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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영감과 예술적 혼이 숨 쉬는 화가의 집을 찾아서
『화가의 집』은 앙드레 드랭, 르네 마그리트, 귀스타브 모로, 클로드 모네 등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눈부신 족적을 남긴 화가 열네 명의 인생과 작품세계를 ‘집’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살펴본 책이다. 지금 당장 누군가 살아도 될 정도로 생활의 냄새가 짙게 남아 있는 공간을 사진으로 살펴보며 화가들의 진짜 삶을 추적해나간다. 미술사가인 저자는 인테리어 전문 사진작가와 함께 이들의 작업실, 침실, 거실, 부엌, 복도 등을 천천히 거닐며 그들의 정신과 손길이 닿은 부분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이 흥미로운 추적은 화가의 집이 단순히 생활공간이 아니라 예술적 영감의 원천 또는 작업의 연장이자 무대라는 것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 북소믈리에 한마디!
집이라는 공간은 한 사람의 내밀한 면을 들여다보는 데 도움이 된다. 마그리트가 살던 현관의 중절모와 우산, 손수 설계한 정원에 아름다운 자연을 끌어들인 모네의 집, 구석구석 음울한 기운으로 뒤덮인 제임스 엔소르의 집 등은 작품의 원천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눈치 챌 수 있어 흥미롭다. 집을 통해 화가들의 진면목을 이해하면서, 책에 언급된 작품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것이다.
예술가에게 집이란 서문
앙드레 드랭
정신적 유배지, 장미원
블룸즈버리 그룹
미학의 실험실, 찰스턴 농장
프란티섹 빌렉
지상에 옮겨놓은 신은 사원
귀스타브 드 스메
플랑드르 백합 계곡의 작은 천국
알폰소 무하
시간이 중첩된 프라하의 성채
르네 마그리트
브뤼셀 변두리에 굼겨진 환상의 제국
로자 보뇌르
퐁텐블로 숲 속에 세운 거대한 방주
귀스타브 모로
삶의 기억으로 빼곡히 채운 미술관
윌리엄 모리스
누구나 아름다운 집에서 살 가치가 있다
가브리엘레 뮌터
청기사파의 요람
제임스 엔소르
환상과 몽상의 은신처
클로드 모네
꽃향기로 가득한 색채의 왕구, 지베르니
알프레트 쿠빈
평온하고 소박한 안식처
조르조 데 키리코
욕망과 비애가 화려하게 수놓인 로마의 작업실
화가의 삶과 비밀이 마주치는 공간
옮긴이의 글
걸작의 밑그림이 숨겨진 곳,
화가의 집을 찾아가다!
“내가 죽고 나면 내 가련한 작품들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다. 정말 힘들게 모았는데, 결국 모두 흩어져서 사라지고 말겠지. 이렇게 전부 한 곳에 있어야 비로소 내가 어떤 예술가였는지 조금이나마 알려줄 수 있을 텐데. 이 그림들 사이에서 잠이 들면 얼마나 행복했던가."
_귀스타브 모로
화가에게 집이란 무엇인가
화가에게 집이란 무엇일까. 많은 화가들에게 집이란 생활하는 공간, 작업을 하는 공간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화풍이 라이프스타일을 인도하는 현장을 그들의 집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집은 화가에게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며 작업의 연장이자 무대가 되기도 한다. 마침내는 집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보고 접근하거나, 미학적 성찰의 무대로 완성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화가의 집이 갖는 의미와 범주는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다. 그 범주는 종종 예상을 뛰어넘는 것은 물론이요, 때로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기도 한다.
이탈리아 파도바에 있는 안드레아 만테냐의 저택은 주거지를 모방·복제하는 차원에서 현실 자체보다 숭고한 그 무엇으로 고양시키려는 만테냐의 야심찬 미학적 기획을 증언하고 있다. 산 세폴크로에 있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저택에 가보면 그가 어마어마한 확장 공사를 거쳐 낡은 저택을 예술가의 집으로 변모시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피렌체의 기벨리나 거리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집은 건물 자체는 간결해도 내부 곳곳에 전시되어 있는 그의 걸작들과 조카 손자 소(少) 미켈란젤로의 손으로 이루어진 인테리어는 미켈란젤로 가문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가 생을 마친 우아한 저택은 뉘른베르크에 남아 있으며, 톨레도에 있는 엘 그레코의 집은 안뜰에 포석이 깔려 있어 그의 부귀를 자랑하고 있다.
아레초에 있는 조르조 바사리의 저택은 커다란 거실 전체가 르네상스의 수많은 화가, 조각가, 건축가의 초상화로 덮인 도상학적 프로젝트의 완결판이다. 17세기 초 부와 권력을 거머쥐고 수많은 기술자와 문하생을 거느린 아틀리에를 운영했던 페테르 루벤스는 거대한 정원이 달린 넓은 저택을 지었는데, 저택의 절반은 당대 플랑드르 양식을 따라 만든 주거 공간, 나머지 절반은 그의 방대한 미술 컬렉션을 보관하는 화려한 궁전이었다. 루벤스는 로마의 판테온을 연상시키는 홀에 진귀한 고대의 조각품들을 모아두기도 했다. 아름다운 자연을 손수 설계한 정원에 끌어들여 자신만의 도원향을 만든 모네의 집 역시 화가의 집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사회 통념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생활을 한 화가들의 거처는 상대적으로 초라하고 빈한했다. 바르비종에 있는 장 프랑수아 밀레의 누추한 집을 보면 알 수 있듯 인상파 화가 대부분은 이렇다 할 재산이 없었다. 최소한의 가구만을 갖추고 살던 아를 시절의 고흐를 보면 알 수 있듯, 집이란 아틀리에를 연장한 임시 공간에 불과하기도 했다.
『화가의 집』에서 다루는 작가들은 비교적 현재에 가까운 이들이다. 이들의 집과 아틀리에, 정원은 지금 당장 누군가 살아도 될 정도로 생활의 냄새가 짙게 남아 있다. 그래서 더욱 호기심을 유발하고, 공간을 유심히 살펴보게 만든다.
프랑스 샹부르시에 있는 앙드레 드랭의 집 ‘장미원’은 일종의 유배지다. 파리에서의 화려한 사교생활을 뒤로하고, 급작스레 샹부르시로 모든 것을 옮긴 앙드레 드랭은 자신의 정신마저 그곳으로 유배시켰다. 공작새를 비롯해 온갖 동물이 거닐던 정원 깊숙한 곳의 저택에서 그는 다시금 영감을 되찾았다. 버니지아 울프, 버네사 벨, 던컨 그랜트 등이 속한 블룸즈버리 그룹의 작가들은 찰스턴 농장을 구석구석 자신들이 지향하는 미학을 구현하는 거대한 무대로 탈바꿈시켰다. 오스탕드의 음울한 기운으로 뒤덮인 제임스 엔소르의 집은 그의 그림에 숱하게 등장하는 ‘가면의 카니발’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화가의 집』은 이들의 작업실, 침실, 거실, 부엌, 복도를 천천히 거닐며 그들의 정신과 손길이 닿은 부분을 세밀하게 훑는다. 창밖으론 어떤 풍경이 보이는지, 햇살이 어떤 식으로 들어오며, 한낮에는 얼마나 더운지, 화가들의 작업도구는 어떤 식으로 배치돼 있는지, 그들이 소장한 작품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적확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예술 작품들이 어떤 공간에서 태어났는지, 그 밑그림이 새겨진 공간을 통해 작품 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을 한층 더 넓고 깊게 만들어준다. 미술사가인 지은이와 인테리어 공간 사진을 전문적으로 촬영해온 사진작가는 화가의 공간과 꼭 맞는 합일을 이루며, 화가의 자취를 좇는다. 이런 흥미로운 추적을 통해 화가의 집이 단순히 생활공간이 아니라 예술적 영감의 원천 또는 작업의 연장이자 무대라는 것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이 책은 또한 각 작가의 작품 세계와 생애에 관한 개론서 역할도 충실히 하고 있다. 전기적 자료조사도 훌륭하지만, 선별한 화가의 예술세계를 잘 이해하고 그 특징이 잘 살아 있는 요소들을 거주공간에서 찾아내는 안목이 뛰어난 덕분이다. 사진에 담긴 내용은 어느 하나도 우연히 찍힌 것이 없다. 지은이의 해설을 읽고 난 다음에 사진을 보면, 화가의 공간이 가진 핵심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화가에게 집이란 번잡한 세상을 피해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도피처를 제공하기도 하고, 당대에 이해 받지 못한 작가의 작품을 후대에 전하는 미술관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거주지가 작품세계와 서로 영향을 주기도 하고(모네가 식당에 걸어놓은 일본 판화들이나 그가 공들여 조성한 정원은 모네의 그림에 나타나는 특유의 색감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집 자체가 캔버스가 되거나 예술작품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나면 이렇게 집과 예술가가 관계 맺는 방식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한눈에 들어온다.”_옮긴이의 글中
유배지, 실험실, 은신처, 결투장, 그리고 낙원
앙드레 드랭_정신의 유배지, 장미원
“1935년 앙드레 드랭은 향후 인생의 향방을 바꾼 결정을 내린다. 예전에 조르주 브라크와 함께 쓰려고 지었던 파리 14구 몽수리 공원 부근의 작업실, 파루조 소재의 성(城), 샤이앙브리에르의 집 등 모든 부동산을 처분하고 샹부르시에 있는 17세기 말에 지어진 아름다운 저택, ‘장미원(薔薇園)’을 구입한 것이다. 생제르맹앙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 저택에는 거대한 정원이 딸려 있었는데, 정원에는 여러 개의 조각상, 연못, 화려한 장미정원,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정자 ‘사랑의 신전’을 비롯해 18세기에 칭송 받던 여러 건축물이 있었다. 질녀인 주느비에브 타이야드의 증언에 의하면 드랭은 여기에 ‘채소밭, 테니스코트, 대형 작품을 만들 때 작업실로 쓰던 온실’ 등을 추가로 만들었다. 예전 집 주인들이 갖다놓은 초가지붕의 배도 있었다. 또 부지에 고양이, 개, 공작, 염소 등 수많은 짐승들도 풀어놓았다.”
“드랭은 오랜 세월 세상을 등지고 지냈지만, 그 시간 동안 예술적으로 빈곤해지진 않았다. 그는 독특하고 강렬한 검은 바탕의 정물화들을 제작했고「숲의 빈터」나「오디세우스의 귀환」처럼 기괴한 역사화들도 그렸다. 또한 신고전주의적 요소가 섞여 있으면서도 그 자신의 야수파·입체파 경력을 단숨에 요약하는 매우 특이한 화풍의 눈부신 누드화들도 있다.”
“1948년 10월의 어느 아침, 나는 연금술사의 작업실에 와 있다. 이곳에는 히에로니뮈스 보스의 괴물들, 서아프리카 베냉의 청동 조각, 로마 시대의 조각, 흑인들의 부적, 민간의 골동품 등이 살고 있고, 그 유명한 블라맹크의 콩고 가면이 마술적 광채를 발하고 있다. 창문 앞에는 숲이 꿈쩍도 않고 버티고 있다. 드랭은 그 숲의 신비를 파헤치려고 여러 차례 노력한 바 있다. 그는 사물들을 환하게 둘러싸고 있는 새하얀 빛의 점을 가리켰다. (……) 그는 이렇게 실토했다. ‘이건 내가 편집증 환자처럼 집착하고 있는 작품들이오. 예술가는 누구나 자기만의 감옥이 있는 법이지.’”
블룸스버리 그룹_미학의 실험실, 찰스턴 농장
“20세기 전반 영국에서 활동한 지식인, 작가 집단 중 영향력 면에서 블룸즈버리 그룹에 비견할 만한 예는 거의 없다. (훗날 출판인 레너드 울프와 결혼한) 버지니아 스티븐을 중심으로 모인 이 그룹은 그들 세대가 속해 있던 빅토리아 시대의 유산을 청산하기 위해 투쟁했다. 이들은 풍속의 쇄신, 특히 성적 자유를 옹호했으며 정치 체제와 경제 원칙의 변혁을 논했다. (……) 버네사 벨은 가족과 함께 찰스턴에 정착한 후 프라이와 그랜트의 도움을 받아 저택을 꾸미는 일에 몰두한다. 찰스턴에서 버네사는 블룸즈버리 그룹의 정신에 부합하는 특유의 라이프스타일과 자녀 교육법을 만들어나간다. 이렇게 찰스턴은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는 예술작품이 된다. 각 방과 가재도구, 장식품 하나하나 그들의 붓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여기에는 기성도덕의 구속이나 어떤 원칙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윤리학과 미학을 결합하려는 그들의 철학이 반영됐다. ”
“버네사 벨은 찰스턴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한다. (……) 이 집을 개조하고 장식하는 일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버네사는 이곳을 블룸즈버리 특유의 스타일로 꾸미기로 하고, 친구들을 불러 이 집을 ‘바깥세상이 아무리 혹독해도 정신적 안식을 찾을 수 있는 피난처’로 탈바꿈시킨다.”
“커튼, 의자, 양탄자 등에 쓰인 천의 재질과 색깔은 방마다 달랐고, 집안 곳곳마다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등을 여행하면서 가져온 이국적 물건과 찰스턴의 식구들이 만든 공예품으로 가득했다. 가구들도 빠짐없이 식구들의 캔버스가 됐다. 집안의 모든 것이 배치와 채색을 통해 연극의 무대장식 같은 느낌이 났으며, 그 속에서 은근히 어색하면서도 평온한 조화가 만들어졌다. 식기들은 오메가 워크숍스의 재고 창고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조화가 스타일이나 개념 면에서의 어떤 통일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극한의 다양성이 조화를 낳고 있었다.”
“‘버네사는 사구(砂丘)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살고 있어요. 오리, 닭, 자식들 속에서 어미 닭처럼 악전고투를 하고 있죠. 언니는 이제 깨끗한 옷을 입을 생각이 없고 목욕을 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아요. 자식들은 쉬지 않고 질문을 해대고 언니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렇게나 대답을 하지요.’ 버지니아는 또한 언니가 이 난장판 속에서 오리와 닭을 기르고 자식을 교육시키고 남자들과 삼각, 사각 관계를 유지해가면서도 ‘집안 구석구석이 10센티미터 간격으로 색깔이 다를 만큼’ 그림에 전념할 기운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프란티섹 빌렉_지상에 옮겨놓은 신의 사원
“프라하로 이주하면서 빌렉은 당대의 지적·정치적 논쟁을 피해 자기만의 쉼터를 마련할 요량으로 집을 짓는다. 그는 이 집을 매우 복잡한 영적·상징적 계획에 따른‘지상에 옮겨놓은 신의 사원’으로 만들려 했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독특한 빌렉의 아틀리에 겸 저택은 놀랍도록 독창적인 그의 조각과 닮아 있다. 힘과 정열 면에서 보면 지상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성(神性)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과 인간, 천국과 지상의 결합이라는 그의 사유는 아무리 사소한 인테리어에도, 그가 디자인한 가구 하나하나에도 스며들어 있어야 했다.”
“‘타락과 죄악의 온상, 아비규환의 야단법석, 죄와 저주에 끌려가고 싶어 발악을 하는 사람들, 나의 욕정, 가난, 이 모든 것 때문에 나는 눈물을 흘렸고 우리의 구원을 기도했다.’
그는 어떻게든 히노프의 안식처에서 누리던 평화와 고요를 되찾으려 했다. 하지만 이 도시의 집에 대한 그의 구상은 고향에서 생각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털어놓았다. ‘나는 내 손으로 새로운 사원을 짓고 싶어. 하느님의 나라를 지상에 옮겨놓은 사원 말이야.’”
귀스타브 드 스메_플랑드르 백합 계곡의 작은 천국
“귀스타브 드 스메의 작은 집은 백합 계곡의 삼림지대에 있다. 겐트의 산업단지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 현대적 분위기와는 완전히 단절돼 있어 그 무엇도 이곳의 평화와 아름다움을 훼손하지 못할 것만 같다. 스메의 집은 무척 수수하다. 이 소박한 외딴집은 의심할 여지없이 주인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전혀 달라진 것 없이 잘 보존된 가옥의 실내도 소박하고 수수하다. 이곳은 편안하고 매력적이며 불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고 겉멋 들린 반항적 기질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스메가 사회적 야심이나 속물근성이 없었다고 해서 미학적인 면에서도 야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30년 스메는 되를레에 완전히 정착한다. (……) 그가 말년을 보낸 자택에 가보면 무엇 하나 소박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면이 있다. 실내장식은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전혀 없지만, 그것은 농부의 집도 아니고, 바보 같은 부르주아의 저택도 아니며, 자기가 얼마나 특이하게 사는지 과시하려고 별 것 아닌 물건도 자기 식으로 바꿔놓는 예술가의 숭고한 극장도 아니다. 이 집에는 방마다 우아함과 간결함이 깃들어 있으며, 과시적인 것은 전혀 없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 (……) 시간을 두고 거실의 분위기에 젖어들면 가구 하나하나가 정확히 선택됐고, 가구 배치에도 굉장히 공을 들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거실의 물건들은 흠잡을 데 없는 신중함과 취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거실 전체에 품위와 정제된 조화를 부여하고 있다. 이 집은 창작의 공간이자 성찰과 인생의 공간이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알폰소 무하_시간이 중첩된 프라하의 성채
“프라하 성 앞에 서서 맞은편을 바라보라. 대문 위에 바로크풍의 무기를 든 거인 조각상 두 개가 서 있는 이탈리아 양식의 아름다운 바로크 저택이 보일 것이다. 알폰스 무하의 물건, 소장품, 작품 들이 빼곡히 쌓여 있어 구석구석 그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이 저택은 세계적으로 유명한이 화가가 조국의 문화에 얼마나 깊은 애착을 갖고 있었는지 생생히 전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 물건들의 주인이었던 알폰스 무하는 이곳에 산 적이 없다. 이는 곧 그의 운명과 겹쳐진다.”
“황량하기까지 한 건물의 1층을 지나 어마어마하게 넓은 2층 거실에 들어가면, 친지나 프라하를 방문 중인 유명 인사만이 출입할 수 있는 괴상한 현대미술관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공산 체제 아래에서 이 홀은 벨벳 커튼을 내리고 별의별 특이한 인사들에게 하룻밤의 도피처가 됐다. 예술가, 지식인, 세계 각지의 보헤미안들이 공산주의의 압제를 잊으려고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두터운 붉은 커튼, 붉은 안락의자, 중동의 고급 양탄자, 무수히 많은 소형 조각상 외에도 온갖 물건들이 섞여 있어, 이 집의 거실은 흡사 각양각색의 골동품을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창고처럼 혼란스러운 느낌을 준다. (……) 편안한 가구들, 대리석 원탁, 고급 목재로 만든 개폐식 책상, 중세에 만들어진 X자 모양의 접이식 나무 의자인 어두운 빛깔의 포데스테유, 화려한 무늬의 두꺼운 고급 양탄자, 체코어·영어·불어·독어 등 다양한 언어권의 책들이 수북이 쌓여 선반이 휘어진 책장들, 흉상들, 가면들, 자그마한 청동 조각상들, 단지들, 보헤미아산 유리 물병들,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2세가 좋아했을 법한 기괴하고 엉뚱한 물건들, 금색 샹들리에, 고갱이 연주하곤 했던 파리 시절의 풍금 등등. 방문객의 시선은 이 소리 없는 유령들 속에서 정처 없이 떠돈다.”
르네 마그리트_브뤼셀 변두리에 숨겨진 환상의 제국
“부부의 집은 브뤼셀 변두리 특유의 다닥다닥 붙은 가옥들의 특징을 모조리 갖고 있었다. 건물의 정면은 붉은 벽돌, 지붕도 붉은 기와였으며 흰 돌로 된 횡목, 3층의 베란다 등도 빠지지 않았고 전체 너비는 6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마그리트 부부는 1층에 살았는데 그 집에 들어가려면 계단으로 통하는 좁은 복도를 통해야 했다(아마 이 복도는 건축가가 이 건물에서 그나마 특이하게 만든 유일한 것일 것이다). (……) 이 변두리 동네에 대한 마그리트의 기묘한 애정은 여러 작품에서 드러나는데, 그 중 「빛의 제국」(1952)이 특히 유명하다.”
“그의 전기를 집필한 친구 스퀴트네르에 따르면 마그리트는 ‘이젤 한 개, 물감통 하나, 팔레트 하나, 붓 한 다스, 박스 안에 들은 흰 종이 한두 장, 지우개 하나, 찰필(擦筆) 한 개, 재봉 가위 한 쌍, 목탄 조각 하나, 낡은 검은색 연필 하나’ 정도의 최소한의 도구로 만족했다.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마그리트는 이 도구들을 정성껏 정돈해야 했다.
‘워낙 시설이 간소하다 보니 (설사 그 간소함을 모범적 정신의 지표로 간주할 수 있다 해도) 화가에게 종종 불편을 초래할 때가 있었다. 일단 공간이 너무 협소해 곤란할 때가 많았다. 식탁, 문, 프라이팬 사이에서 작업을 하다가 식탁에 부딪히기도 하고 프라이팬에 손을 데기도 하고 드나드는 사람 때문에 문손잡이에 팔을 찧어 붓이 캔버스의 엉뚱한 곳에 닿기도 했다. 높다란 창문으로 햇빛이 수직으로 떨어져 마그리트는 땀범벅이 되기 일쑤인데다 빛이 너무 강해 캔버스가 거울이 되기도 했다. 식당의 조명도 엉망이어서 해가 구름에 가리거나 지면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로자 보뇌르_퐁텐블로 숲 속에 세운 거대한 방주
“1859년 로자 보뇌르는 퐁텐블로 근방의 토므리에 있는 비 성을 사들인다. 15세기 초만 해도 이곳은 왕실 양봉인의 거처였으니 ‘성’이라는 말은 지나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100여 년 후 소유권이 생장드라트랑의 기사장 앙리 드 비에게 넘어가면서 이후 약 400년 동안 드 비 가문이 살았다. 보뇌르가 도착했을 때 이 집은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불가피했다. 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보뇌르는 벽돌로 지은 풍광 좋은 부속건물에 아틀리에를 꾸몄다. 공사가 끝나자 그녀는 즉시 넓은 정원에 양, 소, 산양, 말, 심지어 사자까지 수많은 짐승들을 풀어놓았다.”
“1895년에 확장 공사를 했지만, 현재 남아 있는 보뇌르의 아틀리에는 1864년 외제니 황후가 페티코트 차림의 귀부인 부대를 이끌고 이곳을 찾았을 때의 광경을 묘사한 오귀스트 드루아의 그림과 별반 다르지 않다. 거대한 벽난로 양쪽에는 그녀의 동생 오귀스트가 만든 개 석조상이 있고, 위에는 근사한 뿔을 가진 사슴 머리가 달려 있다. 하지만 이 그림에는 박제한 새들이나 다른 사냥 노획물 등은 보이지 않는다. 기실 보뇌르의 아틀리에는 동물 세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에 모르는 사람에게는 짐승들이 곳곳에 쌓여 있는 난잡한 야생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귀스타브 모로_삶과 기억으로 빼곡히 채운 미술관
“작가 장 로랭은 소설『무슈 드 포카』에서 한 젊은 귀족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그리고 있다. 한 화가와 친해진 것이 화근이었다. 화가는 젊은이에게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을 방문하여 시체와 피밖에 없는 그 장소에 감돌고 있는 ‘살육과 살해의 분위기’에 젖어보라고 권유한다. 그렇게 ‘피비린내’에 물든 주인공은 자신을 괴롭히고 박해하던 자를 죽일 용기를 갖게 된다. 이렇듯 귀스타브 모로의 작품은 당대의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했다. (……) 에드가 드가는 이 특이한 미술관의 개조 공사 중에 친구 모로를 찾았다가 뭐라 말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고 말한다.”
“약 1,200점의 유화 및 수채화와 거의 1만 3,000점에 달하는 데생을 모아놓은 이 독특한 성소에 발을 디디면 누구나 이상야릇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약간의 불안감과 현기증이 밀려오는 것이다. 금색 액자를 두른 작품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대리석으로 뒤덮인 벽에 걸린 그림의 모티프는 주로 기독교 성경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취한 것이라 관람객은 숭고하고 비극적인 경이감에 압도될 수밖에 없다. 도처에 아름다움과 폭력적인 죽음의 징후가 나란히 공존하고 있다. 당시에 테오필 고티에가 남긴 논평은 지금도 되새겨볼 만하다.
‘기이하기 짝이 없고 독창성이 넘치는 그의 그림은 세련되고 섬세한 호사가들을 위한 것이다.’”
“작품이 잘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소수의 열성적 수집가들만이 그의 그림을 구입했다) 모로는 자기 그림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계획해왔지만, 이 미술관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그림과 데생은 다른 장소에 전시하고 집은 개인사를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만들어야 할까? 아니면 작품들을 통째로 국립미술관에 기증해야 할까? 결국 모로는 자택을 미술관으로 개조해 자신의 인생과 조형적 사유의 결실을 모두 담아내기로 결심한다. 이 미술관은 작품 세계의 은밀한 변화를 세밀히 보여줄 수 있어야 했다. 따라서 그의 야심적인 대표작들을 한눈에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모로는 이미 팔아버린 그림을 비슷하게 다시 그리거나,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았던 작품을 다시 그리기까지 했다.”
윌리엄 모리스_누구나 아름다운 집에서 살 가치가 있다
“옥스퍼드셔 남서쪽의 켐스코트 매너가 그의 새 집이 된다. 그는 이 집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이렇게 설명한다.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둑길이 보였고, 나무들 사이로 집 한 채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예상했던 회색 담장은 보이지 않았다. (……) 담장과 집 사이에 있는 정원에는 6월의 꽃들이 만발했고, 잘 가꿔놓은 작은 정원들에는 장미들이 무성히 뒤엉켜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다른 생각은 모두 잊고 오직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빠져들게 했다. (……) 그리고 집 자체가 한여름의 아름다운 풍경을 완벽히 지켜주고 있었다.’”
“1896년, 모리스는 세상을 떠난다. 의사들의 소견에 따르면 사인은 ‘사회주의원칙을 전파하려는 지나친 열정’이었다. 더 정확히는 탈진해 죽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가 레드하우스와 켐스코트 매너에서 시도한 일 중 완성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그 많은 야심찬 계획을 완수할 수 있었으랴? 그 모든 일을 끝내려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을 것이다. 켐스코트 매너는 가족과 함께 생활을 꾸려나가는 통상적인 의미의 집이 아니었다. 그곳은 장식미술의 전 부문에서 혁명이 이뤄진 형식과 스타일의 거대한 실험실이었으며, 아르누보, 미국 아나키스트들의 ‘리버티’ 운동에서 빈 분리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후예와 아류를 낳은 새로운 시대정신의 산실이었다.”
가브리엘레 뮌터_청기사파의 요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바실리 칸딘스키가 러시아로 떠나면서 가브리엘레 뮌터는 바이에른의 무르나우에 홀로 남게 된다. 그 이전 몇 년 동안 무르나우는 독일 화단에서 가장창의적이고 정력적인 젊은 인재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뮌터는 그 후에도 이곳에서 수십 년 동안 살면서 계속 작업을 했다. 무르나우의 자택은 애초에 뮌터와 칸딘스키가 함께 구한 집이었으며,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청기사 그룹의 미술관이 된 상태였다. 뮌헨을 1910년대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지로 만든 주요 인사들 대부분이 이곳을 찾아 작품을 두고 갔고, 그것들이 모여 미술관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가 된 것이다.
나치가 창궐하던 암흑기에도 뮌터는 이 황홀하면서도 고독한 장소에서, 제3제국이 퇴폐미술이라는 딱지를 붙인 예술가들의 유령들 틈에서 미학적 모험을 계속했다. 뮌터는 나치를 피해 수많은 그림, 수채화, 데생 등을 숨겼고 전쟁이 끝난 후 이들 대부분을 뮌헨 시에 기탁했다. 이에 뮌헨 시는 고루한 아카데미형 작가로 특히 비스마르크의 초상화로 유명했던 화가 프란츠 폰 렌바흐가 살았던집에 유례없이 독특한 미술관을 만들었다. 그 집은 렌바흐가 자기 작품을 전시하려고 지은 토스카나 양식의 호화 저택이었다. 역사는 때로 잔인할 정도로 아이로니컬하다.”
제임스 엔소르_환상과 몽상의 은신처
“매우 개인적인 내용을 담은 초기작들은 엄격한 여인들로 가득하다. 1881년 작인「부르주아 살롱」이나「오스탕드의 오후」에는 테이블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는 누이들이 보인다. (……) 엔소르는 자신의 추억이 오롯이 새겨진 이 기념품 상점을 과거 그대로 보존했다. 그의 조형세계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이 상점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면 이곳을 성역 취급하는 것이 우스꽝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깔끔히 정돈되어 있는 이 침울한 집의 방들은 그에게 플랑드르 사람들의 민족성에 깃든 양면성을 드러내주었다. 그는 이를「내가 가장 아끼는 방」(1892)에서 표현하고 있다. 벽난로와 피아노가 있는 이 방은 이 사회가 얼마나 깔끔하고 단조로운지 보여준다. 하지만 방의 벽을 온통 뒤덮고 있는 그림들 때문에 이 작품에는 다소 어색할 정도로 경쾌한 느낌이 생긴다. 이 그림들은 사실 엔소르 자신의 그림으로 마치 견딜 수 없는 현실을 뒤바꾸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툭하면 다락방에 틀어박히던 어린 소년으로서는 (그는 나중에 이 다락방에 아틀리에를 꾸민다) 환상성으로 이 우중충한 고장을 덮어야 했다.”
“엔소르의 아틀리에는 순수한 상상력이 지배하는 동화 속 나라였으며, 그곳에서 그는 유령들이나 죽음의 여신과 장난을 치고 놀았다. 1932년경의 작품인「동서남북」을 보면 그의 집 거실이 상세히 공개된다. 거실 벽에는 그의 그림과 데생이 빽빽이 걸려 있고,「 그리스도의브뤼셀입성」과 일상적 가재도구 옆에는 가면, 꼭두각시, 해골, 피아노 위에 보란 듯이 얹어둔 악보, 구두, 소형 입상(立像), 유리잔, 남반구에서 가져온 조가비 등이 놓여 있다. 일평생에 걸친 고단한 탐구를 함께한 친구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이다.”
성공한다. 이러한 평가는 그의 그림이나 데생뿐만 아니라 음악 작품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클로드 모네_꽃향기로 가득한 색채의 왕국, 지베르니
“클로드 모네는 무척 오래 살았고 뒤늦게나마 큰 명성을 얻었는데, 그 덕에 오랜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지베르니의 저택이 바로 그것이다. 풍경화를 그리기 위해 중무장을 하고 야외에 나가 원하는 각도와 광선이 나올 때까지 한없이 기다릴 나이가 지나자 모네는 아예 자연을 집에 옮겨놓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지베르니의 아름답고 화려한 정원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모네는 정원을 세심히 구상한 후 식물에 대한 전문가적 지식을 바탕으로 꽃과 나무를 심었다. 우선 희귀종 나무들을 골라 큰 얼개를 짜고, 이어서 다양한 꽃과 식물을 배치해 정원이 계절에 따라, 자신의 기분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커다란 연못을 하나 만들어 멋진 수생식물들이 자라게 하고, 그 위에 일본식 홍예교를 놓았다. 그렇게 그는 작품의 이상적 소재가 될 만한 풍경들을 빠짐없이 지척에 두게 된다. 여기서 탄생한 수많은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수련」연작일 것이다.”
“그가 가장 정성을 쏟은 곳은 단연 정원이었다. 그는 정원에 끊임없이 새로운 품종의 꽃을 심고 건축적 원칙이 아닌 회화적 구도에 따라 정원의 배치를 변경했다. 귀스타브 조프루아는 지베르니를 찾을 때마다 느낀 황홀한 기분을 이렇게 적고 있다.
‘지베르니에 하나밖에 없는 큰길로 난 작은 문을 밀고 들어가면 어느 계절이건 거의 천국에 온 기분이다. 그곳은 꽃향기가 가득한 색채의 왕국이다. 달이 바뀔 때마다 라일락과 붓꽃에서 국화와 한련에 이르기까지 그때그때 새로운 꽃들이 만발한다. 주인의 꼼꼼한 지시 아래 노련한 정원사들이 가꿔놓은 이 정원은 언제든 손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어 진달래, 수국, 디기탈리스, 접시꽃, 물망초, 제비꽃 등 화려한 꽃과 수수한 꽃이 차례로 등장한다.’”
“1892년「루앙 대성당」연작이라는 걸작을 남기고, 1895년 겨울 노르웨이를 여행한 것을 끝으로 모네는 자기 예술의 실험실인 정원과 연못에 틀어박힌다. 마리안 알팡의 정확한 지적처럼 ‘모네는 아틀리에로 직행하는 대신 그림, 정원, 집을 수수께끼같이 얽어놓은 복잡 미묘한 길을 돌아다녔다. 딱히 정해진 길도 없이 계절, 시간, 기분에 따라 그때그때 발길을 옮겼다.’ 결코 만족을 모르는 예술가였던 그의 앞에서 서로를 반영하면서 환희와 절망을 동시에 주었던 작품과 정원은, 말년의 모네에겐 더 이상 구별할 의미가 없어진 것이었다.”
알프레트 쿠빈_평온하고 소박한 안식처
“1902년, 쿠빈은 베를린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빈 분리파의 여러 행사에 참여한다. 1904년에는 칸딘스키와 교분을 맺고, 2년 후 파리로 여행을 갔다가 오딜롱 르동을 만난다. 이후 린츠 지방의 츠비클레트에 집을 구해 그곳에서 아내 헤드비히와 평생을 산다. 1911년에는 청기사 그룹의 일원이 되면서 확고한 명성을 얻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화단과 거리를 둔 채 츠비클레트에서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에 집중하면서 자신의 집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도서관, 기괴한 미술관로 조금씩 바꾸어나간다.”
“오늘날 누군가가 린츠 부근 츠비클레트의 푸른 평야에 숨어 있는 알프레트 쿠빈의 아름다운 집을 찾는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이 예술가의 내면은 너무나 어둡고 고통스러웠지만 이 집에는 고요와 조화를 머금지 않은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깔끔히 정돈되어 반짝이고 있다. (……) 그의 고달픈 형이상학적 탐색에서 엿보이는 어두운 측면과 그가 역사의 모진 풍파와 현대 생활의 버거운 요구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선택한 수려한 주거공간이 보란 듯이 드러내는 밝은 측면, 분명 모순적이지만 어쩌면 둘 사이의 대립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카프카와 동시대인이자 친구였던 알프레트 쿠빈. 1955년 그는 50여 년간 수천 점의 기괴한 데생을 탄생시킨 츠비클레트 자택과 작품 및 서재를 오스트리아 정부에 기증한다. 1959년 8월, 쿠빈은 생에 이별을 고한다. 그로부터 3년 후 이 집은 쿠빈만의 특별한 분위기를 그대로 살린 채 미술관으로 재탄생한다.”
조르조 데 키리코_욕망과 비애가 화려하게 수놓인 로마의 작업실
“키리코 부부는 새 집을 상당히 이상야릇하게 만들어놓았다. 얼마나 이상한지는 직접 보고 판단해야 한다. 2층은 전체가 터무니없을 만큼 넓은 응접실인데, 이 공간은 거실과 식당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거실은 화려한 리셉션이나 사교계 파티라도 염두에 둔 것처럼 다시 여러 개의 거실로 분리돼 있다. 애초에 이 집은 앙시앵 레짐 스타일로 꾸며져 있었는데, 여기에 수없이 많은 소파와 안락의자(소파에는 새빨간 커튼과 극명히 대조되는 푸른 빛이 감도는 회색의 천이 덮여 있다), 크리스털 샹들리에, 중동산 양탄자, 18세기 가구, 바로크 조각, 현대식 커피테이블 등을 들여놓아, 이 집은 사회성이 없고 폭언을 일삼는 유명 화가의 집이라기보다는 상류사회의 클럽처럼 보인다.”
“2층은 전적으로 사교의 공간이었지만 갤러리 구실도 하여 키리코는 이곳에 1950년대의 그림, 이탈리아의 여러 광장 그림(새로운 스타일로 그린 이 작품들은 1910년대 초 파리에서 구상한 그림들을 연상시킨다), 형이상학 시기의 그림, 제1차 세계대전 중 페라라에서 그린 그림, 정장 차림의 자화상,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자화상, 의도적으로 루벤스, 들라크루아, 쿠르베 등 과거의 거장들을 표절한 그림 등 50여 점의 작품을 걸었다. 이 중에는 과거 전성기 자신의 작품을 카피한 그림들도 있는데, 낄낄거리면서 그린 게 분명한 이 그림들은 스스로 이미 오래전부터 불멸의 거장 반열에 올랐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자기조롱과 속임수를 즐기는 개인적 성향을 극단적으로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테이블, 콘솔테이블, 서랍장 위에는 그가 즐겨 쓰는 테마들을 보여주는 작은 브론즈 조각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다. 그런데 키리코가 그토록 많은 글을 통해 예찬하고 연구했던 선배 거장들의 그림은 하나도 없으며, 다른 동시대 작가의 작품은 더더욱 찾아볼 수 없다. 전후에 키리코는 미술 시장의 화상이나 위작을 제작하는 사기꾼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여 법정투쟁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비평가, 기자 및 당당히 졸작을 만들어내고 있는 현대 예술가들에게도 걸핏하면 싸움을 걸었다. 정겨운 지적 교류의 장소처럼 보이는 이 넓은 거실은 사실 그에게는 음모와 간계가 난무하는 결투장이었다.”
첫댓글 제라르 조르주 르메르, 장 클로드 아미엘 지음 / 역자 이충민 옮김 / 출판사 아트북스 | 2011.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