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에게 듣는다①
어느 자리에서나 최선을 다했다
서울고 총동창회 뉴스레터 14호(2018. 3. 12)
강신항
(서울고 1회, 88세) 성균관대 명예교수
‘동문원로에게 듣는다’ 연재를 시작합니다.
총동창회 고문단의 추천을 받아 4회에 걸쳐 릴레이 인터뷰를
합니다.
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1회), 이종호 JW홀딩스 명예회장(4회),
신동호 전 스포츠조선 사장(5회), 최명걸 전 대우그룹 부회장(8회) 등
“참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1회라 그랬는지, 서울고 시절 우리는 선생님한테서 꾸지람을 들은 적도 거의 없어요. ”
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당시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자율의 정신을 심어주셨다”고 말했다.
당시 밤이면 9만9천여 평방미터(3만 평)에 이르는 경희궁 캠퍼스를 고2~고3학생 서른 명이 순찰을 돌았다고 한다. 혼자서 당직을 서는 숙직교사의 일을 돕기 위해서 라고 했다.
선배님은 그 시절 도서반원이었다고 한다. 약 서른 명의 도서반원이 1만여 권의 장서정리를 담당했다. 그러느라 주말에도 학교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학교의 규율은 엄격했지만 선생님들은 엄하면서도 인정이 넘쳤다고 선배님은 회고했다.
선배님이 고3이었던 1949년 봄의 일이다.
당시엔 6월에 졸업을 했다고 한다. 다른 고등학교는 오전수업만 하는데 서울고만 7교시까지 수업을 했다. 그 해 3월28일 누가 선동한 것도 아닌데 오전수업 후 3학년생 전원이 ‘땡땡이’를 쳤다. 그 일로 선생님들이 “너희가 우리를 배반했다”며 울먹이셨다. 그 반응을 접하고 고3학생들도 눈물을 흘렸다.
+고교 동문들에게 당부하시고 싶은 게 뭡니까?
“서울고 출신이면 어디서든 자부심을 가질 만 합니다. 그렇다고 우쭐하거나 배타적이어서는 안됩니다. 또 세상엔 우리보다 잘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잘났다는 건 상대적인 거죠. 자비(自卑), 스스로 낮출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제값을 갖고 태어난 만큼 어려운 사람들을 감싸고 도와야 합니다. 우리동창들 가운데도 어려운 사람들이 적지 않아요.”
은퇴 후 더 큰 업적 남길 수 있어
+올해 미수(米壽·88세)를 맞으셨습니다. 막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베이비 부머’ 후배들에게 어떤 조언을 주시겠습니까?
“독일사람들은 정년퇴직 후에 더 좋은 책을 낸다고 합니다. 퇴직 후에 마음먹고 오히려 큰 업적을 낼 수 있다는 거죠. 저도 지난해까지 매년 논문을 썼고, 학술회의에 참가하는 등 꾸준히 활동했습니다.”
선배님은 2008년 대한민국학술원상을 받는 등 큰 상을 여러 번 받았다. 그러나 지난해 부인 정양완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와 함께 펴낸 <사모문집>의 책 날개에 실은 수상실적 맨 앞에 선배님은 ‘자랑스러운 서울인상’을 배치했다.
+국어학 중에서도 국어사를 전공하신 이유가 뭡니까?
“돌아가신 남광우 선생이 남들이 하지 않는 학문을 해보라고 권했습니다. 국어사전 공자들은 논문을 써봤자 1년에 세 명이 볼까 말까 해요. 대중성이 없는 거죠.”
선배님은 공군장교로 군복무를 마친 1960년 가을 서울대문리대에서 교양국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4·19후 학생들이 교수들을 배척해 교양국어를 가르칠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고 한다. 학생들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특히 정치·외교학과 등의 학생들이 기세가 등등했다.
하루는 정치학과 학생 하나가 여봐란듯이 군화소리를 내면서 앞문으로 나가버렸다.
선배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친구는 강신항의 엉터리강의를 듣느니 도서관에 가 공부를 하는 게 낫습니다.”
그러고 나서 학기말에 점수를 95점 줬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후 유럽의 학회에 갔다가 당시 그 강의를 함께 들은 정치학과 출신 기자를 만났다. 그가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존심이 상했었죠. 하지만 갓 전역한 대학 교양국어 선생은 노련한 고3선생보다 실력이 못한 게 사실입니다.”
+젊은 후배들 특히 20대 후배들에게는 어떤 당부를 하고 싶습니까?
“자신의 적성에 맞는 대학 전공과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공구를 파는 장사를 하더라도 그 분야에서 1등 하면 됩니다. 생업으로 춤을 춘다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신나는 춤 꾼이 되어 보세요.”
+만일 ‘강신항의 인생사용설명서’같은 게 있다면, 거기에 뭐라고 적혀 있을까요?
“어느 자리에서나 최선을 다했습니다. 서울고 시절 도서반을 떠날 때 ‘참 열심히 하더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그럼 된 거죠.”
1995년 성균관대에서 정년퇴임 할 때 한 기자가 전화를 걸어 소회를 물었다고 한다. 선배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회가 해직당한 교수들만 높이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해직은 되지 않았지만 묵묵히 자기자리에서 학문을 지키려 한 사람들의 공도 알아줘야 합니다.”
선배님은 4년간 서울고 교사를 지냈다. 12~15회를 가르쳤다. 공주사대와 서울고 두 개의 선택지를 놓고 선배님은 모교를 선택했다고 한다. 9대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낸 1회 권갑주 동문과 당시 같이 근무했다. 권선배님은 이북출신이지만 선배님은 충청도가 고향이다.
서울고 교사시절 교문을 들어서 본관현관을 향해 걸어 올라갈 때면 어쩌다 고3학생들이 창밖을 내다보다 “야, 충청도 촌놈”하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면 선배님은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에이, 서울 돌 깍쟁이 놈들아.”
체벌이 흔했던 시절이지만 선배님은 교칙위반자 외에는 거의 체벌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12회가 1학년이었을 때 담임을 맡고서 고3학생을 때린 일이 있다고 했다.
“입학식 다음날이었는데 우리반의 청운중 출신 아이가 고3에게 맞은 거 예요. 3학년 교실로 뛰어올라가 그 반 담임 앞에서 체벌을 했습니다. ‘우리학교가 좋아서 들어온 후배를 들어오자마자 때리면 되느냐’고 꾸짖었죠.”
그 시절 선배님은 학부형들에게 “담임으로서 책임지고 학년 진급시킬 테니 앞으로 한 분도 학교에 오시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실제로 선배님 반71명 중 단 한 명도 평락·과락이 없었다고 한다. 월말고사 수학·영어 점수가 현저하게 낮은 학생은 담당과목교사와 직접‘협상’을 해 낙제하는 걸 막았다.
“‘저 사람 대체 얼마를 먹었기에 점수를 구걸하고 다니나’하는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 학년초에 일찌감치 학부형 출입금지령을 내린 거죠.”
+그 시절부터 천생 선생님이셨군요?
“본래 교사집안이고, 선생을 천직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선생이 된 걸 후회해본 일도 없고요.”
+이사회를 향해 하시고 싶은 말씀은 뭡니까?
“서로 포용하고 상대방을 배려해야 합니다. 대화시간의 7할은 듣고 3할을 말하는 데 써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어요. 가정에서도, 학생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람되지만, 묘비명을 미리 쓰신다면 뭐라고 적으시겠습니까?
“자식들에게 그런 거 절대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촌스럽기도 하거니와 그걸 누가 읽겠어요? 봉분도 하지 말라고 했어요. 화장도 하지 말라고 했고요. 너무 뜨거워 못 참을 거 같아서. (웃음)”
강 선배님을 만난 곳은 선배님이 몸담았던 성균관대 부근 혜화동로터리 엘빈이라는 카페였다. 댁이 그 뒤 어디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와 목도리를 두르느라 지체했다. 선배님이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코너를 돌아 안 보일 때까지 선배님은 까마득한 후배에게 네 번이나 머리 숙여 인사를 했다.
글_이필재(29회) 편집인, 사진_ 전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