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산칠봉 투구봉 / 박얼서
춘풍의 홍상(紅裳)자락
완산칠봉 품고 돌아가는 길
어떤 그리움 하나
여진의 어지럼증처럼
기억을 흔드는데
자드락길 능선을 따라
뒤쫓아온 철쭉꽃 메아리
갑오년(甲午年) 그 해
동학농민 함성인가
산 허리를 휘감은 횃불
새봄의 성지를 이뤘네.
철쭉꽃 / 박얼서
타향 하늘 아래
그리움 지천으로 피어날 때
만산을 물들이고
불쑥 환희로 일어서는 아픔
봄비 후드득 지나간 뒤
아쉬움 정녕 시든다 할지라도
그리움 툭 꺾지는 말자
유년을 달려온 꿈
오늘의 만개 이만큼 서글퍼도
당신 뒤를 쫓는
짙푸른 청춘이 있어
그 시절 고향 하늘
여전히 남아있질 않는가!
어둠은 희망이다 / 박얼서
백주대낮에 눈길을 끄는 담벼락
저건 전광판
암흑의 스크린 아니더냐!
이런 위급함 속에서
속보를 떠받치는 본바탕도
등짐진 어둠이로구나.
9월 / 박얼서
어제는
폭염에 열대야에 태풍까지 담았던 유리병
오늘은 9월
너와 나의 구월이 더 눈부신 것은
엎질러 깨져 버린 파편들
그 예리한 기억들 때문이다.
그때도 가을이었네 / 박얼서
이 가을날에
책갈피를 뛰쳐나온 샛노란 은행잎 한 장
어떤 그리움
그 소녀였었네
그때도 이 무렵이었을 걸
비린내를 굽던 옴팡집 주모의
노련한 사랑담 곁에 앉아
취기와 시름하던 그날도
꼭 오늘 같은 날이었네
이 가을엔
낙엽 길에 스쳐가는 바람마저도
그리움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