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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7. 묵상글 (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 하늘 길, 좁은 길, 생명의 길.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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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7.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늘 길, 좁은 길, 생명의 길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생명의 문은 왜 좁고 멸망의 문을 왜 넓을까요?
생명의 문이 좁은 것은 많은 사람이 못 들어오도록
하느님께서 일부러 좁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되기를 하느님께서 원치 않으셨고,
일부 개신교에서 주장하듯 십사만사천 명만 정원으로 정하셨기에 좁은 걸까요?
그렇다면 생명의 문이 좁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이 좁은 것이고
하느님 사랑의 품이 비좁은 것일 겁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닐 거라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성심성월을 지내며 우리가 믿는 믿음은 하느님의 마음은 하해와 같다는 것이고,
주님께서도 하늘에는 있을 곳이 많으며 당신은 제자들과 우리가 있을 곳을
마련하려고 먼저 하늘에 올라가신다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의 문이 좁은 것은, 그 문이 하늘 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문이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넓은 길이고 넓은 문이지만
하늘로 오르는 길과 문은 산을 오르듯이 올라야 하기에 싫고 힘들고 좁습니다.
시편에서 이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고?
그 손은 깨끗하고 마음 정한 이,
헛 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로다.”
이 세상 길은 자기 욕심대로 가고,
가고 싶은 대로 가기에 편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가지만
하늘길은 손도 마음도 깨끗하고 정신을 오로지 길 가는 데만 써야 하기에
가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먼저 그 길을 가시며 같이 가자고 초대하시고,
당신을 따라오면 혼자서는 가기 어려워도 갈 수 있다고 부르십니다.
사실 주님께서 하늘에서 굳이 이 땅에까지 내려오신 것은
우리를 그 하늘로 데려가시기 위해서인데
문제는 그 길이 꽃길이 아니고 십자가 길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꽃길이라 즐기며 노니다가 하늘에 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느님께서 하늘길을 가시밭길, 십자가 길로 만드시고
그래서 그 길 빨리 벗어나게 하시려는 것 아닌가 하고
제가 생각하는 것은 너무 억지춘향인가요?
억지춘향일지라도 하느님 사랑을 그렇게라도 믿고 싶은 오늘 저입니다.
내일부터 금요일까지 강론을 올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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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7.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짧은 말씀이지만, 중요한 세 가지의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가르침이요, <둘째>는 “너희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는 가르침이요, <셋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가르침입니다.
<첫째> 말씀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두 가지 원리 중 하나입니다. 어제 <복음>인 앞 장면에서 우리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마태 7,1)는 이웃과의 화합의 원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이와는 대조되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태 7,6)는 이웃과의 단절의 원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결코 남에게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분별 있고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르기”(마태 7,6) 때문입니다. 곧 세속적이고 악한 생활로부터 영적인 분별력과 신중함을 가지라는 말씀이요, 나아가서 균형 있고, 조화 있게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분별 있는 행동을 이렇게 권고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사부 성 베네딕도께서도 <수도규칙>에서 ‘분별은 모든 덕의 어머니’(64,19)라고 강조하였으며, 요한 카시아누스 역시 분별의 귀중함에 대해서 <담화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분별의 은총 없이는 완전한 덕이 없다.”(담화 2,3)
<둘째> 말씀은 흔히 ‘황금률’이라 불리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이는 6장 33절의 말씀과 더불어 산상설교의 2대 강령이기도 합니다. 곧 6장 33절의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는 말씀이 수직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면, 여기 7장 12절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말씀은 수평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결코 ‘정직은 그 대가를 지불한다.’는 공리주의적 금언도, ‘주는 양만큼 똑같이 받을 것’을 기대하는 합리주의적 금언도 아니며, 오히려, ‘이타적인 사랑’으로 남에게 베풀라는 말씀이요, 나아가서 겸손하게 ‘먼저’ 남에게 베풀라는 적극적인 사랑에 대한 요청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마태 7,12) 입니다.
<셋째>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을 규명하는 세 가지 비유 중 첫 번째로, ‘좁은 문의 비유’입니다. 곧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7,13-14 참조)는 요청입니다. 이 ‘문’은 좁기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버려야할 것들은 버리고 오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의 이끄심에 의탁하는 자라야이 들어갈 수 있는 문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이 세 가지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실현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
주님!
제 자신이 부서지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꺾이고 사라지게 하소서.
좁지만 열린 문이기에, 붙들어 주는 당신을 꼭 붙들고 들어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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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7.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바라는 그대로 해주어라
사람은 살아가면서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바가 있고, 자식이 부모에게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부부간에는 물론 이웃간에도 친구에게도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와 바람에 만족하고 기쁨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대에 못 미친다고 느낄 때가 훨씬 많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는 이 정도는 따라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자기는 잘하고 있는데 상대는 그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기일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대접 받기를 원한다면 남을 똑같이 대접해 주어야 합니다. 사실 내가 받는 고통이나 기쁨은 내가 남에게 어떻게 해줘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정된 사람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한정된 테두리를 극복 하도록 촉구하십니다.“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루가6,32).
오래 전입니다. 교우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탈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부를 옆자리에 태운 것이 긴장되었는지 후진을 하다가 그만 다른 차를 들이 받았습니다. 얼른 내려서 잘못을 얘기하려고 하는데 그 운전사는 차량 상태를 확인도 하지 않고 그냥 가라고 했습니다. 별 이상은 없다고 하더라도 차량상태를 확인할 법도 한데 말입니다. 아마 확인을 했으면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이후로 ‘은혜를 입었으니 같은 처지가 되면 그런 넉넉한 마음을 표현해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온갖 유혹을 거슬러 살려면 문이 좁고 길이 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밑지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옳은 길과 옳은 문을 찾는 수고는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나의 기대와 바람만큼 걸 맞는 수고와 땀을 소홀히 하지 않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길이라 해도 그 길이 목적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서둘러 그 방향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험하고 힘든 고된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이 천상과 연결되어 있다면 군소리 없이 걸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매 순간이 세상을 감당하는 도전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위 묵상은 2017. 06. 27.자의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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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7.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와 터키를 순례하면서 망해버린 고려의 슬픔을 노래했던 시조가 생각났습니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흥하고 망함이, 또 성하고 쇠함이 모두 운수가 정해져 있는 법이니 멸망한 고려 왕조의 궁터 만월대에도 이제는 임자 없는 가을철 풀숲으로 덮여져 있구나. 오백년이나 이어오던 왕업도 저 목동이 부는 피리 곡조에 붙이게 되었으니, 해질 녘에 지나치는 나그네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구나.) 터키 이스탄불에는 ‘성 소피아 성당’이 있습니다. 3번에 걸쳐서 성당은 완공되었고, 성당을 완공한 황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솔로몬 왕이시여, 이제 나는 당신이 부럽지 않습니다.” 황제는 성 소피아 성당이 솔로몬 왕이 건축했던 예루살렘 성전보다 뛰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주교좌성당으로 자리를 지켰던 성당은 이슬람 사원이 되었습니다. 성당에 있던 아름다운 모자이크 성화는 회칠로 지워졌습니다. 순례의 여정 중에 바오로 사도가 세웠던 교회들이 지금은 폐허가 되었고, 대부분의 지역은 이슬람 교회가 되었습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는 박해와 시련을 겪으면서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공동체로 성장하였습니다.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교회의 박해와 시련은 끝이 났습니다. 교회는 로마가 깔아 놓은 길을 따라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로마의 제도와 법은 교회의 법과 제도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법과 제도에 따라서 교회는 성장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복음이 빛은 조금씩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권력과 부가 쌓여갈수록 교회의 부패와 부정도 늘어났습니다. 문화와 민족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고유한 전통과 종교를 무시하였습니다. 원주민들의 사원을 부셔버리고 그 위에 성전을 세웠습니다. 원주민들이 세웠던 성전의 돌을 뜯어내어 성전을 세웠습니다. 교회의 권위와 힘으로 인류와 역사에 큰 아픔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등불을 켜놓고 됫박으로 가려놓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교회가 복음의 빛을 권력과 권위라는 됫박으로 가려놓았을 때, 교회가 가난이라는 소금을 교만과 부유함이라는 물에 담가놓았을 때가 있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겸허하게 교회가 인류와 역사에게 잘못한 것들을 인정하고 사과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정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오늘 독서에서 아브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실천하였습니다. 조카 롯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겠다.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조카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남이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조카에게 해 주었던 아브람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누게 됩니다. 신앙인들은 자업자득의 허물은 없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당신의 천막에 누가 머물리이까? 흠 없이 걸어가고, 의로운 일을 하며, 마음속 진실을 말하는 이, 함부로 혀를 놀리지 않는 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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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7.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생명의 좁은 문, 구원의 좁은 문
-은총, 분별의 지혜, 황금률-
어찌보면 하루하루가 좁은 문의 연속입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의 자리, 바로 거기가 생명의 좁은 문이자 구원의 좁은 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 좌우명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는 생명의 좁은 문, 구원의 좁은 문을 통과해온 삶에 대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통과해 왔고 통과하고 있고 통과해야할 생명의 좁은 문, 구원의 좁은 문입니다. 죽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통과해야 할 문이요 마지막 가장 어려운 생명과 구원의 좁은 문이 죽음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강력히 권고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누구나의 광야 인생 여정, 하루하루 통과해 나가야할 좁은 문의 연속입니다. 끝까지 잘 통과하면 성인이지만, 도중에 넓은 문의 유혹에 빠져 인생 좌초하여 괴물로, 폐인으로 끝나는 인생은 얼마나 많은지요! 새삼 인생은 선물이자 평생 좁은 문들 통과의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좁은 문을 힘껏 잘 통과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하고자 날마다의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비교할 수 없는 각각 고유의 좁은 문입니다. 한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도 각자 통과해야 할 구원의 좁은 문은 다 다릅니다. 사람 숫자만큼 좁은 문의 수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힘들어 무척이나 외롭고 고독하기도 합니다. 좁은 문에 좌절하고 절망하여 목숨을 끊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굳이 구원의 좁은문 찾아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주어진 자리가 생명의 좁은 문, 구원의 좁은 문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행복은 생명의 구원은 바로 지금 여기 있습니다. 눈만 열리면 언제 어디나 구원의 좁은 문, 구원의 꽃자리입니다.
사실 밖에서 볼 때, 몰라서 좁은 문이지 살다 보면 내적으로 점차 넓어지는 생명의 넓은 문일 수 있습니다. 연륜의 수도자들에겐 그렇습니다. 예전 50년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선배 여교사의 충고가 생각납니다.
“이선생,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 좀 쉽게 살아.”
“저에겐 이게 쉽게 사는 것인데요.”
힘껏 정도를 따라 사는 것이 사실 저에겐 힘들어도 쉽게 사는 일이었습니다. 그후 20여년후 여기서 뜻밖에 그 선생님을 만났을 때, 참 계면쩍어 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동안 영세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됐던 것입니다. 수도생활도 밖에서 볼 때 좁은 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좁은 문의 수도생활도 사랑하면 점차 내적으로 넓어지는 생명과 구원의 좁은 문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도, 공부도, 겸손도, 가난도. 침묵도, 순종도, 정결도 하느님을 사랑하듯 그렇게 모든 수행을 사랑하여 온갖 자발적 노력을 다할 때 주님 의 은총과 더불어 날로 내적으로 넓어지는 생명과 구원의 좁은 문이 됩니다. 언젠가 써놨던 고백시가 생각납니다.
“자리 탓하지 말자
자리 찾지 말자
어디든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그 어디든 뿌리내려
자리 잡아
하늘 가득 담아
하늘 사랑 활짝 꽃피어 내면
바로 거기가 구원의 꽃자리이다.”
행복기도중 한 대목도 이런 진리를 고백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도 수도생활의 좁은 문이 날로 감미로운 생명과 구원의 문으로 변모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주며 성규 머리말 끝에서 우리를 격려하며 용기를 줍니다.
“좁게 시작하기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말아라. 그러면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니, 주의 가르침에서 결코 떠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그분의 교훈을 항구히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성규 머리48-50)
오늘 복음은 세 단절어로 되어 있는데 좁은 문 통과가 그 하나가 둘은 거룩한 것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것과 황금률입니다. 참 공교롭게도 생명과 구원의 좁은 문 통과에 큰 도움을 주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는 분별의 지혜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가 분별의 지혜요 겸손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참으로 분별의 지혜를 지닌 이들은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않고, 우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시기와 질투, 분노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 지도 모른다.”
좋은 일을 하고도 어처구니 없는 해를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차별이나 무시가 아니라 분별의 지혜입니다. 아무리 귀하고 좋은 가르침도 때와 사람을 봐야 합니다. 이런 분별의 지혜가 좁은문 통과에 결정적 도움이 됨을 봅니다. 얼마나 많은 선의와 정의의 의인들이 개혁에 좌초하여 억울한 박해와 죽음을 당했는지요. 어제 도올 김용옥의 주역 강의중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지금은 난세다. 악랄한 선인들이 필요하다.”
하나는 황금률입니다.
동서양 공통의 지혜로운 잠언입니다. 사랑의 이중계명과 황금률을 잣대로 하면 좁은 문 통과도 수월할 수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남이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해주는 것이요,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 하지 않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사랑, 공감과 배려, 존중의 사랑입니다. 이런 황금률의 진리대로의 삶이 좁은문 통과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바로 이런 황금률 실천의 모범이 제1독서 창세기의 아브람입니다. 어제 오늘 아브람의 여정을 보면 좁은문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좋은 믿음에 지혜로웠고 한결같았습니다. 주님의 제단을 쌓음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했습니다.
오늘도 아브람은 사심이나 욕심없는 관대한 마음으로 롯에게 선택권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롯은 자기가 택한 참 좋은 요르단 땅에 멸망할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음을 꿈에도 생각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어 하느님께 큰 축복을 받는 계기가 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자들의 좁은문 통과에는 늘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함을 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생명과 구원의 좁은문 통과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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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7.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말 아시지요. 이 말의 뜻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더욱더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이 말씀은 돼지에게 쓸모없는 진주를 주면 그것이 먹을 것인 줄 알고 입에 넣고 씹었던 돼지들이 화를 내며 달려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돼지에게 필요한 것은 진주가 아니라 먹을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옛날이야기입니다.
코끼리와 고래가 연애했다고 합니다. 코끼리를 고래가 너무 좋아서 자신이 제일 아끼는 과일을 고래에게 선물했고, 고래 역시 코끼리가 너무 멋있어서 자신이 좋아하는 해산물을 잔뜩 모아서 코끼리에게 선물했다고 합니다. 둘의 사이는 어떻게 됐을까요?
우리 이미 알고 있습니다. 코끼리를 숲속에, 고래는 바다에 살고 있음을 말입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다른 이에게 주면 그것은 반쪽짜리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시작은 좋은 것이었지만 결과는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려면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 주어야 합니다. 혹은 너무 내 고집만 부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간혹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강요하고, 부부는 서로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요구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보십시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탈을 쓴 이기심입니다.
사랑에는 매너가 있어야 합니다. 배려가 있어야 하고 이기심보다는 이타심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사랑 말고 우리가 모두 원하는 사랑 해 나가기를 희망합니다.
커피 한 모금
이 고요한 밤에,
제 방은 묵상 글 쓰는 자판 소리 가득 합니다.
갑자기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습니다.
캡슐을 커피머신에 넣고
버튼을 누르니
향기 가득한 진한 커피가 내려집니다.
문득 든 생각….
묵상 글에서도 커피향이 났으면 좋겠습니다.
은은하고 깊은 그런 향기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기도에서도 이런 향기가 나기를 바라봅니다.
커피를 들고 잠시 쉬어봅니다.
커피 한 모금이 행복한 묵상 글의 마중물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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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7.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길 원하십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먼 훗날에 이 세상 삶을 모두 마친 다음에는 꼭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고 열이면 열 모두 고백할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하느님을 직접 보게 되는 지복직관의 상태가 된다고 하지요. 하지만 하느님과 함께하고 직접 뵙는 것이 과연 행복할까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삶 안에서 보면 하느님과 관계되는 모든 것을 힘들어하기 때문입니다.
일주일에 단 한 번 주일미사에 오면서도, 미사 시간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시계만 연신 바라보면서 짜증 냅니다. 기도와 묵상을 1시간 하라고 하면, “어떻게 1시간씩이나 기도해요?”라면서 화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사랑 실천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대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싫고, 주님과 함께하는 일을 거부하면서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있고 함께 마주하며 대화를 나눌 수가 있을까요? 주님께 시간을 내어드리지 않는 신앙인을 향해 어떤 책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더군요.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이교도’
단순히 십계명의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모든 계명을 철저하게 지켰던 부자 청년이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라는 예수님 말씀에 울먹이며 떠났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라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자신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이교도가 아닌 참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 길은 넓고 편한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표현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문이 좁고 비좁아서 이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지만, 생명으로 이끄는 문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를 황금률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자신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심을 드러내는 것은 멸망으로 이끄는 넓고 편한 길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좋은 길은 남에게 해주는 이타적인 삶에 있었습니다. 그 삶이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는 어떤 사람이 주님을 직접 마주 보면서 기뻐하게 될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지금 내가 살아야 할 삶의 방향이 결정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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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성인들의 박물관이 아니라, 죄인들의 병원이다(모튼 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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