의 학설 의발을 계승한 증자가『대학』에서 말한 “대학(大學)의 도(道)는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친애함에 있으며, 지극한 선[至善]의 경지에 머묾에 있다.”고 한 구절이 무엇에 근거해서 왔는지를 알게 됩니다. 성선(性善)은『역경』의「계사전」으로부터 유래하였으며『대학』의 도는 건괘의「문언(文言)」과 「계사전」으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우주간의 지극한 선의 대표
이제 본체라는 것을 얘기하겠습니다. 우주 만유의 본체(본체도 빌려 쓴 명사입니다), 즉 만물이 생겨나기 이전의 그것은 ○으로서 상(象)이 없어서 묘사할 수가 없습니다. 이 상이 없는 상[無象之象]은 완전하고 원만한 모든 것을 대표합니다. 그것은 청정(淸靜)한 것이며 지극히 선[至善]한 것입니다. 그것이 용(用)을 일으킬 때 한 번 움직이기만 하면 상대적인 역량이 나와서, ‘일음일양’을 드러내고 선악이 있고 시비가 있고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는 용(用)과 상(象)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움직이기 이전의 그 본체는 적연부동(寂然不動)하며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으며 양도 없고 음도 없습니다.
뒷날 정통의 도가나 불가에서 말하는 ‘도를 얻었다[得道]’는 것도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의 도가 아니라, 음도 없고 양도 없으며, 움직이지도 않고 정지하지도 않으며, 시(是)도 없고 비(非)도 없으며,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경지, 즉 도체(道體)의 경지입니다. 용(用)을 말할 것 같으면,『역경』전체가 바로 용입니다.
『역경』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제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공자가 연구하고 난 대답은 이렇습니다, ‘인자견지위지인(仁者見之謂之仁), 지자견지위지지(知者見之謂之知), 백성일용이부지(百姓日用而不知), 고군자지도선의(故君子之道鮮矣)’, ‘선(鮮)’은 고문의 용법입니다. 적다, 아주 적다는 뜻입니다.『역경』의 본체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지난 날 ‘신무방이역무체(神无方而易无體)’를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원칙을 파악해야 합니다. 두 번째 문제는『역경』의 용(用)은 어느 용인가? 입니다. 본체의 체의 용일까요(체 역시 가설입니다), 아니면 작용을 일으킨 이후의 용일까요? 이상(理想)이 다르고 각도가 다르면 관념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한 사람이 이 도를 이해하면, ‘인자견지(仁者見之)’, 이 ‘見’자는 바로 관념입니다, 그의 관념은 바로 인(仁)입니다. 공자가 仁을 주장하고, 맹자가 의(義)를 주장하여 각자 달랐습니다. 묵자가 겸애라고 했고, 예수는 박애라고 했고, 부처님은 자비와 평등이라 했고, 유가가 인(仁) ․ 의(義) ․ 도(道) ․ 덕(德)을 말한 것은, 모두 명칭이 달랐고 관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해하듯이『역경』의 상수는 10가지 방면으로부터 문제를 바라보는 것인데, 하나의 괘상(卦象)의 반복착종(反復錯綜)으로부터 관찰 분석하기에 보이는 바도 자연히 다릅니다. 그래서 ‘인자견지위지인(仁者見之謂之仁), 지자견지위지지(知者見之謂之知)’입니다. 학문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도를 이해하고 智라고 부릅니다. 지혜의 지(智)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관점이 다르므로 그 보는 바도 달라집니다. 요컨대 천하의 이 도는 어디에 있을까요? 서양의 종교가의 설하는 것을 원용(援用)해보면, 도대체 하느님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느님은 있는 곳도 없고, 없는 곳도 없습니다. 불가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여래는 어디로부터 온 곳도 없고 간 곳도 없습니다. 부처는 바로 여기 곧 당신의 마음에 있지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도가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도는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도입니다. 하지만 이 마음이란 우리들 인심(人心)의 마음이 아니며 생각이라는 마음도 아닙니다. 이 마음은 반드시 생각이 모두 고요해져서, 희비(喜悲)도 선악도 시비도 없는 적연부동한 저 마음의 본체가 바로 도입니다.
도가 우리들 사람의 몸에 도달하여서 ‘백성일용이부지(百姓日用而不知)’입니다. ‘백성’은 고대에 일반 사람들에 대한 총칭이었는데 오늘날로 말로 해석하면 바로 인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말하면 백성은 인류를 대표하고 불가의 입장에서 말하면 더욱 확대됩니다! 온갖 중생 온갖 생명의 존재는 그 자체가 바로 일종의 도의 작용입니다. ‘백성일용이부지(百姓日用而不知)’, 우리는 매일 이 도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 도를 알지 못합니다. 사람은 어떻게 해서 생각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서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을까요? 번뇌가 있고 고통이 있는 줄 어떻게 해서 알까요? 어머니가 나를 낳기 이전에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요? 지금 죽는다면 어디로 가야할까요? 닭이 먼저 있었을까요 달걀이 먼저 있었을까요? 남자가 먼저 있었을까요 여자가 먼저 있었을까? 전체적인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고, 이것은 모두 도의 분화(分化)입니다. 그러나 도는 어디에 있을까요? 도란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작용의 측면에서는 그 본체를 볼 수 있으나 본체의 측면에서는 그 작용을 볼 수 없습니다. 본체로 돌아가자마자 작용은 곧 고요해집니다.
그래서 공자는 말하기를, 우리들의 생명은 작용 속에서 있으면서 날마다 도를 사용하고 있지만 자기가 오히려 도를 볼 수 없다고 합니다. ‘백성일용이부지(百姓日用而不知), 고군자지도선의(故君子之道鮮矣)’. 도가 그렇게 가까이 있다면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자신에게 있습니다! 하느님에게 있는 것도 아니요, 부처님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보살님에게 있는 것도 아니요 선생님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당신에게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요? 심장도 아니고 머릿속도 아닙니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바로 있는 그곳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고군자지도선의(故君子之道鮮矣)!, 이 때문에 공자 당시의 보고는 말합니다, ‘도를 얻은 사람이 너무나 적다. 왜 그럴까? 이해를 하고 싶지만 그런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이상은『역경계전별강』제5장에서 발췌 번역하였음)
황중통리(黃中通理) : 지극히 높은 인생 경지
군자가, 추상적으로는 천지의 중(中)이요 인체로는 내부의 위나 장 등의 일체가 다 좋은 것인, 황중(黃中)이 외부의 피부와 모공까지 통하고, 그 몸에 천도와 인도가 하나로 합한[天人合一] 바른 위치가 거하니, 아름다움이 그 가운데 있어서 안면에 광채가 가득하고 사지에 충만하여 온몸이 막힘없이 확 통하고, 이런 내면의 수양이 어떤 기회에 외부의 사업과 연계되면 안과 밖이 합하여 하나가 되면서 천도와 인도가 하나로 합하여 아름답기 그지없다.
君子黃中通理, 正位居體, 美在其中, 而暢於四支, 發於事業, 美之至也.
육오(六五) 효(爻)에 대한 해석인데, 이게 바로 훗날의『중용』사상입니다. 제가 얘기한 적이 있지만『대학』의 사상은 건괘로부터 나왔고,『중용』의 사상은 바로 이 구절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학술적 주장은 저의 전매특허입니다. ‘황중통리(黃中通理), 정위거체(正位居體)’, 이게 바로 중용의 도입니다.『중용』제1장이 말하는, “만약 언제 어디서나 수양하여 중화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면, 자기가 본래 천지와 더불어 동일한 본래의 위치에 존재하고 있으며, 동시에 자기가 본래 만물과 더불어 동등하게 천지의 생생불이(生生不已)의 양육(養育) 속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는 구절이나, 맹자가 말하는 양기(養氣), 즉 “나는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 (중략) 그 호연지기라는 것은 무엇으로 견줄 수 없을 만큼 지극히 크다. 양명(陽明)한 기(氣)로서 지극히 강하다. 동요시킬 수 없고 변경시킬 수 없는 것이며, 빛나면서 생기가 활발한 것 등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 바르고 자연스러움으로써 길러서 해를 끼치는 일이 없으면[以直養而無害] 하늘과 땅 사이에 충만하다[吾善養吾浩然之氣 (中略) 至大至剛以直養而無害라 充塞於天地之間].”는 구절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중국 도가에서는 수도하여 신선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임맥과 독맥 이 두 맥을 통하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임맥 독맥을 통하게 하려면 먼저 ‘황중통리(黃中通理)’해야 합니다. 이 ‘황중(黃中)’이란 추상적으로 말하면 천지의 중(中)이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체 내의 위나 장 등 일체(一切)가 다 좋은 것입니다. ‘황’이란 중앙의 색깔이며 ‘이(理)’는 ‘도리’의 리(理)가 아니라 중국의학에서 말하는 ‘주리(腠理)’, 즉 피부와 모공(毛孔)입니다. 공부가 성취되고 수양이 충분해진 사람은 내부도 통하고 외부도 통해서 모공마다 모두 통합니다. 이때가 바로 이른바 천도와 인도가 합하여 하나가 된[天人合一] 경지인데, 신체에 도달해서 안면에 모두 광채가 있습니다. 이때는 참으로 아름답고, 사지에 충만하고 전신이 모두 막힘없이 확 통해졌습니다. 그렇다면 ‘내성외왕(內聖外王)’, 내면에 이런 높은 수양이 있기에, 만약 어떤 기회에 밖으로 발현되어 사업에 발휘될 경우, 안과 밖이 합일하고 천도와 인도가 합일하여 지극히 아름답습니다.
(『역경잡설(易經雜說)』에서 뽑아 번역하였음)
성성존존과 여여부동
성성존존은 도의의 문이다. 다시 말해 정말로『역경』의 저 도통(道統)을 이해함에 도달하면, 우주만유의 저 도체(道體)의 경지는 영원히 불생불사(不生不死)하는 것이다.‘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가 바로‘도의(道義)의 문’으로서, 도를 완성할 수 있고‘명심견성’,‘여여부동’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成性存存, 道義之門.
이것은 공자의 가장 훌륭한 한 마디 말인데, 인생철학에서『역경』일 뿐만 아니라 수도(修道)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이 여덟 글자는 해석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과거에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 승낙하고『역경』을 백화로 번역한 적이 있는데, 마지막에 좀 생각해보니 어쩔 방법이 없기에 포기하고 투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역경』을 강해하면서 고문의 해석만 사용할 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백화로의 해석은 그 정신과 의미를 전달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불법을 학습하면서 ‘명심견성(明心見性)’을 말하는데, ‘명심견성’은 절대적으로 공(空)할까요? 공이 아닙니다! 유(有)일까요? 유도 아닙니다. 공자는 ‘성성존존(成性存存)’이라는 네 글자로써 모조리 다 말해버렸습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공자는 도를 얻었습니다. ‘성성존존(成性存存)’, 정말로『역경』의 저 도통(道統)을 이해함에 도달하면, 우주만유의 저 도체(道體)의 경지는 영원히 불생불사(不生不死)하는 것입니다. ‘존존(存存)’이란 바로 그 모습으로서, 오직 불가의 ‘여래(如來)’라는 두 글자로의 번역이 가장 좋습니다. 불가는 ‘여래’를 ‘도(道)’라고 번역했습니다. ‘여래’는 불가를 대표하고 ‘도’도 대표합니다. 무엇을 ‘여래’라고 할까요? 바로 ‘여여부동(如如不動)’입니다. 무엇을 ‘성성존존(成性存存)’이라고 할까요? 바로 ‘여여부동’입니다. 불가는 ‘여여부동’이라고 말했지, ‘부동(不動)’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 같다고만 말했습니다. 당신은 한번 들어보세요! 마치 움직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움직일까요? 움직이지 않을까요? 그것이 움직인다고도 말할 수 없고 움직이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여부동’이라고 하고, 이런 모습을 ‘여래’라고 합니다.
공자는 당시에 이미『역경』중에서 ‘성성존존(成性存存)’의 경지를 제시하였습니다. ‘도의지문(道義之門)’, 이 ‘道’에 대해서는 우리 다시 해석하지 않겠습니다. 공자는 이미 명백하게 말했습니다. ‘義’란 알맞다[宜]의 뜻입니다. 상의(相宜)하다는 뜻의 宜입니다. 꼭 알맞은 정도에 이르러야지 너무 지나치면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불학의『반야심경』에서는 말하기를,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不垢不淨, 不增不減]’고 하는데, 이게 바로 ‘알맞다[宜]’입니다. 즉, 중도(中道)입니다.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가 바로 ‘도의(道義)의 문’으로서, 도를 완성할 수 있고 ‘명심견성’, ‘여여부동’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역경잡설』에서 뽑아 번역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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