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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9월7일 월요일 [(녹)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청주] 마음을 펴라.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콜로 1,24─2,3
+ 복음 루카 6,6-11
◈ 오늘의 묵상
유다교 묵시 문학에서 ‘신비’는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갖고 계시지만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인간 역사의 계획을 가리킵니다. 한편
헬레니즘 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신비 종교에서는 ‘신비’가 그 종교에
입문한 이들에게만 전해지는 은밀한 가르침을 지칭하는데, 그 가르침을
전수받은 이들은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신비’는 이 두 가지 전통의 영향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비는 감추어진 채로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납니다. 그래서 콜로새서는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라고 선언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이르는데, 그분께서 오심으로써 이제 그 신비가 우리에게
계시되었으며, 그분 안에서 우리는 완성의 희망을 품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에 덧붙여 콜로새서는, 그 신비를 전하는 교회의 일꾼이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자신의 육신으로 채우고 있다고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기 시작한 하느님의 계획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그 지체인 우리 신자들이 해야 할
수고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넓은 전망 안에서 살펴볼 때, 아직 하느님의 계획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통과 수고와 환난은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는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그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에게 계시는
되었지만 인간이 아직 온전히 알 수 없는 것이 신비의 특성이라면, 그
수고의 의미는 종말에 가서야 비로소 충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보다 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분명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율법주의, 근본주의를 경계해야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근거로 규정과 법규를 자기에게 편리하고 유리하게
마음대로 해석하려는 유혹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서울]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2015년 나해 9월7일 월요일 [(녹)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제1독서
<과거의 모든 시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를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려고,
나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1,24─2,3
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6-11
뜻하지 않게 양평 서종에 작은 땅을 샀습니다. 벌써 7년가량 되었습니다.
땅이 있다고 다 집을 짓고 사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같은 땅이라도 그
용도가 참 다양한 것 같습니다. ‘대지, 임야, 전’으로 구분이 되는 것
같습니다. 진입로가 있어야 하고, 벌목도 해야 되는가 봅니다. 저는
아버님을 위해서 땅을 샀는데, 아버님께서 하늘나라로 가셨기 때문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와 비슷한 시기에 땅을 사신 분들은
사정이 다른 것 같습니다. 집을 짓고 살아야 하는데 상당히 많은 규제와
제약이 있는 것 같습니다. 땅을 판 사람이 해 주어야 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도 같고, 땅을 산 사람들도 저마다 사정이 있기 때문에
쉽게 해결 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아무쪼록 전원생활의 꿈을 가지고 땅을
산 사람들의 소망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체험했고,
예수님께서 모든 삶의 중심이 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전하며 평생을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의 그와 같은 체험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사목국에 있을 때 함께 지내던 주교님께서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늘 이렇게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면 어려움도, 갈등도, 아픔도 다 해결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제 앞에 어떤 일이 생기면, 먼저 제 스스로 해결하려고 할 때가
많았습니다. 제 판단의 기준은 ‘양보, 용서, 이해와 협력’이기보다는 저
자신의 욕심을 먼저 따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양보하고, 용서하며, 이해하셨을 것들을, 저는 자존심과 이기심 그리고
분노와 원망을 앞세워 단죄하고 미워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신앙인은 삶을 살아가는 자세가 세상 사람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 별로 차이가 없기 때문에 간디는 신앙인을 보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존경하지 않는다.’ 이 말은 지금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나오지만, 우리 주변에는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체면 때문에, 시기와 질투 때문에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욕심과 명예 때문에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오그라든 마음을 바르게 펴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느끼며 살게 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그분은 우리 삶의
모든 지혜와 보물을 알려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한 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입니다.
주님과 함께 오그라든 나의 마음을 활짝 펼 수 있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예수님의 그런 점이 참 멋져요.
“소털 뽑아 고자리에 다시 꼽겠다는 사람이라고 흉볼 때가 있었습니다.
고지직하고 외골수로 나가는 비합리적 사고방식을 꾸짖던 말입니다.
그런데 누가 왜 그게 원칙이라고 정한 건지 이해 안 갈 때가 많습니다.
유교의 가르침에서 남녀 칠세 부 동석, 남존 여비도 해당 되겠군요.
이런 건 그 시대에나 맞을 법한 것이지 자연의 흐름은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자연스럽게’라는 말이 있듯, 전 예수님의 그런 점이 참 멋져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인천] 주님을 진심으로 자주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2015년 나해 9월7일 월요일 [(녹)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제1독서
<과거의 모든 시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를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려고,
나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1,24─2,3
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6-11
예전에 어느 성당으로 강의를 간 적이 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성당
마당에 나와 돌아가시는 분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을 때였지요.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고등학생 쯤 되어 보이는 딸의 손을 잡고 제게 오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혹시 저 모르시겠어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신부님과 같은 초등학교를 다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초등학교 6년을 다니면서 두 번이나
같은 반이었다고 하는데 저는 처음 보는 얼굴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못
알아봐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나중에 다시 보게 될 때에는 꼭
알아보고 먼저 인사하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헤어졌지요. ‘두 번이나 같은
반이었다는데 왜 몰라보았을까? 아마도 반에서 잘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친구였나 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얼른 초등학교 졸업 앨범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초등학생 때 너무 예뻐서 남자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던
친구였고, 저 역시 관심이 많았지만 수줍음을 워낙 많이 탔던 시기라서
표현하지 못하고 그냥 마음속으로만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랬던 친구였는데 전혀 알아보지를 못한 것입니다. 잠깐이라도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시간의 흐름 때문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보지 않으니 제 기억 속에
사라졌고 더군다나 30년이 훨씬 넘은 시간은 그 친구의 예쁘장한 예전
얼굴 찾는 것을 힘들게 만든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완벽한 기억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하기에 오랫동안 보지 않으면 잊히는 것도 당연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계속 기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계속 만나고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을 멀리하고 그래서 사랑의
주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사랑의 주님을 잊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인 바리사이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안식일 논쟁을 벌이지요.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해석한 율법, 그렇게 하느님을 멀리했기 때문에 율법을 만드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음을 묵상해 봅니다. 나의 입장만을 내세워서 오랫동안
하느님의 뜻을 멀리한다면 바로 옆에 주님이 계셔도 알아볼 수 없으며,
주님을 잊어버려 자신의 입장을 내세울 수 없음에 이상한 마음을 품어
오히려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큰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자주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곧 나를 내려놓고
주님의 뜻인 사랑의 삶을 살아갈 때에 가능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경청의 태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찬사 가운데 하나이다(카네기).
지나가다 본 고깃집 광고 구조물. 정말 맛있을까요?
신독(愼獨)의 삶을 지향하며
올해 안식년이라 아파트에서 혼자 지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특별히
맡겨진 일이 없다보니 때로는 게을러지는 것 같습니다. 전날 술을
늦게까지 하는 날이면 아주 이른 시간에 새벽 묵상 글을 올려놓은 뒤에
아주 푹 잡니다. ‘안식년이니까 언제 이렇게 게으름을 피워 보겠어.’라는
마음을 간직하면서 말이지요.
언젠가도 이러한 마음을 갖고서 아주 늦게 일어났습니다. 씻고 난 뒤에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하고나서 인터넷을 살펴보았지요. 그런데 어떤 분이
제 묵상 글에 “신부님, 아주 일찍 일어나셨네요. 어떻게 하면 이렇게
부지런하실 수 있습니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댓글을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이제 일어났는데 말이지요. 그리고 안식년이라는 이유로
게으름을 피웠던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공자의 대학을 보면 신독(愼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지 않고 삼가는 것이라는 뜻이지요.
혼자 있는 시간에 게을러지고 ‘이 정도는 괜찮아.’라는 안일한 마음을
품고 있는 저를 깨우치는 말입니다.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에 집중하기 보다는, 내 자신에게 당당한 모습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가짜, 위선의 삶을 벗어던지고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도 좋아하시는 삶이 아닐까요?
공원에 놓인 작품. 직접 볼 때는 멋있었는데....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9월7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손을 뻗어라.”> (루카 6,10)
여러분은 손에 문제가 없나요.
펴고 오그리는데 아무렇지도 않나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서 펴게 해 주시네요.
오른손이 오그라들었다면 일도 제대로 못하고 사람구실도 어려웠겠지요.
예수님은 이렇듯 자상하시게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시네요.
그런데 말입니다.
내 손이 성하다고 하면서도 어려운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줄 모른다면 그게 바로 손이 오그라든 것이 아닐까요?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오늘 "손을 뻗어라!" 하시네요.
오늘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나
만나게 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게 되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꼭 기억합시다. "손을 뻗어라!"
내 손도 성해지고 그 사람도 행복해지니 이것이 참된 치유가 아닐까요?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나해 9월7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루카 6,10)
오그라든 생명을 모른 체하지 않으시는 우리의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랑만이 오그라든 우리의 슬픈 마음을 활짝 펼 수 있습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건 먼저 오그라든 마음을
펴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픔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새로이 시작하고 새로이 살기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랑이신 주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축복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감당할 수 없는 아픔과 욕심으로 오그라든 우리의 마음을
먼저 예수님께 드릴 수 있어야합니다.
다시 성하여지고 다시 건강해지는 기쁨의 삶이란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손을 뻗어라."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 -
때와 장소와 틀보다 더 고귀한 생명을 위하여
2015년 나해 9월7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루카 6,6-11
“안식일에 목숨을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때와 장소와 틀보다 더 고귀한 생명을 위하여
어느 시대든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는 늘 긴장과 대립이 있어왔다.
근본주의는 지나친 엄격성을 불러와 인간을 도외시한 율법주의나
법실증주의를 낳기도 했다. 실제 삶에서도 의미와 존재, 특히 생명보다
시간과 공간, 틀과 규범을 중시하는 모습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이런
삶이 과연 행복을 불러올까? 하느님의 계명은 인간을 살리고 자유롭게
하는 길인데 말이다.
오늘 복음은 ‘또 다른 안식일에’(6,6)라는 말로 시작된다.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길에 점점 긴장이 고조되어 가고 있고, 적대자들의
반대가 심해지고 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고
계셨다. 마침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6,7)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알아차리시고 손이 오그라든 이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셨다(6,8). 그분은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6,9) 하고 물으셨다.
선을 이루고 목숨을 구하는 일은 시간과 장소나 규정에 매이는 것이
아니며 생명보다 더 고귀한 것은 없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이렇게 율법의
근본정신을 상기시켜주시면서 그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어 고쳐주셨다
(6,10). 예수님의 치유를 통해 사람들은 이제 인간 위에 구속하는 틀에서
벗어나 ‘인간을 살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유를 체험한다.
하느님의 계명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회복시키기 위해 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자유와 생명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신다.
철저히 인간을 위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메시아 예수님은 인간성을 회복하고 하느님의 선이 모든 이 안에서
되살아나도록 온 존재를 바치실 것이다. 인간의 존엄함을 무시하고 생명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는 이는 결국 하느님을 배척하는 사람이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안티파스로부터 환심을 사고
자신들의 권력과 지위를 지키는데 혈안이 되어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6,11) 그들은 사람의 생명이나 선(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나 실은 그들의
삶은 이미 살아 있으나 스스로가 만든 영혼의 감옥에 갇힌 수인과
다름없었다.
우리 삶에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선을 이루고 존엄한 생명을
그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시 하고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목숨 앞에 시간도 장소도, 물질이나 권력도 그것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의 삶이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
이 길에서 우리는 법이나 제도를 결코 인간 생명이라는 지고의 가치보다
중시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되겠다. 최상의 법은 인간의 구원임을
잊지 않도록 하자.
온갖 생명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더라!’ 하시며 경탄하신 주 하느님!
생명을 소홀히 여겨 도구화 하고 상품화 하는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법이나 제도의 이름으로 서로를 속박하지 않고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
안에서 생명을 노래하는 저희가 되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리하여 저희
안에서 당신 생명의 얼이 꿈틀대는 사랑의 존재가 되게 하소서! 아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청주] 마음을 펴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9월7일 월요일 [(녹)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제1독서
<과거의 모든 시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를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려고,
나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1,24─2,3
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6-11
마음을 펴라.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가을을 느끼게 합니다. 맑고
푸른 하늘은 곡식을 여물게 하는 더없이 좋은 선물입니다. 수확의 때가
되면 수고와 땀의 결실을 맛보게 되는 기쁨이 함께합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때를 기다립니다. 약속된
하느님의 나라를 기억하며 지금 여기서 수고와 땀의 결실을 기뻐합니다.
기쁨은 희망하는 만큼 확인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며 당신의
능력을 통해서 오그라든 손을 이전처럼 성하게 하셨습니다(루가6,10).
손을 뻗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주는 행위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을 받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손을 뻗어 서로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손을 편다는 것은
본인뿐 아니라 모두가 기뻐해야할 일입니다. 그런 기쁨이라면 더 많이
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그 사람들입니다(루가6,7).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들어서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하고 마침내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 수 있을 것인지 의논하였습니다. 자신의 뜻이 이루지지 않는다고
골을 부리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것은 마음이 오그라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것은 아닌지? 내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 상 때문에 다른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 넣어 주시길
청합니다.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시길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안식일은 물리적으로 쉬는 것보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더불어 향유하는 것이라는
깨우침을 얻길 바랍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일에서든 트집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는 무엇인가 꼬인 사람입니다. 얽힌
것을 풀면 좋으련만 바른 것도 그릇 것으로 보니 그 사람은 불행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
사사건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못마땅해 하는 사람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긍정을
찾아내는 삶입니다. 긍정의 주 하느님을 생각하십시오! 행동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주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음자세를 굳건히 하여 참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손을 뻗어 주님의 손을 꼭 잡으시기 바랍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군종] 안식일에 생긴 일
김홍석 신부(군종교구 해성대성당)<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9월7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루카 복음 6장 6-11절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안식일에 생긴 일
옛날 달력이 없던 시절, 가난한 사람들은 매일 매일이 월화수목금금금
이었을 것입니다. 부자들에게는 한주간이 일일일일일일일이었겠죠.
그래서 하루도 쉴 수 없던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에게 하루라도 쉬는 날을
주고 싶었던 하느님의 뜻, 하루라도 쉬어 다시 일할 힘을 얻고 다시 살아
나아가라는 하느님의 의지!
그래서 하느님도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마지막 날을 쉬셨다고 가르치는
성경. 그러므로 안식일은 생명입니다. 부활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안식일에 일을 쉬는 그 이유를, 하느님의 그 선한
의지를 몰랐습니다.
아니 그 선한 의지가 자신들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조항들로 가난한 이들을 묶어 두었습니다.
이방인 종을 둔 이들은 자신들은 쉬면서 그들은 일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손이 오그라든 이는 예수님을 노리는 이들 한가운데서 그분이
시키는 대로 오그라든 손을 내밀고 서 있습니다.
아마 가늘게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선한 의지의 편에 섰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팔을 고침으로서 자신도 그들의 표적이 될 줄
알았지만 그는 선택했습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하느님의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의 용기에 하느님의 선한 의지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 살리시는 하느님의 편이 아닌, 죽이는 사람의 편에 서서 지었던
우리의 잘못들을 살펴봅시다.
- 김홍석 요나 신부(군종교구 해성대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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