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불교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관문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 불기 2559년(2015년) 5월 21일 후기
Bhikkhu Bodhi 스님의 In the Buddha's Words (17)
서울경기강원지역방 3334번 글 http://cafe.daum.net/altlovebuddha/PEK/3334
의 후속타입니다.
<Bhikkhu Bodhi 스님의 In the Buddha's Words> 를 열일곱 번째로 읽었습니다. 오늘 영어 불서읽기에는 환희장엄 법우, 클나라 법우, 저 관문 이렇게 3명이 참석했습니다.
오늘도 지난번에 모였던 장소 ‘Cafe 57th’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곳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80 미터 가량 직진하신 후 풍문여고를 오른 쪽에 끼고 돌아서 약 60 미터 가면 보이는 곳입니다. 모이는 때는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교재 <Edited and introduced by Bhikkhu Bodhi, In the Buddha's Words> 중 III. Approaching the Dhamma의 Text 5. Steps toward the Realization of Truth를 읽었습니다. 오늘로서 III. Approaching the Dhamma가 끝났습니다. 교재 96페이지 밑에서 4째 줄부터 103페이지 끝까지입니다.
<Bhikkhu Bodhi 스님의 In the Buddha's Words>를 읽는 동안의 후기는 영어와 저희가 시도해 본 번역을 올리겠습니다. 아직 이 책의 우리말 번역본이 없어서 이 후기는 순전히 저희 영어불서 읽기 모임의 작품이 되겠습니다.
III. Approaching the Dhamma
제3장 담마[법, 진리]에 다가가기
5. STEPS TOWARD THE REALIZATION OF TRUTH
5. 진리의 깨달음을 향하여 가는 단계
10. Then the brahmin Caṅkī,18 together with a large company of brahmins, went to the Blessed One, exchanged greetings with him, and sat down at one side.
10. 그리고 나서 바라문 짱끼(주18)는 많은 바라문 동료와 함께 세존께 가서, 인사를 나누고 한 쪽 편에 앉았다.
NOTE 18. He was a prominent brahmin who ruled over Opasāda, a crown property in the state of Kosala that had been granted to him by King Pasenadi.
(주 18) 그는 저명한 바라문으로 오빠사다 마을을 다스리고 있었다. 이 마을은 꼬살라 국 왕의 소유지인데, 빠세나디 왕이 그에게 하사한 것이다.
11. Now on that occasion the Blessed One was seated finishing some amiable talk with some very senior brahmins. At the time, sitting in the assembly, was a brahmin student named Kāpaṭhika. Young, shaven-headed, sixteen years old, he was a master of the three Vedas with their vocabularies, liturgy, phonology, and etymology, and the histories as a fifth; skilled in philology and grammar, he was fully versed in natural philosophy and in the marks of a great man. While the very senior brahmins were conversing with the Blessed One, he repeatedly broke in and interrupted their talk. Then the Blessed One rebuked the brahmin student Kāpaṭhika thus: “The honorable Bhāradvāja19 shouldn’t break in and interrupt the talk of the very senior brahmins while they are conversing. He should wait until the talk is finished.”
11. 그 때 세존께서는 몇몇 원로 바라문들과 정다운 대화를 마치고 난 후 자리에 앉으셨다. 이 때, 모인 사람 중에 까빠티까라는 바라문 학인이 앉아 있었다. 젊고, 삭발한 머리에, 16세인 그는 세 가지 베다와 함께 어휘론, 의식문집, 음운론, 어원론과 다섯 번째로 역사에도 능통했다. 그는 또 문헌학과 문법에 숙련되어 있었고, 자연 철학[자연 과학]과 위대한 사람의 특징에도 완전히 정통했다. 원로 바라문들이 세존과 대화하는 도중에 그가 자꾸 끼어들어 그들의 대화를 방해했다. 그래서 세존께서 바라문 학인 까빠티까를 꾸짖으시며 이렇게 말했다. “존경하는 바라드와자(주19)는 원로 바라문들의 대화하는 도중에 끼어들어 대화를 방해하지 말라. 그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NOTE 19. Apparently this is Kāpaṭhika’s clan name.
(주 19) 이것[바라드와자]은 까빠티까의 성(姓)인 듯하다.
When this was said, the brahmin Caṅkī said to the Blessed One: “Master Gotama shouldn’t rebuke the brahmin student Kāpaṭhika. This brahmin student is very learned; he has a good delivery; he is wise. He can well take part in this discussion with Master Gotama.”
이렇게 말하자, 바라문 짱끼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바라문 학인 까빠티까를 꾸짖지 마십시오. 이 바라문 학인은 매우 박식합니다. 그는 언변이 아주 훌륭하고, 현명합니다. 그는 고따마 존자와의 이 토론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12. Then the Blessed One thought: “Surely, since the brahmins honor him thus, the brahmin student Kāpaṭhika must be accomplished in the scriptures of the three Vedas.”
12. 그래서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생각했다. “바라문들이 그를 이렇게 존경하는 것을 보니, 바라문 학인 까빠티까는 틀림없이 세 가지 베다 경전에 숙달해 있을 것이다.”
Then the brahmin student Kāpaṭhika thought: “When the ascetic Gotama catches my eye, I shall ask him a question.”
그때 바라문 학인 까빠티까는 이와 같이 생각했다. “사문 고따마가 나를 주시하면, 그에게 질문을 해야겠다.”
Then, knowing with his own mind the thought in the brahmin student Kāpaṭhika’s mind, the Blessed One turned his eye toward him. Then the brahmin student Kāpaṭhika thought: “The ascetic Gotama has turned toward me. Suppose I ask him a question.” Then he said to the Blessed One: “Master Gotama, in regard to the ancient brahmin hymns that have come down through oral transmission, preserved in the collections, the brahmins come to the definite conclusion: ‘Only this is true, anything else is wrong.’ What does Master Gotama say about this?”
그러자 바라문 학인 까빠티까의 마음속의 생각을 마음으로 아시고, 세존께서 그에게 눈길을 주셨다. 그때 바라문 학인 까빠티까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문 고따마가 나에게 눈길을 주셨다. 그에게 질문을 하면 어떨까?” 그래서 그는 세존께 말했다. “존자 고따마여,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고, 성전 모음에 보존되어 온 고대의 바라문의 [베다] 찬가와 관련해서, 바라문들은 ‘이것만이 진리이고 그 밖에 다른 것은 잘못 되었다.’라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는데, 이에 대해 존자 고따마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3. “How then, Bhāradvāja, among the brahmins is there even a single brahmin who says thus: ‘I know this, I see this: only this is true, anything else is wrong’?”—“No, Master Gotama.”
13. “그런데 바라드와자여, 바라문들 가운데 단 한 명의 바라문이라도 ‘나는 이것을 안다. 나는 이것을 본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그 밖에 다른 것은 잘못 되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없습니다, 존자 고따마여.”
“How then, Bhāradvāja, among the brahmins is there even a single teacher or a single teacher’s teacher back to the seventh generation of teachers who says thus: ‘I know this, I see this: only this is true, anything else is wrong’?”—“No, Master Gotama.”
“그렇다면 바라드와자여, 바라문들 가운데 단 한 명의 스승 혹은 칠대의 스승 세대에 이르기까지 단 한 명의 스승의 스승이라도 ‘나는 이것을 안다. 나는 이것을 본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그 밖에 다른 것은 잘못 되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없습니다, 존자 고따마여.”
“How then, Bhāradvāja, the ancient brahmin seers, the creators of the hymns, the composers of the hymns, whose ancient hymns that were formerly chanted, uttered, and compiled, the brahmins nowadays still chant and repeat, repeating what was spoken and reciting what was recited—that is, Aṭṭhaka, Vāmaka, Vāmadeva, Vessāmitta, Yamataggi, Angirasa, Bhāradvāja, Vāseṭṭha, Kassapa, and Bhagu20—did even these ancient brahmin seers say thus: ‘We know this, we see this: only this is true, anything else is wrong’?”—“No, Master Gotama.”
“그렇다면 바라드와자여, 고대 바라문 선각자들, [베다] 찬가의 창작자들, [베다] 찬가의 작곡자들, 이들의 [베다] 찬가들이 예전에 암송되었고, 설해지고, 편찬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바라문들은 아직도 설해진 것을 반복하고, 암송된 것을 암송하면서 암송하고 반복한다. 이를테면, 앗타까, 바마까, 바마데바, 벳싸밋따, 야마딱기, 앙기라싸, 바라드와자, 바쎗타, 깟싸빠, 바구(주20)와 같은 이들이다. 이 고대 바라문 선각자들 중 누구라도 ‘우리는 이것을 안다. 우리는 이것을 본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그 밖에 다른 것은 잘못 되었다.’라고 말했던 사람이 있는가?”—“없습니다, 존자 고따마여.”
NOTE 20. These are the ancient rishis whom the brahmins regarded as the divinely inspired authors of the Vedic hymns.
(주 20) 이들은 바라문들이 하늘의 영감을 받아 베다 찬가(讚歌)를 지은 저자로 여기는 영감을 받은 현자(賢者)들이다.
“So, Bhāradvāja, it seems that among the brahmins there is not even a single brahmin who says thus: ‘I know this, I see this: only this is true, anything else is wrong.’
“그렇다면 바라드와자여, 바라문들 가운데 단 한 명도 ‘나는 이것을 안다. 나는 이것을 본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그 밖에 다른 것은 잘못 되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And among the brahmins there is not even a single teacher or a single teacher’s teacher back to the seventh generation of teachers, who says thus: ‘I know this, I see this: only this is true, anything else is wrong.’
“그리고 바라문들 가운데 단 한 명의 스승 혹은 칠대의 스승 세대에 이르기까지 단 한 명의 스승의 스승도 ‘나는 이것을 안다. 나는 이것을 본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그 밖에 다른 것은 잘못 되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And the ancient brahmin seers, the creators of the hymns, the composers of the hymns … even these ancient brahmin seers did not say thus: ‘We know this, we see this: only this is true, anything else is wrong.’
“그리고 고대 바라문 선각자들, [베다] 찬가의 창작자들, [베다] 찬가의 작곡자들 … 이들 고대 바라문 선각자들조차도 ‘우리는 이것을 안다. 우리는 이것을 본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그 밖에 다른 것은 잘못 되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Suppose there were a file of blind men each in touch with the next: the first one does not see, the middle one does not see, and the last one does not see. So too, Bhāradvāja, in regard to their statement the brahmins seem to be like a file of blind men: the first one does not see, the middle one does not see, and the last one does not see.
“봉사들이 한 줄로 서서 각자가 다음 사람을 잡고 있다고 하자. 맨 앞에 선 자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선 자도 보지 못하고, 맨 뒤에 선 자도 보지 못하면서. 이와 마찬가지로, 바라드와자여, 바라문들의 설한 것과 관련해서 바라문들은 봉사들이 줄을 선 것과 같이, 맨 앞에 선 자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선 자도 보지 못하고, 맨 뒤에 선 자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구나.
“What do you think, Bhāradvāja, that being so, does not the faith of the brahmins turn out to be groundless?”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바라드와자여, 그렇다면, 바라문들의 믿음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았는가?
14. “The brahmins honor this not only out of faith, Master Gotama. They also honor it as oral tradition.”
14. “바라문들은 단지 믿음으로만 이것에 경의를 표하지 않습니다, 존자 고따마여. 그들은 또한 구전으로서 그것에 경의를 표합니다.”
“Bhāradvāja, first you took your stand on faith, now you speak of oral tradition. There are five things, Bhāradvāja, that may turn out in two different ways here and now. What five? Faith, approval, oral tradition, reasoned cogitation, and acceptance of a view as a result of pondering it.21 These five things may turn out in two different ways here and now. Now something may be fully accepted out of faith, yet it may be empty, hollow, and false; but something else may not be fully accepted out of faith, yet it may be factual, true, and unmistaken.
“바라드와자여, 처음에 그대는 믿음에 토대를 두는 입장을 취했는데, 이제는 구전에 대해 말하는구려. 바라드와자여, 지금 여기에서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결과가 드러나는 다섯 가지가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믿음, 승인, 구전, 조리가 선 고찰, 심사숙고한 후에 견해를 받아들임(주21)이다. 이 다섯 가지는 지금 여기에서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결과가 드러난다. 자 어떤 것은 믿음으로 완전히 받아들여지지만, 그것은 공허하고, 비어있고, 거짓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것은 믿음으로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그것이 사실에 관한 것이고, 진실하고, 잘못된 것이 없을 수 있다.
NOTE 21. In Pāli: saddhā, ruci, anussava, ākāraparivitakka, diṭṭhinijjhānakkhanti. Of these five grounds for arriving at a conviction, the first two seem to be based primarily on emotion, the third to be an unquestioning acceptance of tradition, and the last two primarily rational or cognitive. The last three are included among the ten unacceptable grounds for a belief in Text III,2. The “two different ways” that each may turn out are true or false.
(주 21) 빠알리로는 saddhā, ruci, anussava, ākāraparivitakka, diṭṭhinijjhānakkhanti이다. 확신에 도달하기 위한 이 다섯 가지 근거 중에서, 첫 번째 두 가지[믿음, 승인]는 주로 감정에 근거를 둔 것 같아 보이고, 세 번째 것[구전]은 전통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이고, 마지막 두 가지[조리가 선 고찰, 심사숙고한 후에 견해를 받아들임]는 주로 이성적이거나 인식에 관련된 것이다. 마지막 세 가지는 Text III,2에 있는 열 가지 신앙의 받아들일 수 없는 근거에 들어있다. 결과가 드러날 “두 가지 다른 방식”은 진실 혹은 그릇된 것이다.
“Again, something may be fully approved of … well transmitted … well cogitated … well pondered, yet it may be empty, hollow, and false; but something else may not be well pondered, yet it may be factual, true, and unmistaken. [Under these conditions] it is not proper for a wise man who preserves truth to come to the definite conclusion: ‘Only this is true, anything else is wrong.’”22
“또다시, 어떤 것은 완전히 승인되고 … 잘 전승되고 … 잘 고찰되고 … 잘 심사숙고 되지만, 그것은 공허하고, 비어있고, 거짓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다른 것은 잘 심사숙고 되지 않지만, 그것은 사실에 관한 것이고, 진실하고, 잘못된 것이 없을 수 있다. [이런 조건에서] 진리를 수호하는 현명한 사람이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어떤 것도 잘못되었다.’(주22)라는 명확한 결론에 이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NOTE 22. It is not proper for him to come to this conclusion because he has not personally ascertained the truth of his conviction but only accepts it on a ground that is not capable of yielding certainty.
(주 22) 현명한 사람이 이런 결론에 이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몸소 그가 확신하는 진리를 확인한 것이 아니라 단지 확실성을 낳을 수 없는 근거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15. “But, Master Gotama, in what way is there the preservation of truth?23 How does one preserve truth? We ask Master Gotama about the preservation of truth.”
15. “하지만, 존자 고따마여, 그렇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진리의 수호(주23)가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진리를 수호합니까? 저희는 존자 고따마에게 진리의 수호에 대하여 여쭙니다.”
NOTE 23. Saccānurakkhana: or, the safeguarding of truth, the protection of truth.
(주 23) Saccānurakkhana: 혹은 진리의 옹호, 진리의 보호.
“If a person has faith, Bhāradvāja, he preserves truth when he says: ‘My faith is thus’; but he does not yet come to the definite conclusion: ‘Only this is true, anything else is wrong.’ In this way, Bhāradvāja, there is the preservation of truth; in this way he preserves truth; in this way we describe the preservation of truth. But as yet there is no discovery of truth.24
“바라드와자여, 만일 어떤 사람이 ‘나의 믿음은 이러하다.’라고 말하지만, ‘오직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잘못 되었다.’라는 명백한 결론에 아직 이르지 않았다면, 그는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이렇게 바라드와자여, 진리의 수호가 있다. 이렇게 그는 진리를 수호한다. 이렇게 우리는 진리의 수호를 묘사한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진리의 발견(주24)에는 도달하지 못 했다.
NOTE 24. Saccānubodha: or, the awakening to truth.
(주 24) Saccānubodha: 혹은 진리를 깨달음.
“If a person approves of something … if he receives an oral tradition … if he [reaches a conclusion based on] reasoned cogitation … if he accepts a view as a result of pondering it, he preserves truth when he says: ‘The view that I accept as a result of pondering it is thus’; but he does not yet come to the definite conclusion: ‘Only this is true, anything else is wrong.’ In this way too, Bhāradvāja, there is the preservation of truth; in this way he preserves truth; in this way we describe the preservation of truth. But as yet there is no discovery of truth.”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승인하면 … 전승을 받아들이면 … 조리가 선 고찰에 근거한 결론에 도달한다면, … 심사숙고한 후에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그가 ‘내가 심사숙고한 후에 받아들인 견해는 이러하다’라고 말할 때 그는 진리를 수호한다. 하지만 그는 아직 ‘오진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명백한 결론에 이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바라드와자여, 이렇게 진리의 수호가 있고, 이렇게 우리는 진리를 수호한다. 우리는 이렇게 진리의 수호를 묘사한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진리의 발견에는 도달하지 못 했다.”
16. “In that way, Master Gotama, there is the preservation of truth; in that way one preserves truth; in that way we recognize the preservation of truth. But in what way, Master Gotama, is there the discovery of truth? In what way does one discover truth? We ask Master Gotama about the discovery of truth.”
16. “존자 고따마여, 그렇게 진리의 수호가 있고, 그렇게 사람이 진리를 수호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진리의 수호를 인정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그런데 어떻게 진리의 발견이 있습니까? 어떻게 사람은 진리를 발견합니까? 우리는 진리의 발견에 대하여 존자 고따마께 여쭙니다.”
17. “Here, Bhāradvāja, a monk may be living in dependence on some village or town. Then a householder or a householder’s son goes to him and investigates him in regard to three kinds of states: in regard to states based on greed, in regard to states based on hate, and in regard to states based on delusion: ‘Are there in this monk any states based on greed such that, with his mind obsessed by those states, while not knowing he might say, “I know,” or while not seeing he might say, “I see,” or he might urge others to act in a way that would lead to their harm and suffering for a long time?’
17. “바라드와자여, 여기 한 비구가 어떤 마을 혹은 성읍에 의지해서 생활하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재가신도 또는 재가신도의 아들이 그에게 가서 세 종류의 상태와 관련하여 그를 조사한다. 즉, 탐욕에 근거한 상태와 관련하여, 증오에 근거한 상태와 관련하여, 어리석음에 근거한 상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조사한다. ‘이 비구 안에 탐욕에 근거한 어떤 상태가 있어서, 그 상태에 의해 마음이 사로잡혀 있으면서, 알지 못하면서 “나는 안다.”라고 말하거나, 보지 못하면서 “나는 본다.”라고 말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오랫동안 해로움과 괴로움을 낳을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열심히 권하거나 하지는 않는가?’
“As he investigates him he comes to know: ‘There are no such states based on greed in this monk. The bodily and verbal behavior of this monk are not those of one affected by greed. And the Dhamma that he teaches is profound, hard to see and hard to understand, peaceful and sublime, unattainable by mere reasoning, subtle, to be experienced by the wise. This Dhamma cannot easily be taught by one affected by greed.’
“그 재가신도는 그 비구를 조사하고 나서 이렇게 알게 된다. ‘이 비구 안에 탐욕에 근거한 어떤 상태도 없다. 이 비구의 신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는 탐욕에 영향을 받은 자의 행위가 아니다. 그리고 그가 가르치는 담마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고, 평화롭고 탁월하며, 단순한 추론으로 얻을 수 없고, 현자들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담마는 탐욕에 영향을 받은 자가 쉽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8. “When he has investigated him and has seen that he is purified from states based on greed, he next investigates him in regard to states based on hate: ‘Are there in this monk any states based on hate such that, with his mind obsessed by those states … he might urge others to act in a way that would lead to their harm and suffering for a long time?’
18. “그 재가신도는 그 비구를 조사하고 그가 탐욕에 근거한 상태로부터 벗어나 깨끗한 것을 보고난 후, 다음으로 증오에 근거한 상태와 관련하여 그를 다음과 같이 조사한다. ‘이 비구 안에 증오에 근거한 어떤 상태가 있어서, 그 상태에 의해 마음이 사로잡혀 있으면서 … 다른 사람들이 오랫동안 해로움과 괴로움을 낳을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열심히 권하거나 하지는 않는가?’
“As he investigates him, he comes to know: ‘There are no such states based on hate in this monk. The bodily and verbal behavior of this monk are not those of one affected by hate. And the Dhamma that he teaches is profound … to be experienced by the wise. This Dhamma cannot easily be taught by one affected by hate.’
“그 재가신도는 그 비구를 조사하고서 이렇게 알게 된다. ‘이 비구 안에 증오에 근거한 어떤 상태도 없다. 이 비구의 신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는 증오에 영향을 받은 자의 행위가 아니다. 그리고 그가 가르치는 담마는 심오하고 … 현자들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담마는 증오에 영향을 받은 자가 쉽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 “When he has investigated him and has seen that he is purified from states based on hate, he next investigates him in regard to states based on delusion: ‘Are there in this monk any states based on delusion such that, with his mind obsessed by those states … he might urge others to act in a way that would lead to their harm and suffering for a long time?’
19. “그 재가신도는 그 비구를 조사하고 그가 증오에 근거한 상태로부터 벗어나 깨끗한 것을 보고난 후, 다음으로 어리석음에 근거한 상태와 관련하여 그를 다음과 같이 조사한다. ‘이 비구 안에 어리석음에 근거한 어떤 상태가 있어서, 그 상태에 의해 마음이 사로잡혀 있으면서 … 다른 사람들이 오랫동안 해로움과 괴로움을 낳을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열심히 권하거나 하지는 않는가?’
“As he investigates him, he comes to know: ‘There are no such states based on delusion in this monk. The bodily and verbal behavior of this monk are not those of one affected by delusion. And the Dhamma that he teaches is profound … to be experienced by the wise. This Dhamma cannot easily be taught by one affected by delusion.’
“그 재가신도는 그 비구를 조사하고서 이렇게 알게 된다. ‘이 비구 안에 어리석음에 근거한 어떤 상태도 없다. 이 비구의 신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는 어리석음에 영향을 받은 자의 행위가 아니다. 그리고 그가 가르치는 담마는 심오하고 … 현자들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담마는 어리석음에 영향을 받은 자가 쉽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0. “When he has investigated him and has seen that he is purified from states based on delusion, then he places faith in him; filled with faith he visits him and pays respect to him; having paid respect to him, he gives ear; when he gives ear, he hears the Dhamma; having heard the Dhamma, he memorizes it and examines the meaning of the teachings he has memorized; when he examines their meaning, he accepts those teachings as a result of pondering them; when he has accepted those teachings as a result of pondering them, desire springs up; when desire has sprung up, he applies his will; having applied his will, he scrutinizes; having scrutinized, he strives; resolutely striving, he realizes with the body the supreme truth and sees it by penetrating it with wisdom.25 In this way, Bhāradvāja, there is the discovery of truth; in this way one discovers truth; in this way we describe the discovery of truth. But as yet there is no final arrival at truth.”26
20. “그 재가신도는 그 비구를 조사하고 그가 어리석음에 근거한 상태로부터 벗어나 깨끗한 것을 보고나서, 그 비구에게 믿음을 둔다. 믿음으로 가득차서 그는 그 비구를 방문해서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나서 그의 말을 경청한다. 그의 말을 경청할 때, 재가신도는 담마를 듣는다. 담마를 듣고 나서, 그는 담마를 외우고 그가 외운 가르침의 의미를 검사한다. 그가 가르침의 의미를 검사하고 고찰한 결과로 그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그가 고찰한 결과로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의욕이 일어난다. 의욕이 일어나면, 의지를 쏟는다[노력한다]. 의지를 쏟고 나면, 면밀하게 조사한다. 면밀히 조사한 후에 그는 정진(精進)한다. 결연히 정진하고 나서,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깨닫고 지혜로써 진리를 꿰뚫어 보게 된다.(주25) 바라드와자여, 이렇게 해서 진리의 발견이 있게 되고, 이렇게 진리를 발견한다. 이렇게 우리는 진리의 발견을 설명한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진리에 궁극적으로 도달한 것은 아니다.”(주26)
NOTE 25. In this series, “he scrutinizes” (tūleti), according to Ps, means that he investigates phenomena as impermanent, suffering, and nonself. This is the stage of insight contemplation. “Applies the will” (ussahati) and “strives” (padahati) appear similar. We might understand the former as the effort leading to insight, the latter as the effort that leads from insight to world-transcending realization. This last step is signified by the expression, “he realizes with the body the supreme truth.” The supreme truth (paramasacca) is Nibbāna.
(주 25) 이 시리즈에서, “그는 면밀하게 조사한다”는 맛지마 니까야 주석에 따르면, 현상을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로 조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통찰 명상의 단계이다. “의지를 쏟는다[노력한다]”와 “정진(精進)한다”는 비슷해 보인다. 전자는 통찰로 이끄는 노력으로, 후자는 통찰에서 세계를 초월하는 깨달음으로 이끄는 노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 마지막 단계는 “그는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깨닫는다.”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최상의 진리는 열반이다.
NOTE 26. While the “discovery of truth” (saccānubodha) in this context seems to mean the attainment of stream-entry, the final arrival at truth (saccānuppatti) must mean the attainment of arahantship. Note that the final arrival at truth does not come about through any new measures, but simply through the repeated development of those same factors that led to the discovery of truth.
(주 26) 이 문맥에서 “진리의 발견”은 예류(預流; 수다원)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 같은 반면에, 진리에의 궁극적 도달은 아라한(阿羅漢)의 성취를 의미함에 틀림없다. 진리에의 궁극적 도달이 어떠한 새로운 수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진리의 발견으로 이끈 꼭 같은 요소를 반복적인 개발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점에 주목하라.
21. “In that way, Master Gotama, there is the discovery of truth; in that way one discovers truth; in that way we recognize the discovery of truth. But in what way, Master Gotama, is there the final arrival at truth? In what way does one finally arrive at truth? We ask Master Gotama about the final arrival at truth.”
21. “존자 고따마여, 그렇게 해서 진리의 발견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진리를 발견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진리의 발견을 알아봅니다. 하지만 존자 고따마여, 어떻게 해서 진리에의 궁극적 도달이 있습니까? 어떻게 궁극적으로 진리에 도달합니까? 우리는 존자 고따마께 진리에의 궁극적 도달에 대해 여쭙니다.”
“The final arrival at truth, Bhāradvāja, lies in the repetition, development, and cultivation of those same things. In this way, Bhāradvāja, there is the final arrival at truth; in this way one finally arrives at truth; in this way we describe the final arrival at truth.”
“바라드와자여, 진리에의 궁극적 도달은 앞에서 말한 일련의 것들을 반복하고, 개발하고 닦아나감에 있다. 바라드와자여, 이렇게 해서, 진리에의 궁극적 도달이 있다. 이렇게 궁극적으로 진리에 도달한다. 이렇게 우리는 진리에의 궁극적 도달을 설명한다.”
22. “In that way, Master Gotama, there is the final arrival at truth; in that way one finally arrives at truth; in that way we recognize the final arrival at truth. But what, Master Gotama, is most helpful for the final arrival at truth? We ask Master Gotama about the thing most helpful for the final arrival at truth.”
22. “존자 고따마여, 그렇게 해서 진리에의 궁극적 도달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궁극적으로 진리에 도달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진리에의 궁극적 도달을 알아봅니다. 하지만 존자 고따마여, 진리에의 궁극적 도달에 무엇이 가장 도움이 됩니까? 우리는 존자 고따마께 진리에의 궁극적 도달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 여쭙니다.”
“Striving is most helpful for the final arrival at truth, Bhāradvāja. If one does not strive, one will not finally arrive at truth; but because one strives, one does finally arrive at truth. That is why striving is most helpful for the final arrival at truth.”
“정진이 진리에의 궁극적 도달에 가장 도움이 된다, 바라드와자여. 만약 정진하지 않으면, 궁극적으로 진리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정진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진리에 도달한다. 그런 이유로 정진은 진리에의 궁극적 도달에 가장 도움이 된다.”
23. “But what, Master Gotama, is most helpful for striving? We ask Master Gotama about the thing most helpful for striving.”
23. “그러나 존자 고따마여, 정진에 무엇이 가장 도움이 됩니까? 우리는 존자 고따마께 정진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 여쭙니다.”
“Scrutiny is most helpful for striving, Bhāradvāja. If one does not scrutinize, one will not strive; but because one scrutinizes, one strives. That is why scrutiny is most helpful for striving.”
“면밀한 조사가 정진에 가장 도움이 된다, 바라드와자여. 만약 면밀히 조사하지 않으면, 정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면밀히 조사하기 때문에 정진한다. 그런 이유로 면밀한 조사가 정진에 가장 도움이 된다.”
24. “But what, Master Gotama, is most helpful for scrutiny? We ask Master Gotama about the thing most helpful for scrutiny.”
24. “그러나 존자 고따마여, 면밀한 조사에 무엇이 가장 도움이 됩니까? 우리는 존자 고따마께 면밀한 조사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 여쭙니다.”
“Application of the will is most helpful for scrutiny, Bhāradvāja. If one does not apply one’s will, one will not scrutinize; but because one applies one’s will, one scrutinizes. That is why application of the will is most helpful for scrutiny.”
“의지를 쏟음[노력]이 면밀한 조사에 가장 도움이 된다, 바라드와자여. 만약 의지를 쏟지 않으면, 면밀한 조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지를 쏟기 때문에 면밀히 조사한다. 그런 이유로 의지를 쏟음이 면밀한 조사에 가장 도움이 된다.”
25. “But what, Master Gotama, is most helpful for application of the will? We ask Master Gotama about the thing most helpful for application of the will.”
25. “그러나 존자 고따마여, 의지를 쏟음[노력]에 무엇이 가장 도움이 됩니까? 우리는 존자 고따마께 의지를 쏟음[노력]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 여쭙니다.”
“Desire is most helpful for application of the will, Bhāradvāja. If one does not arouse desire, one will not apply one’s will; but because one arouses desire, one applies one’s will. That is why desire is most helpful for application of the will.”
“의욕이 의지를 쏟음[노력]에 가장 도움이 된다, 바라드와자여. 만약 의욕을 일으키지 않으면, 의지를 쏟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욕을 일으키기 때문에 의지를 쏟는다. 그런 이유로 의욕이 의지를 쏟음[노력]에 가장 도움이 된다.”
26. “But what, Master Gotama, is most helpful for desire? We ask Master Gotama about the thing most helpful for desire.”
26. “그러나 존자 고따마여, 의욕에 무엇이 가장 도움이 됩니까? 우리는 존자 고따마께 의욕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 여쭙니다.”
“Accepting the teachings as a result of pondering them is most helpful for desire, Bhāradvāja. If one does not accept the teachings as a result of pondering them, desire will not spring up; but because one accepts the teachings as a result of pondering them, desire springs up. That is why accepting the teachings as a result of pondering them is most helpful for desire.”
“가르침을 고찰의 결과로 받아들임이 의욕에 가장 도움이 된다, 바라드와자여. 만일 가르침을 고찰의 결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의욕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르침을 고찰의 결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의욕이 일어난다. 그런 이유로 가르침을 고찰의 결과로 받아들임이 의욕에 가장 도움이 된다.”
27. “But what, Master Gotama, is most helpful for accepting the teachings as a result of pondering them? We ask Master Gotama about the thing most helpful for accepting the teachings as a result of pondering them.”
27. “그러나 존자 고따마여, 가르침을 고찰의 결과로 받아들임에 무엇이 가장 도움이 됩니까? 우리는 존자 고따마께 가르침을 고찰의 결과로 받아들임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 여쭙니다.”
“Examination of the meaning is most helpful for accepting the teachings as a result of pondering them, Bhāradvāja. If one does not examine their meaning, one will not accept the teachings as a result of pondering them; but because one examines their meaning, one accepts the teachings as a result of pondering them. That is why examination of the meaning is most helpful for accepting the teachings as a result of pondering them.”
“의미의 검사가 가르침을 고찰의 결과로 받아들임에 가장 도움이 된다, 바라드와자여. 만일 가르침의 의미를 검사하지 않으면, 가르침을 고찰의 결과로 받아들이지 못 할 것이다. 그러나 가르침의 의미를 검사하기 때문에, 가르침을 고찰의 결과로 받아들인다. 그런 이유로 의미의 검사가 가르침을 고찰의 결과로 받아들임에 가장 도움이 된다.”
28. “But what, Master Gotama, is most helpful for examination of the meaning? We ask Master Gotama about the thing most helpful for examination of meaning.”
28. “그러나 존자 고따마여, 의미의 검사에 무엇이 가장 도움이 됩니까? 우리는 존자 고따마께 의미의 검사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 여쭙니다.”
“Memorizing the teachings is most helpful for examining the meaning, Bhāradvāja. If one does not memorize a teaching, one will not examine its meaning; but because one memorizes a teaching, one examines its meaning.”
“가르침을 외우는 것이 의미의 검사에 가장 도움이 된다, 바라드와자여. 만일 가르침을 외우지 않으면, 가르침의 의미를 검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르침을 외우기 때문에, 가르침의 의미를 검사한다.”
29. “But what, Master Gotama, is most helpful for memorizing the teachings? We ask Master Gotama about the thing most helpful for memorizing the teachings.”
29. “그러나 존자 고따마여, 가르침을 외우는 것에 무엇이 가장 도움이 됩니까? 우리는 존자 고따마께 가르침을 외우는 것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 여쭙니다.”
“Hearing the Dhamma is most helpful for memorizing the teachings, Bhāradvāja. If one does not hear the Dhamma, one will not memorize the teachings; but because one hears the Dhamma, one memorizes the teachings. That is why hearing the Dhamma is most helpful for memorizing the teachings.”
“담마를 듣는 것이 가르침을 외우는 것에 가장 도움이 된다, 바라드와자여. 만일 담마를 듣지 않으면, 가르침을 외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담마를 듣기 때문에, 가르침을 외운다. 그런 이유로 담마를 듣는 것이 가르침을 외우는 것에 가장 도움이 된다.”
30. “But what, Master Gotama, is most helpful for hearing the Dhamma? We ask Master Gotama about the thing most helpful for hearing the Dhamma.”
30. “그러나 존자 고따마여, 담마를 듣는 것에 무엇이 가장 도움이 됩니까? 우리는 존자 고따마께 담마를 듣는 것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 여쭙니다.”
“Giving ear is most helpful for hearing the Dhamma, Bhāradvāja. If one does not give ear, one will not hear the Dhamma; but because one gives ear, one hears the Dhamma. That is why giving ear is most helpful for hearing the Dhamma.”
“말을 경청하는 것이 담마를 듣는 것에 가장 도움이 된다, 바라드와자여. 만일 말을 경청하지 않으면, 담마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을 경청하기 때문에, 담마를 듣는다, 그런 이유로 말을 경청하는 것이 담마를 듣는 것에 가장 도움이 된다.”
31. “But what, Master Gotama, is most helpful for giving ear? We ask Master Gotama about the thing most helpful for giving ear.”
31. “그러나 존자 고따마여, 말을 경청하는 것에 무엇이 가장 도움이 됩니까? 우리는 존자 고따마께 말을 경청하는 것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 여쭙니다.”
“Paying respect is most helpful for giving ear, Bhāradvāja. If one does not pay respect, one will not give ear; but because one pays respect, one gives ear. That is why paying respect is most helpful for giving ear.”
“경의를 표하는 것이 말을 경청하는 것에 가장 도움이 된다, 바라드와자여. 만일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말을 경청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의를 표하기 때문에 말을 경청한다. 그런 이유로 경의를 표하는 것이 말을 경청하는 것에 가장 도움이 된다.”
32. “But what, Master Gotama, is most helpful for paying respect? We ask Master Gotama about the thing most helpful for paying respect.”
32. “그러나 존자 고따마여, 경의를 표하는 것에 무엇이 가장 도움이 됩니까? 우리는 존자 고따마께 경의를 표하는 것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 여쭙니다.”
“Visiting is most helpful for paying respect, Bhāradvāja. If one does not visit a teacher, one will not pay respect to him; but because one visits a teacher, one pays respect to him. That is why visiting is most helpful for paying respect.”
“스승을 방문하는 것이 경의를 표하는 것에 가장 도움이 된다, 바라드와자여. 만일 스승을 방문하지 않으면, 경의를 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스승을 방문하기 때문에, 스승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런 이유로 스승을 방문하는 것이 경의를 표하는 것에 가장 도움이 된다.”
33. “But what, Master Gotama, is most helpful for visiting? We ask Master Gotama about the thing most helpful for visiting.”
33. “그러나 존자 고따마여, 스승을 방문하는 것에 무엇이 가장 도움이 됩니까? 우리는 존자 고따마께 스승을 방문하는 것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 여쭙니다.”
“Faith is most helpful for visiting, Bhāradvāja. If faith in a teacher does not arise, one will not visit him; but because faith in a teacher arises, one visits him. That is why faith is most helpful for visiting.”
“믿음이 스승을 방문하는 것에 가장 도움이 된다, 바라드와자여. 만일 스승에 대한 믿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스승을 방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스승에 대한 믿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스승을 방문한다. 그런 이유로 믿음이 스승을 방문하는 것에 가장 도움이 된다.”
34. “We asked Master Gotama about the preservation of truth, and Master Gotama answered about the preservation of truth; we approve of and accept that answer, and so we are satisfied. We asked Master Gotama about the discovery of truth, and Master Gotama answered about the discovery of truth; we approve of and accept that answer, and so we are satisfied. We asked Master Gotama about the final arrival at truth, and Master Gotama answered about the final arrival at truth; we approve of and accept that answer, and so we are satisfied. We asked Master Gotama about the thing most helpful for the final arrival at truth, and Master Gotama answered about the thing most helpful for the final arrival at truth; we approve of and accept that answer, and so we are satisfied. Whatever we asked Master Gotama about, that he has answered us; we approve of and accept that answer, and so we are satisfied.
34. “우리는 존자 고따마께 진리의 수호에 대해 여쭈었고, 존자 고따마는 진리의 수호에 대해 대답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족스럽습니다. 우리는 존자 고따마께 진리의 발견에 대해 여쭈었고, 존자 고따마는 진리의 발견에 대해 대답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족스럽습니다. 우리는 존자 고따마께 진리에의 궁극적 도달에 대해 여쭈었고, 존자 고따마는 진리에의 궁극적 도달에 대해 대답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족스럽습니다. 우리는 존자 고따마께 진리에의 궁극적 도달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 여쭈었고, 존자 고따마는 진리에의 궁극적 도달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 대답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족스럽습니다. 우리가 존자 고따마께 무엇에 대하여 묻든지, 존자께서는 우리에게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족스럽습니다.
“Formerly, Master Gotama, we used to think: ‘Who are these bald-headed ascetics, these dark menial offspring of the Lord’s feet, that they would understand the Dhamma?’27 But Master Gotama has indeed inspired in me love for ascetics, confidence in ascetics, reverence for ascetics.
“존자 고따마여, 예전에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곤 했습니다. ‘이 빡빡 머리 수행자들, 이 시커먼 천한 신의 발에서 태어난 자들이 누구이고, 그들이 담마를 이해할까?’(주27) 그러나 존자 고따마께서는 진실로 저에게 수행자에 대한 사랑, 수행자에 대한 확신, 수행자에 대한 존경을 불러일으켜 주셨습니다.
NOTE 27. Ps: The brahmins believed that they themselves were the offspring of Brahmā’s mouth, the khattiyas of his breast, the mercantile class (vessa) of his belly, the workers (sudda) of his legs, and samaṇas of the soles of his feet.
(주 27) 맛지마 니까야 주석: 바라문들은 자신들은 브라흐마 신의 입에서, 크샤트리야는 신의 가슴에서, 상인 계급(바이샤)은 신의 배에서, 노동자들(수드라)은 신의 다리에서, 그리고 사문[수행자]들은 신의 발바닥에서 태어난다고 믿었다.
35. “Magnificent, Master Gotama! Magnificent, Master Gotama!… [as in Text III,2] … From today let Master Gotama remember me as a lay follower who has gone to him for refuge for life.”
35. “훌륭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훌륭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담마를 분명하게 설해 주셨습니다. 마치 엎어진 것을 똑바로 세우듯이, 숨겨진 것을 드러내듯이, 길 잃은 자에게 길을 가르쳐 주듯이, 시력이 좋은 자들이 형태를 볼 수 있도록 어둠 속에서 등불을 높이 들어 비춰주시듯 하십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께, 담마에, 비구 상가에 귀의합니다. 오늘부터 존자 고따마께서는 저를 재가신도로 받아주소서.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귀의합니다.”
(from MN 95: Caṅkī Sutta; II 168–77)
(맛지마 니까야 95: 짱끼 경에서)
|
출처: 불교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