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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교의 문화사적 의미와 연구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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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식 박사
-2007.02.17.-
세기의 석학 아놀드 토인비는 세계의 문명들을 독립문명(獨立文明)과 위성문명(衛星文明)으로 나누어서 설명했다. 독립
명이란 태양과 같은 것이어서 독자적인 저력(底力)을 가지고 창조적인 발전을 해가고 있는 문명이다. 따라서 다른 문명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보다는 자기의 문명의 빛으로서 다른 문명에 영향을 주고 있다. 예컨대 과거의 중국문명 (中國文明)이나 현대의 서구문명 (西歐文明)이 그러하다. 과거 중국문명은 동양천지 (東洋天地)를 덮었고 오늘의 서구문명은 세계 전역에 파급되어 있다. 이에 반해 위성문명은 자기의 독자성이 거의 없고 창조성이 빈약하기 때문에 항상 열세 (劣勢)에 몰려 있다. 따라서 강대한 독립문명에 의존함으로써 자기의 문화를 유지하여 간다. 독립문명의 발전된 사상, 종교, 제도, 기술 등을 도입(導入)하거나 모방 또는 개조(改造)하여 제 것을 만드는 것으로써 자기를 형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다른 문명에 영향을 줄 만치 큰 사상이나 문화를 창조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문명이나 일본문명이 그러하다. 중국문명이 태양이었다면 한국문명은 지구요, 일본문명은 또 그 지구를 돌고 있는 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천 년이 지난 오늘의 문명권은 그 양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동양의 경우, 태양이었던 중국문명도 인도문명도 과거의 빛을 잃었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서구문명의 위성(衛星)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와는 반대로 과거의 위성문명권에 속했던 나라들이 오히려 새로운 빛을 발사(發射)하기 시작했다. 지구가 우주를 향해 반격(反擊)하듯이 위성문명이 세계를 향해 반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이 그 한 예라 하겠다. 그러나 이 빛과 반격은 다른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서구의 기술문명에 대항하는 고도의 기술문명 또는 과학문명이 아시아나 제삼세계에서 성장하여 서구를 반격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서구의 과학기술문명의 발전만으로도 인류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핵무기의 위협과 자연자원의 고갈, 그리고 환경오염 등이 초래하는 생물체의 생존위협 등이 단적으로 과학기술문명의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또다시 같은 노선의 문명 발전을 위해 위성세계를 동원할 필요는 없다. 위성문명의 반격은 과학문명으로서가 아니라 차원을 달리한 정신문명 또는 종교문명으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과학만능과 합리주의는 세계를 향해 동양의 신비주의가 말하기 시작한 것이 그 징후의 하나이다. 오늘날 서구문명에 덮여 있던 동양문명이 새로운 문화를 태동(胎動)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문명은 역사적으로 중국문명이라는 태양을 도는 지구였다. 중국으로부터 문명의 빛을 받아들여서 한국문화의 지층(地層)을 형성해 왔다. 가장 깊은 암석층을 이루고 있는 것은 천여 년에 걸쳐 받아들인 중국의 문물제도와 불교의 이데올로기이다. 그 위의 지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유교문화의 지반이다. 그리고 19세기 말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세기에 걸쳐 급속도로 형성되어 가고 있는 지표층이 있다. 기독교를 동반한 서구문명이다. 근대화란 이름 아래 진행되고 있는 오늘의 한국의 문화 경향(傾向)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한국문화의 지층은 최소한 세 겹으로 되어 있는 셈이다.
지구의 속 가운데에는 지핵(地核)이 들어 있다. 실은 이것이 있어 이것을 바탕으로 지각(地殼)의 각층을 형성할 수 있다. 한국의 문화란 세 겹의 문명 층으로만 되어 있는 둥근 파가 아니다. 한국문화 역시 그 심층부에는 지핵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있어 외래문명을 받아들여서 자기의 껍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지핵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은 중량이 무거울 뿐만 아니라 수천 도(度) 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는 태양과도 비길 수 있는 독자적인 것이라 하겠다. 다만 그것이 지각에 억압되고 은폐되어 있는 것뿐이다. 때로는 그 일부라 할 수 있는 것이 지각의 틈바구니로 새어나와 화산을 만들고 있다. 거기에는 흘러나온 용암으로써도 지핵의 성격을 짐작할 수가 있다.
한국문화의 지핵(地核)은 무교이다. 외래문명을 받아들이기 전 한국에는 억압 없이 무교가 노출되어 있던 때가 있었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 외래문명들을 받아들이고 문화지층을 형성하게 했다. 그러나 한편 지각은 차츰 무교를 억압하기 시작했다. 이조 오백년 사이의 유교와 근대화의 물결을 몰고 온 서구문명이 오늘의 지표를 형성하자 무교에 대한 억압은 더욱 심하여졌다. 뜨거운 원초기(原初期)의 무교에 접촉했던 불교는 그 열에 적지 않게 용해되어 상당부분이 동질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무교는 겹겹이 쌓이는 지각의 봉쇄(封鎖)와 중압에 못 이기어 지하로 물러앉고 한국문화의 표면으로부터 사라져 가고 있다.
하지만 무교는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니다. 민중문화의 저변을 흐르면서 지핵을 형성하고 있다. 한국문화의 심층에서 여전히 그 에너지를 발휘하고 있다. 우리들의 행동양식을 결정할 가치체계와 세계관을 적지 않게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아직도 곳곳에서 무교의 용암이 활화산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본다. 시시 때때로 부락제가 진행되는가 하면 방방곡곡에는 아직도 굿하는 소리가 남아 있다. 무교라는 지핵은 깊숙이 억압되어 소멸되어 가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무교의 에너지는 여전히 민중 속에, 그리고 한국문화 속에 간직되어 있으며 보이지 아니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그 강한 열량 때문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만약 이 지열이 억압되는 대신에 창조적인 열량으로 변화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을 꿈꿀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무교란 이미 사라져 버린 고대종교도 아니요, 미개민족의 단순한 원시종교도 아니다. 이것은 고대종교의 잔유계승(殘留繼承)된 것이요, 한국의 현대문화 사회 속에서도 민간신앙의 형태로 살아남아 있는 역사적 종교현상이다. 흔히는 단순히 무속이라고 불러 왔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교를 사회적 습속(習俗)으로 다루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에는 종교현상에 대한 역사적 관심과 종교적 독자성에 대한 고려(考慮)가 결여되어 있다.
한국무교는 물론 동북아시아와 내륙 유라시아 일대에 퍼져 있는 원시종교현상인 샤머니즘의 일부라 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의 문화사를 통하여 형성된 한국적 특수성을 지닌 것이다. 따라서 한국무교란 한국적 샤머니즘에 대한 고유명사로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한국무교란 단순한 사회적 습속 이상의 종교적 현상임을 나타내는 말인 동시에 한국적 샤머니즘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지난 반세기에 걸쳐 한국무교에 관한 연구는 여러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을 대체로 세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곧 역사학적 연구와 민족지(民族誌)적 연구 그리고 사회인류학적 연구가 그것이다. 이제 이 유형을 따라 지난 연구들을 개관하여 본다.
첫째, 역사학적 연구는 문화사가(文化史家) 이능화(李能和)가 대표한다. 1927년에 계간지(季刊誌) 「啓明(계명)」제 19 호에 발표된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는 한국무교에 관한 최초의 종합적 연구논문이다. 그는 역사적 고찰과 함께 한국 전역에 걸친 무격신앙의 해설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자료는 주로 고래(古來)의 문헌에 의존하고 있다. 대체로 문헌학적으로 자료를 정리한 논문이라 하겠다.
역사적 연구라는 입장에서 이능화와 노선을 같이 하면서도 주변 민족과의 비교연구를 시도한 이로는 최남선(崔南善)이 있다. 그도 같은 「啓明(계명)」제 19 호에 ‘살만교차기(薩滿敎箚記)’를 발표했다. 이 논문은 짜프리카의 시베리아 샤머니즘에 관한 연구와 조거용장(鳥居龍藏)의 인본 주변민족의 원시신앙에 관한 연구를 소개하면서 한국의 고대신앙을 고찰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국무교 자체를 직접 다루지는 못했다. 한국무교 연구에 직접 공헌한 그의 논문은 오히려 그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이라 하겠다. 이것은 광명신앙을 중심으로 동북아시아의 샤머니즘 문화권을 논하면서 한국무교의 성격과 그 위치를 해명하려고 한 논문이다.
둘째, 무교에 관한 민속지(民俗誌)를 처음으로 발표한 이는 헐버트였다. 그는 월간지 The Korea Review(1903)에 전후 6회에 걸쳐 ‘한국의 무당과 판수’(The Korea Mudang and Pansu)를 실었다. 그 후 선교사 클라크는 헐버트의 민속지를 안내로 무속에 관한 민족학적 연구를 발표했다. 그는 무당과 박수가 직접 시베리아의 샤만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고 시베리아의 샤머니즘 분포영역내(分布領域內)에 있는 한국무교의 형태를 규명하려고 했다.
민족지적 연구를 본격적으로 전진시킨 이는 손진태(孫晋泰)와 촌산지순(村山智順, れらやまじゅん)이다. 같은 분야의 송석하(宋錫夏)도 또한 민간신앙 연구에 관여하고는 있었으나 그의 주된 관심은 민속예능이었다. 손은 직접 채록한 무가를 편집하여「조선신가유편」(朝鮮神歌遺篇, 1930)을 출판했다. 그 밖에도 무교에 관한 많은 논문을 냈다. 촌산(村山, れらやま)은 당시 한국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 총독부의 촉탁의 한 사람으로서 민간신앙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출판했다. 여러 분야에 걸친 전국적인 자료수집이라는 점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다만 그 수집 방법에 있어 당시 전국 경찰서를 통해 조사한 것을 정리했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다. 이러한 연구들은 채집과 분류작업에 시종하였을 뿐 아직 체계적 연구에 도달하지는 못하였다.
셋째, 한국무속에 관한 총체적이며 체계적인 연구는 추엽(秋葉) 륭(隆)에 의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사회인류학적 입장에서 현지조사를 기초로 연구를 진행했다. 그의 표현을 빌린다면 말리노브스키(B. K. Malinowski)의 영향으로 ‘심화적 사회학적 방법(intensive sociological method)에 의한 현지연구’를 수행한 것이다. 즉 그는 한국의 무속신앙들을 집약적으로 조사하고 사회구조와의 관계 밑에서 무속의 전모를 포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종교현상으로서의 무교로 보다는 정체적(停滯的) 사회의 습속(習俗)의 하나로 보려고 했다. 그의 연구 논문들은 일단 적송지성(赤松智城)과의 공동 저작인「조선무속의 연구」상, 하(1937, 1938)에 수록되었으나 그 후 다시 편집하여 「조선무속의 현지연구」(1950)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추엽(秋葉)의 이 연구가 있은 후로는 한국무교에 관한 총합적 연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의 문화인류학자들과 국문학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 중에도 괄목할만한 것으로는 장주근(張籌根)의「한국의 민간신앙」(1973) 자료편(資料篇)과 논고편(論考篇)이 있다. 다만 이것은 무가(巫歌)를 중심으로 제주도의 무속에 국한되어 연구하는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 한편 현지조사들이 활발히 진행되어 단편적인 자료들과 함께 무가집(巫歌集)들이 간행되고 있다. 특히 정부에 의해 전국적인 실태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사실에 우리는 기대를 걸어 본다.
샤마니즘은 시베리아 원주민의 원시적 종교현상이라는 데 착안하여 19세기 말경부터 민족학자들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종교학자들이 샤머니즘에 관심을 가지고 종교학적으로 연구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 중 가장 총괄적(總括的)으로 연구된 저작으로는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Shamanism : Archaic Techniques of Ecstasy, 1964. (orig. in French, 1951)가 있다. 민족학자들은 대체로 샤머니즘이 지닌 사회적 기능에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샤만의 엑스타시 현상을 정신병리학적인 것으로서 역사적 사회적 소산으로 보려는 경향이 짙다. 예컨대 M. A. Czaplicka, G. Nioradze, Äke Ohlmarks, W. Schmidt, D. Zelenin 등이 그 전형적인 학자들이다. 젤레닌은 샤머니즘을 원시적 병리학과 아니미즘 아니마티즘적 기반에 선 치료기술 등과 관련시킴으로써 전 세계 인류의 진화의 한 과도기적 현상으로 보려고 한다. 또한 슈미트는 샤머니즘을 극북지대(極北 地帶)의 현상으로 한정하고 여기로부터 준(準) 극북지대로 전파됨에 따라 차츰 쇠퇴되었다고 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엘리아데는 샤머니즘을 원시적인 종교현상이라고 보고, 또한 그것은 잠재적으로는 전 인류에게 가능한 보편적 현상으로 본다. 따라서 무병현상(巫病現象) 자체도 이것을 단순히 정신 병리학적인 것으로 보지 아니하고 속된 인간에서 거룩한 인간으로 이행하는 과정 또는 종교적 이니시에이션 체험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샤만이 가진 종교적 기능은 물론 무의와 무구들이 지닌 종교적 상징의 의미를 해석하는 등 샤머니즘 전체를 종교사학적으로 연구하였다.
본서의 연구는 그 방법론에 있어 엘리아데가 제창(提唱)한 종교학적 연구의 입장을 취하려고 한다. 즉 무교를 단순한 사회학적 현상이나 심리학적 현상으로 보지 아니하고 종교학적 현상으로 보고 이것을 연구하려고 한다. 물론 무교가 지닌 사회학적 또는 심리학적 의미를 도외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는 엘리아데가 말했듯이 종교의 독자적 요소인 거룩과 그 현현(顯現 hierophany)을 포착할 수가 없다. 종교적 현상은 종교적 현상으로 취급하고(a religious phenomena as a religious phenomena) 연구해야 한다. 곧 자기를 계시하는 대상은 그 자체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현상학적 입장에서의 연구이다. 본시 종교적 행동이나 의례(儀禮)는 초경험적인 실재 곧 ‘거룩한 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종교적 사실은 모두 상징적 성격을 띠게 마련이다. 상징은 단순한 객관적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고 기본적인 것을 나타내고 있다. 요컨대 종교적 사실이란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그 자체의 입장에 서서 그 깊은 의미를 해석해 내려는 현상학적 연구야 말로 종교학의 본질적 방법론의 하나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학은 단순히 종교현상의 ‘의미’만이 아니라 종교의 역사적 현상 자체에도 관심을 갖는다.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지 아니한 의미라든가 구조론(構造論)은 결국 허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학은 마땅히 종교적 사실을 역사적 현상으로 보고 그 사적(史的) 전개를 추구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종교학은 이러한 종교의 역사적 표상 속에 들어 있는 의미와 구조를 구명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본서는 한국의 무교에 대한 종교학적 연구를 시도한 것이다. 우선 한국의 신화에 나타난 고대신앙의 형태와 그 반복행위로서의 고대제의의 분석을 통해 한국무교의 원초적 형태 또는 원형을 찾아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신라왕조, 고려왕조, 이조 등 각 시대를 통해 어떻게 전개되고 변천되었는가를 보려고 한다. 여기서는 특히 이러한 전개 변천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흘러온 무교의 구조를 또한 찾아보려고 한다. 끝으로는 이러한 역사적 전개를 해 온 한국무교의 잔유현상으로서의 민간신앙 곧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무속 또는 무격신앙(巫覡信仰)이 지닌 구조와 그 종교적 의미를 밝히려고 한다. 또한 여기서는 한국무교와 역사적으로 관계가 깊은 퉁구스족과 일본의 샤머니즘과 비교고찰(比較考察)함으로써 한국무교의 구조적 특성을 아울러 찾아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