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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西山.진덕수) 선생의 《심경(心經)》은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이 나온 이래로 심법(心法)을 논한 격언(格言)을 차례로 모아서 편집한 책인데, 간단하면서도 절실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글이 많아서 항상 외우기가 어려운 점을 염려해 왔다. 그래서 지금 다시 그중에서도 특히 절실한 것으로 경문(經文)에서 각각 1장(章)과 후현(後賢)의 말씀들을 뽑아서 모두 12장으로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9개의 장은 《심경》에서 모은 것이고 3개의 장은 내가 새로 뽑은 것이다. 이는 배우는 면에 있어서는 박학(博學)이 중요하지만 지키는 면에 있어서는 요약(要約)이 중요하니, 이를 더욱 요약해서 항상 간직하며 지키기 쉽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에 대한 해설이 《심경》에 들어 있지만 여기에서는 나의 의견만 기록하였다. 다만 《시경》과 《예기(禮記)》의 조목은 내가 새로 뽑은 것이기 때문에 그 본주(本註)를 수록하였다. 이 역시 간단히 요약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아, 이것은 정밀한 것 중에서도 정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이다. 오직 참된 마음으로 정성껏 간직하면서 지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만력(萬曆) 무오년(1618) 납월(臘月) 입춘에 쓰다.
목록: 인심도심장(人心道心章)/옹옹재궁장(雝雝在宮章)/불원복장(不遠復章)/사물장(四勿章)/성의장(誠意章)/《중용(中庸)》의 수장(首章)/무불경장(毋不敬章)/우산지목장(牛山之木章)/《통서(通書)》의 성가학장(聖可學章)/사잠(四箴) /경재잠(敬齋箴)/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 인심도심장(人心道心章)
순(舜) 임금이 말하기를,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희미하다. 따라서 두 마음 사이를 잘 살펴 차질없이 구분해서 인심의 요소가 뒤섞이는 일이 없이 도심으로 순일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진실로 의리의 중도에 맞게 행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帝曰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라고 하지만 이 마음은 허령(虛靈)한 사람의 지각(知覺)에서 동일하게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되어 나올 때에 공(公)과 사(邪)의 구분이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의 종류가 두 개가 되는 것이다. 인(人)은 사람의 몸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니, 이것은 사(私)에 속한다. 이목구비(耳目口鼻) 및 사지(四肢)의 욕구와 자기 한 몸을 위한 모든 염려(念慮)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도(道)는 의리(義理)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니, 이것은 공(公)에 속한다. 사단(四端)의 정(情)과 의리를 위한 모든 염려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위(危)라는 것은 얻을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잃을 가능성이 큰 것을 말한다. 가령 혼란이 극심한 나라를 위방(危邦)이라고 하니, 이것은 보존될 수도 있고 멸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멸망할 가능성이 큰 것을 말하고, 증세가 위독한 질병을 위증(危證)이라고 하니, 이것은 생존할 수도 있고 사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사망할 가능성이 큰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인심(人心)을 위(危)라고 표현한 것은 선하게 될 수도 있고 악하게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악하게 되기가 쉬운 것을 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인심이 발동할 때에 그 궤도(軌道)를 따라서 멈춰야 할 곳에 멈추면 이것도 선하게 되는 것이지만, 외물(外物)에 따라서 휩쓸리다 보면 사악(邪惡)하고 편벽(偏僻)된 곳으로 쉽게 빠져 들기 때문에 위태롭다고 말한 것이다. 반면에 도심(道心)은 선한 요소만 있고 악한 요소는 없다. 그래서 안정되어 위태롭게 되지 않는 것이다.
인심은 형기(形氣)의 사(私)에 집착한다. 그래서 그 정(情)의 농도가 짙다. 도심은 의리(義理)의 공(公)에 순일하다. 그래서 그 정의 농도가 옅다. 농도가 짙으면 분명하게 밖으로 드러나고, 농도가 옅으면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분명하게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제어하기가 어렵고,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잃어버리기가 쉽다. 대저 위(危)에 상대되는 용어는 안(安)이다. 따라서 인심을 위(危)하다고 말했으면 도심은 안(安)하다고 말했어야 할 텐데, 인심이 위태롭다고만 말했으니, 이것은 인심이 사악하고 편벽된 곳으로 빠져 드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미(微)에 상대되는 용어는 저(著)이다. 따라서 도심을 미(微)하다고 말했으면 인심은 저(著)하다고 말했어야 할 텐데, 도심이 희미하다고만 말했으니, 이것은 도심을 잃어버리게 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이는 대체로 각기 경계해야 할 곳을 감안해서 말한 것이라고 하겠다.
정(精)은 두 마음 사이를 잘 살펴서 차질없이 구분하는 것을 말한다. 일(一)은 바른 도심으로 순일하게 해서 인심의 요소가 뒤섞이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대개 희미한 도심에 대해서는 극력 간직하고 지켜서 혹시 잃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하고, 위태로운 인심에 대해서는 반드시 재제(裁制)를 가하여 사악하고 편벽된 지경으로 빠져 들지 않게 하면서 한결같이 그 궤도를 따르게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도심이 항상 주인이 된 가운데 인심 역시 도심의 명령을 듣게 될 것이다. 인심이 도심의 명령을 듣게 되면, 이것은 바로 인심 역시 도심이 되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우리의 마음이 도심으로 순일해져서 인심의 요소가 뒤섞이지 않게 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도심으로 일단 순일해져서 인심의 요소가 뒤섞이지 않게 되면, 동정(動靜)과 언행(言行) 모두가 의리의 중도에 맞게 될 것이다. 대개 이 두 가지의 마음은 사람마다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다만 정일(精一)의 공부를 할 경우에는 위태로운 것이 편안해지고 희미한 것이 분명해져서 성인도 되고 현인도 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위태로운 것이 더욱 위태로워지고 희미한 것이 더욱 희미해져서 금수(禽獸)의 지경에 빠져 드는 것도 어렵지 않게 될 것이다.
무릇 천하에서 고금을 막론하고 선인이 되고 악인이 되는 것은 모두 여기에서 결판이 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에 실려 있는 상고(上古) 시대의 대성(大聖) 중에서 요(堯)와 순(舜)과 우(禹)가 으뜸으로 꼽히고, 경전에 실려 있는 성인의 위대한 덕으로 말하더라도 요와 순과 우를 능가할 수가 없지만, 그들이 서로 전해 주고 전해 받을 즈음에는 바로 이 말을 가지고서 심법(心法)을 전하는 요체(要體)로 삼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또 성현들이 수많은 세대를 거쳐서 이 세상에 나왔지만 그들이 심법을 논한 말들을 보면, 비록 수많은 말들을 쏟아 내었다 하더라도 그 의의(意義)의 귀결점을 추구해 보면 모두 이 16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으니, 이 16자의 말씀이야말로 만세토록 심학(心學)의 연원(淵源)이 된다고 할 것이요, 만세토록 희성현(希聖賢.이는 士希賢 賢希聖 聖希天에서 나온 말이다)하는 이들의 대법(大法)이 된다고 할 것이다.
인심과 도심은 바로 공(公)과 사(私) 그리고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에 따른 명목(名目)이라 할 것이요, 유미(惟微)와 유위(惟危)는 두 가지 마음의 정상(情狀)이 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요, 정(精)과 일(一)은 위태로운 것을 편안하게 하고 희미한 것을 분명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할 것이요, 집중(執中)은 바로 정일(精一)의 표적(標的)이 된다고 할 것이다. 대저 16자의 글자 속에 명목과 정상과 방법과 표적이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이 말이 상고 시대의 으뜸인 대성(大聖)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이 세상에 출현해서, 만세토록 심학의 연원이 되고 희성현하는 이들의 대법이 되었으니, 아, 지극하다고 하겠다.
● 옹옹재궁장(雝雝在宮章)
《시경》에 이르기를, “궁중(宮中)에 계실 때에는 온화하였고, 종묘(宗廟)에 계실 때에는 공경스러웠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항상 임재(臨在)한 존재가 있는 것처럼 여기셨고, 싫어서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없을 때라도 항상 자신의 마음을 보전하셨다.”라고 하였다.〔詩曰 雝雝在宮 肅肅在廟 不顯亦臨 無射亦保〕
○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옹옹(雝雝)은 그지없이 온화한 것이요, 숙숙(肅肅)은 그지없이 공경스러운 것이요, 불현(不顯)은 그윽하게 은폐되어 있는 곳이요, 역(射)은 역(斁)과 같으니 싫어한다는 뜻이요, 보(保)는 지킨다는 뜻이다. 이 장의 뜻을 설명하면 대개 다음과 같다. 문왕(文王)이 규문(閨門)의 안에 있을 때에는 그지없이 온화하였고, 종묘(宗廟)의 안에 있을 때에는 그지없이 공경스러웠으며, 비록 그윽하게 은폐되어 있는 곳에 거할 때에도 항상 그곳에 임한 존재가 있는 것처럼 여겼는가 하면, 비록 싫어서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더라도 항상 마음속으로 지키는 바가 있었으니, ‘순일(純一)하면서도 중단함이 없는〔純亦不已〕’ 문왕의 덕이 이와 같았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서산 진씨(西山眞氏)는 말하기를, “이 시의 뜻을 설명하면 대개 다음과 같다. 문왕이 궁중에 있을 때에는 화기애애하게 온화한 모습을 보였고, 종묘에 있을 때에는 엄숙하고 장중하게 공경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종용히 법도에 합치된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러면서도 굳게 지니고서 지키는 공부를 잠시라도 그만둔 적이 없었기 때문에, 거처하는 곳이 비록 환히 드러난 곳이 아니라 하더라도 항상 천지 신명이 그 위에 임한 것처럼 여기고 부모와 사보(師保)가 그 앞에 임한 것처럼 여겼으며, 비록 싫어서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보존하는 공부에 엄격했던 까닭에 연안(燕安)한 가운데 태타(怠惰)해지는 사욕이 마음속에서 싹틀까 항상 걱정하였고, 사벽(邪僻)하고 만이(嫚易)해지는 기운이 몸에 붙게 될까 항상 걱정하였다. 이것이 바로 문왕이 순역불이(純亦不已)하게 된 소이(所以)라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불현역림(不顯亦臨)과 무역역보(無斁亦保)의 두 구절이야말로 성인이 순역불이(純亦不已)하게 된 뜻을 표현한 것으로서, 굳게 지니고 지키는 공부를 하는 데에 매우 긴요하고 절실한 내용이니, 학자가 열심히 배워야 마땅할 것이다.
● 불원복장(不遠復章)
복괘(復卦)의 초구에 이르기를, “머지않아서 되돌아올 것이다. 후회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크게 좋고 길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공자가 말하기를, “안씨의 아들은 도의 경지에 거의 도달하였다. 선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그것을 모르는 일이 없었고, 그것을 알고 나서는 반복해서 행하는 일이 없었다.”라고 하였다.〔復之初九曰不遠復 無祗悔 元吉 子曰 顔氏之子其殆庶幾乎 有不善 未嘗不知 知之未嘗復行也〕
○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오직 성인만이 잘못을 범하는 일이 없으니, 성인의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잘못을 범하는 일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다시 복구하면 그 잘못이 없어지기 때문에 좋게 되고 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지난 뒤에 복구할 경우에는 그 잘못이 이미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내게 된 만큼, 복구해서 비록 선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후회할 수밖에 없게 된 일은 완전히 없애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오래 끌지 않고서 곧바로 복구할 경우에는 그 잘못이 아직 뚜렷하게 드러나기 전에 고치는 것이라서 애당초 후회할 일이 있게 됨과는 관계가 없기 때문에 크게 좋고 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을 오래 끌지 않고서 곧바로 복구하는 것은 두뇌가 명철(明哲)하면서도 의지가 강건(剛健)해야만 가능한 법이다. 무릇 잘못을 범하고서도 시간을 오래 끌게 되는 까닭은 그 기미(幾微)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탓이요, 또 비록 잘못인 줄을 알았다 하더라도 사욕(私欲)에 이끌린 나머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탓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명철하면 그 기미를 환히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에 잘못을 범했다는 것을 곧바로 알게 될 것이요, 강건하면 사욕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 이끌리지 않고 결단을 내려 제거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될 것이다.
안자(顔子)는 선하지 못한 일이 있기만 하면 그 즉시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으니 이것은 지극히 명철했기 때문이요, 알고 나면 그때마다 단절하고 다시는 행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지극히 강건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잘못을 범해도 시간을 오래 끌지 않고 곧바로 복구함으로써 그 잘못이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내게 한 적이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그가 도의 경지에 거의 도달하게 된 이유라고 하겠다. 성인은 잘못을 범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도와 더불어 하나가 된다. 그런데 안자는 잘못이 없을 수 없었지만, 잘못을 범하면 그때마다 즉시 고쳤기 때문에 도의 경지에 가깝게 된 것이니, 이른바 “한 칸을 이르지 못했다.〔未達一間〕”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 효사(爻辭)의 의리는 오직 안자 정도의 인물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자(夫子)가 특별히 말씀하신 것이니, 참으로 만세토록 법도로 삼아야 마땅할 것이다.
○ 내가 일찍이 거처하는 방에 ‘불복(不復)’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기문(記文)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자가 안자를 칭찬하기를, “선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그것을 모르는 일이 없었고, 그것을 알고 나서는 반복해서 행하는 일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대저 선하지 못한 일이 있을 때에 그것을 모르는 일이 없었던 것은 명철해서 잘 살펴 볼 수 있었기 때문이요, 그것을 알고 나서는 반복해서 행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용감해서 잘 고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병통이라고 한다면, 제대로 살필 수가 없어서 그 일이 선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선하지 못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서도 고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만약 명철해서 잘 살필 수가 있고 용감해서 잘 고칠 수 있는 것이 안자와 같다면, 선하지 못한 것을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그대로 놔둘 수가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안자가 안자답게 된 소이라고 할 것이다.
선인과 악인으로 나뉘어지고 현인과 불초자로 나뉘어지는 까닭은 오직 잘 살필 수 있느냐의 여부와 잘 고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잘 살피지 못하고 잘 고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천하의 큰 병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잘 살피는 면에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래도 가망(可望)이 있다고 할 것이니 그것을 알게 해 주면 혹 고칠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도 하겠지만, 이미 알고 나서도 고치지 않을 때에는 다시 가망이 없다고 할 것이니 그 경우는 선하지 못한 결과로 끝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중에서도 고치지 않는 데 따른 해로움이 또 가장 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학문에 뜻을 둔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지금까지 성취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 이유를 깊이 추구해 보면 실로 이 두 가지 병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저 천하의 큰 병통을 내가 지니고 있었으니, 성취한 것이 없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아, 그동안 발전하지 못했던 것이 바로 여기에 기인하였으니, 지금에 와서도 예전처럼 그대로 한다면 또한 이 정도로 끝나고 말 것이다. 이 어찌 크게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중에서도 고치지 않는 병통이 가장 심하기에, 나의 방에 ‘불복(不復)’이라는 이름을 붙이고서 안자가 반복해서 행하는 일이 없었던 것을 법도로 삼으려고 생각한다. 일단 벽에 써서 붙여 놓고 마음속으로 또 다짐을 하였으니, 지금부터 선하지 못한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그 즉시로 분연히 일어나서 조금도 망설이지 말고 결연히 떨쳐버려야 할 것이다.
● 사물장(四勿章)
안연이 인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이르기를, “사욕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하루라도 사욕을 이기고서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그 인을 허여할 것이다. 인을 행하는 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다. 어찌 남을 통해서 하는 것이겠는가.”라고 하였다.〔顔淵問仁 子曰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 인(仁)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내재한 천리(天理)로서 마음 본연의 실체이다. 문인(問仁)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야 인이 되는 것인지 문의한 것이다. 인이란 사람에게 본디 있는 것이지만,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추구해서 보존하려고 한 것이다.
기(己)는 사욕(私欲)이다. 천리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이 사욕이니, 사욕이 이기면 천리가 없어지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리를 보존하려면 오직 극기(克己)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극기를 하면 인이 된다고 말하지 않고, 꼭 극기복례(克己復禮)를 한 뒤에야 인이 된다고 말하였다. 인이 천리(天理)의 전체(全體)를 말하는 것이라면, 예(禮)는 전체 중의 절문(節文)을 말하는 것이니, 모든 사물에 있어서 응당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가지는 실제로 하나의 이(理)이다. 그러나 전체가 넓고 크기만 하니, 어디에서부터 손을 댈 수가 있겠는가. 손을 댈 수가 있는 곳은 오직 일을 행하는 사이에 있기 때문에, 인을 행하는 공부도 반드시 극기를 하여 예에 복귀한 다음에야 인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상생활 가운데에서 행해지는 어떤 행동이든지 간에 각각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치가 없는 것이 없다. 이것이 바로 절문(節文)이라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예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사욕에 가리워지기 때문에 천리에 따를 수가 없게 된 나머지 응당 그렇게 해야 할 이치를 돌아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사욕을 이기고 한결같이 천리를 따르게 되어 우리의 어떤 행동이든 천리 아닌 것이 없게 할 수만 있다면 이 천리의 전체(全體)가 훼손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인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사욕을 극복하는 것이 곧 예로 돌아가는 길이요, 예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을 행하는 길이 된다고 하겠다.
‘일일극기복례 천하귀인언(一日克己復禮天下歸仁焉)’에 대해서, 집주(集註)에서는 “그 효과가 매우 빠르고 지극히 크다는 것을 극구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저 매우 빠르다는 것은 일일(一日)을 가리켜 말한 것이요, 지극히 크다는 것은 천하(天下)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참으로 극기복례를 할 수만 있다면, 하는 일마다 천리에 합치되어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즉시로 그것이 인임을 허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루 사이에만 그렇게 할지라도 모두가 허여할 것이니, 허여하는 것은 천하가 모두 그렇게 할 것이라는 말이다.
‘위인유기 이유인호재(爲仁由己而由人乎哉)’에 대해서, 집주에서는 “그렇게 하는 기틀이 나에게 있기 때문에 어려울 것이 없다는 것을 보인 말이다.”라고 하였다. 대저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이 자기를 통해서 나오고 남에게 말미암지 않는다면, 이것은 바로 그 기틀이 나에게 있는 것이니, 이처럼 나에게 있는 까닭에 어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기틀이 남에게 있게 되면 따라야 할지 그만두어야 할지 기필할 수 없는 점이 있기 때문에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는 행동의 여부가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것으로서 남이 간여할 성격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신이 극복을 하면 극복하지 못할 것이 없으니 어찌 쉽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대저 극기복례는 인을 행하는 방법을 말한 것이요, 천하귀인(天下歸仁)은 인을 행하는 효과를 말한 것이요, 유기(由己)는 인을 행하는 기틀의 소재를 말한 것이다. 일단 그 방법을 말해서 힘을 쓸 방도를 알게 해 준 다음에, 그 효과를 말해서 권장하였고, 다시 그 기틀의 소재를 말해서 힘쓰게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사람을 잘 이끌어 주셨다.〔善誘〕”라고 말한 것이라고 하겠다.
집주에서 또 말하기를, “날마다 극복을 하면서 어렵게 여기지 않게 되면, 사욕이 말끔히 없어지고 천리가 흘러 넘쳐서 인을 이루 다 쓸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또 이 한 대목의 뜻을 총괄하여 말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날마다 극복을 한다〔日日克之〕’라고 말한 것은 또 언외(言外)의 뜻을 드러낸 것으로, 극기하는 공부를 지극히 엄밀하게 추진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극기하는 공부를 만약 잠깐 사이라도 멈추는 일이 있게 되면 때에 따라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만큼 이것을 극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끝내는 사욕이 말끔히 없어지는 기약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날마다 극복을 하면서’ 잠깐 사이라도 멈추는 일이 없어야만 참으로 극복할 수 있게 되어 사욕이 말끔히 없어지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안연이 말하기를, “그 조목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라고 하자, 공자가 이르기를, “예가 아니면 보지 않는 것이며, 예가 아니면 듣지 않는 것이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않는 것이며,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안연이 말하기를, “제가 비록 어리석고 둔하긴 합니다만, 이 말씀대로 실천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하였다.〔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 예가 아닌 것이란 이치에 어긋난 것을 말하는데, 이치에 어긋나게 하는 것은 바로 사욕이다. 그렇기 때문에 극기하는 공부는 오직 예가 아닌 것을 막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한 몸을 운용(運用)하는 것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이 네 가지 속에 모두 포함된다. 그렇기 때문에 극기를 하는 조목 역시 오직 이 네 가지를 발동할 적에 모두 이치에 어긋나는 것들을 금하도록 한 것이다. 이치에 어긋나는 것을 제거해야만 이치에 합당하게 될 것이니, 참으로 이 네 가지를 발동할 적에 모두 이치에 어긋나는 것들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한 몸을 운용하는 것 역시 천리의 정대함 아닌 것이 없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극기를 할 수만 있다면 자연히 예로 복귀하여 인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집주(集註)에서 말하기를, “안자가 부자의 말씀을 듣고 나서는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이 나누어지는 것에 대해서 이미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고서 곧장 그 조목을 알고 싶다고 청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안자가 극기복례하는 이치에 대해서 부자의 말씀을 듣자마자 바로 이해를 하고는 이미 의심할 것 없이 환히 깨닫게 되었는데, 여기에 또 공부해야 할 조목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곧바로 그 조목에 대해서 묻자, 부자가 과연 이 네 가지 조목으로 일러 준 것이었다.
집주에서 또 말하기를, “ ‘물(勿)’ 즉 ‘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 마음속으로 주재(主宰)하는 것으로서 바로 사욕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기틀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극복하는 기틀은 오직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위 글에서도 ‘인을 행하는 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다〔爲仁由己〕’라고 한 것이다. 집주에서 사람이 자기 마음속으로 주재하는 것이라고 한 것은 바로 위 글의 유기(由己)와 같은 뜻으로서, 물의 기요(機要)를 추출해 낸 것이라고 하겠다. 예가 아닌 것이 싹틀 적에는 반드시 이 마음이 주재자가 되어야만 제압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제대로 주재하지 못할 경우에는 함께 휩쓸리고 말 것이니, 어떻게 이것을 다스릴 수가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물의 가능 여부는 오로지 마음이 주재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니, 이 물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오직 이 마음을 스스로 분발해서 힘써야만 할 것이다.
집주에서 또 말하기를, “ ‘이 말씀대로 실천하도록 노력하겠다’고 한 것은, 안자가 말 없는 가운데 그 이치를 이해하였고 또 자신의 힘으로 이겨 낼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기 때문에, 곧장 자기의 임무로 삼고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안자가 사물(四勿)의 이치에 대해서도 말을 듣자마자 바로 이해하였고, 또 스스로 돌아볼 때에 자기 힘으로 이겨 낼 수가 있기 때문에, 곧바로 실천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씀드린 것이다. 안자는 총명 예지의 자질을 소유한 위에 박문(博文) 약례(約禮)의 공부를 이루어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 까닭에 그가 부자(夫子)의 말씀을 듣고는 말 없는 가운데 이해하고 마음속으로 통해서 의심할 것이 없이 환히 알 수 있었던 것인데, 그의 지식이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역량도 자연히 갖추게 되었을 것이요, 그리하여 사욕을 이기는 면에 있어서도 마치 오확(烏獲)이 힘을 떨치고 일어나서 마른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대저 부자가 문인에게 인을 행하는 방도를 일러 준 것이 또한 많다. 그러나 이처럼 긴박하고 절실하게 가르쳐 준 경우는 있지 않았다. 이 경우는 있는 힘을 모두 기울여서 사욕을 곧장 공격하게 한 것으로서, 마치 난리를 일으킨 적병을 몰아낼 때에 한번 북을 울려 성 위에 올라가서는 있는 실력을 모두 발휘하여 박멸하는 계책과 같다고 할 것이니, 참으로 긴박하고 절실한 내용이라고 하겠다. 순(舜)이 우(禹)에게 전해 줄 적에는 인심과 도심을 대칭해서 말하였고, 여기에서는 기(己)와 예(禮)를 대칭해서 말하였으니, 순과 우 그리고 공자와 안자가 서로 주고받은 것이 천년의 세월에 걸쳐서 하나의 법도를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고 보면 이것은 바로 성학(聖學)의 심술(心術)에서 첫째가는 정법(正法)이라고 할 것이니, 그런 까닭에 부자가 다른 제자에게는 일러 주지 않고 오직 안자에게만 일러 준 것이라고 하겠다.
게다가 그 조목을 일러 줄 때에도 한 몸으로 운용(運用)하는 것을 모두 거론하여 빠뜨리는 일이 없게 함으로써 공력을 들일 때에 이르지 않는 곳이 없도록 하였으니, 완전무결하게 일러 준 것이 또한 이와 같다고 하겠다. 그리고 집주(集註)에서 해석한 것을 보면 다시 오묘한 요체를 끝까지 추구해서 구절마다 모두 음미할 점이 있게 하였으니, 이렇게 본다면 공자가 온통 마음을 기울여서 안자에게 일러 주었고, 이것을 또 주자(朱子)가 온통 마음을 기울여서 설명해 주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학자로서는 이 사물장에 대해서 있는 힘을 모두 기울여 추구해야 마땅할 것이다.
● 성의장(誠意章)
《대학》에 이르기를, “이른바 그 뜻을 참되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나쁜 냄새를 싫어하는 것처럼 하고, 좋은 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스스로 기꺼워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자기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大學 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慊 故君子必愼其獨也〕 - 이 장의 주해는 예전에 내가 지었던 해설을 개정한 것이다. -
○ 그 뜻을 참되게 한다는 것은, 선을 행하고 악을 없애려고 하는 뜻을 한결같이 한다는 말이다. 그 뜻을 참되게 하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 것이라고 한 것은, 즉 성의(誠意)의 공부는 오직 자신을 속이는 일을 하지 않는 데에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스스로 속인다는 것은, 선인 줄을 알면서도 하려 하지 않고 악인 줄을 알면서도 하려 하는 것을 말한다. 선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대상이고, 악은 사람이 마땅히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은 그 뜻이 바르니 이것이 성(誠)이요, 선인 줄을 알면서도 하려 하지 않고 악인 줄을 알면서도 하려고 하는 것은 그 뜻이 바르지 못하니 이것이 기(欺)이다. 성이란 진실(眞實)한 것을 의미한다. 다만 바른 것이 진심(眞心)이니, 바르지 못한 것이 어찌 진심이 되겠는가.
대저 사람의 본심은 모두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선을 행하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니, 당초에는 성(誠)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할 것인데, 스스로 속이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이는 선이 비록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또한 사(私)에 방해를 받는 경우도 있고, 악이 비록 사람이 마땅히 제거해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또한 욕(欲)에 이끌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처럼 사와 욕에 가리워지기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사에 방해받은 나머지 하려고 하지 않게 되고, 마땅히 없애야 할 일을 욕에 이끌린 나머지 거꾸로 하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은 사욕에 가리워진 나머지 선을 행하려고 하는 본연의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오직 선한 일은 행하려고 하지 않고 악한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선이 항상 방치되고 악이 항상 득세하게 되는 것이다.
무릇 이 세상에서 불선을 행하게 되는 것은 모두 스스로 속이는 데에서 비롯된다. 대저 사람의 뜻은 본래 참되지만 오직 스스로 속이기 때문에 참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모든 악은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속이는 일이 없으면 뜻이 참될 것이니, 이렇게 본다면 성의의 공부는 오직 자신을 속이는 일을 없게 하는 데에 있을 뿐이라고 하겠다. ‘무(毋)’라는 글자는 금지(禁止)를 뜻하는 말이다. 즉 스스로 속이려는 뜻이 싹틀 때에 이것을 막고 끊어버림으로써 마음 속에 남아 있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 ‘무’라는 글자는 비례물시(非禮勿視)의 물(勿)과 그 기요(機要)가 동일하다.
나쁜 냄새는 사람들 모두가 싫어하니 어떤 경우에도 이런 냄새를 싫어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좋은 색은 사람들 모두가 좋아하니 어떤 경우에도 이런 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냄새를 싫어하는 것처럼 할 수만 있다면, 악한 일을 반드시 제거하려고 하면서 털끝만큼도 그 일을 하려고 하는 뜻이 없게 될 것이요, 좋은 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할 수만 있다면, 선한 일을 반드시 행하려고 하면서 털끝만큼도 그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뜻이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결같이 참되어 스스로 속이는 일이 없게 되는 것이니, 이른바 그 뜻을 참되게 한다는 것도 이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자겸(自慊)이라는 말은 자기의 마음속으로 쾌하고 족하게 여기는 것을 의미하는데,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한다면 마음이 쾌하고 족하게 될 것이니, 맹자(孟子)가 “위로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면 즐겁다.〔仰不愧俯不怍則樂〕”라고 한 말과 “자기 몸을 돌이켜보아 참되다면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다.〔反身而誠 樂莫大焉〕”라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라고 하겠다. 성(誠)은 그 속성이 바르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없으면서 쾌하고 족하게 되는 반면에, 기(欺)는 그 속성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부끄러우면서 쾌하고 족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대저 스스로 속이지 않는 것은 성의를 실제로 행하는 일이요, 스스로 기꺼워하는 것은 성의를 통해서 기대되는 바이니, 이것은 곧 공부(工夫)와 공효(功效)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속이지 않는 공부는 반드시 스스로 기꺼워하는 경지에 이른 뒤에야 극진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속이지 않아서 스스로 기꺼워할 수 있게 되려면 오직 자기 홀로 있을 때를 삼가야 할 것이다. 속이는 것과 기꺼워하는 것은 모두 각자의 마음속에 들어 있으니,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더라도 자기만은 홀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삼간다는 것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면서 감히 태만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 속이려는 싹이 틀 때에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면 감히 그대로 따르지 않고 금지하게 마련이요, 태만하거나 소홀히 하면 그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마련이다. 이렇게 본다면 금지하고 금지하지 않는 것은 단지 삼가는 것과 소홀히 하는 그 사이에 있다고 할 것이다. 대저 스스로 속이는 일이 발동하는 것은 혼자서만 알고 있을 때에 있게 되니, 이것을 금하기 위해서는 홀로 삼가는 방도 이외에는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스스로 속이지 않으면서 반드시 자기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 그런데 삼가는 것은 실로 경(敬)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성의의 공부라는 것도 그 귀결점은 역시 하나의 ‘경’ 자에 있을 뿐이라고 하겠다.
이 장은 뜻을 참되게 하는 공부를 말하고 있는데, 이 1절(節) 속에 모든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힘을 쓰는 요령을 찾아본다면 단지 ‘무자기(毋自欺)’와 ‘신기독(愼其獨)’이라는 여섯 글자에 들어 있다고 할 것이다. 대저 뜻을 참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선과 악이 나누어지는 관문이 되고 자신을 닦는 첫걸음이 되는 것이니, ‘덕을 밝히고〔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新民〕’도 사실은 모두가 이것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다. 그 일이 이처럼 중대하고 긴급할 뿐만 아니라 힘쓰는 방법이 또 이처럼 간략하기만 하니, 학자가 노력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대학》에 또 이르기를, “소인은 혼자 있을 때에 좋지 못한 일을 하면서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러다가 군자를 본 뒤에는 슬그머니 자기의 좋지 못한 행위를 감추면서 좋은 면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몸 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것처럼 자기를 보고 있으니,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이것을 일러 속에 있는 진짜 마음이 밖으로 드러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자기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小人閒居爲不善 無所不至 見君子而后厭然掩其不善 而著其善 人之視己如見其肺肝然 則何益矣 此謂誠於中形於外 故君子必愼其獨也〕
○ 이것은 스스로 속이는 자의 일을 말해서 경계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 소인은 남모르게 불선한 짓을 행하면서 겉으로는 감추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이것은 당초 그 짓이 악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닌데도, 자기의 사욕을 따라서 무작정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악인 줄을 알면서도 하려고 하는 것이니, 바로 스스로 속이는 일이라고 할 것이요, 급기야 군자를 보게 될 경우에는 그 악을 감추고서 선을 드러내려고 하니, 이것은 또 사람을 속이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이는 사욕을 따르는 일에 습관이 된 나머지 자연히 악을 행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게 된 것인데, 그러면서도 악을 행한다는 이름을 듣기는 싫어하고 남에게 천하게 여김을 받는 것은 두려워하기 때문에, 남 모르는 가운데에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남이 볼 때에는 숨기려고 하는 것이니, 그가 계교하는 것이 또한 교묘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사람들이 저절로 환히 알게 되는 법이니, 아무리 속이려 해도 끝내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다.
대저 혼자서 무슨 짓을 하다가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숨긴다면 남이 알지 못할 법도 하지만, 실제로 자기 내면에 그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저절로 외면에 드러나면서 폭로되고 마는 것이다. 희미하게 숨겨진 것도 나중에는 환히 드러나게 마련이라서 실상은 숨기기가 어려운 법이니, 이것이야말로 이치상으로 필연적인 결과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 점을 잘 살펴서 반드시 혼자만 알고 있는 곳에서 자신을 삼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속이는 일이 싹트려고 할 적에 이것을 금지하며 항상 공개적으로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 있는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여기에 털끝만큼도 불선이 숨을 자리가 없게 하는 것이다.
《대학》에 또 이르기를, “증자는 말하였다. 수많은 눈이 바라보고 있고 수많은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으니, 얼마나 무서운 일이냐.”라고 하였다.〔曾子曰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
○ 이것은 남 모르는 가운데에 행한 불선을 사람들 모두가 알게 마련이니,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마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보면서 손가락질을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이 대목은 증자의 말을 인용해서 위 글의 뜻을 거듭 밝힌 것이다.
《대학》에 또 이르기를, “부는 집을 윤택하게 하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해서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펴지게 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자기의 뜻을 참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富潤屋 德潤身 心廣體胖 故君子必誠其意〕
○ 이것은 스스로 기꺼워하는 자의 일을 말해서 권면한 것이다. 스스로 기꺼워하기 때문에 마음이 넓어지는 것이요, 마음이 넓어지기 때문에 몸이 펴지는 것이다. 마음이 넓어진다는 것은 편안하고 평온하고 관대하고 여유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그 마음이 쾌하고 족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기 때문에 편안하고 평온하고 관대하고 여유 있게 될 수 있는 것이요, 그 마음이 이러하기 때문에 그 몸도 펴지면서 태평스럽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넓어지는 것은 덕윤신(德潤身)의 덕에 해당하고, 몸이 펴지는 것은 윤신에 해당한다.
이 장의 맨 처음 1절에서는 공부(工夫)를 말하였고, 그 뒤에는 스스로 속이는 자와 스스로 기꺼워하는 자의 일을 말해서 권면하고 경계하였다. 맨 처음 1절의 무자기(毋自欺)와 신기독(愼其獨)은 공부에 해당하고, 자겸(自慊)은 신기독과 무자기의 준적(準的)에 해당한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에 불선한 짓을 하는 것은 신기독을 하지 못해서 스스로 속이는 자의 일에 해당하고,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펴지는 것은 신기독과 무자기를 제대로 해서 스스로 기꺼워하게 된 자의 일에 해당한다.
대저 공부에 대해 먼저 말해서 학자가 힘쓸 바를 알게 하였고, 그 다음에는 또 제대로 하는 자와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의 일을 거론하여 권면하고 경계하였으니, 선을 행하도록 사람을 가르쳐 준 그 뜻이 지극히 간절하다고 하겠다. 학자가 이에 대해서 깊이 살펴본다면 홀로 있을 때를 삼가서 스스로 속이지 않도록 금하는 일을 자연히 그만둘 수 없게 될 것이다.
● 《중용(中庸)》의 수장(首章)
《중용》에 이르기를,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하고, 성에 따르는 것을 도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라고 한다.”라고 하였다.〔中庸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 하늘은 만물의 근본이다. 사람과 물건이 나온 것은 천지의 은혜를 받은 것이니, 그 이(理)는 바로 하늘의 이이다. 하늘의 이가 만물에 부여될 때 각자 일정한 분량이 있게 된다. 이것은 바로 하늘이 명한 것이니, 이것을 일러 성(性)이라고 한다.
성은 항상 사물의 사이에 유행하는데, 그 성이 ‘원래 그러한 것〔自然〕’에 따라 각자 ‘그렇게 해야 하는 법칙〔當然之則〕’이 있으니, 이것을 일러 도(道)라고 한다.
성인이 각자 그렇게 해야 할 법칙에 따라 재제(裁制)를 가하여 천하에 법도를 세움으로써, 이 도를 지닌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이 길을 따르게 하였으니, 이것을 일러 교(敎)라고 한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스스로 닦는 것〔自修〕’을 가지고 말하기도 한다. 즉 제대로 도를 닦으면 천하 사람들에게 법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교라고 했다는 주장이 그것인데, 그 설도 통한다.
성은 하늘에서 나오고 도는 성에서 나왔으니 이것은 천리(天理)의 자연이요, 교는 성인에게서 나왔으니 이것은 인사(人事)의 소위(所爲)이다. 그러나 교 역시 모두가 성의 자연에 따라 닦는 것으로서, 털끝만큼도 더하거나 덜한 것이 있지 않으니, 이것도 하늘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이 세 구절은 천지 만물의 근원과 성인의 도의 근본을 설명해 주고 있다. 자사(子思)가 저술을 하여 장차 천하 만세에 도를 밝히려고 했기 때문에, 맨 먼저 이 세 구절을 말함으로써 학자들로 하여금 곧바로 그 근원과 그 근본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먼저 알게 하였으니, 가르쳐 보여 준 그 뜻이 지극히 깊고도 절실하다고 하겠다.
《중용》에 또 이르기를,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떠날 수가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보이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근신하는 것이며, 들리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 도는 정(靜)하면 ‘하나의 근본〔一本〕’이 되지만, 동(動)하면 ‘다양한 차이〔萬殊〕’를 드러내게 된다. 그리하여 크게는 군신 부자로부터 작게는 사물의 미세한 경우에 이르기까지 도가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이 도는 하늘이 명한 성(性)의 자연에서 우러나온 것으로서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잠시도 떠날 수 없는 이유이다. 따라서 떠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도에서 벗어난 것은 모두 도가 아니다. 도는 이(理)이니, 도가 아닌 것은 욕(欲)이다. 도는 선이니 도가 아닌 것은 악이다. 도는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니, 도가 아닌 것은 떠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경계하고 근신하는 것〔戒愼〕’과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恐懼〕’은, 즉 도를 떠나서 도 아닌 것이 혹시라도 끼어들지 않을까 저어하는 것이다. 도는 떠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군자가 항상 계신(戒愼)하고 공구(恐懼)하는 것이요, 도는 잠시라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그 사이에서도 계신하고 공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신하고 공구한다는 말은 대체로 도를 잃을까 두려워하면서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도(不睹)와 불문(不聞)이라는 말은 사물이 아직 형태를 드러내지 않아서 응접(應接)하는 것이 없는 때를 뜻한다. 그렇지만 사물을 응접할 때에는 계신 공구할 필요가 없고 오직 부도와 불문할 때에만 계신 공구해야 한다는 뜻의 말은 아니다. 사물을 응접하는 경우에는 그 도가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반면에, 사물이 아직 형태를 드러내기 이전의 경우를 당할 때에는 도를 볼 수가 없어서 도가 떠날 수도 있는 것으로 의심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특별히 이 점을 지적해서 말한 것이니, 그러한 때에 처했을지라도 도를 떠날 수 없는 만큼 공구 계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비록 볼 수 있는 사물이 없다고 할지라도, 어느 한 편에 기울어지거나 치우치지 않는 이(理)는 그 사이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으로서 실로 도의 근본이라고 할 것이니, 여기에서 떠난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군자는 비록 이러한 때를 당하더라도 혹시라도 잃을까 두려워하면서 항상 전전긍긍하는 가운데 경외(敬畏)하는 것이니, 이는 도의 근본을 보존하려고 노력하면서 잠시라도 떠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중용》에 또 이르기를, “숨어 있는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 어두운 곳이 사실은 매우 뚜렷하게 드러나고, 미세한 일이 사실은 매우 명백하게 나타난다. 은폐된 곳과 미세한 일이라 할지라도 일단 싹터 나오게 되는 이상에는, 선은 아름답게 되고 악은 추악하게 되는 요소를 이미 실제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속일 수 없이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막현(莫見)이요 막현(莫顯)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어떤 기미(幾微)라도 일단 발동하고 나면 그 일이 자연히 드러나면서 폭로되기 때문에, 군자는 은(隱)을 현(見)으로 여기고 미(微)를 현(顯)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정 이러한 사실을 스스로 알게 되면 반드시 삼가게 되는 것이니, 남이 알지 못한다고 해서 삼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삼가면 악을 반드시 제거하고 선을 반드시 보존하게 되니,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는 까닭은 도가 아닌 것을 금하고 도에서 떠나지 않게 하려는 이유에서이다.
《중용》에 또 이르기를, “희로애락이 발동하지 않은 것을 중이라 하고, 발동해서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한다. 중은 천하의 대본이요, 화는 천하의 달도.”라고 하였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 칠정(七情)이 발동하기 이전에는 이 마음이 적연(寂然)하니, 이것을 중(中)이라고 한다. 중이라는 것은 한쪽에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이 마음이 발동한 뒤에 한쪽으로 치우쳐 향하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이요, 적연한 상태에서는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울어지는 것이 없으니, 지극히 중(中)할 뿐인 것이다.
절(節)은 한(限) 즉 분한(分限)이라는 말과 같으니, 그 분한에 지극히 합당하고 흡족하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칠정이 발동해서 모두 지극히 합당하고 흡족하게 분한에 맞았을 때에 이것을 일러 화(和)라고 한다. 화는 합당하다는 합(合)이나 적당하다는 적(適)과 같은 말이다. 지나친 것도 적당한 것이 아니요, 모자란 것도 적당한 것이 아니다. 오직 흡족하게 되어 분한에 맞았을 때에 적당한 것이 되는 것이다.
중의 상태에 있을 때에는 칠정이 아직 발동하지 않고 만사가 아직 싹트지 않았으니, 한쪽에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은 이(理)가 이 속에 존재한다. 그러고 보면 중은 바로 칠정과 만사의 이의 근원이 된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천하의 대본(大本)이라고 말한 것이다. 일단 발동을 해서 화의 상태가 되면 다양한 현상에 응할 적에 모두 지극히 합당한 도에 합치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화는 천하에서 고금을 막론하고 모두 따라야 할 것으로서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천하의 달도(達道)라고 말한 것이다.
하늘이 명한 이가 사람의 내부에 있으면 성이 되고, 그것을 따르면 도가 된다. 아직 발동하기 이전의 중 이것은 이의 본체로서 즉 ‘하늘이 명한 성〔天命之性〕’이라고 할 것이요, 절도에 맞게 된 화 이것은 이의 유행으로서 즉 ‘성에 따르는 도〔率性之道〕’라고 할 것이다. 이 1절은 맨 처음의 1절을 근본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2구로 표현하였다. 그리하여 그 실체가 나에게 내재한 것이야말로 천하의 지극한 이치가 되는 것을 말해 주고 있으니, 그 명의(名義)를 정확하게 설정하고 명백하게 발명(發明)해 준 것이 이와 같다고 하겠다.
《중용》에 또 이르기를, “중과 화의 경지를 이루게 되면, 천지가 제자리에서 안정될 것이요, 만물이 제대로 육성될 것이다.”라고 하였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 중(中)과 화(和)의 요소를 사람들마다 물론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형기(形氣)를 품부(稟賦)받은 것이 순수하지 못한 데다가 습관적으로 물든 것이 이미 오래되었다. 그래서 외물에 감응하기 이전에도 사의(私意)와 망념(妄念)으로 분분하게 흔들리기 마련이라서 고요히 안정될 때가 있지 않으니, 중의 체(體)를 보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감응하기 이전부터 벌써 이와 같기 때문에, 외물에 감응하여 발동할 적에도 합당함을 잃지 않는 경우가 또 드물기만 하니, 화의 용(用)을 또한 잃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아직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을 때부터 경계하고 두려워한다면 외물을 감응하기 이전에 분분하게 흔들리는 걱정이 없게 되어 그 중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요, 홀로 있을 때에 삼가한다면 외물을 응접할 즈음에 성찰을 하고 제재를 가해서 그 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정(靜) 속에서도 중이 되지 않는 경우가 없게 하고, 동(動) 속에서도 화가 되지 않는 경우가 없게 한다면 바로 중과 화의 경지를 이루게 되어 천지가 제자리에서 안정되고 만물이 제대로 육성되는 효과를 보게 될 것이다.
중은 체이고, 화는 용이다. 천지와 만물을 가지고 말한다면, 천지는 체이고 만물은 용이다. 중을 이루면 본체를 잃는 일이 없기 때문에 바로 천지가 제자리에서 안정되는 이치가 있게 되는 것이요, 화를 이루면 그 용이 차질이 없기 때문에 바로 만물이 제대로 육성되는 이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장에서 맨 먼저 천명지성(天命之性)과 솔성지도(率性之道)에 대해서 언급했으니 이것은 이의 본원을 말한 것이요, 바로 이어서 계구와 신독을 언급했으니 이것은 이 이를 체득하기 위한 공부를 말한 것이요, 다음에 중화를 언급했으니 이것은 이의 실체를 말한 것이요, 마지막에 치중화(致中和)와 위육(位育)을 언급했으니 이것은 이 이를 체득한 데 따른 지극한 공효를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학자들로 하여금 그 본원의 유래와 실체의 소재를 알고 나서 공력을 기울여 지극한 경지에 이르도록 노력하게 하였는데, 그 공력을 기울이는 요체가 단지 ‘경(敬)’이라는 글자에 있다고 할 것이니, 경이 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극히 크다고 하겠다.
● 무불경장(毋不敬章)
곡례에 이르기를, “공경하지 않음이 없는 가운데, 깊이 생각하는 것처럼 진지한 자세를 취하고 말을 할 때에도 안정되게 한다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曲禮曰毋不敬 儼若思 安定辭 安民哉〕
○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무(毋)는 금지하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유씨(劉氏)는 말하기를, “이 세 구절은 증자(曾子)가 말한 군자가 귀중하게 여겨야 할 세 가지의 도(道)와 같다. 무불경(毋不敬)은 용모를 드러낼 때에 사납고 오만함을 멀리해야 한다는 말과 같고, 엄약사(儼若思)는 안색을 바르게 할 때에 신실함에 가깝게 해야 한다는 말과 같고, 안정사(安定辭)는 말을 할 때에 천박하게 억지를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 진씨(眞氏)는 말하기를, “무불경은 몸과 마음 그리고 안과 밖에 털끝만큼이라도 불경(不敬)한 요소가 있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용모를 반드시 단정하고 엄숙하게 하여 깊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고, 언사(言辭)를 반드시 안정되게 하여 억지를 부리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서 백성들 위에 군림한다면 백성들 가운데에 불안하게 느끼는 자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 내가 생각건대, 이 세 마디의 말이야말로 항상 몸에 지니고 지키는 공부와 관련하여 매우 간단하면서도 절실한 말이라고 할 것이니, 학자가 깊이 체득해야 마땅할 것이다.
● 우산지목장(牛山之木章)
맹자가 말하기를, “우산의 나무 숲은 옛날에 아름다웠다. 그런데 큰 나라의 교외에 있는 까닭에 도끼와 자귀로 벌목(伐木)을 하니, 그 숲이 아름다워질 수가 있겠는가. 물론 밤과 낮으로 자라나고 비와 이슬이 적셔 주면 싹이 돋아 나오는 일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싹이 돋아 나오기만 하면 또 소와 양을 방목(放牧)하기 때문에 저렇게 헐벗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그 산이 헐벗은 것을 보고는 일찍이 재목이 있어 본 일이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산의 본성이기야 하겠는가.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 말하더라도 어찌 인의의 마음이 없기야 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양심을 방기(放棄)하게 되는 까닭은 도끼와 자귀로 날마다 벌목을 하는 것과 같은 이유라고 할 것이니, 어떻게 아름다워질 수가 있겠는가. 밤낮으로 자라나고 또 이른 아침이 되면 맑은 기운이 돋아 나온다고 할지라도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 양심이 사람들과 서로 비슷한 점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고 할 것인데, 낮에 일삼는 행위가 그것마저도 짓눌러 없애버리곤 한다. 이렇게 곡망(梏亡)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밤사이에 돋아 나오는 기운도 보존할 수 없을 것이요, 그 야기(夜氣)마저 보존할 수 없게 되면 짐승이나 별 차이가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짐승처럼 된 것을 보고서 사람들은 일찍이 인간의 성정(性情)이 없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어찌 인간의 성정이기야 하겠는가. 그러므로 제대로 기르기만 한다면 어느 것이든 자라나지 않는 것이 없고, 제대로 기르지 못하면 어느 것이든 시들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다. 공자가 이르기를 ‘잡고 있으면 보존되고 놓아 버리면 없어지며 드나드는 일정한 때도 없고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도 없는 것, 그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孟子曰 牛山之木嘗美矣 以其郊於大國也 斧斤伐之 可以爲美乎 是其日夜之所息 雨露之所潤 非無萌蘖之生焉 牛羊又從而牧之 是以若彼濯濯也 人見其濯濯也 以爲未嘗有材焉 此豈山之性也哉 雖存乎人者 豈無仁義之心哉 其所以放其良心者 亦猶斧斤之於木也 旦旦而伐之 可以爲美乎 其日夜之所息 平旦之氣 其好惡與人相近也者幾希 則其旦晝之所爲 有梏亡之矣 梏之反覆 則其夜氣不足以存 夜氣不足以存 則其違禽獸不遠矣 人見其禽獸也 而以爲未嘗有才焉者 是豈人之情也哉 故苟得其養 無物不長 苟失其養 無物不消 孔子曰 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
○ 내가 생각건대, 이 장은 산의 나무를 가지고 사람의 선한 마음을 비유하면서 구절마다 서로 대칭해서 설명하였으니, 그 말이 그지없이 친절하기만 하다.
사람에게 본래 선한 마음이 있는 것은 산의 나무가 본래 아름다운 것과 같다. 사람의 양심(良心)이 물욕 때문에 방기되는 것은 산의 나무가 도끼와 자귀로 벌목을 당하는 것과 같다. 비록 벌목을 당하고 방기되었다 하더라도 그 근본은 그래도 남아 있기 때문에 밤과 낮 사이에 항상 싹이 돋고 발현(發見)하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와 이슬이 적셔 주면 싹이 돋아 나오는 것이요, 이른 아침에 아직 외물과 접하지 않아서 그 기운이 허정(虛靜)할 때에는 양심이 발현되는 것이다.
다만 싹이 돋아 나오자마자 소와 양을 또 방목하기 때문에 저와 같이 헐벗게 된 것처럼, 발현한 것이 얼마 되지 않은데도 날마다 일삼는 행위가 또 짓눌러 없애 버리고 보면, 그 야기마저도 더 이상 양심을 보존할 수 없게 된 나머지 짐승과 별 차이가 없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산이 헐벗게 된 것과 사람이 짐승과 비슷하게 된 것이 어찌 본연의 모습이라고 하겠는가. 이 두 대목은 본래 사람에게 선한 마음이 있지만 물욕에 해를 당한 나머지 그 선한 마음을 잃어 불선하게 된 것을 말해 주고 있는데, 매우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 장에서는 또 어떤 것이든지 제대로 길러지면 자라나고 제대로 길러지지 못하면 시들게 된다는 것을 말해서, 양심도 제대로 길러지지 못하면 없어지게 되는 것을 알게 하였는데, 이는 실로 이치상 필연적인 결과라고 하겠다. 대저 양심을 방기한 뒤에 또 곡망을 하면서 이 일을 반복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양심이 제대로 길러지지 못하는 까닭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양심이 제대로 길러지게 하는 방도는, 오직 방기하는 일과 곡망하는 일을 그만둠으로써 날마다 일삼는 행위가 양심을 해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하여 양심을 해치는 일이 없게 되면 밤과 낮으로 자라나는 것이 자연히 충만하고 성대하게 될 것이니, 이는 산의 나무에 도끼와 자귀로 벌목하는 일과 소와 양을 방목하는 일이 없게 되면 자연히 번창하고 무성하게 되는 이치와 같다고 할 것이다.
이 장의 끝 부분에서는 다시 공자(孔子)의 말을 인용하여, 마음이라는 것은 보존하기가 어렵고 잃기가 쉽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양심을 기르는 요체는 항상 잡고서 놓지 않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마음은 살아 있는 것으로서 발동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모름지기 잡고 있어야만 보존될 수가 있고 놓으면 도망가 버리는 것이다. 드나드는 일정한 때도 없고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도 없다고 한 것은 바로 헤아릴 수 없이 신령스럽고 밝은 이 마음이 일정한 때가 없이 발동하는 것을 형용한 것이다. 이 마음을 잡아서 보존되게 하면 외물에 휩쓸리지 않아서 본연의 선이 항상 있게 되겠지만, 놓아 버려 도망치게 하면 그저 물욕에 휩쓸리는 일만 있게 될 것이니, 곡망하는 일을 반복하게 되는 것도 모두 여기에 연유한다고 하겠다. 그러고 보면 물욕으로 인한 피해를 없애고 그 양심을 제대로 기르는 데에는 마음을 잡는 하나의 방법보다 좋은 것은 없다고 할 것이다.
심(心)이라는 것은 지각(知覺)을 말한다. 지각은 본래 선하니, 본래 그렇게 선한 것이 바로 양심이요 바로 인의지심(仁義之心)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각지심(知覺之心)과 양심은 둘이 아니니, 즉 지각의 본래 선한 것이 바로 양심인 것이다. 지각이 비록 본래 선하다고는 하나, 물욕에 휩쓸리면 그 본래의 선이 없어지니, 이른바 양심을 방기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오직 물욕에 휩쓸리지 않게만 된다면 본연의 그 선을 잃는 일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잡아서 보존되게 하는 것이 지각이니, 지각을 보존하기만 하면 선이 보존될 것이다.
● 《통서(通書)》의 성가학장(聖可學章)
주자의 《통서》에 이르기를, “성인은 배워서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 요체가 있는가? 있다. 그 요체가 무엇인가? 일이 요체이니, 일이라는 것은 무욕을 말한다. 무욕이 되면 정할 때에는 허하고 동할 때에는 직하다. 정할 때에 허하면 명하고 명하면 통하며, 동할 때에 직하면 공하고 공하면 부한다. 그리하여 명해서 통하고 공해서 부하면 가깝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周子通書曰 聖可學乎 曰可 有要乎 曰有 請問焉 曰 一爲要 一者無欲也 無欲則靜虛動直 靜虛則明 明則通 動直則公 公則溥 明通公溥 庶矣乎〕
○ 이에 대한 나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무욕(無欲)의 상태가 되면 마음속으로 외물(外物)을 구하려는 마음이 없어지기 때문에 담연(淡然)히 순일(純一)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一)이라는 것은 무욕을 말한다고 한 것이니, 일은 무욕으로 인해 이루어진 결과요, 무욕은 일이 나오게 된 연유라고 하겠다. 무욕을 통해서 일이 될 수만 있다면, 조용히 있을 때에는 사려(思慮)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허(虛)하게 되고, 활동을 할 때에는 치우치거나 매인 바가 없기 때문에 직(直)하게 되는 것이다. 무욕의 상태가 되면 일이 되는데, 허는 일의 체(體)라고 할 것이요, 직은 일의 용(用)이라고 할 것이다.
명(明)은 지(知)에 입각해서 말한 것이고, 통(通)은 이(理)에 입각해서 말한 것이며, 공(公)은 일을 행하는 것을 가지고 말한 것이고, 부(溥)는 대상에 미치는 효과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명하기 때문에 통하니 통은 명의 효과요, 공하기 때문에 부하니 부는 공의 효과이다. 허하면 어지럽게 뒤섞이지 않기 때문에 그 지견(知見)이 명하게 되어 정미(精微)한 의리까지 통할 수가 있는 것이요, 직하면 불공평하게 잘못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일을 행할 때에 크게 공정하게 되어 은혜를 널리 입힐 수 있어서 모두 안정을 얻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명해서 통하면 ‘사물의 신묘한 변화를 궁구하여 알 수 있게 될 것〔窮神知化〕’이요, 공해서 부하면 ‘사모하며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게 될 것〔無思不服〕’이니, 따라서 명해서 통하고 공해서 부하면 거의 가깝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근본을 찾아본다면 무욕(無欲)일 따름이니, 이 무욕이 바로 배워서 성인이 될 수 있는 요체가 되는 까닭이라고 하겠다. 대저 무욕의 상태를 일관되게 하여 안으로는 밝아서 통하게 하고 밖으로는 공정해서 널리 미치게 하는 경지야말로 얼마나 오묘하다고 하겠는가. 이 장의 취지를 찬찬히 음미하면 오묘한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니, 주자(朱子)가 “일상생활 중에 자연히 힘쓸 곳이 따로 없다.〔日用間自無別用力處〕”라고 한 말이 참으로 그렇다고 하겠다.
○ 또 내가 살펴보건대, 이 장과 양심설(養心說)에서 모두 무욕을 요체로 삼고 있다. 이것은 제 1 등이 되는 일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보여 준 것이니, 이는 그야말로 성현의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말씀이라고 하겠다. 근세에 설 문청공(薛文淸公)도 말하기를, “오직 욕심이 없어야만 가장 고급이라고 할 것이요, 욕심이 있으면 그것은 저급한 것이다.〔惟無欲最高 有欲則便低矣〕”라고 하였는데, 이 말 역시 매우 좋으니 학자가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
○ 내가 또 살펴보건대, 오직 정(靜)할 때에 허해야만 명해서 통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사욕에 골몰하게 되면 그 지견(知見)이 어두워질 것이니, 쉽게 알 수 있는 사리도 제대로 살피지 못할 것인데, 어떻게 정밀하고 미세한 이치를 통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허정(虛靜)을 통해서만 명통(明通)이 가능한 것이다. 내가 나름대로 헤아려 보건대, 예로부터 성현이 정미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허정을 통해서 가능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주자(周子)가 태극(太極)의 오묘한 이치를 깨달아 보여 준 것도 필시 이를 통해서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내가 또 살펴보건대, 주자(朱子)가 “보통 사람들이야 어떻게 무욕의 상태를 바로 얻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천이 단지 ‘경’이라는 한 글자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따라서 다만 ‘경’이라는 이 글자 하나를 가지고 밀고 나아가면 아마도 붙잡을 곳이 있어서 안정을 얻고는 착수할 곳을 알게 될 것이다.〔尋常人如何便得無欲 故伊川只說箇敬字 敎人 只就這敬字上 捱去 庶幾執捉得定 有下手處〕”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또 사람들에게 무욕에 이르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고 보면 배워서 성인처럼 되려고 하는 자는 마땅히 무욕으로 요체를 삼아야 할 것이요, 무욕의 경지를 얻으려고 하는 자는 마땅히 경으로 요체를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참으로 경에 종사하여 중단하는 일이 없게 하면, 스스로 인욕에 대적할 수 있는 힘이 생겨서 무욕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니, 정할 때에 허하고 동할 때에 직하며, 명해서 통하고 공해서 부하게 되는 효과를 모두 자연히 얻게 될 것이다.
○ 내가 또 살펴보건대, 정할 때에 무욕이 되면 사적인 집착이 없기 때문에 허하게 되니, 이 허는 거울 안에 당초 하나의 물건도 없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리고 동할 때에 무욕이 되면 치우치거나 매인 바가 없기 때문에 직이 되는데, 이 곧은 것은 바로 옳음을 의미한다. 무릇 사물의 이치란 옳은 것이 직이 되고 그른 것이 곡(曲)이 되는 법이다. 인심이 발할 때 그 자체는 본래 곧지만, 단지 사욕에 얽매이기 때문에 그르게 되고 굽혀지게 되는 것이니, 만약 사욕에 얽매이는 일만 없게 된다면 어느 때이고 곧고 옳게 되지 않겠는가. 또 체와 용을 가지고 말한다면, 오직 정할 때에 허하기 때문에 동할 때에 직하게 되는 것이니, 대개 정할 때에 반드시 사욕이 없는 것을 위주로 해서 동하는 곳마다 집착하는 걱정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허하게 된 효과로 명해서 통하게 되는 것이고, 직하게 된 효과로 공해서 부하게 되는 것인데, 경이 바로 사욕을 제거하고 허와 직에 이르는 요체라고 할 것이다.
● 사잠(四箴)
정자가 이르기를, “안연이 극기복례의 조목을 묻자, 공자가 ‘예가 아니면 보지 않는 것이며, 예가 아니면 듣지 않는 것이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않는 것이며,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이 네 가지는 몸의 작용에 속하는 것으로서, 내면의 마음을 통해서 외물(外物)에 반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외물에 대해 제재를 가하는 것은 내면의 마음을 기르기 위함이다. 안연이 이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겠다고 한 것은 성인의 길로 나아가기 위함이었으니, 학자들은 이 말씀을 가슴속에 새기고서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그래서 이에 대한 잠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였다.”라고 하였다.〔程子曰 顔淵問克己復禮之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四者 身之用也 由乎中而應乎外 制於外 所以養其中也 顔淵事斯語 所以進於聖人 學者宜服膺而勿失也 因箴以自警〕
정자의 시잠에 이르기를, “마음의 본체는 허령(虛靈)한지라, 외물(外物)에 응할 적에 종적(蹤迹)이 없다. 마음을 잡아 보존하는 요령이 있으니, 보는 것이 바로 그 법도가 된다. 외물이 가리우며 눈앞에 교차하면, 마음 또한 옮겨가게 마련이다. 따라서 밖에서 제어하여 안을 안정시켜야 하는 것이다. 극기복례 공부를 이로부터 시작하면, 시간이 감에 따라 성의 경지에 이르리라.”라고 하였다.〔其視箴曰 心兮本虛 應物無迹 操之有要 視爲之則 蔽交於前 其中則遷 制之於外 以安其內 克己復禮 久而誠矣〕
정자의 청잠에 이르기를, “사람이 양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천성에 근본한 것이다. 하지만 지각이 발동하면 유혹을 받고 외물에 따라 변해서 마침내는 그 바름을 잃게 되는 것이다. 출중한 저 선각자들은 머물 곳을 알아서 안정을 취하는 바가 있었다. 그들은 밖의 사를 막고 안의 성을 보존하여, 예가 아니면 들으려 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其聽箴曰 人有秉彛 本乎天性 知誘物化 遂亡其正 卓彼先覺 知止有定 閑邪存誠 非禮勿聽〕
정자의 언잠에 이르기를, “사람의 내심이 동하면 말을 통해서 밖으로 드러난다. 발언할 적에 조급함과 경망함을 금하면 내심이 고요하고 전일해질 것이다. 더구나 말은 중요한 계기로 작용해서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친선을 도모하기도 한다. 길흉과 영욕도 모두가 말로 인해서 초래되는 것이다. 말을 쉽게 하면 허탄해지고, 말을 번잡하게 하면 지리멸렬해지고, 자기가 멋대로 말을 하면 남도 어그러지는 말을 하고, 도리에 위배된 말을 하면 남도 위배된 말로 대꾸한다. 법도에 맞지 않으면 말을 하지 말고서, 훈계한 말씀을 공경히 따를지어다.”라고 하였다.〔其言箴曰 人心之動 因言以宣 發禁躁妄 內斯靜專 矧是樞機 興戎出好 吉凶榮辱 惟其所召 傷易則誕 傷煩則支 己肆物忤 出悖來違 非法不道 欽哉訓辭〕
정자의 동잠에 이르기를, “철인은 선악의 기미를 알고서 생각부터 참되게 하고, 지사는 행동에 힘쓰면서 하는 일마다 정도를 준수하려고 한다. 올바른 도리를 따르면 여유가 있게 되는 반면에, 사적인 욕망을 따르면 위태로워지게 마련이니, 다급한 순간이라도 제대로 생각해서 전전긍긍하며 스스로 견지해야 할 것이다. 습관이 천성처럼 이루어지면 성현과 똑같은 경지로 귀착되리라.”라고 하였다.〔其動箴曰 哲人知幾 誠之於思 志士勵行 守之於爲 順理則裕 從欲惟危 造次克念 戰兢自持 習與性成 聖賢同歸〕
○ 이에 대한 나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이 네 가지는 내면의 마음을 통해서 외물(外物)에 반응하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예가 아닌 것을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것은 외부에서 들어와 내부를 동요시키지 않게 막는 것이요, 예가 아닌 것을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것은 내부에서 나와 외부의 사물을 접할 때에 삼가는 것이다.〔非禮而勿視聽者 防其自外入而動於內者也 非禮而勿言動者 謹其自內出而接於外者也〕”라고 하였다.
이 네 가지를 발(發)하는 곳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정자가 말한 것처럼 모두 내면(內面)에서 나오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긴 하지만 이것을 다시 세분(細分)한다면, 외물(外物)의 유혹은 단지 보고 듣는 것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주자가 다시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설을 제기한 것이다. 예가 아닌 것을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것은 모두 외부의 유혹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시잠(視箴)과 청잠(聽箴) 두 편은 그 말이 대체로 유사하다. 참으로 보고 들을 때에 예가 아닌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일체 금할 수만 있다면, 삿되고 편벽된 유혹에 빠지는 뜻이 자연히 없어지게 될 것이다.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모두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긴 하다. 그렇긴 하지만 말은 단지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것인 반면에, 행동은 몸과 마음으로 지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말에 비해서는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두 개의 잠에서 말한 것이 서로 다른 것이다.
언잠(言箴)에서 경계한 것은 단지 조급하고 경망스럽게 말하는 것과 하면에 나오는 네 항목의 병통일 뿐이다. 그러나 네 항목의 병통 역시 조급하고 경망스럽게 말하는 것에서 빚어지는 것이니, 조급하고 경망스럽게 말하는 것이 없다면 이 네 가지 병통도 자연히 없어지게 될 것이다. 조(躁)라는 것은 경망스럽게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이요, 망(妄)이라는 것은 도리에 위배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언어상의 모든 잘못은 단지 이 두 글자로 포괄할 수가 있으니, 언잠에서 말한 ‘발금조망(發禁躁妄)’의 한 구절이야말로 공부에 가장 긴요한 말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행동으로 말하면 몸과 마음으로 지어내는 것인 만큼 선과 악이 나뉘는 것이 모두 여기에서 판가름 난다고 할 것이니, 보고 듣고 말하는 것에 비해서 더욱 중대한 관계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동잠(動箴)에서 말한 것이 더욱 절실하기 그지없다. 그리하여 올바른 도리와 사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데 따라 여유 있게 되고 위험하게 되는 차이를 분별한 다음에 성찰(省察)하고 지수(持守)하는 일을 또 말한 것이니, 올바른 도리에 따르도록 노력하고 사적인 욕망을 경계하려고 한 그 뜻이 매우 엄밀하다고 하겠다. 이 두 구절은 바로 몸과 마음으로 계구(戒懼)하고 신독(愼獨)하는 지극히 절실한 공부에 해당된다고 할 것인데, 동잠(動箴)에 와서야 비로소 이것을 언급하였으니, 이는 관계되는 바가 가장 크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학자는 모름지기 이 네 가지의 일에 대해서 각자 있는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네 가지 일 중에서도 각자 긴요하고 절실한 곳에 힘을 기울여서 이 네 가지 모두가 예에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어느 날엔가는 인욕이 말끔히 사라지고 천리가 넘쳐 흐르는 때를 보게 될 것이다. 정자의 이 사잠(四箴)이야말로 부자가 말씀하신 취지를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드러낸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 경재잠(敬齋箴)
주자의 경재잠에 이르기를,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존엄하게 한 가운데, 마음을 오롯이 하여 거하면서, 상제를 대하는 것처럼 할지어다. 걸음걸이는 반드시 무게 있게 하고, 손 모양은 반드시 공손하게 할 것이며, 땅을 가려서 밟을 것이요, 의봉을 만나더라도 절선해야 할 것이다. 문밖에 나가서 사람을 대할 때에는 손님을 대접하듯 하고, 일을 봉행할 적에는 제사를 받드는 것처럼 할 것이니, 항상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마음으로, 혹시라도 감히 함부로 하는 일이 없을지어다. 입을 지키기를 마개 닫힌 병처럼 하고, 뜻을 막기를 성곽처럼 하여, 성실하고 일관된 자세를 견지하면서, 혹시라도 감히 경솔하게 하지 말지어다. 동쪽 서쪽으로 가지도 말 것이요, 남쪽 북쪽으로 가지도 말 것이니, 일을 당해서는 마음을 보존하여,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도록 할지어다. 두 개의 일이 있다고 해서 마음이 둘이 되면 안 되고, 세 개의 일이 있다고 해서 마음이 셋이 되면 안 되니, 오직 마음을 전일하게 해서 온갖 변화를 제대로 살펴 대처해야 할 것이다. 이상의 원칙에 입각해서 힘써 나간다면 이것을 일컬어 지경 공부라고 하나니, 동하고 정함에 어긋남이 없게 하고, 안과 밖이 서로 바르게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잠시라도 중단하는 일이 있게 되면, 온갖 사욕이 기승을 부리게 된 나머지, 불을 때지 않아도 마음이 뜨거워지고, 얼음이 얼지 않아도 마음이 차가워질 것이다. 털끝만큼이라도 차질이 생기면, 하늘과 땅이 뒤바뀐 나머지, 삼강이 없어지게 됨은 물론이요, 구법도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다. 아, 공부하는 이들이여, 항상 염두에 두고서 경의 자세를 지닐지어다. 묵경에게 경계하는 글을 쓰게 하면서, 감히 영대에 고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朱子敬齋箴曰 正其衣冠 尊其瞻視 潛心以居 對越上帝 足容必重 手容必恭 擇地而蹈 折旋蟻封 出門如賓 承事如祭 戰戰兢兢 罔敢或易 守口如甁 防意如城 洞洞屬屬 罔敢或輕 不東以西 不南以北 當事而存 靡他其適 弗貳以二 弗參以三 惟心惟一 萬變是監 從事於斯 是曰持敬 動靜弗違 表裏交正 須臾有間 私欲萬端 不火而熱 不氷而寒 毫釐有差 天壤易處 三綱旣淪 九法亦斁 於乎小子 念哉敬哉 墨卿司戒 敢告靈臺〕
○ 이에 대한 나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이 편은 모두 4구(句)마다 1장(章)을 이루고 있다. 이 편의 첫 대목부터 ‘만변시감(萬變是監)’까지가 여섯 장이 되는데, 힘쓰는 방법을 말한 것은 오로지 이 여섯 장에 들어 있다. 각 장마다 각기 하나의 일을 거론하고 있는데, 지경(持敬)하는 조목은 이 여섯 가지 안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정기의관(正其衣冠)의 4구는 거처(居處)할 때의 공부이니 정(靜)한 상태에서의 경(敬)을 말하고, 족용필중(足容必重)의 4구는 행보(行步)할 때의 공부이니 동(動)한 상태에서의 경을 말한다. 사람의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정이 되고, 행동할 때에는 동이 된다. 거처할 때에는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용모(容貌)를 장엄(莊嚴)하게 한 가운데, 그 마음을 늠연(凜然)하게 하여 마치 신명(神明)을 대하는 것처럼 해야 할 것이요, 행보할 때에는 팔을 펴고 손을 마주 잡는 것과 서서히 걸어가는 것을 종용(從容)하고 단중(端重)하게 하고, 땅을 밟고 걸어갈 때에도 자세히 살펴야 함은 물론, 방향을 바꿔서 돌아갈 때에도 법도가 있게 해야 할 것이다. 거처할 때에도 이와 같이 하고 행보할 때에도 이와 같이 한다면, 동정(動靜) 간에 누락된 점이 없게 될 것이다.
출문여빈(出門如賓)의 4구는 밖에 있으면서 응접할 때 힘써야 할 항목이니 이것은 표(表)의 경(敬)에 해당하고, 수구여병(守口如甁)의 4구는 혼자 있을 때 의념상(意念上)으로 힘써야 할 항목이니 이것은 이(裏)의 경에 해당한다. 응접하는 것은 외면의 일로서 현현(顯見)하는 것인 만큼, 이러한 때에는 과실이 드러나게 될 걱정이 있으니, 항상 계구(戒懼)하는 가운데 감히 혹시라도 함부로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요, 생각하는 것은 내면의 일로서 은미한 것인 만큼, 이러한 때에는 사벽(邪僻)이 싹틀 걱정이 있으니, 항상 엄외(嚴畏)하는 가운데 감히 혹시라도 경솔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현현하는 곳에서도 계구하고 은미한 곳에서도 엄외한다면 현현하고 은미한 곳 어디에도 누락된 점이 없게 될 것이다.
부동이서(不東以西) 4구는 사(事)의 주일(主一)을 말하고, 불이이이(弗貳以二)의 4구는 심(心)의 주일을 말한다. 일이 있을 때에는 마음이 일에 있게 되고, 일이 없을 때에는 마음이 내면에 있게 된다. 마음이 일에 있을 때에는 오직 이 일에 마음을 두고서 동쪽 서쪽으로 가지 않게 해야 하니 이것이 사의 주일이요, 마음이 내면에 있을 때에는 오직 담연(湛然)한 상태를 유지하고서 두 개 세 개로 뒤섞이지 않게 해야 하니 이것이 심의 주일이다.
일이 있는 것은 동(動)이요 일이 없는 것은 정(靜)이니, 여기에서 말한 것도 동정(動靜)이다. 그러나 위 글에서 말한 동정은 몸의 동정이요, 여기에서 말한 동정은 마음의 동정이니, 그 일이 더욱 정밀하게 밝혀지면서 그 뜻이 더욱 치밀하게 드러났다고 하겠다. 몸으로 힘써야 할 일을 말한 위에 다시 마음으로 힘써야 할 일을 말하였으니, 이는 또 정추(精粗) 간에 누락된 점이 없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동정(動靜)과 표리(表裏)와 정추(精粗) 사이에 모두 극진하게 공을 들여서 빠진 점이 없게 하고 끊어지는 점이 없게 하였으니, 지경(持敬)의 공부가 더할 나위 없이 구비되고 정밀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종사어사(從事於斯)의 4구는 이 여섯 장의 공부를 총괄해서 말한 것이다. 그리고 수유유간(須臾有間)의 4구와 호리유차(毫釐有差)의 4구는 모두 불경(不敬)의 병폐를 말한 것인데, 수유유간은 마음의 병폐를 말하였고, 호리유차는 일의 병폐를 말하였다. 마지막 4구는 또 총괄하여 매듭을 지은 것이다.
경(敬)은 성학(聖學)에서 말하는 심법(心法)의 제일의(第一義)이다. 천성(千聖)이 논한 심법의 요체가 이 한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경을 행하는 방도를 말한 것이 무엇보다도 이 편에 가장 갖추어져 있다. 따라서 학자가 이를 통해 노력한다면 그 마음이 보존되고 덕이 쌓여서 날마다 성현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니, 그 누가 이를 막을 수 있겠는가.
●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진씨의 숙흥야매잠에 이르기를, “닭 우는 소리에 잠을 깨고 나면, 사려가 싹트면서 점차로 치달리게 되나니, 담연한 마음으로 정돈하는 일을, 어찌 그 사이에서 하지 않을쏘냐. 지난날의 허물을 반성도 하고, 새로 얻은 실마리를 풀어내기도 하면서, 차근차근 순서대로 조리에 맞게, 명료하게 말 없는 가운데 다짐해야 하리로다. 이처럼 근본 자세를 일단 세운 위에, 먼동이 트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서, 세수하고 빗질하고 옷을 입고 관을 쓰고, 단정히 앉아 외모를 단속해야 하리로다. 이 마음을 돌아보고 점검을 하며, 떠오르는 태양처럼 한 점 의혹이 없게 하여, 엄숙하게 바로잡아 가지런히 하고, 허명하고 정일한 상태를 유지할지로다. 이에 비로소 서책을 펼쳐 들고서, 성현의 말씀을 마주 대할지니, 부자께서 자리에 앉아 계시고, 안자와 증자가 앞뒤로 서 있도다. 성인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들을, 간절한 마음으로 공경히 듣고, 제자들이 묻고 토론한 말에 대해, 반복해서 참고하며 연구할지라. 일을 당해서 응수할 때에는, 하는 일마다 징험을 하며, 밝은 명이 성대히 빛나도록, 항상 눈 안에 두어야 할지니라. 응수하는 일이 일단 끝나면, 나는 그 전처럼 변함이 없이, 방촌을 맑은 물처럼 유지하면서, 정신을 모으고 생각을 쉴지로다. 동과 정이 고리처럼 도는 속에서, 오직 나의 마음을 돌아볼지니, 정할 때엔 존양(存養)하고 동할 때엔 성찰(省察)하여, 둘이 되거나 셋이 되지 말지어다. 글을 읽다가 틈이 생기면, 이따금 한가로이 완상(玩賞)도 하며, 정과 신을 발산해 펴기도 하고, 정과 성을 쉬면서 기르기도 할지로다. 날이 어둑해지면 사람도 피곤해서, 혼미한 기운이 편승하기 쉽나니, 엄숙하고 장중하게 몸을 가다듬고, 밝고 깨끗한 마음을 추스릴지라. 밤이 깊어서 잠자리에 들 때에는, 손과 발을 가지런히 거두어들이고서, 다른 생각에 이끌리는 일이 없이, 마음과 정신이 안정되게 할지로다. 그리하여 야기로써 길러 나가면, 정이 곧 원으로 돌아오듯 할 것이니, 항상 잊지 말고 이를 명심하여, 낮이고 밤이고 자강불식(自彊不息)할지어다.”라고 하였다.〔陳氏夙興夜寐箴曰 鷄鳴而寤 思慮漸馳 盍於其間 澹以整之 或省舊愆 或紬新得 次第條理 瞭然黙識 本旣立矣 昧爽乃興 盥櫛衣冠 端坐斂形 提掇此心 皦如出日 嚴肅整齊 虛明靜一 乃啓方冊 對越聖賢 夫子在坐 顔曾後先 聖師所言 親切敬聽 弟子問辨 反復參訂 事至斯應 則驗于爲 明命赫然 常目在之 事應旣已 我則如故 方寸澹然 凝神息慮 動靜循環 惟心是監 靜存動察 勿貳勿參 讀書之餘 間以游泳 發舒精神 休養情性 日暮人倦 昏氣易乘 齋莊正齊 振拔精明 夜久斯寢 齊手斂足 不作思惟 心神歸宿 養以夜氣 貞則復元 念茲在茲 日夕乾乾〕
○ 이에 대한 나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이 잠(箴)의 대략적인 내용을 논한다면 4절(節)로 나누어야 할 것이요, 그 속에서 다시 세분(細分)한다면 9절이 된다고 할 것이다.
이 편의 처음부터 허명정일(虛明精一)까지는 이른 아침 이전의 일이요, 내계방책(乃啓方冊)부터 휴양정성(休養情性)까지는 낮 사이의 일이요, 일모인권(日暮人倦)부터 심신귀숙(心神歸宿)까지는 야간(夜間)의 일이요, 양이야기(養以夜氣) 이하는 주야(晝夜)를 아울러 말한 것으로서 바로 총 결론에 해당하니, 이것이 대략적인 내용이다.
세분한다면 다음과 같다. 이른 아침 이전의 일은 또 2개의 절(節)이 되니, 수구(首句) 이하 8구는 잠을 처음 깨어서 아직 일어나기 이전의 일이요, 본기립의(本旣立矣) 이하 8구는 이미 일어난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이 모두가 몸과 마음으로 공부해야 할 조목이지만, 담이정지(澹以靜之)는 존양(存養)에 관한 일이요, 혹성구건(或省舊愆)과 혹추신득(或紬新得)은 성찰(省察)에 관한 일이니, 잠을 깨는 즉시로 힘써야 할 조목들이다. 관즐의관(盥櫛衣冠)과 단좌염형(端坐斂形)은 몸을 점검하는 일이요, 제철차심(提掇此心)은 마음을 다잡는 일이며, 엄숙정제(嚴肅整齊)는 몸을 가지고 말한 것이고, 허명정일(虛明靜一)은 마음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낮 사이의 일도 4절로 나뉜다. 내계방책(乃啓方冊) 이하 8구는 독서에 대해서 말하였고, 사지사응(事至斯應) 이하 8구는 일을 응접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였고, 동정순환(動靜循環) 4구는 일을 응접하는 것을 이어서 말하였고, 독서지여(讀書之餘) 4구는 독서에 대한 일을 이어서 말하였다. 낮 사이에 하는 일로는 단지 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글을 읽을 때에는 성현을 마주 대한 것처럼 하고, 일을 응접할 때에는 항상 밝은 명을 돌아보아야 하니, 이것은 성찰(省察)에 해당한다. 그리고 일을 응접하는 것이 끝난 뒤에는 그 마음을 고요하고 안정된 상태로 되돌리고, 글을 읽다가 피곤할 적에는 또 한가로이 완상(玩賞)하며 휴양도 해야 하니, 이것은 존양(存養)에 해당한다. 이 항목들은 모두 낮 시간이 끝날 동안의 동정(動靜)과 적감(寂感) 사이에서 우리가 마음을 써야 할 것들이라고 하겠다.
야간(夜間)의 일은 또 2절로 나뉜다. 일모인권(日暮人倦)의 4구는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 아직 잠자리에 들기 이전의 일이요, 야구사침(夜久斯寢)의 4구는 누운 뒤에 아직 잠들기 이전의 일이다. 그런데 재장정제(齋莊正齊)는 몸에 대해서 말한 것이고, 진발정명(振拔精明)은 마음에 대해서 말한 것이며, 제수염족(齊手斂足)은 몸을 말한 것이고, 심신귀숙(心神歸宿)은 마음을 말한 것이다. 대개 새벽녘에 잠자리에서 금방 눈을 뜬 시각부터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어서 아직 잠들기 이전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순간도 해야 할 일이 없는 때가 없으니, 이 모두가 몸과 마음의 공부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몸과 마음에 공력을 쏟는 것이 이처럼 치밀하기만 한데, 여기에 염자재자(念茲在茲)와 일석건건(日夕乾乾)으로 결론을 맺었으니, 경책(警策)하는 뜻이 간절하기 그지없다고 하겠다.
내가 나름대로 살펴보건대, 이 잠(箴)이야말로 일상생활 중의 공부로 가장 긴요하고 절실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감히 여기에 모아 첨가한 뒤에 나의 천견(淺見)을 덧붙여서 그 뜻을 대략 이와 같이 밝혀 보았으니, 학자가 가슴에 새겨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지은 뒤로 지금 20년이 된다. 이것은 모두가 옛날 성현들의 격언(格言)으로서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닦기 위한 것들이요, 나아가서는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되는 공부에 있어서도 요체가 되는 것들이라고 하겠다. 내가 가령 이에 대해서 제대로 힘썼다면 지금쯤에는 필시 스스로 우뚝 설 수 있었을 것인데, 어찌하여 이 글을 짓고 나서는 다시 힘쓰지 못한 채 끝내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말았단 말인가. 어찌하여 제대로 택할 줄은 알았으면서도 제대로 지킬 줄은 모른 나머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했단 말인가. 그러니 내가 어찌 한스럽고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가 있겠는가.
다행히 이 책을 병화(兵禍)의 와중에서 잃어버리지 않아 지금 흩어진 서책 속에서 발견하고 보니 그저 망연할 따름이다. 지금부터라도 힘을 기울여 보고도 싶지만, 남은 생애를 돌아보면 벌써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섰다. 그렇긴 하지만 이 일은 바로 우리 사람들이 죽은 뒤에야 그만둘 일이니, 또 어찌 늙어가는 것을 느낄 틈이 있다고나 하겠는가. 이에 느낀 점을 기록하는 바이다. 정축년(1637) 10월 무오일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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