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와 신호등
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정석곤
사람은 동물과 다른 점이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직립보행(直立步行)을 한다는 점이다.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열 달 살다 태어나면 걸으려고 온몸을 부지런히 움직인다. 누웠다가 뒤집기를 하고, 앉다가 기어 다닌다. 엄마 손을 붙잡고 섰다가 홀로서기를 한다. 드디어 첫돌을 앞두고 가족과 친지의 칭찬과 축하를 받으며 한 발 두 발 내디딘다. 뒤뚱뒤뚱 걷다가 맘대로 걸으면 바로 달리기를 시작한다.
사람은 걸으면서 마음이 조급해지는 게 아닌가 싶다. 걸으면 빨리 걸으려 하고, 달리면 더 빨리 달리고 싶어 한다. 새날이 밝으면 늘 만나는 게 도로다. 날줄인 도로에 씨줄인 횡단보도가 있고, 거의 신호등이 마주 서 있다. 나는 매일 만 보를 걷고 싶지만 실천은 못 하고, 한 걸음이라도 더 걸으려고 노력한다.
만약 도로에 차선과 신호등이 없다면 어떨까? 몇 년 전 프랑스와 이집트에 갔을 때 감동적인 광경을 보았다. 파리 에투알 개선문이 있는 광장은 방사형으로 뻗은 12개의 도로가 모이는 곳이다. 그 광장은 차선과 신호등이 없는 데도 차들이 클랙슨(klaxon)을 누르지 않고 잘 소통이 됐다. 또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의 중심지는 사람과 차의 통행이 잦은데 차선과 신호등이 없었다. 그렇지만 서두르지 않고 편안하게 통행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빨리 그들을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횡단보도 앞 신호등은 하루 내내 바쁘다. 파란불이 한참 켜졌다가 숫자가 20, 30, 50부터 나와 하나씩 적어지다가 1이 깜박거리면 바로 빨간불이 들어온다. 짧은 황단보도는 파란불만 깜박거리다 빨간불로 바뀐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잔머리를 몇 번 굴린다. 처음부터 빨간불일 때는 횡단보도 앞에서 파란불이 오길 기다린다. 문제는 횡단보도에 가까이 가고 있을 때다. 파란불을 보았다 하면 무법자처럼 쏜살같이 달려가 도로에 한 발을 먼저 들여놓는다. 곧바로 빨간불은 나에게 눈을 부릅뜨고 경고를 한다.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어디 한두 번이던가? 건너다보면 금방 민낯으로 돌아온다.
아기가 말을 할 줄 알면 부모는 신호등의 빨간, 노란, 파란불을 가르친다. 아니, 조급한 부모는 태교로 횡단보도를 안전하게 건너는 순서도 가르칠 것이다. 어린이집과 유치원 그리고 초등학교에서 얼마나 횡단보도 보행을 가르치던가? 그런데도 잘 지키지 못한 이들이 더러 있다. 나 또한 40여 년을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황단보도 앞에만 서면 급한 마음이 발동해 보행자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했다.
횡단보도는 주행자보다 우선 보행자의 안전을 꾀하고자 만들었을 것이다. 횡단보도가 많이 모인 곳은 교차로다. 사거리에는 횡단보도가 4개 있고, 신호등이 모두 다르게 작동한다. 대개는 한 번만 건너 자기 목적지로 간다. 그런데 기다렸다 한 번 더 신호를 받고 가는 이도 많다. 'ㄱ자'를 만들며 건너느라 꽤 시간이 소요된다. 급한 일이 있거나 여름과 겨울에는 기다리다 짜증을 낼 때도 있다.
교차로에 횡단보도를 보행자 우선으로 만들어 놓은 곳이 있다. 바로 전주 서신동에 있는 새터마을 제일아파트와 신일아파트, 비사벌아파트와 한국양봉농협 전북지점 사이의 사거리다. 4각형 횡단보도에다 대각선으로 2개가 더 있다. 그리고 횡단보도 신호등이 동시에 작동한다. 대각선 보행자는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나도 건널 때는 신이 나, 다른 사거리 교차로에도 이렇게 설치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아내와 외출할 때는 잔소리를 하곤 한다. 아내는 교통량이 적은 도로는 황단보도가 있는데도 가로질러 가려 한다. 황단보도로 건널 땐 신호등을 무시하려 한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 보도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잔소리가 효력이 없다 싶으면 화가 치민다.
지인들은 내 성격이 차분한 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운전대만 잡으면 180도로 변한다. 또 횡단보도를 걸을 때도 마찬가지다. 0.1초라도 빨리 운행하고, 건너려는 욕심이 생긴다. 나이가 들수록 욕심을 조금씩 내려놓으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칠순이라 그런지 아직은 더 움켜쥐려 하지 않은가? 앞으로 내 삶에 켜질 빨강 신호등을 잘 분별하여 잠깐 멈추었다 가는 지혜를 가져야 하리라. 날마다 횡단보도 앞 신호등을 바라보면서 급한 마음부터 내려놓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2018. 9. 28.)
※ 직립보행(直立步行) : 사지(四肢)를 가지는 동물이 뒷다리만을 사용하여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걷는 일로, 주로 인간이 이동하는 형태를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