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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권 몰락과 함께 혼동의 시대를 겪었던 사람들, 그들에게 90년대는 사상과 이론에 있어 긴 암흑기가 아니었을까. 자본이 승리했다는 믿기도 어렵고 인정하기도 어려운 현실과 부딪혀야 했다. 사람들은 산개했다. 약속할 수 없는 미래, 무언가 새로 준비하고 만들어서 다시 만나자고 했고, 그리고 치열했던 계급투쟁의 현장에는 노랫말처럼 깃발만 나부꼈다.
이론과 실천, 실천과 이론의 간극을 메꾸기 위한 많은 노력이 이루어졌다. 선각자들은 새로운 유령을 찾아 타국으로 나섰다. 누구는 독일로, 누구는 이탈리아로, 누구는 다시 러시아로, 누구는 프랑스로, 누구는 멕시코로... 어느 시점이던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독일로 간 사람은 사민주의를, 이탈리아로 간 사람은 그람시와 톨리아티를, 러시아로 간 사람은 빼레스트로이카를, 프랑스로 간 사람은 들뢰즈를, 멕시코로 간 사람은 사파티스타를 이야기하더라는 거다. 한국 계급투쟁의 현실을 해석하면서도 제각기 마음속에 품은 타국의 경험을 강조했다. 타국의 '정치세례'를 체험하면서 개선장군처럼 등장한 사람도 있었고, 다시 돌아오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이진경은 단연 돋보이는 이름이었다. 그는 80년대 좌익혁명이론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그랬던 이진경도 90년대 혼란을 피해갈 수는 없었으리라. 어느 시점에선가 그는 프랑스를 품었던 듯 하다. 그는 프랑스를 향했고, 프랑스에 머물렀으며, 프랑스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 수유+너머의 고병권 님 |
나는 이진경을 세 번 만났다. '사사방'(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에서, '맑스주의와 근대성'에서, 그리고 2004년 '서프라이즈'의 인터뷰에서. 사사방은 얼추 대여섯 번 정도, 맑스주의 근대성은 일독을, 서프라이즈 인터뷰는 읽다 말았다. 인터뷰에서 국가보안법과 관련한 코멘트를 보며 가슴 먹먹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인터뷰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김규항 님의 지적에 공감했던 바다. 그 시점에서 이진경을 잊으려 했던 듯 하다.
그러던 중 이진경, 고병권 두 연구자가 지난 4월 말 '한미FTA를 둘러싼 정세에 관하여'라는 문건을 내놓았는데, 뜻밖이었다. 반갑고 유쾌한 글이었다. 부안, 새만금에서 평택으로, 서울로 대장정을 구상한다는 소식도 들렸다. '현실'에 대한 정세글과 실천 기획을 한꺼번에 내놓게 된 배경과 과정이 무척 궁금해졌다. '전망좋은담'에서 두 분 다 만나볼까 속으로만 헤아리다 고병권 님한테 시간을 내주십사 부탁드렸다.
어느 순간 불온하지 않더라
5월초, 수유+너머 사무실은 대장정 준비로 분주해 보였다. 고병권 님은 대장정 준비에 지역단체와도 접촉하고,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 집행단위 회의에도 결합하던 참이라며, 바쁜 근황을 전해왔다.
"대장정 한다고 지역 단체에 숙식 문제 같은 걸 문의하니까 공문 보내라 해서 난감하더군요. 뭔 절차를 거친다는 게 우리와 잘 안 맞더라고요. 한미FTA 범국본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더군요. 국민보고서 만든다고 워크샵을 하는데 써오기로 한 분들이 아무도 준비를 안 해 오고 우리만 메모를 해갔더라고요. 빨리 나와야 6월초일 텐데... 청와대에서 공무원 계통으로 지시하면 뭐라도 바로바로 나오잖아요. 우리는 그런 면에서 발빠른 편이죠. 2-3일이면 모여서 바로 대응하거든요. 우리끼리는 이번에는 청와대와 수유와의 싸움이다 뭐 그런 이야기도 했지요."
모처럼 발을 들여놓는 지라 '무브먼트스탠다드'와 문화적으로 격이 많이 안 맞나 보다. 수유+너머는 총회나 대의제도 자체가 없다고 한다. 뭔가를 다수결로 결정한 적도 없다고 한다.
"필요하다고 느끼면 느끼는 사람들이 일을 결정하고, 집행을 하기 전에 시간을 주고 개입하면 가는 거고 아니면 말고... 다수결로 결정할 문제는 아닌 거죠."
'수유+너머'는 국문학자 고미숙 씨의 1인 연구실 '수유연구실'과 사회학자 이진경 씨의 '연구공간 너머'가 결합하며 시작되었다. 두 모임이 하나의 이름으로 합친 게 2000년, 단순한 연구공동체를 넘어선 생활공동체를 표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수유+너머 홈페이지 |
"자기 지식 생산과 유통에는 관심이 없고 말로만 노동자계급 떠드는 걸 보면 안쓰러워요. 여기서는 50명이 밥을 같이 먹어요. 50인분 밥 해보면 알아요. 민중적 교육이 무엇인지 여기서 생활해보면 영감이 떠오르지요. 그런데 우리의 연구는 너무 안전하다는 반성이 있었어요. 수유 연구가 별로 불온성을 유발하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이죠. 좋지 않은 겁니다. 94년 말부터 서울사회과학연구소에서 '맑스주의와 근대성' 세미나를 하는데 이진경 선생님이 데카르트부터 현대 맑스주의 근대성의 한계를 살피면서, 맑스주의를 근대성에서 찾겠다, 맑스주의 전환하겠다 라는 생각이 있었고요, 실제 기대도 많았어요. 어떤 사람은 불길하게 느끼기도 했지요."
8-90년대 초반에 이루어진 근대성 연구는 총체적이어서, 데카르트와 칸트, 서양과 동양의 근대성 구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근대성과 시민성 구분도 명확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근대성 연구가 흥미가 있었고 아마추어 연구는 작동을 했는데, 후에 프로의 연구는 작동하지 않더라고 덧붙였다. 연구의 질로만 보면 지금의 근대성 연구가 훨씬 높지만, 당시 허점투성이 연구가 사상으로서는 훨씬 강력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고병권 님은 지금 전문적인 근대성 연구는 아기자기한 재미는 있지만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다고 개탄한다. 말하자면 '아마추어의 불온한 사상과 프로의 안전한 사상'을 문제삼는 것이다.
"전자는 다소 부실하더라도 실제로 불온한 것이었죠. 이론이 전사회의 무기가 되는 것과 학자들의 소소한 일거리가 되는 것의 차이가 뭔지 아시죠. 후자는 무기로 쓰이지 않아요. 이론과 사상은 작동할 수 있는가가 관건인데 수유연구소의 연구가 과연 작동하는가를 거듭 돌아본 거죠. 불온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여기도 현장이라 생각했고... 어디서 하든 실천인가 아닌가의 문제이고, 곧 전사냐 아니냐를 묻는 것인데, 쓰는 말이 무기라면 전사가 아니겠어요. 작동하는 사상을 발굴해야 한다는 거죠."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 맞습니까
연구자들은 특히 지난 해 가을부터 이런 논의를 해왔다고 한다. 고병권 님은 작년 10월에 쓴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 맞습니까'라는 글을 내보여주었다. "한미FTA 싸움이 될 듯 하니 갑자기 머리띠 묶고 나온 것 아니냐는 세간의 의혹이 있는데 어떻게 보는지" 다소 냉소적인 질문이었는데 이야기를 들으며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에 곧 후회했다.
"온통 세계를 관찰하겠다는 사람들뿐입니다. 도무지 세계를 바꾸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죽음을 앞둔 늙은 부엉이가 아니고서야, 세상의 구경꾼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꿈을 꿀 수 있습니까. 신조차 시샘할만한 꿈, 그런 게 우리의 꿈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직하게 말해봅시다. 지금 우리는 자신의 글이 상대방을 바꿀 것이라고,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까. 정말로 동료에게 자신의 글을 읽으라고, 내 발표를 들으라고 말할 자신이 있습니까. 내가 글을 썼으니, 이 세상으로 하여금 그것을 받으라고 명령할 수 있겠습니까."(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 맞습니까)
작년 10월에 쓰여진 글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 맞습니까'는 '한미FTA를 둘러싼 정세에 관하여'라는 글이 아무런 배경 없이 발표된 게 아니라는 걸 입증한다. 물론 의문은 계속된다. 현실 계급투쟁에는 많은 이슈와 사안이 있는데 다른 걸 젖혀 두고 한미FTA에 맞춰 정세글을 발표하게 된 건 왜인지...
▲ 이진경, 고병권 님 둘의 이름으로 4월 말 발표한 글 '한미FTA를 둘러싼 정세에 관하여' |
"개인적으로는 장애인 이동권연대 투쟁에서 큰 영감을 받았어요. 이동권은 정보지식 접근권이기도 하지만 떠날 권리이기도 했지요. 그걸 소수자들이 잘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람들 규모는 작더라도, 보세요. 중중장애인은 반드시 둘 이상이 등장합니다. 한 인간이 개성을 드러낸다는 것이 이미 집합임을 보여줍니다. 활동보조인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꼬뮨주의를 이야기할 때 개인도 공동체라는 맥락에서 개인주의를 비판하는데 그들의 모습에서 활동 영감을 얻었지요. 고미숙 선생님은 새만금 문제를 보며 화가 났고, 일부 연구자 중에는 대추리에 관심이 있었고, 이진경 선생님은 생명과학 세미나에 집중하던 중이었는데, FTA가 모두에게 같은 문제로 다가오게 된 것이죠. 밥 먹다가 누군가 열 받아서 바로 결합하자 라고 말한 건데 그렇게 시작되었어요."
밥 먹다가, 열 받아서, 결합하자 해서 한미FTA 싸움에 나서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 즉흥적인 의기투합의 배경에 역시 장애인 이동권, 새만금, 대추리, 생명과학에 관심을 집중해온 연구자들의 고민이 깔려 있었다. 불온한 연구자들이 한미FTA를 놓고 동시에 필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한미FTA와 관련해서는 심광현 선생님과의 미팅도 있었고, 자연스레 분위기가 무르익었어요. 사람들이 이야기하다가 하자, 하자 하니까 분위기가 뜬 건데, 그래서 네이버에 에뿌키라 싸이트 만들고, 대장정 기획 내고, 범국본에 참여하고, 대추리도 가보고, 중중장애인과 이주노동자 싸움에도 결합하고..."
너른마당, 지식인, 소수자 되기
고병권 님은 고 김진균 선생님의 제자다. "김진균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한겨레에 기고한 글에서 '하지만 선생님과 함께 걷다보면 누구나 자기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직접 가르치시지 않아도 배울 수 있었고, 직접 가리키시지 않아도 그 방향을 알 수 있었다'고 썼다. 그동안 길을 잘 찾아 왔나. 지금도 잘 가고 있는가"
"언덕같은 분이셨다. 위대한 교사는 신도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짜라투스트라는 '내 월계관을 낚아채야 내 친구일수도 스승일 수도 있다'라고 했다. 살아온 모습에 동의가 있으면 열어주신 분이셨다. 범상치 않은 내 졸업논문(니체를 연구한 사회학 석박사 논문)을 놓고 다른 선생들한테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스승의 품을 느꼈다. 너른마당이라고 하셨는데 내가 여기서 자라도 되겠구나. 사람이 꼭 자신이 동의하는 것만 지지하는 게 아니구나... 거기가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다."
▲ 고 김진균 선생님 |
고병권 님은 수유+너머가 학교보다 공부하기 좋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행정 일도 해야 하고, 강의하고, 프로젝트도 해야 하는데 그러면서 언제 공부할 수 있겠냐는 거다. 수유+너머에서는 책을 읽어내는 방법이 달라진다고 한다. 누구와 어떤 삶을 어떻게 꾸리느냐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른바 신체성에 대한 문제제기다.
"여기 있으면 책을 읽어내는 방법이 달라져요. FTA 대응 실천하면서 딴 데서는 소진된다고 하는데 여기는 오히려 충전되고 있어요. 에뿌키라에 글을 써 보라 했는데, 대추리 논 입장에서 쓰고, 장애인의 시각으로 쓰고, 사회과학적 글, 문학적 글을 다양하게 써내요. 걷고 사유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지고 웃음 떠날 날이 없어요. FTA 대응 준비하면서 운동가요 불러보는 기회가 있었는데 세대별로 아는 노래가 다 틀리더라고요. 밤새도록 노래부르고 떠들기도 했지요. FTA 싸움 하면서 연구실이 폭발할 지도 모르겠군요"
"올초 '한겨레' 선진대안포럼이 마련한 신년특집 대토론회 2부 '진보 지식사회에 대한 성찰과 대안'에서 돋보이는 발언이 있었다. 진보적 지식사회가 '현장에서 분리돼 있다'는 것을 가장 큰 문제로 짚었다. '지금 지식인은 대학으로 편입돼 기능적 지식인이 됐다. 지식인들은 자기 삶으로부터도 분리돼 있다. 다른 대상에 대해선 말을 많이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발언하지 않는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고병권 님 자신도 연구자이자 지식인이라 하겠는데..."
"좋은 삶을 살아야 좋은 공부를 할 수 있다고 봐요. 운동도 그런 것 같아요. 자기 삶이 담기지 않으면 운동을 할 수 없는 거죠. 자기 신체성을 갖지 않으면서 진정성을 이야기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요. 수유+너머 연구실은 든든한 기반을 구축해왔어요. 왜 우리가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느냐 하면 우리가 기반한 삶의 형태가 그렇기 때문이죠. 회의 쉽게 하고, 빨리 움직이고. 그래서 대장정도 쉽게 꾸린 것이고... 한 사람의 말이 다른 사람의 가슴에 빠르게 전달되는 건 코뮨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싸우며 살고 있다는 거죠. 물론 풍찬노숙 운동 하시는 분들 폄훼할 이유는 조금도 없어요. 우리 자신도 자기 삶을 그렇게 꾸려왔다는 맥락을 말하는 겁니다."
자신감인가? 수유+너머의 연구자들 자랑을 많이 한다. 어느만큼 자기 '신체성'을 갖고 있는지 헤아리기 어렵다. 풍찬노숙 운동하는 사람들한테 익숙한 나로서는 이들 연구자들과 실천 현장에서 동고동락해본 경험이 없다시피 해서다. 여전히 의심과 경계심을 풀기 어렵다. 연구자, 지식인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봤다. 고병권 님은 지난 4월 발표한 '우리사회의 지식인'이란 글에서 오늘 우리 사회 지식인이 서 있는 좌표를 짚고, 지식인과 현장의 관계에 대해 날카로운 메시지를 던졌다.
고병권 님은 한겨레 선진사회포럼에서 만난 지식인들의 위치(position)와 시선(perspective)에 경종을 울리는데, 두 가지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도래할 대중'의 '부재', '현재' 대중의 '이해'에 대한 적응의 문제, 추수주의와 함께 계몽주의의 문제를. 또 하나는 현재의 집권세력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 진보세력은 자신들이 집권하고 있는 줄 안다. 따라서 어떻게 사회적 문제를 제기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까에 고민이 가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코포라티즘으로의 귀결.
"나는 내가 느낀 지식인의 문제를 '현장의 상실이라고 즉석 명명했다. (1)하나는 운동 현장의 상실이다.... (2)현장 상실의 두 번째 측면, 자기 삶의 현장을 상실한 것. 지식은들은 자기 자신이 어떻게 먹고사는지에 대한 대자적 의식은커녕 즉자적 의식도 없다..."(우리 사회의 지식인)
고병권 님은 테크노크라시의 출현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상당히 긴장하는 표정을 지었다. 고급 기술 지식으로 무장하고, 창의적이고 의욕적이며 자가발전하는 기계. 이 테크노크라트는 전문기술지식을 독점하고, 시기의 긴급성과 비밀주의 등을 통해 상황에 대한 지배력을 극대화하는데, 최근 한미FTA가 극심한 예라고 지적한다. 기술적 유용성이 증대할수록 이들 테크노크라트의 지배력이 커지는데, 구체적 정책화 능력이 없으면 침묵하게 하는 풍토에 실증적 수치를 중시, 구체적인 정책을 못 만들면 지식인 취급도 받지 못한다고 짚는다. '유기적 지식인'은 설 자리를 잃게 되고 그럴수록 테크노크라트의 지배력은 노조와 시민단체까지 확대된다는 이야기다. 고병권 님은 '우리 사회의 지식인'을 호명하며, "첫째는 지식인을 너무 존경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는 것, 둘째는 지식인은 대중보다 더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 '한미FTA반대! 새만금에 생명을, 대추리에 평화를 위한 대장정' |
"소수자 되기라고 보고 있다. 우리가 소수자가 되겠다는 거다. 연구소를 떠나면서 우리를 새롭게 구성해내는 것이다. 이주노동자, 새만금 투쟁들이 우리 연구소로 들어오면서 연구소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더 근본은 우리가 바뀌는 것이다. 우리가 소수자가 되는 것이다. 대중에 결합해서 말하는 사람이 지식인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지식인 스스로 대중일 때... 그런 의미에서... 이게(대장정이) 끝나면 어떻게 되어 있을까..."
"테크노크라시, 지배시스템, 이념적 선택 주시해야죠"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한미FTA를 둘러싼 정세에 관하여'라는 글에서도 개괄하고 있긴 한데, 한미FTA 사안을 계급투쟁의 맥락에서 어떻게 보나
"정세분석이라고 되어 있지만 정세에 대한 개입입니다. 분석적으로 정치한가 보다 빨리 개입할 필요가 있다 싶었고, 테크노크라시도 그렇고 NL(자주파)도 그렇고 우리가 어서 개입해야 한다고 판단했죠. 한민족경제공동체 주장하는 사람들, FTA 이야기했더니 단서 달고 지지한다고 합디다. 한미FTA 논의가 진행될수록 영향력이 커질 거고 심각한 문제가 될 겁니다."
고병권 님은 정세 개입의 필요성을 우려스러운 FTA 주창자들에 대한 경계에서 먼저 찾았다. 최근 발표한 이일영 교수와 서동만 교수의 견해를 직설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이일영 교수가 발표한 글 보세요. 목숨걸고 반대하지 않습니다. FTA 저지 흐름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어요. 남북 문제 관련 한미FTA가 긴장 완화와 민중적 교역 가능성도 있겠지요. 개성공단 생산물품을 메이딘코리아로 가고, 전략물자수출입 열어준다면 사실상 자주파 일부 그룹의 주장은 모순이 아니라 충족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자본으로서는 북의 고급노동력을 갖는다는 게 나쁜 선택이 아닌 데다 그 조건이 풀릴 경우 통일비용 감소 뿐 아니라 서동만 교수의 지적처럼 '군축으로 양극화 해소' 같은 논리도 성립할 수 있는 건데 참으로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아닐 수 없어요. 현실론이 이미 시작된 거죠. 이걸 사전에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거고 그래서 급하게 그 글을 내놓은 거지요."
느낌이 좋은 모두 브리핑이다. 이일영 교수는 5월 2일 창비주간논평 '한미FTA, 노무현정부의 자살인가'에서 나쁜FTA를 문제삼는다. "이미 시작된 일이니 우리에게 유리하게 협상조건을 만들어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쁜 FTA'는 국민들에게 심각한 고통을 안겨줄 것이므로, 그대로 방관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서동만 교수는 계간 '창작과비평' 봄호 특집글 등에서 "(복지예산과 안보예산이) 서로 경합관계에 있다는 근시안적 발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대북화해협력 비용이 국내 복지예산 증대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는 동시에 북조선의 투자처를 확보하는 것이 남한 과잉자본에게 하나의 출구가 될 수 있다"고 주장, 남북화해협력이 자본 주도의 성장동력 문제와 노동이 겪는 양극화 문제에 대해 동시에 해답을 줄 수 있다는 입장이다. 고병권 님은 불쾌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가 이진경 고병권 님의 정세 글에 슬쩍 딴지를 걸어보았다. "한때 한국 정부에서도 관심을 보였던 동북아 경제권의 가능성을, 혹은 아세안을 포함한 새로운 지역 경제권의 가능성을 그저 공허하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게 아닐까?" 등의 대목이 있는데, 노무현 정부가 집권이래 아세안+3 차원에서 동북아 평화론, 내지는 평화번영정책을 펼쳐왔다고 볼 수 있는데, 큰 틀에서 이를 승인한다는 것인지...
"아세안+3는 아세안의 값싼 노동력과 한국의 자본 기술력으로 아메리카 시장에 대응하자는 의미가 있었지요. 미국이 제국인가 황혼인가 이야기도 있지만 그렇다고 중국이 미국을 대체하리라 보지는 않아요. 중국에서 역시 자본주의 모순이 폭발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지요. 중국 내부에 농업 문제와 도농 격차가 커졌고, 당과 인민은 괴리되고 있는데, 중국 내부가 폭발하면 미국이 개입할 것이고 따라서 중국 주변의 군사적 대응이 따라갈 테죠. 그러니까 아세안+3를 이야기할 때 자본의 블록화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걸 짚은 겁니다. 아세안+3를 지지한다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읽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짚고 간 거죠."
고병권 님은 "한미FTA가 성공하는 게 더 걱정"이라고 했다. 또 한미FTA에 대해 "이는 일단 세계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저물기 시작하는 제국의 경제에 편승하기 위해 ‘막차를 타는 것’이다. 한쪽 끝이 이미 침몰하기 시작한 항공모함에 거대한 승선료를 내고 올라타는 것이다"라고 빗대 말했다. 통계 수치로만 보면 몰락해도 벌써 몰락했어야 하는 게 맞다. 제국주의의 위세가 드세보이기는 하지만...
"중국 일본 한국이 달러가치를 떠받쳐주고 있잖아요. 한국은행은 이미 환율 방어하는데 4조 원의 적자를 냈죠. 한국은 이미 달러 방어에 많은 비용을 지출했고, 중국은 미국 채권을 많이 쥐고 있기 때문에 지렛대를 쥐고 있는 거죠. FTA가 가면 더 많이 떠받치는 효과가 나겠죠. 민중적으로 보면 재앙이에요. 미국의 양극화가 얼마나 심각한데..."
정세 이야기는 곧 한미FTA가 '이념적 선택'이라는 진단으로 이어진다. 이 대목은 이진경, 고병권 님이 쓴 정세글의 백미이기도 하다. 고병권 님은 "한미FTA는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차라리 '이념적 선택'으로 보인다. 아메리카니즘이라는 이념. 사실 FTA란 바로 교역조건을 통해 관철시키고자 하는 집단적 이익의 집합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적 이익에 의해 한미FTA가 방해받아선 안 된다'는 노무현의 태도는 그것이 이익 극대화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이익을 떠난(떠났다고 생각하는) 이념적 선택임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단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라고 썼다.
역시 앞에서 지적한 기술관료의 위력 언급과 연결되는 대목이다. 아메리카니즘과 테크노크라시를 언급한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일견 한미FTA 싸움에 있어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를 강하게 암시하는 대목이다. 다만 '이념적 선택'으로 강조되는 것에 약간의 본능적인 기우가 생겨 한미FTA가 '위기의 자본'이 선택한 전략적 측면이 크다는 점을 환기해보았다.
"한미FTA을 자본운동의 맥락에서 우선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한미FTA는 자본의 과잉생산, 과잉축적에 따른 내수 위축과 만성 불황에 시달려온 초국적자본이 자기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취한 전략적 선택의 맥락이 분명히 있다. 노무현 정부는 그 후과로서 양극화문제에 시달려왔고, 따라서 자본 요구에 기반한 정치적 선택으로서 한미FTA 추진에 올인을 선언한 것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이념적 선택'의 측면을 짚는다 하더라도 '전략적 선택'을 배경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전제하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고병권 님은 가볍게 받아쳤다.
"우리가 분석할 때 총자본의 이해를 보는 것은 당연히 고려되어야죠. 그런데 자본분파의 이해가 복잡하다는 점도 동시에 봐야 합니다. 정세 분석에서 유사한 패턴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긴장이 떨어져요. 자본의 이윤율경향 저하의 문제가 있지만 이걸 일반론으로 보면 곤란한 문제가 있죠. 가령 386이 실력은 없고 이념만 있다고 하는데, 농업기반공사 테크노크라트 몰아부치는 거 보세요. 부안 때 반핵 반대에 몰리다 경주 군산에 경쟁 붙여서 최고의 수행성 효율성 내놓잖아요. 어떤 때는 애국적이기기 까지 하죠. 의회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 지 드러나잖아요. 몸바쳐 일하는 관료들한테 지식 차원에서도 못따라 가요."
토론이 좀 필요한 대목인데 호흡이 빨라졌다. 테크노크라트 이야기로, 의회주의 이야기로 진도가 나가버렸다. 의회주의, 의회민주주의 비판도 칼라가 다르다.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이 있어요. 법안을 누가 만드는 지 보세요. 테크노크라트가 만들어요. 아무도 제어 못하잖아요. 의회는 들러리 서고 있는 거죠. 최장집 교수도 그러는데 통제가 안 된다는 거예요. 지배거버넌스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 보세요. 양극화 관련해서 의회에 맡겨놔봤자 당리당략 때문에 안 되는 거 뻔히 보이니까 (저출산 고령화대책)국민연석회의 만들잖아요. 정부가 노동단체 시민단체 끌어들여 국민연석회의 만들어서 거기서 통과시키자는 것인데, 노조도 시민단체도 참가한단 말이죠. 지배에 대한 저항의 재구성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예요. 민주화운동 세력이 바뀌면서 변화하자는 게 아니라 지금 진보가 누구인지를 다시, 또 항상 되물어야 합니다. 테크노크라시 문제를 확인하고 지배시스템을 이해하자는 건데, 그런 점에서 이념적 선택을 주시해야죠"
불온성 - 대장정 - 신체성
▲ 5월 22일 영등포역 앞, 서울 대장정을 시작하며 |
고병권 님은 연구자들과 함께 5월 9일부터 부안과 새만금에서부터 한미FTA 저지 대장정에 나섰다. 기획으로만 보면 범국본이나 부문분야별 공대위의 흐름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보인다. 범국본과 평택범대위의 투쟁 일정을 중심에 놓고 보면 분명 따로 노는 모양새다.
"범국본 홈페이지 보세요. 죽어있잖아요. 너무 개인적인 대응을 하는 것 같아요. 에뿌키라 페이지에서는 대여섯 명이 같이 글을 써요. 혼자 할 수 없잖아요. 토론하고 올리고 추천하면 다 보거든요. 좀 조직적으로 할 필요가 있지 않겠어요. 민주노총도 그래요. 메이데이 전에 오도엽 참세상 기자가 쓴 '기자의눈'에서 비정규법안 한나라당이 막아주고 있다는 글을 재미있게 봤는데, 민주노총 위원장 등이 열심히 헌신적으로 하는데 왜 밑에서 안 움직일까요."
고병권 님이 쥐고 있는 키워드는 뜻밖에 소수자였다. 고병권 님은 거대담론, 그리고 거대담론에 익숙한 무브먼트스탠다드와는 결이 다른 인식 매뉴얼을 갖고 있었다.
"청년이 장년을, 노사정이 비정규법안을,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남성이 여성을,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대의하는 거는 곤란해요. 다수자는 소수자의 척도가 있는 것이죠. 쪽수로서의 소수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비정규직은 쪽수는 많지만 소수자거든요. 지금 살펴보면 대의할 수 없는 것이 대의를 하고 있잖아요."
"이제 만물이 소수자입니다. 물과 흙바람이 소수자이고 뻘의 조개와 들판의 곡식이 소수자이며 농민과 노동자 청년 여성 장애인 학생 예술인이 소수자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소수자입니다."
이번 대장정을 앞두고 고병권 님이 직접 지은 문구다. 한미FTA 저지와 함께 우리 사회 소수자의 실천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소수자란 어떤 의미를 갖는 주체인가. 우리 사회 문제, 그러니까 계급투쟁의 문제, 사회문화적인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
"소수자의 이익은 다 다르겠죠. 이주노동자 다르고, 비정규직 노동자 다르고... 한편에서는 통하는 게 있을 텐데요, 전북 갯벌 생명 버리면서 농민 희생시키고, 기업하기 좋으려면 고용유연화 해야하는데 비정규직 노동자 배제하고, 노동력 필요하니 이주노동자 갔다 쓰지만 정치적 시민권은 주지 않고... 그러고 나면 남는 국민은 누구겠어요. 국익이란 걸 받는 사람은 누구냔 말이죠. 자본주의 변동 속에서 대부분이 마이너리티로 밀려나요. 대장정은 이들과 공통분모로 작용하고 이 모든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겁니다."
다수가 소수자이고, 스스로 소수자이며, 소수자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세글이 던진 실천적 메시지도 이것이었다.
"더욱이 투쟁 주체로서 민족을 호명하는 것은, ‘도래할 FTA의 재앙’을 ‘이미’ 체험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들의 문제를 은폐하는 효과를 낼 것이다.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온 것처럼 보이는 FTA는, 경제학적 총량지표와 경제적 이득의 계산, 그리고 시장과 경쟁력,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장애인들, 이주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여성들, 청년들, 그리고 갯벌에 사는 생명체 모두에게 이미 오래 전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그들에 대한 착취를 조장하거나 방조했음을 깨달아야 한다. 한미FTA는 그 재앙의 규모와 강도를 더할 수 없는 최대치로 증폭시킴으로써 남 얘기로 쉽게 치부하던 문제가 결코 남 얘기가 아님을 알려주는 전령인 셈이다. 따라서 FTA에 대한 투쟁은 민족이 아니라 이 모든 소수자들로부터, 이 모든 민중들, 이 모든 대중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 고병권 님의 소수자 되기, '신체성' 획득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 유영주 |
아울러 고병권 님은 오늘날 지식인이 체득해야 할 가장 중차대한 덕목으로 신체성을 지목했다. 불온성의 화두를 대장정을 경과하면서 신체성으로 전환하겠다는 뚜렷한 의지를 피력했다. 그는 대장정 이후의 삶과 사유 과정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유감이지만 나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고 있다. 불온성에 호감을, 대장정에 경의를 가졌지만, 그리고 신체성에 호기심이 작동했지만 이 모든 걸 통채 덥석 안을만큼 익숙하지 않은 탓이다. 긴 시간을 이야기 나누고도 풍천노숙의 현장과 엇박자가 나지 않는 '신체성'을 기대해보는 건 나의 똥고집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장정을 통해서 신체성을 강조하고 싶어요. 민중에게 들어간다는 게 아니라, 지식인이 남의 신체는 이야기하지만 자기 신체는 이야기하지는 않는단 말이죠. 모든 관념은 자기 신체에 대한 관념인데 우리 사회 지식인은 다른 사람의 신체를 이야기하지 않아요. 또 하나는 대중적 신체성, 나의 신체와 연결되어 있는 신체성, 운동 속에서 신체성을 획득하는 겁니다. 대장정을 앞두고 불온성이 화두였다면 대장정을 경과하면서는 신체성 이야기를 화두로 삼아볼까 싶습니다. FTA 싸움 짧게 안 끝날 겁니다. 대장정 끝나면 또 사유 과정을 거칠 텐데, 6월 내려가면 7월에 또 끌어올리는 게 만만치 않을 거고요, 변화 속에서 또 다른 글을 쓰고 또 제안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