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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
金鰲新話
최 인 훈
고개 마루를 기어오르면서, 기차는 짐승이 되었다. 잇따라 울리는 날카로운 기적은 김을 뿜어내는 쇠붙이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라기보다는 분명히, 함정에 빠진 짐승이 그저 체면을 팽개치고 뽑아내는 그런 목청이라고 하는 편이 나았
다.
A는 이를 악물었다 놓으면서 창유리에 바싹 얼굴을 붙이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거기서 그는, 흘러가는 고원(高原)의 밤 경치 대신에, 어떤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달 없는 밤 유리는 컴컴한 뒤판을 댄 거울이 돼있었던 것이다.
빗어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푸수수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 그 이마에 잡힌 두 줄의 깊은 주름. 불거진 광대뼈. 그를 바라보는 푹 꺼진 눈동자는, 늙은 노동자의 그것처럼 지쳐있었다. 그는 오싹 몸을 떨었다.
그는 창에서 얼굴을 떼며, 의자 등에 힘없이 기댔다.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턱을 쳐들싸한 눈길이 닿는 곳, 입구 위쪽에 표어가 커다랗게 붙어있다. ‘위대한 중국 인민과 조선 인민의 영구불변의 친선 만세.’ ‘민족의 태양이며 조국 전쟁의 승리를 지도한 우리들의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장군 만세.’
A는, 가로 붙여진 그 글씨를, 오래 바라보았다. 질이 나쁜 갱지에 물감으로 쓴 그 표어는, 붙여놓은 지가 오래 된 모양으로 글씨의 색이 바래어있었고, 한
쪽 모서리가 떠서, 어쩌다 바람 때문에 문이 덜컥 열릴 때면, 가장자리가 세모꼴로 펄럭 접혔다가는 펴지고 하였다. 그는 걸어가서 문을 단단히 닫아놓고 돌아왔다.
짐차줄에 다만 한 칸만 달아놓은 손님찬데, 손님은 그를 넣어 단지 넷. 그 네 사람도, 차칸을 넷으로 나눠 자리잡은 채, 기침 소리도 내지 않았다. 어쩌다 기차가 심하게 흔들릴 때 몸을 바로잡는 기척도 그때마다 한 사람 같았다. 휴전이 되고 체코에서 들여온 객찬데, 퍽으나 낡은 것이었다. 그 동안에 이토록 헐었을 리는 없으니까, 원래 쓰던 물건을 보내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나무를 댄 마루바닥이 꺼칠하게 일어나있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모란봉’을 꺼내, 한 대 붙여 물었다. 오랜만에 피우는, 질이 좋은 담배 맛이 아찔하도록 즐거웠다. ‘인민’도 제대로 댈 수가 없어서, 퐁초를 풀어두었다가 신문지에 말아 피우는 것이 일쑤여서, 혓바닥은 그렇게 길들어있었으나, 그는 이번 걸음에는 사치를 부릴 수 있었다. 도당(道黨) 선전부장이 평양까지의 여비몫으로 준 백 왼 중에서, 아직 반이나 남아있었다. 막 떠난대야 혈혈단신인 몸이고 보면, 뒷마무리하는데 그만한 돈도 다 쓸 데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도당(道黨)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것은, 구월 들어 어느 몹시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지난 싸움 때 폭격으로 반 넘어 허물어진 도당 건물에 들어서면서, 그의 가슴은 알 수 없이 어수선했다. 그저 평당원에 지나지 않고, 그렇다고 일터에서 두드러진 일손도 아닌 그가 도당의 부름을 받았다는 일은 아무래도 풀기가 어려웠다. 그는 컴컴한 복도의 맞은편에 선전부장실이라 쓰인 도어를 밀었다.
벽을 등지고 앉아있던 남자가, 낯을 들었다. 중년을 지난, 작달막한 사나이였다. 그는 먼저, 자기 손목시계에 흘낏 눈길을 보냈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A동무지요?”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 굵직한 목소리였다. A는, 빗물이 흐르는 웃옷을 한 손으로 쓸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네, 부름을 받고 온, 홍남비료 제3공장 제26작업반의 A입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책상에 놓았다.
“수고했소. 심한 모양이군.”
그는, 흠뻑 젖은 A의 위아래를 새삼 훑어보았다.
“네, 뭐…….”
비가 오는 것이 마치 자기 탓이나 되는 듯이, A의 목소리는 떨려나왔다.
“비옷을 벗으시오, 동무.”
비누一―마대(麻袋)를 오려내서 망토 모양으로 지은, 흠씬 젖은 걸레쪽을 몸에서 떼어 들고, 그는 잠시 망설였다. 어디 마땅한 둘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전부장은 문간에 놓인 작은 상자를 눈으로 가리켰다. 그는 두 겹으로 접은 비옷을 그 위에 놓고 나서 선전부장과 마주앉았다. 선전부장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작년 볼셰비키 혁명 기념식과, 금년 메이 데이 때 그리고 지난
번 군중대회에서―¬모두 세 번 그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한 번은 높은 단 위에서, 나머지 두 번은 시위행진을 하면서 지나치는 길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난 전쟁 때 자강도(慈江道) 지구에서 군수공장을 맡고 있었다는 그는, 뛰어난 조직 능력으로 중앙당의 믿음이 두텁다는 말이었는데, 지금 눈앞에 두 손길을 책상 위에서 마주잡고 그를 지켜보는 마흔줄의 사나이는, 얼핏 그의 중학시절의 어느 교사를 떠올리는 그린, 평범하고도 조금 지친 듯한 눈을 가진 남자였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겠지요?”
“네, 아무한테도…….”
선전부장은 마치 그것을 알기까지 기다렸다는 듯이, 그제서야 소환장을 집어서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미리 책상 위에 얹혔던 서류를 끌어당기먼서, 불쑥 말하는 것이었다.
“동무, 당과 인민을 위해서 일해 볼 생각이 없소?”
“네?”
A는 엉거주춤 일어설 듯한 몸매를 지니면서, 턱수염이 푸슬하게 자란 부장 동무의 아래턱에 대고, 순전히 바보같이 네 ? 를 두 번 뇌었다.
“당과 인민을 위해서 봉사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소.”
말씨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네, 물론…… 부장 동무, 좀 자세한…….”
“물론 그렇게만 말해서는 짐작이 안 갈 게요.”
그는 한번 멈추었다가,
“동무가 열성적인 당원이란 보고는 잘 듣고 있소.”
전혀 엉뚱한 얘기를 꺼냈다. A는 가슴이 꺽 막혔다. 자기가 그련 당원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동무에게, 특수 임무를 맡기자고 생각했소.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기회요. 현재의 자리보다 더 보람 있는 자리에서, 당에 봉사할 수 있는 것이오. ……남조선으로 가는 일이오.”
“네 ? 남조선으로요?”
“그렇소.”
눈앞이, 막이 끼인 듯이 잠간 보얗게 흐렸다. 간첩. 간첩 두 글자가 머리 속에서 두 겹 세 겹으로 핑그르핑그르 돌아갔다.
삼십 분 지나서 그는 도당을 나왔다. 비는 여전했다. 그는 마대를 뒤집어쓰고, 비오는 거리를 합숙을 향해 걸어갔다. 합숙까지 이르는 사이 양쪽은, 원래 흥남의 메인 스트리트가 있던 자리였으나, 지금은 부숴진 벽돌만 여기저기 흩어진 벌판이었다. 벽돌이며 목재 등속은 가건물을 짓는 데 수집당해서, 쓸모 없는 부스럭지 말고는, 부숴진 터에 남아서 쉬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도당에 갔다 온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도 물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오는 길로,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독보회(讀報會)에
나가지 않고, 그의 자리로 와서 번듯이 드러누웠다.
그들의 합숙은 허물어진 건물에서 주워낸 벽돌, 시멘트 덩어리를 쌓아서 흙으로 바른, 낮은 움막이었다. 그는 누운 채로 팔을 뻗쳐, 손가락으로 벽을 만져보았다. 흙벽에 바른 시멘트 포장지는, 더 좀 세게 꾹 누르면 물이 번질 것처럼, 눅눅하게 불어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갖다 코 끝에 댔다. 질소비료의 퀴퀴한 냄새와 흙 썩은 냄새가, 시장한 그의 속을 울컥 뒤집어놓았다. 오십 명의 인원이 잠자는 자리로서는 너무나 비좁았으나, 그래도 A는 이 움막을 사랑하였다. 왜냐하면, 잠자는 시간에만은 그는 자기가 되어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에 절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 밑에 가려진 캄캄한 공간 속에서, 그는 소리 없이 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소리도 내지 않고, 느끼지도 않고, 물론 눈물도 흘리지 않고 울음을 운다는 기술에 익숙해있었다. 문 앞에 달아놓은 박격포 깍지가 땅 땅 땅 세 번 울리면, 그들은 저마다 고단한 몸을 눕히고 이불을 뒤집어쓴다. A는 꼭대기까지 푹 덮은 다음에, 두 주먹을 쥐어 아랫배에 붙이고, 이를 악문다. 몸을 빳빳이 뻗친다. 그리고 한참 있는다. 머리끝에서 발끝으로, 실오리처럼 가놀고 잔잔한 물결이 지나간다. 자꾸 흘러간다. 그러면 그의 마음과 몸은 후련해진다. 그는 주먹을 풀고 악물었던 입을 벌린다. 이것이 우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습관이 된 이 움직임을 치르고 난 다음에도, A는, 여느 때처럼 후련한 기운을 가지지 못했다. 남조선으로 가시오. 조국과 인민이 당신의 봉사를 바라고 있소. 중학교 시절의 어느 선생을 닮은 부장 동무는, 그에게 권하고 있었다. 당은 동무의 충성을 믿고 있소. 인민과 조국을 지키고, 해방을 갈망하는 남반부 동포들을 도울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요. 어떻소? 네, 물론입니다. 네, 부장 동무 지는 자랑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응하겠다는 말이오? 네, 동무, 부장 동무……. 물론 생각할 수 있는 충분한 짬을 주겠소. 잘 생각해보시오. 잘. 일 주일 후에 이 시간에 다시 오시오. 부장 동무는 하얀 이를 드러내보이면서 인자하게 웃었다. 마치 외국 유학읕 권고하는 은사처럼.
그는 앓는 소리를 죽이느라고 이불 자락을 물었다. 방안은 텅 비어있었다. 제3동에서 종합학습을 하는 날이었다. 그쪽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들은 민주 조선 힘찬 근로자
새 세계를 청조하는 건설의 역군
동무들아 이 기세로 굳게 뭉치어
인민경제계획을 승리로 맺자
인민경제계획을 완수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투쟁하논 지금의 생활도 물론 훌륭한 봉사요. 그러나 당은 동무에게 다른 일터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오. 더 혁명적이고 더욱 영광에 찬 임무 말이오.
일 주일 후, 그는 도당 선전부장실에서 지금 일터에서 눈에 띄지 않고 빠져나오는 일을 가지고 이야기했고, 다시 한 주일이 지난 다음에는, 부장 동무는, 그의 성공을 축하하면서 평양까지의 여비 백 원과, 열차 번호를 적은 여행 증명서를 주었다. 우엉우엉 길게 뽑아대는 기적은, 목을 힘껏 놀이고, 팔다리를 버둥대는 어떤 짐승의 형국읕 뚜렷하게 머리에 그리게 할 만큼, 절실한 느낌에
차있었다. 그는 허공중으로 사라져가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우스운 일이었다. 이 걸음의 목적이 잠시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으면서도, 그의 가슴 한 구석에는, 어떤 티없는 기쁨이 번지고 있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여행을 한 적이 없어서였을까. 그 지루하고 고달픈 공장살이. 1,200칼로리 아래로 처지는, 성욕마지 아슴푸레하게 만드는 생활. 그 생활에서 어쨌든 벗어났다는 기쁨일까.아무리 그렇게 주착이 없을 수야. 사람이란 그렇게 주착이 없는 것일까. 빈대가 미워서 초가 삼간을 태운다고. 그래도 초가가 아니라 내 몸인데. 내 몸인데야 그럴수가……. 그래도, 그래도 그의 가슴에 번지는 설레임.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새로운 일터. 더 높은 충성을 나타낼 기회요. 동무. 당을 사랑하고 투쟁의 역사에 자랑스러운 이름을 남긴 동무들은, 원수들이 지배하는 거리에서, 그들의 총검이 번득이는 병영(兵營)에서, 혁명을 조직하고 미래를 만들어냈소. 새 역사를 만드는 계획에 참가하는 게 어떻겠소. 당과 동무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나 자신의 미래. 흥남 비료 제3공장 제26작업반 선반공 A의 새로운 미래.
기차는 내리막을 달리고 있었다. 알리도록 몸이 기울었다. 칙칙푹푹, 어린 시절에, 기차 소리는 그렇게 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칙칙푹푹.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기차 소리는 이렇게 들렸다. 놓치면은 안 된다, 놓치면은 안 된다. 칙칙푹푹, 놓치면은 안 된다, 놓치면은 안 된다. 누군가가 열심히, 놓치면 안 된다고 소리치는 것이다. 무엇을? 무엇을 놓치면 안 된다는 말인가? A는 물론 알고 있었다. 그는 얼굴에서 손을 떼고, 다시 창유리에 얼굴을 갖다댔다. 거울 속의 사나이는 비밀을 가진 인간의, 조심스럽고 불안한,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웃음을 웃고 있었다. 놓치면은 안된다. 놓치면은…….
기차는 이제 평지를 달리는 모양이었다…….
전쟁 중에 깡그리 부숴진 흥남만을 보아온 눈에, 평양은, 그래도 사람 사는 도시라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평양이 덜 부숴진 것이 아니라, 흥남이 너무 부숴진 탓이었다. 아뭏든 도시가 더 크고 보면, 부숴지기를 벗어난 데가 넓이로는 우선 더 클 이치였다. 다만, 시간이 퍽으나 된 다음에도, 거리에 나도는 사람이 너무나 적었다. 그러한, 인간의 부재를 메꾸기나 하는 듯이, 플래카드가 가는 데마다 걸려있었다. ‘제○차 당대회의 호소를 받들고 전 조선 인민은 영명한 수령 김일성 동무의 주위에 철옹성처럼 단결하라.’ ‘조국 전쟁의 원조자이며 조선 인민의 친근한 벗이며 중국 공산당의 위대한 지도자 모택동 동무 만세.’ ‘우리 민족의 불구대천의 원수이며 세계 평화 애호 인민의 가증할 적 미제국주의자들과 그 졸도인 이승만 괴뢰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남북 조선인민의 단결 만세.’ 지붕이 내려앉고, 마치 국민학교 아이들이 윤곽을 그릴 때
어디고 깜정 크레용을 칠하듯이, 반듯하게 검은 테가 둘린 타버린 창틀 사이로, 하늘이 내다보였다. 유럽의 어떤 도시가 ‘동상의 거리’라고 불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평양은 플래카드의 도시라고 하면 어울릴 성싶었다. 동상이,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고라면, 플래카드는 닥쳐올 시간에 대고 던지는 고함 소리라고 할까.
흥남보다 부숴지고 남은 건물이 좀더 많은 반면에, 그런 비율만큼은 사람이 많지 못하고, 그 대신 플래카드가 풍성한 도시―--이것이 A의 눈에 비친 평양
이었다.
기차에서 내리면서 시간을 알아보았을 때는 8시 10분 전이었다. 그 동안에 10분이 지났다 하고 8시, A가 내무성에 나타나기로 된 9시 30분까지는 그는 자유일 수 있었다. 평양은 처음 걸음이지만, 그는, 정거장에서, 그 위치와 그곳까지 걸어서 걸리는 시간을 물어둔 탓으로, 남은 시간을 마음놓고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걸어가는 길가에 시장이 나섰다. 사람들은, 히허벌판에 저마다, 바꾸자는 물건을 앞에 놓고 앉아있었다. 이만한 수의 사람이 한곳에 몰린 곳을 처음 대하는 까닭에서였던지, A는 문득 따뜻한 뭉치가 가슴에서 꿈
틀거렸다. 번들번들 닦은 양은 그릇, 쇠솥, 탄 자리에서 걷어온 땔감, 빛이 바랜 옷가지들, 양철판에 수북이 쌓아서 헝겊으로 덮은 삶은 옥수수, 그리고 유독 A의 눈길을 끈 것은, 서랍 탈린 묵직한 장농이었다. 연한 밤색을 입힌 나무걸은, 빈들반들 윤이 나고, 아침 햇살에 그 밝은 데가 호박(璇自)처럼 비쳤다. 봉황새 모양을 본뜬 놋 자물쇠까지 덩그마니 잠겨있었다. 이련 물건이 어떻게 남아났을까. 그는 형태를 취한 기적을 대한 듯이, 놀라움과 까닭 모를 그리움의 눈으로 이 살림살이를 바라보면서, 손으로 만져보았다.
“동무, 잘해서 써보우다레.”
A는 그렇게 말하는 물건 임자를 그제야 쳐다보았다. 장농 모서리에, 몸을 숨긴 모양으로 쭈그리고 앉아서 철에 어울리지 않는 중공군 방한모를 귀를 접어서 머리에 얹은 노인은, 소 장터에서 송아지 등을 쓰다듬는 손짓으로 그의 사치한 상품을 매만지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용케 이련 물건이 남았군요.”
그는, 마음 속에 있는 말을 기어이 입 밖에 냈다. 그러나 노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다시 한번 A를 흘깃 쳐다보고는, 방한모를 꾹 누르는 시늉을 하면서, 무슨 털게처럼, 앉은 채 뒷걸음질을 하여, 도로 장농 모서리로 움추러 들어갔다.
그는 일른 그 앞에서 자리를 옮겼다: 옥수수더미 앞에서 그는 발을 멈췄다.그는 쭈그리고 앉아서, 손으로 가리켰다. 아낙네는 헝겊을 들쳤다. 연한 수염에 싸인 노란 뭉치를 보자, 그는, 거짓말처림 심한 시장기를 느꼈다. 그는 덥썩 한 개를 집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내무성에 닿아서 시간을 알아보니, 그는 이십 분이나 앞질러 온 것이었다. 그는 몹시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A는 아까와할 시간이 다시는 없을, 그런 곳으로 자기가 걸어들어온 것을 똑똑히 깨달았다. 그 초라한 저자에서의
산책이 그토록 아쉽고 유쾌하던 까닭을 뒤미처 느낀 것이었다. 내무성 건물은,
비교적 파괴가 덜하느니보다 거의 말짱했다. 건물 같지 않은 건물, 거리 같지 않은 거리, 가구 같지 않은 가구 속에서만 이 수삼 년을 보내온 그의 감각은,
힘을 주어 걸어도 마루가 울리지 않는, 이 제대로 된 건물에서 그것만으로 위압을 느꼈다. 대남공작을 맡은 책임자의 방에서도, 그는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말끔히 치운 방. 벽에 걸린 커다란 조선 지도. 쟁반에 받쳐놓은 물주전자.
그런 것들이 당치 않은 물건처럼 그를 눌렀다. 그보다 잘해야 서너너덧 샅 위일 성싶은 방의 임자는, A가 자리에 앉는 것을 기다려서, 입을 열었다. 앞니가 한 대 금이빨이었다.
“수고했소. 오늘부티 동무는, 내 지시에 움직여야 하오. 오늘 과업을 말하겠소. 제3시립병원으로 가서, 건강 진단을 받으시오. 진단서는 필요 없소. 받기만 하면 되오. 끝나는 대로 다시 나한테 오시오.”
A가 어물거리자 금니는,
“가시오, 연락은 되어있소.”
밀어붙이듯 말했다. A는, 무릎에 얹었던 레닌모를 손에 집어들고, 방을 나왔다.
제3시립병원은, ㄷ 자의 밑줄쪽이 부숴진 채로 있는, 학교 건물이었다.
그는 용지를 들고 먼지 저울에 올라섰다. 바늘은 50과 60 사이에서 부르르
떨다가 미안한 듯이 55에서 주춤하더니 그대로 멎었다. 시력, 키를 재고 그는 의사 앞에 앉았다.
“어디 아픈 데 없소.”
“아니.”
의사는 꾹 집어서 눈까풀을 뒤집 어보고, 앙을 시키고 혓바닥을 눌렀다.
“벗으시오.”
A는 웃옷읕 벗을 때 약간 망설였다. 속옷이 너무 더러웠기 때문이다. 의사는 그런 데는 아랑곳없이, 청진기를 귀에 꽃고, 꼭지를 내밀어 그를 재촉했다.
“크게…… 좀더…….”
그는 용지에 써넣고 청진기를 귀에서 뗐다.
“입으시오. 복도 맞은 편 X선과로 가시오.”
X선실에서 그는 좀 기다려야 했다. 담당 의사가 어디를 갔다는, 간호원의 말이었다. 간호원은 창가에 앉아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솜을 넣은 장감인데, 그녀의 발뿌리에는 같은 장갑이 여러 개 쌓여있었다. A는 물어봤다.
“뭡니까, 간호원 동무.”
그녀는 쳐다보지 않고 대꾸했다.
“인민군 동무들에게 보낼 겁니다.”
한 사람이 몇 켤레씩 맡았느냐고 물으려다가, 그는 입을 다물었다. 담당의사가 들어왔다. 그는 또 한번 웃몸을 드러내고 기계에 올라섰다. 엉거주춤 키를 낮추고, 얄팍한 가슴을 유리판에 밀어붙이면서 눈을 감았다. 이날부터 A의 이상한 삶이 시작되었다.
“……합법적인 신분을 획득하는 투쟁은, 지시하는 바를 따라서 치밀하게 실천만 하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동무가 어떤 지방에서 상인으로서…… 아까도 말한 것처럼…….”
강사(講師)는 기억을 상기시키려는 것처럼 손가락을 까딱까딱해보였다.
“……아까도 말한 것처럼, 상인이 가장 안전한 신분이니깐. 즉 동무가 상인으로서 그 지방의 사정을 어느 정도 연구한 다음에는, 그 지방에 그럴 만한 사람을 통해서 경찰에 접근합니다. 물론 서장이나 지서장 급이라면 더욱 좋겠으나,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고, 또 썩 현명한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자가 낫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일은 그들의 손을 통해서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거기서는 ‘대한민국에는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항간에서 떠도는 이 짤막한 이야기가, 미제국주의자들의 충실한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이승만 도당이 어떤 정치를 하고 있는가를, 잘 말
해주고 있습니다. 동무는 그렇게 해서 그 순경과, 인간적으로 친해집니다. 이 ‘인간적’이란 말을 잘 기억해두십시오. 그것은, 이승만 도당이, 자기들의 부패와 착취를 수식하기 위한 발명품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두 번 술자리를 같이 하고, 적당한 기회를 봐서 말을 꺼냅니다. 도민증을 분실했다고 하십시오. 처음에는 지나가는 말처럼 비치기만 하고, 그 자리에서는 더 이야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만났을 때, 동무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아 여보. 지난 번 이야기하려다 그만 잊어버렸군. 도민증 하나 내주시오.’ 그러면 그 자는 ‘내
주지.’ 할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그 말대로 도민증 자체를 내줄 수도 있는 문제지만, 그보다 더 쉬운 것은 분실증입니다. 즉, 이 사람이 그곳에서 도민증을 잃어버린 것을 증명해주는 서류란 말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새 도민증을 신청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남반부에서의 당신의 신분은 합법성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동무의 활동은 훨씬 쉬워집니다. 상인이라는 것은, 특히 한곳에 점포를 지키지 않고 지방에서 지방으로 왕래하면서 장사하는 경우에도, 가장 감시를 덜 받는, 그러면서도 자연스러운 직업인 것입니다. 동무가 매일 받고 있는, 남뱐부의 경제정세에 관한 학습은, 그때에 가서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특히 조심할 것은, 정치문제에 관해서는 아무 흥미 없는 사람이라는 인상읕 주도록 힘써야 합니다.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만, 술이 취한 때라 할지라도, 시사적인 문제에 대해서 담론할 때에는 조심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남반부의 부패한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가 벌어지는 경우에도, 결코 홍분하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실은 어쩔 수 없는 일이란 듯이 여겨야 합니다. 이를테면 못 먹는 놈이 병신이지, 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애국자인 체, 세상을 근심하는 체해서는 안됩니다. 부패한 사실은 삔히 알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별수 없지 않느냐, 하는 세계관을 가진 사람으로 처신해야 합니다. 가령, 면사무소(면 인민위원회를 이렇게 부른다는 것은 알고 있지요?)에서 서류를 부탁할 때, 항상 미국 담배를 한 감 창구(窓口)에 들이미는 것이 좋습니다. 일이 아주 쉽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쓸데없는 일을 가지고 꼬치꼬치 질문을 당하다가, 뜻하지 않은 위험에 부닥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방법은, 당신이 남반부의 어느 곳에서 활동하든지 간에 적용해야 할 전술입니다. 불안해할 필요는 없소. 남반부에서는 그것이 한 가지 절차니깐. 자 그러면 남반부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물건에 대해서, 다시 한번 학습
합시다.”
그들은 의자에서 일어서서 다음 방으로 걸어들어갔다. 널찍한 방이다. 벽에다 두 겹으로 선반을 매고, 물건이 얹혀있다. 방 가운데는 낮은 탁자에 의자가
둘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오른쪽으로부터 선반에 놓인 물건읕 하나하나 보아갔다.
러키 스트라이크, 캐멀, 팰멀, 바이스로이 따위 담배, 론손, 지포 같은 라이타. 우편 엽서와 우표, 마카오 복지, 제니스 라디오, 오메가, 로렉스, 불로바 등의 시계, 럭스, 카미, 다이얼, 아이보리 등 포장이 아름다운 비누들, 콜게이트 치약, 폰드 크림, 필그림 스웨타, 파나마 모자, 라이카 카메라. 강사는 말했다.
“동무. 이 상품의 어느 하나도, 남반부에서 생산한 것은 없소. 이것들은 월가의 자본가들이, 국내 시장에서 팔다 못해서, 그들의 앞잡이들에게 원조라는 이름으로 보낸 잉여물자들과, 남조선을 강점하고 있는 미제국주의 군대들이, 그들의 PX에서 훔쳐내온 물건들이오. 동무가 남조선에 가면, 우선 이런 물건들이 거리마다 넘쳐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그러나 이런 물건을 사용하는 것은, 한 줌도 못 되는 악질적인 반동분자들뿐이오. 동무도 남반부 출신이니 잘 알 것이오. 대부분의 인민대중은, 이런 물건들과 관계 없는 생활을 하고 있소. 그들은 굶기를 밥먹듯이 하고 있소. 이 담배 한 갑이 이백오십 환이오. 도시의 자유 노동자의 하루 벌이를 기껏 잡아서 천 환이라고 한다면, 그 노동자가 하루 총 수입의 사분지 일을 들여서 이 담배를 살 수 있겠소? 어림도 없는
일이오…….”
A는 깊이 고개를 지어서 긍정해보이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남한에 있을 때, 분명히 이 담배를 자주 피웠다. 나는 한 줌도 못 되는 자본가이기는 커녕 고학생이었다. 동무는 남뱐부 출신이니 잘 알겠지만, 하고 풀이를 붙이는 강사의 말이 공허한 것을 지나쳐서 어떤 슬픔을 주었다. A는 그곳에 내놓은 물건을 보면서, 언제나처럼, 마음에 스며드는 향수를 느꼈다. A는, 모든 학습 가운데, 이 시간에만은 기쁨을 느꼈다. 그때. 그때 내 인생에는 아무 목표도 없었다. 그리고 날마다의 생활에도, 기쁨보다도 고달픔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 앞에 있는 물건들은, 그에게 향수를 느끼게 한다. 강사의 눈길이 그를 살피는 듯이 훑는 것 같아서, 그는 낯빛읕 가다듬었다. 강사는 별 다른 눈치도 없이 말을 이었다.
“남조선은, 한 줌도 못 되는 매국노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와있는 미제국주의 군대들이, 먹다 버리고 쓰다 버리고 입다 버린 찌꺼기들을 얻어먹고, 노예처럼 살아가는 인민대중이 대부분이오. 남반부 도시에 사는 대부분은, ‘꿀꿀이죽’이라고 부르는 음식을 주식으로 하고 있소. 이것은 미제국주의 군대가 먹다 버린 찌꺼기를 긁어모아서 한데 휘저어놓은 이상야릇한, 이 지구상에서 남조선에밖에는 없는, 이상야릇한 음식이오. 이 속에는 닭고기, 쇠고기, 돼지고기, 감자, 사과, 순대, 계란, 칠면조, 복숭아, 햄, 버터 그밖에 온갖 음식의 찌꺼기가 골고루 들어가 있고, 게다가 담배꽁초와 껌까지 들어가 있소. 어떻소, 이 세상에 이처럼 영양이 풍부하고, 게다가, 음식을 먹으면서 동시에 담배를 피우고, 껌까지 씹을 수 있는 음식…… 또 어디 있겠느냔 말이오. 이것이야말로, 가증할 미제국주의자들과 이승만 반역 도배들이, 인민에게 제공한 가장 큰 선물이오. 그러나 꿀꿀이죽을 먹을 수 있는, 도시의 인민들만 해도 행복한 편이오. 남조선 인구의 5할을 차지하는 농민들은, 풀 뿌리와 나무 뿌리로 연명을 하고 있소. 이승만 매국 도당이 농민들의 피땀으로 지은 곡식을 뺏아서, 일
본 자본가들에게 팔아먹고 있기 때문이오……. 앉읍시다.”
그들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이승만 도당은, 자기들의 죄악을 엄폐하기 위하여, 최후 발악을 하고 있소. 공화국 북반부의 막강한 민주 역량과, 공화국 남반부의, 밑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인민들의 항쟁을 두려워하는 놈들은, 미제국주의희 군대의 갖은 행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소. 그들은 인민의 재산읕 약탈하고, 농촌의 청년들과 노동자의 아들들을 강제로 끌어다가
미제국주의자들의 탄알막이로 사용하고 있소. 동무가 가논 곳이, 이런 데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하오. 남조선에는 수많은 다방이 있소.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자리가 바로 그런 곳의 표본이오. 여기에는 실업자들이 특히 들끊고 있소. 동무가 이곳을 잘 이용하시오. 어느 곳보다 안전한 장소요. 어떤 작은 도시라도 다방 한두 집이 없는 곳은 없소. 그곳에는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드나들기 때문에, 동무들에게는 좋은 학습의 장소가 될 것이며, 또한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동무의 사명을 완수하기에는 가장 적절한 장소요. 그럼 실습해봅시다……. 레지…….”
문이 열리면서, 쟁반에 차를 받쳐들고, 젊은 여자가 걸어 들어와서, 그들의 앞에 놓인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 우유를 카네이션이라고 하오. 동무가 있었을 때는 뭐라고 했소?”
A는 잠시 망설였다.
“글쎄요, 그때는 그렇게는 부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좋소, 카네이션이란 것은, 이 우유의 상품 이름이지만, 보통 우유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소.”
A는 여자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레지. 카네이션 좀더.”
여자는 A의 잔 위에 카네이션 주전자를 천천히 기울였다.
봄이 지척에 있었으나 추위는, 그리 쉽사리 물러서주지 않았다. 교외의 밀봉(密封) 가옥에는 피훈련자와 식모 한 사람이 살게 돼있다. 벌써 4개월. 훈련도 이제 마지막 고비였다.
그의 자서전(自敍傳)도 최근장(最近章)에 접어들고 있었다. 밀봉교육이 시작되면서 그는 자서전을 쓰도록 지시받았다. 기억할 수 있는 한, 거슬러 올라가서, 성분과 가계(家系)를 밝히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유년, 소년, 청년 시대 순으로, 개인의 생활사를 자세히 회상하여 일 주일에 한 번씩 강사에게 내는 것이었다.
자서전은 정치보위부에 넘어가서 세밀한 검토와 평가를 받게 돼있다. 쓰는 원칙은, 자신에 대해서 무자비하게 평가할 것과 ‘허위를 배제’하는 일이었다. 그의 자서전은 때로는 ‘막연하다’는 이유로 혹은 ‘고의로 사실을 엄폐’한 듯하다든가 ‘당성(黨性)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나무람을 받았다. 나무람은 강사를 통하는 경우도 있고, 중앙당 연락부로 불려가서 심문을 받는 수도 있었다.
자서전을 써가면서, 그는 어떤 슬픔을 느꼈다. 평범. 너무나 평범한 지난날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성이 부족하다. 자각이 없다. 투쟁적이 아니다. 동무는 역사의 흐름에 어쩌면 그렇게도 무관심할 수 있었는가. 이련 꾸지람은, 그 질문자들의 독단척인 평가와는 다른 뜻에서, A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사실이다. 아무 뜻도 갈피도 없는 생활. 부르즈와에 대한 미움도 없고,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동정도 그만두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미움이나 동정도 없는 생활. 나는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단 한 사람의 살붙이인 어머니에게 효자도 못 되었다.
그는, 전쟁이 일어나던 그 해, 대학 공과 이학년생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 돌아가신 부친은, 그들에게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고학을 해야만 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하겠다는 걸심은 굳었으나, 사회에 대한 반항의식 같은 것은 몰랐다. 아직 연애도 못 하고 있었다.
인생에다 공식을 적용하는 경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도 모르게 죄인이 미는 것이 가능하다. 공산주의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A의 자서전을 읽어보고서는, 앞에 말한 바와 같은 나무람을 주었는데, 그럴수록 A는 어리둥절한, 어떤 모욕을 느끼는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박헌영이는 어떤 일을 한 사람인가, 김일성 장군은 장백산맥에서 무슨 일을 하였는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생활하였다는 것이 A의 ‘죄’라고 동무들은 말하였다. 그러나 A의 생각으로는, 그런 일들을 모르고서도, 그는 별일 없이 살라왔다는 일이 더 중요해보였다. 다시 말하면, 인생이란 그런 것도 포함한 더 큰 것이 아니겠는가. 동무들이 말하는 ‘진리’는 지 하늘의 태양 같은 것과는 다르다. 태양 없이는 사람은 대뜸 삶을 위협당할 테지만, A는 그 ‘진리’를 모르고도 살았으니, 그것은 그만한 것밖에는 못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말을, 강사 동무나 연락부의 동무에게 들이댈 수는 물론 없는 일이었다. 그는 참아야 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었다. 어쨌든 그는 여기서 빠져나가야만 했다.
어느날 거리로 나간다. 민청 동무들에게 붙들린다. 의용군(義勇軍)으로. 이런 과정을 거친 그의 과거로부터는, 동무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진리’에 대한 사랑이 움터나올 수 있는 마디가 없었다.
그와 반대로 그의 마음 속에는, 비록 생기에 넘치고 있지는 못했으나, 지금 이 사회처럼 그렇게 사람을 들볶는 일은 없었던 그 사회――남한으로 가야 하겠다는 욕망이 걍하게 부풀어올랐다. 아직도 남한 사회는 그에게, 그런 소극적인 상(像)으로만 회상되었으나, 그곳으로 가고 싶다논 욕망은 조금도 방해를 받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한번 생활을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이 생활이 시작된 이래 그의 마음에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다시 한번 생활을, 이번에는 더 정신을 차리고. 그렇지, 휴전선을 넘는 즉시로 자수를 한다. 내가 어떻게 월북했는가, 어떻게 하여 간첩교육을 받게 되었는가를 숨김없이 털어놓는다. 애당초 탈출의 기회로 삼기 위하여 임무를 맡았다는 것을 이야기하자.
얼음이 풀리고, 산과 들에 새 목숨이 움트기 시작할 무렵, 마침내 그날이 왔다.
그는 당(黨) 연락부로 불려갔다.
참으로 봄다운 날씨였다. 그가 앉아있는 방, 창 밖에서는 무슨 새일까, 목청이 찢어지게 울고 있었다. 어둡고 지루한 겨울이 가고, 또다시 맞이한 봄이 그들에게 가져다준 기쁨을 소리높이 노래하는 것이리라. 울어라 새여. A의 마음 속에도 그 목소리에 어우러져 외치고 싶은 소리가 있었다.
“동무. 성공을 비오.”
연락부의 동무는 금이빨을 번쩍, 빛내면서 웃었다. A는 금이빨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힘껏 하겠습니다.”
사실이었다. A는 힘껏 할 생각이었다. 개성까지 기차로 왔다. 연락부의 동무와 그는 같은 자리에 앉은, 그러나 모르는 사이처럼 신문만 들여다보면서. 개성에서 A는 인민군 정찰부대에 넘겨졌다. 연락부의 동무는, 다시 한번 주의사항을 강조한 다음에, 그의 북한 사람으로서의 이런 지런 신분증 모두를 거둬 가지고 돌아갔다.
그는 해가 질 때까지, 그 곳 정찰소대 본부의 한 방에서 잠자도록 명령받았다. 그는 달고 곤한 짐을 즐겼다. 꿈에 그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A에게 “아무 데나 있는 데 있지, 험한 길을 뭣하러 오느냐.”고 말하고 있었다. “어머니, 그렇잖아요. 가서 말씀드리지요.” A는 답답한 마음으로 그렇게만 말했다. 어머니는 모르실 테지…… 여기가 어떤 곳인가를…….
잠에서 깨어보니, 날은 이미 지물어있었다. 잠들기 천의 광명(光明)을 기억하고 있던 A의 망막에, 어슴푸레한 복도의 빛이 새어드는 방안의 어둠이, 틀림없는 불안을 주었다.
A는 식사를 마치고, 군관 1명, 전사 3명으로 짜여진 정찰반의 안내로 도하 지점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쌀쌀한 밤이었다.
두 시간만에 그들은 임진강에 닿았다. 정확히 말하면 임진강이 바로 지적인 지점이다. 임진강을 건넜다.
안내 군관은 A에게 마지막 지형 설명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A는, 그들이 사라진 다음에도, 한참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하늘이 개어있는 탓으로 별빛이 있었다. 그가 엎드린 곳에서 임진강이 보인다. 어둠에 익은 눈에는 그 강의 윤곽이 비교적 분명했으나, 어떤 순간에는 어둠 속에 파묻혀, 그지 한결같은 시커먼 공간이 있을 뿐이었다. 아무려나 이제 A가 갈 곳은 그쪽이 아니었다. 이제 그가 할 일은 빨리 잡히는 일이었다. 그는 가슴이 죄어들 듯 무서웠다. 어느 쪽으로 어떻게 갈 것인가. 산에서 그대로 밤을 밝힌 다음 새벽에 내려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지금 움직여서 시내로 내려갈 것인가를 그는 망설였다.
같은 시간에, 같은 어둠의 공간 속에, 또 다른 사람들이 숨어있었다.
“형님.”
“쉬이. 소리가 커.”
“공치는 것 아니우?”
“시끄럽대두. ”
그런 다음에는 다시 침묵. 어둠.
A는 조금씩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천천히 움직여서, 조금이라도 남쪽에 가까이 가기로 하자. 그는, 이왕이면 경찰을 택하기로 했다. 전방지대의 병사들에게 잡힌다는 생각이 불안했다.
이럴 때, 강사 동무의 끈질긴 학습이, 은연중 A의 마음에 영향을 준 것인지도 모른다. 간첩은 잡히면 즉결처분이오 알겠소? A는 그것이 거짓말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그의 머리에는 살기등등한 병사들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경찰이다. 좀더 뒤로 내려가서 경찰에게 붙잡히자.
어둠 속에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형님 이거 으실으실하구만.”
“돈벌이가 그리 쉬운 줄 알안?”
물론 귓속말로 숨죽인 속삭임이다.
“길목은 틀림 없갔디오?”
“잠자코 있으라우.”
어둠. 기다림.
A는, 굼벵이처럼 기어서, 능선을 하나 넘었다. 잠간 쉬면서 귀를 기울인다. 고요함. 어둠. 콧구멍을 벌름거린다. 마늘풀 냄새. 그리고, 아니 그뿐이었다. 그밖에 그의 콧구멍으로 들어간 것은 밤. 희미한 별빛이 스민 밤뿐이다. 그렇다. 밤이다
“형님…….”
“쉬이, 왔다!”
“!”
“!”
A는 잠간 하늘을 쳐다보았다. 반쯤 구름이 덮인 사이로 듬성듬성한 별빛. A는 온 정신을 두눈에 모으면서 앞을 살핀다. 조금씩 나간다.
그때였다.
그는 눈앞에 번쩍하논 빛을 보았다.
어둠.
침묵.
아니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말없이 사람들은 움직이고 있다. 움직임은 임진강 가에까지 왔다.
덤벙.
검은 덩어리가 강 속으로 던져진다.
그들은 다시 강에서 멀어져간다.
그들은 능선을 넘는다. 세 사람이다.
“형님.”
“…….”
“처음이 돼서 그런지 이상하우다.”
“닥쳐. 돈 벌고 대한민국 애국자야.”
“…….”
애국자들은 말없이 밤 속으로 걸어갔다.
“…….”
얼마나 지났을까.
검은 덩어리가 임진강 한복판으로 흘러간다. 그것은 A였다. 그는 이미 사람은 아니었다. 즉 주검이었다. 얼굴을 물 속에 묻고 그는 흘러간다.
A의 치명상은 뒤통수의 으깨어진 자리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 으깨어진 상처가 흐물흐물 움직이더니, 그 속에서 손이 하나 쓱 나온다. 이어서 팔뚝. 다음에 머리. 가슴. 이윽고 한 사람이 그 속에서 빠져나왔다. 시체는 이 돌연한 짐 때문에 기우뚱했다. 시체 속에서 빠져나온 인물은, 조심스럽게, 시체 등에 무릅을 세운 자세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것은 A의 넋이었다.
넋은 상한 데 없이 말짱했다. 그는 손을 뻗쳐, 시체의 뒤통수를 만져보았다. 손끝에 끈적거리는 닿음새에, 넋은, 몸을 부륵 떨고 얼른 손을 떼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그는, 도무지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만이었다. A는 자기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물론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자기 몸이니깐, 그곳에 하나의 상(像)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불쌍한 A. 그는 중얼거렸다. 더욱 애처로운 것은, 시체는 옷이 벗겨져있는 일이었다. 차디찬 물 속에저 시체는 벌써 얼음장이었다.
원 이럴 수가 있담. A는 어처구니 없어서 중얼거렸다. 자수. 새로운 삶. 어머니니에게 맹세한 효도. 다 틀려버린 일이었다.
A는 자기의 시체를 내려다보면서 그 흉한 모습이 점점 미워졌다. 그리고 노여움이 차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이제야, 그 시체가 얼마나 못났는가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멍청하니 학교를 다니다가, 길거리에서 붙잡혀 의용군이 되고, 하필 간첩으로 월남하다가 이 꼴. 그 마디의 어느 하나에도 그의 뜻이 들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내가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그 두 가지 생각이 A에게 노여움과 슬픔을 한꺼번에 가져다주었다.
그는, 세차게 흐느껴 울면서, 자기의 주검을 타고 밤의 임진강을 흘러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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