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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 35] 우암 송시열(上) 하루 100리를 속보로 걷던 송시열, 제자들이 헉헉 거리자... <조선일보> 2014년 10월 10일
조선의 대유학자이자 노론의 영수로서 역사에 길이 빛나는 선비인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위대한 인물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고 하는데, 83세까지 장수했습니다. 그것도 늙어서 여러 번 귀양을 다니다가 마지막에는 사약(賜藥)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 것이기에,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90세 정도는 살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과연 우암 선생의 장수비결은 무엇이었을까?
▲후손들이 국립청주박물관에 기탁한 우암 송시열 선생의 영정. 조선일보DB
젊은 제자들이 따라가기 힘들었던 우암의 빠른 발걸음 우암은 젊은 시절에 빨리 걷기 운동을 많이 했습니다. 24세에 김장생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여 율곡의 학통을 물려받았는데, 일 년 뒤에 김장생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김집 선생에게 배워 학문을 대성했습니다. 그런데 벗이었던 송준길 선생의 권유에 따라 집을 회덕(懷德)의 송촌(宋村), 즉 은진 송씨 집성촌으로 옮겨가서 그와 한 마을에 살면서 같이 공부했습니다. 회덕에서 김집 선생이 사는 연산(連山)까지는 50리나 떨어져 있었는데, 송시열 선생은 매일 책과 도시락을 싸다니며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니 하루에 100리 길을 걸어 다녔기에 우암 선생의 다리는 무척이나 튼튼해졌던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에 그렇게 빠르게 걸어 다닌 바람에 넓은 개울이나 도랑을 거의 평지같이 걸어 다닐 정도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늙어서 산수를 유람하러 다닐 때는 함께 따라나선 문하생들이 미처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잘 걸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삼시마다 한 되 밥을 먹고 하루에 백리 길도 못 가는 사람은 학문도 능히 성취해 내지 못하는 위인이다”하는 말로 재촉하곤 했습니다. 이처럼 빨리 걷는 습관이 몸에 밴 것이 우암을 평생 건강의 길로 이끌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요즘 걷기 운동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 약간 빨리 걷는 것이 좋습니다. 땀이 잘 나고 혈액순환도 더욱 활발해지므로 효과가 커지요.
평생 부지런하게 살았던 우암 우암은 평생을 부지런하게 살았습니다. 68세에 함경북도 덕원으로 귀양을 갔을 때의 일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지요. 마음이 아픈 데다 북방의 겨울이라 무척 추웠기에 건강이 나빴지만 하루 종일 방안에 앉아 지칠 줄 모르고 책을 읽었습니다. 혹독한 시련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모든 시름을 잊으려는 듯 저술에 몰두하여 3년간의 고심 끝에 72세의 나이로 <주자대전차의>라는 책을 완성했습니다. 치질에다 가래기침 등 악화된 건강 상태와 싸우며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거의 쉴 틈도 없이 매달렸다고 합니다. 나태함을 싫어하고 부지런하게 지내는 습성이 그대로 이어졌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관직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자유롭게 지내다 우암은 벼슬살이를 늦게 시작했고, 관직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27세에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29세에 봉림대군의 사부로 임명됐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이후에는 산 속의 조용한 곳에서 지냈습니다. 43세 때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자 왕의 부름을 받아 벼슬을 제수 받게 되는데, 이후로 무려 28번이나 관직에 취임과 사퇴를 반복했습니다. 52세 때 이조판서가 됐고 북벌 계획에도 깊숙이 관여하지만 다음 해에 효종의 갑작스런 승하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갔지요. 현종이 즉위한 53세 때 왕의 신임을 얻어 좌참찬을 지냈으나 다음 해 남인의 탄핵을 받고 낙향했습니다. 62세에 다시 우의정이 되었으나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했고, 65세에 다시 우의정, 좌의정을 잠깐 지냈습니다. 만약 우암이 골치 아픈 벼슬살이를 계속 했더라면 건강상태가 나빠져 장수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성균관대 박물관장 이준식 교수가 2014년 9월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박물관에서 개관 50주년을 기념해 국내 최초로 공개한 우암 송시열 선생의 대자첩(大字帖)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글씨는 '富貴易得 名節難保'(부귀이득 명절난보, 부귀는 얻기 쉬우나 명예와 절개는 지키기 어렵다는 뜻) 8자로 한 글자가 대략 89x90cm, 전체 길이가 7m에 달하는 국내 서예사상 유명인사의 가장 큰 글씨이며,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유물로서 최초로 공개되는 데 의의가 있다. 이 글씨는 우암이 모함을 받았을 때 목숨을 걸고 스승의 변론에 앞장선 제자 농계 이수언에게 써준 것으로 이 글귀는 '주자대전(朱子大全)' 54권에 나온 것이라고 한다.
공기 맑은 곳에서 재야 생활을 즐긴 우암 우암은 절간에서 독서하기를 좋아했고 산천 유람을 즐겼습니다.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공림사(空林寺), 속리산에 있는 고산사(高山寺)와 서대사(西臺寺), 진산에 있는 청림사(靑林寺)에 들어가 세속의 번다함을 피해 책을 읽곤 했습니다. 그리고 금강산이나 선유동을 찾아 심신을 달랬다고 합니다. 젊어서 충북 황간의 냉천리에 초당을 지어 이주했는데요, 산 높고 계곡 물 맑은 곳으로 사색과 독서를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아울러 건강 장수에 좋은 여건이기도 했죠.
60세에는 충북 괴산의 낙양산 아래 화양동(華陽洞)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계곡의 빼어난 경치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죠. 지극히 아름다운 천석(泉石)의 경치가 있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책 보기가 아주 좋다고 했습니다. 화양동 계곡의 운영담 위에 다섯 칸 크기의 살림집을 마련하고 화양계당(華陽溪堂)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좀 떨어진 금사담 위에 세 칸 크기의 정자를 지었는데, 그게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암서재(巖棲齋)입니다. 이 정자에서 독서와 사색을 했으며 때로는 찾아오는 제자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우암은 자연을 즐기며 유유자적하면서 세월을 보낸 것이죠. 77세에도 10일간에 걸쳐 금강산 유람을 했다고 하니 건강 상태가 꽤 좋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검소한 식생활 우암은 아주 가난하였기에 산나물로 이루어진 몇 가지 반찬이 고작이었고, 그나마 때로는 끼니를 굶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평소 소식을 하는 데다 밤늦게 귀가하면 저녁도 들지 않았을 정도로 건강을 관리했다고 합니다. 밤늦게 밥을 먹으면 몸에 해롭다고 보았기 때문인데, 위장병으로 고생을 했기 때문에 이토록 조심하게 된 것이죠. 역시 사람은 약간의 병이 있어야 조심하게 되어 건강을 유지하고 중병을 예방하여 장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범생 같은 일상생활 우암은 술과 담배, 그리고 여자를 멀리했습니다.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고 해서 피우지 않았고, 젊은 시절부터 술과 여자를 멀리 해서 늙도록 건강을 잘 유지했던 것이죠. 80세 가까이 되어서도 머리카락에 윤기가 있어 제자들의 탄복을 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정신건강을 유지했고, 가난한 살림이었으나 편안함을 즐기는 자세로 지냈습니다. 조선 최고의 대유학자로서 수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우암이기에 마음 건강의 달인이었죠. 그랬기에 수차례에 걸친 귀양살이도 잘 견뎌내었던 겁니다. 우암은 인간의 내장과 마음이 긴밀한 관계에 있다고 보아 정신 건강에도 남다른 주의를 기울였다고 합니다. 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 36] 우암 송시열(中) 90대 노인에게 아들을 낳게 한 '과일 비아그라' <조선일보> 2014년 10월 16일
우암은 젊을 때는 공부하러 다니느라 하루 백리 길을 걸어 다녔고, 중년 이후에는 공기 맑고 경치 좋은 곳에서 유유자적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산나물 반찬으로 소식하며 술과 담배 그리고 여자를 멀리하고 지냈습니다. 게다가 늘 부지런하고 마음 편하게 생활했기에 건강 장수할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많이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그밖에도 건강 장수에 도움을 준 몇 가지가 더 있습니다.
우암이 중년에 살았던 정자 주변의 한약재 우암은 47세에 현재의 대전시 동구 소제동에 따로 지붕을 이은 집을 지었는데, 집 주위에 구기자와 국화가 무성하여 사람들이 ‘기국정(杞菊亭)’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현재는 대전시 동구 가양동에 있는 우암사적공원 내로 옮겨져 있지요. 그러니 당연히 구기자차와 국화차를 마시고 국화 향을 맡으며 살았을 테니 그야말로 건강장수촌이라 할 만합니다.
구기자(枸杞子)는 구기자나무의 열매입니다. 신장과 간장의 음기를 보충하는 효능이 커서 음기를 보충하는 처방에는 거의 들어가는 한약재입니다. 몸이 쇠약하고 어지러우며 눈이 침침해지는 경우에 좋을 뿐만 아니라 근육과 뼈, 허리를 튼튼하게 하고 귀를 밝게 하며, 수명을 연장하고 노화를 방지하는 효능이 있어 구기자는 옛날부터 많이 사용되어 왔습니다. 구기자에는 재미난 얘기가 전해옵니다.
▲구기자
구기자에 전해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 옛날 중국의 어느 지방에서 중년 부인이 노인과 말다툼을 하다가 그 노인의 뺨을 때렸습니다. 때마침 그 곁을 지나던 사람이 그 광경을 보고 “어째서 노인을 그처럼 무례하게 때리시오?”라고 물었더니 여인이 대답하기를, “당신은 가던 길이나 갈 것이지, 왜 남의 집안 일에 참견이요. 이 사람은 내 아들이오”라고 말했습니다. 나그네가 놀라서 “아들이라니, 당신의 나이가 몇인데 저 노인을 보고 아들이라 하오?”라고 하자 그 여인이 대답하기를 “아들의 나이는 72세이고, 내 나이는 96세요. 어디 잘못되었소?” 나그네는 “예 그렇다면 미안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었어도 그처럼 혈기가 왕성할 수 있는 어떤 비결이라도 있습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우리 집에는 선조 대대로 전해오는 ‘구기자차’라는 불로장수약이 있는데, 그 차를 마시고 모두 장수했다오. 그런데 이 아들놈은 차를 마시라고 해도 말을 안 들어서 이제 겨우 72세밖에 안된 놈이 나보다도 늙어서 머리가 백발이고 허리가 아프다고 하는 것이라오”
나그네는 “구기자차, 구기자차”를 되뇌면서 가던 길을 재촉했다고 합니다.
과연 구기자를 먹으면 젊어질 수 있을까? 구기자에 얽힌 이야기는 과장된 것이지만 그만큼 구기자가 약효가 대단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구기자와 관련된 얘기들이 많이 전해 옵니다. 중국의 진시황이 ‘서복(徐福)’으로 하여금 동남동녀를 거느리고 동해의 봉래섬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게 했는데, 그 불로초가 바로 구기자였다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천 년 전의 한방약물학 책에는 ‘구기자를 오래 먹으면 몸을 가볍게 하며 얼굴색을 좋게 하여 동안(童顔)이 되게 한다’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구기자를 위주로 한 ‘구기환동환(枸杞還童丸)’이라는 처방도 있는데, 환동은 아이로 되돌아가게 한다는 뜻이죠. 옛날 중국 서하지방의 여인들은 구기자나무의 열매, 잎, 뿌리, 줄기 등을 자주 먹었다고 하는데요, 피부가 아름답고 윤택해지며 기미나 여드름 같은 것이 말끔히 없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구기자는 허기를 보충하고 근육과 살을 강하게 하며 몸을 건실하게 하는 보약이죠. 구기자로 술을 담근 구기주를 마시는 것도 좋은데, 옛날부터 연년익수(延年益壽), 즉 오래 살게 하는 처방으로 상용되어 왔습니다. 매일 아침, 저녁에 한 잔씩 마시는데, 특히 밤에 자기 전에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구기자가 야생 비아그라로 불리는 이유 중국 광동 지방에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90세가 되어서도 정력이 왕성한 노인이 있었는데,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20대 처녀와 재혼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 노인이 평소에 먹는 보양식이 바로 ‘이어기자탕(鯉魚杞子湯)’이었습니다. 이어는 잉어이고, 기자는 구기자이죠. 또 다른 얘기에는 어느 노인이 구기자를 먹었더니 나이가 백세가 넘도록 달리는 것이 나는 듯 빠르며, 빠진 이가 다시 돋아나고 양사, 즉 성생활까지 왕성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구기자는 최고의 정력제에 속합니다.
구기자나무는 번식력이 왕성하고 잘 자라, 한 해에 두 번 꽃이 피고 두 번 잎이 돋아나며 열매도 두 번 열립니다. 그래서 성기능, 즉 정력을 강화시키는 효능도 탁월하지요. 또한 구기자는 신장과 간장에 작용하기 때문에 정력제가 되는 겁니다. 한의학에서 성기능을 주관하는 곳이 신장이고, 성기 주변으로 통하는 경락이 간장 경락이기 때문이죠. 성기를 ‘宗筋(종근)’, 즉 으뜸가는 근육이라고 일컫는데, 근육을 주관하는 곳이 간장입니다. 그래서 구기자는 인삼, 하수오(何首烏)와 함께 ‘3대 야생 정력초’라고도 하고, ‘과일 비아그라’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구기자를 주의해야 하는 경우 중국 속담에 ‘집을 떠나 천릿길에 구기자를 먹지 마라’라는 말이 있다. 여행할 때 구기자를 먹을 경우 정기가 넘쳐 자칫 실수를 할까 염려되기 때문이죠. 일본에서도 ‘독신자는 구기자를 먹지 마라’는 말이 있고, 속담에 ‘혼자 사는 남자에게 구기자 술을 먹이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처럼 성기능이 왕성한 경우에는 구기자를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비위장이 허약하여 소화가 잘 되지 않고 설사를 잘 하는 경우에는 피해야 합니다.
▲마돈나
마돈나가 구기자를 먹은 까닭은? 구기자는 동양에서만 먹는 것이 아니고 서양에서도 인기가 많습니다. 영국의 BBC 보도에 의하면 마돈나, 엘리자베스 헐리, 미샤 바튼, 케이트 모스 같은 연예계의 스타들이 구기자를 즐겨 먹는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러자 영국과 미국 여러 곳에서 건강식품 전문점뿐만 아니라 대형 슈퍼마켓에서도 구기자가 인기상품으로 불티나게 판매됐다고 합니다. 마돈나를 비롯한 스타를 보면 전혀 나이를 먹지 않는 것처럼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군살이 전혀 없는 날씬한 몸매의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바로 구기자라는 겁니다. 이처럼 서양 사람들이 구기자를 즐겨 먹는 것은 구기자에 영양성분이 많이 들어 있는데다 실험적으로 약효가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구기자의 영양성분과 약리작용 구기자에는 비타민 C가 오렌지보다 훨씬 많이 들어 있고, 암 예방에 뛰어난 베타카로틴도 당근보다 많으며 필수 아미노산은 물론이고 철분을 비롯한 각종 미네랄이 들어 있습니다. 혈관강화제인 루틴이 들어 있어 혈관의 탄력을 좋게 해 주며, 칼륨이 많이 들어 있어 나트륨 과다 섭취로 인한 고혈압의 예방에도 좋습니다.
구기자는 실험 연구를 통해 체지방의 증가를 억제하고 지방세포의 증식과 분화를 억제하고 수명을 연장시키는 효과가 밝혀졌습니다. 또 면역력을 강하게 하고, 지방간과 간 손상을 억제하며, 혈관을 확장하고 혈압을 떨어뜨리는 등 동맥경화를 예방하는 작용도 있지요. 그리고 강력한 항산화 활성으로 성인병과 노화를 억제하며 피부 노화를 예방하는 것도 밝혀졌습니다. [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 37] 우암 송시열(下) 중병에 걸린 뒤 정적이 준 극약을 먹고 살아나다 <조선일보> 2014년 10월 21일
사약 1잔 먹고 끄떡없어 3잔 먹고 죽은 건강체 우암은 젊어서부터 모범적인 생활 태도를 유지해 온데다 구기자와 국화차를 마시며 유유자적하였기에 늙어서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중년 이후에 중병에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우암은 효종 연간에 처방, 침구, 단방(향약요법) 등을 수집하여 정리한 <삼방촬요(三方撮要)>라는 한의서를 저술했을 정도로 한의학을 다년간 연구하였던 경력이 있기에 스스로 어지간한 처방을 낼 수 있을 정도였고, 주변에 용하다는 의원을 불러 이런 저런 치료를 받았으나 차도가 없어 그야말로 ‘백약(百藥)이 무효’인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특별한 사정이 있었지만 가까스로 약방문을 얻어 극적으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우암을 살린 미수(眉叟) 대감의 약방문(藥方文) 우암은 아들을 불러 병세를 상세히 적어 주면서 “지금 곧 미수 대감께 가서 이것을 보여 드리고 약방문을 얻어 오너라”고 일렀습니다. 미수는 ‘허목(許穆, 1595-1682)’이라는 분인데, 늦게 벼슬길에 올라 우의정에까지 오른 남인(南人)의 거두였죠. 당시는 노론(老論)과 남인 간의 당쟁이 심할 때였는데, 우암과 미수는 북벌론이나 효종 임금 승하시 상례 문제 등에서 정면으로 대립하여 서로 원수같이 지내던 최대의 정적 사이였습니다.
우암의 아들은 크게 놀라며 “왜 하필이면 미수 대감에게 약방문을 청하십니까? 만일 약방문에 독약이라도 써 넣으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라고 반대했습니다. 그렇지만 우암은 아들을 꾸짖으며 미수 선생에게 다녀올 것을 명하니 아들은 갈 수 밖에 없었죠. 미수 선생은 부탁을 받고는 묵묵히 증세를 읽어 보고 약방문을 써 주었습니다. 우암의 아들이 돌아와서 약방문을 보니 대부분 ‘비상(砒霜)’, ‘부자(附子)’, 백두옹(白頭翁 : 할미꽃 뿌리)을 비롯한 극약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이 처방은 아버님을 독살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절대로 이 약방문으로 약을 드시면 안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암이 이르기를 “미수는 의술을 공부한 선비로서 병중의 정적을 독살할 졸장부가 아니다”라고 아들을 꾸짖고, 빨리 그 약방문대로 약을 달여 오라고 하였죠.
우암은 달여 온 약을 조금도 의심 없이 마셨는데, 며칠 동안 혼절해 있다가 나았습니다. 그런데 병이 완전히 다 낫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그대로 약을 지을 수가 없어서 비상을 절반만 넣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죠. 이처럼 질병에 따라 극약을 써야만 나을 수 있는 경우가 드물게 있습니다. 우암은 당시 매일 아이의 오줌을 받아 마시는 건강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몸속에 응어리가 쌓여 있어 그 응어리를 제거하기 위해서 비상을 비롯한 극약을 써야만 했던 것이죠.
▲우암 송시열과 미수 허목(오른쪽)
아이 오줌을 받아 마셔도 괜찮을까? 우암은 요료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 엄동설한에도 추위를 모를 정도로 손발이 따뜻했다고 합니다. 우암은 83세 때 “장희빈이 낳은 왕자의 원자 책봉이 너무 빠르니 더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는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숙종의 미움을 사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약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요료법 탓인지 사약 한 잔을 마셨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어 결국 석 잔이나 마시고서야 비로소 숨을 거두었다고 하지요.
요료법은 동양에서 아주 옛날부터 활용되어 왔는데, 청나라의 서태후와 일본의 왕실 고관들도 요료법을 건강장수의 비법으로 썼다고 합니다. 우암은 아이의 오줌을 마셨지만, 요료법은 자기의 오줌을 주로 공복에 마신다고 합니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본인의 오줌을 받아서 다른 것을 섞지 않은 채로 마신다는 것이죠. 그런데 오줌이란 노폐물로 나온 것이니만큼 요료법은 권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오줌이 한약으로 쓰였다? 옛날에는 오줌이 한약으로 쓰였습니다. 당나라의 명의 손사막(孫思邈, 581-682)은 <천금익방(千金翼方)>에서 소변을 ‘외과 방면 최고의 약’이라 했습니다. 명나라의 이시진(李時珍, 1368~1644)도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소변을 이용해 고칠 수 있는 질병을 40여 종이나 들었습니다. 청나라 말기의 명의 당용천(唐容川)은 소변을 마시고 몸이 회복되어 기운이 펄펄 나는 모양이 흡사 용이 돌아온 것 같다하여 ‘회룡탕(回龍湯)’이라 불렀죠. 또한 온갖 병을 고쳐 원래의 건강한 몸으로 되돌려놓는다고 ‘환원탕(還元湯)’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의가에서는 소변과 사람의 젖, 그리고 사람의 태반의 세 가지를 일러 ‘목숨을 구하는 지극히 귀한 보배’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체내에서 나온 것을 받아 마시면 이것이 몸속을 돌아 생리적으로 활성화하는 기능이 있다고 해서, 약재로서의 소변을 ‘윤회주(輪廻酒)’라고도 하였죠. 정신이 되돌아오게 할 정도로 좋은 약이라 하여 ‘환혼주(環魂酒)’라고도 합니다. 또 몸이 허약해지면서 가래에 피가 섞여 나오거나 코피를 쏟기도 하고 출산 후에 어혈로 인한 통증, 각종 타박상 등에 신선한 소변을 받아 따뜻하게 한두 잔을 마시거나, 탕약 속에 넣어 마셨습니다. 소변에는 어혈을 흩어버리고 피를 멎게 하는 효능도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다른 좋은 약들이 있으므로 굳이 소변을 넣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오줌을 한약으로 썼나? 한약으로 오줌을 쓸 때는 아무 오줌이나 쓴 게 아니고 반드시 어린 사내 아이 오줌만 썼습니다. 그것을 ‘동변(童便)’이라고 하는데, 옛날부터 화기(火氣)를 내리는 데 쓰였죠.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쓰러져 인사불성이 되었을 때 동변에 우황청심원(牛黃淸心元)을 개어 먹였다고 합니다. 또 동변은 한약재 수치(修治)에도 쓰였는데, 한약재를 동변에 담가 두었다가 쓰는 것을 동변침(童便浸)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동변은 여러 가지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궁중의 내의원(內醫院)에서는 오줌을 받는 아이들이 필요했지요. 동변군(童便軍)이라고 하는데, 궐내의 사역원(司譯院: 외국어 교육원), 봉상시(奉常寺: 종묘의 제사 및 시호를 정하는 일을 관장하는 관청), 관상감(觀象監: 천문, 기상 관측을 담당하는 관청) 등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아이들을 차출해서 오줌을 받아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지엄했던 왕이나 왕비도 아이들의 오줌을 먹었던 셈이죠.
오줌으로 만들어진 약 오줌으로 만들어진 약으로는 인중백과 추석이 있습니다. 인중백(人中白)은 오줌을 옹기 질그릇에 받아 두면 바닥과 벽에 허옇게 막이 형성되는데요, 이것이 두터워지면 긁어서 불에 달군 다음 가루를 낸 것이죠. 오줌의 침전물이므로 화기를 내리고 어혈을 풀어주며 입과 혀가 헐고 아픈 것을 막아줍니다. 추석(秋石)은 동변을 고아서 정제(精製)한 결정물(結晶物)입니다. 이것은 오줌과 달리 성질이 따뜻한데요, 몸이 쇠약해졌거나 혹은 오줌을 저절로 흘리거나 오줌이 뜨물처럼 뿌옇게 나오거나 혹은 정액이 저절로 흘러나오거나 정력이 약화되었을 때 썼습니다. 청나라의 옹정황제가 추석을 복용하였고, 영조임금도 추석환을 드셨다는 기록이 있지요. 20년 전까지는 소변에서 유로키나아제를 추출하여 동맥경화를 치료하는 혈전용해제로 활용했습니다.
피부에도 활용되었던 오줌 동의보감에 보면 오줌이 피부를 매끄럽게 해 준다고 나와 있습니다. 예전에 에스키모인이나 만주 지방에 살던 읍루(挹婁 : 말갈족) 사람들은 집안의 한가운데 오줌통을 놓아두고서 버리지 않고 모은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방한복이 별로 없어 워낙 거센 추위에 견디기 위해 온몸에 돼지기름을 두텁게 발랐는데, 비누가 없었기에 돼지기름을 씻어내는데 오줌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물론 오줌을 바르는 바람에 피부가 고왔다고 하지요. 옛날 얘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