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95
2월8일[연중 제5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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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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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byBvaTeC_vM (구본석 사도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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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안에 들어간 좋은 것들이 폭력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긍정적인 에너지로 변화되길!>
강력한 한파의 후유증을 단단히 앓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보일러며 난방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번 스스로 해결해보겠다고, 몇 날 몇 일을 어두컴컴한 보일러실에 앉아 메뉴얼도 꼼꼼히 탐독하면서, 이런 시도 저런 시도, 백방으로 노력해보았지만, 별 진전이 없더군요.
할 수 없이 전문 기사님을 호출했는데,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여기저기 쓰-윽 한번 훑어보시더니 즉시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셨습니다. 초스피드로 분해와 교체, 수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울 난방이나 온수 문제로 답답해하고 있는 사람들의 구세주로 맹활약하고 계시는 전문 기사님의 모습이 정말 멋져 보였습니다. 전문가적 포스가 풀풀 풍기는 보일러 기사님을 바라보면서, 저희 같은 사제 수도자도 마찬가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목자가 가장 멋있어 보일 때는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제단에서, 말씀의 선포자로서의 전문가, 이웃 사랑 실천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수도자가 가장 멋있어 보일 때는 복음삼덕의 실천의 전문가, 균형 잡힌 공동생활의 전문가가 되는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가장 멋있어 보일 때는 공동선 실천의 전문가,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세상 안에서의 일의 전문가, 부모로서의 전문가, 교사나 기술자, 정치인과 관료로서 충만하고 기쁘게 살아갈 때가 아니겠습니까?
피정객들을 위해 한 번씩 왕창왕창 시장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입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 참으로 대단합니다. 평생토록 한 사람이 먹어치우는 양이 대단할 것입니다. 주식에 간식, 후식에 특식까지. 어디 그뿐인가요? 어마어마한 양의 술이나 음료, 안주까지...평생 먹은 것을 쌓아 올리면 대형트럭 몇 대 분량이 되겠지요.
우리 뱃속으로 들어가는 음식, 절대로 상한 것이나 부실한 것이 아니겠지요. 고마운 분들의 정성과 손길, 땀과 노고가 깃든 결과물, 정말 좋은 것들, 양질의 육류와 생선,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우리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좋은 것들을 매일 수시로 섭취하는 우리입니다. 섭생의 결실이 좋은 결실을 맺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안에 들어간 좋은 것들이 폭력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변화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불행하게도 너무나 초라하고 부실한 것들이 많아 안타깝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코 복음 7장 20~23절)
좋은 것을 섭취한 우리에게서 보다 아름답고 고결한 것들,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들이 나와 동료 인간과 세상,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면 좋겠습니다.
좋은 생각,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태도, 순결, 자선, 생명 보호, 나눔, 호의, 정숙, 친교, 일치, 겸손, 지혜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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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가 모르고 먹는 선악과>
미국의 소설가 드라이저의 작품 “아메리카의 비극”은 욕심만 쫓아 사는 인생의 말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클라이드 그리피스란 청년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제대로 입지도 못한 채 살았습니다. 그의 마음엔 어떻게 하든지 돈을 벌어 부자가 되겠다는 결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약방의 사환으로 취직하였다가 조금 커서는 캔사스 시에서 가장 큰 호텔의 종업원이 됩니다. 호텔 보이로 있는 동안 주급 이외에도 손님들이 던져주는 팁의 수입이 제법 많았으므로 그 수입은 자기 어머니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여자들과 어울려 남의 차를 훔쳐 타고는 야외로 놀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린아이를 치는 교통사고를 냈습니다. 그는 경찰에 체포될까봐 그 길로 도망쳐 공장을 경영하는 숙부의 집으로 찾아가 공장 직공으로 숨어서 일하게 됩니다. 공장 주인의 조카라는 체면을 지키며 숙부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열심히 일하며 의복도 단정하게 입으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값싼 월급쟁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던 중 숙부의 집과 가까이 지내는 상류계급의 한 처녀를 사귀게 되었고 그 처녀와 결혼이 될 듯한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클라이드는 이미 결혼을 약속하고 임신까지 한 공장 여직공을 애인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돈과 명예와 부귀에 욕심이 생긴 클라이드는 부잣집을 처가로 삼기 위하여 임신한 여직공을 연못에 밀어 넣어 죽게 하고는 부잣집 딸에게 찾아갑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살인 사건의 발각과 동시에 사형대인 전기의자였습니다.
돈은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사실 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또한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문제는 돈 안에 독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자연산 복어를 먹을 때 꼭 제거해야만 하는 부위가 있습니다. 복어가 아주 맛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느 부위를 제거하지 않으면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 또한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모조리 먹으려다가는 클라이드의 운명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식당에서 식사할 때 늦게 도착하는 사람을 위해 음식을 조금 떼어 남겨놓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는 늦게 오는 사람에 대한 배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뿐만 아니라 우리 생명까지도 하느님의 것으로 고백하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의 몫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가히 도둑이라 불려도 마땅할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약탈할 수 있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약탈하면서 “저희가 어떻게 당신을 약탈하였습니까?” 하고 말한다. 십일조와 예물이 아니냐!“(말라 3,8)
하느님은 분명 십일조와 예물이 당신의 소유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것까지 먹었다가는 하느님의 소유를 약탈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모든 것이 당신 것임을 잊지 않도록 나무 한 그루만 당신 것임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경고하십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을 일구는데 도움을 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그것 하나만 상징적으로 당신의 것으로 기억하며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잊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현재의 가톨릭 신앙에서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와도 같은 하느님께 해당된 것들을 아무 두려움 없이 약탈하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어쩌면 복어 배에 있는 독까지 함께 먹는 것처럼 우리 자신도 모르게 돈에 중독되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모든 것을 주시지만 상징적으로나마 모든 것이 당신 소유임을 고백하는 방법을 그 중 십분의 일을 봉헌하는 것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사는 시간도 마찬가지고 에너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면 우리 생명까지 당장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진정 십일조를 내지 못하는 것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는 것처럼 죽음에 이르는 길일 수도 있음을 느낀다면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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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설화(舌禍)’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때문에 공든 탑을 무너트리는 경우를 말합니다. 말을 잘못했으면 즉시 인정하고 사과하면 그래도 마무리가 되는데 그것을 변명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중국 동진(東晉,317~420)의 9대 왕 사마요는 술김에 애첩 장귀인에게 "당신도 이제 늙었군. 진작 내칠 걸"이라고 말했습니다. 놀라고 발끈한 장귀인은 잠든 왕에게 이불을 덮어씌워 질식사시킨 뒤 도망쳤습니다. 일국의 제왕이 농담 한 마디 때문에 어이없는 죽임을 당한 셈입니다. 태조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의 비참한 말로 역시 설화(舌禍)란 주장도 있습니다. 세자 책봉 싸움에서 패한 게 원인으로 돼 있지만 실은 그 전에 술만 마시면 "한고조 유방이 장자방을 쓴 게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쓴 것이다"라고 떠든 게 화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말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무심코 했든, 작정하고 했든 그 말이 상대에게 비수가 되어 꽂히면 이후 일어날 일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가. 동서고금의 말조심에 대한 경고는 이루 다 열거하기 어렵습니다. 잠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의 문이 되고 입술은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저 역시도 말 때문에 난처했던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직장인들에게 ‘상여금’은 큰 위로가 됩니다. 같이 일하는 분에게 상여금을 드리면서 약간 비아냥거리는 투로 ‘좋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그분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정중하게 사과를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저의 부덕함이 컸습니다. 때로는 사실을 말하는 것보다는 공감하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보좌 신부 때입니다. 본당 청년들과 일영으로 단합대회를 갔습니다. 젊은 날이고, 한 잔 술에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과 약간의 시비가 있었습니다. 시비를 가려보니 우리 청년의 실수가 명백했습니다. 상대방에게 사과를 하고 마무리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청년들은 제게 심판을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같은 편이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툼 끝에 상처를 입었던 청년을 보듬어 주는 것이 더 필요했습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그 직책이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 책임자라면 말의 무게는 천근보다 더 무거워야 합니다. 벌어진 일을 잘 수습하는 것은 차선입니다. 설화가 생기지 않도록 참모들은 잘 보좌해야 합니다. 최고 책임자라 할지라도 국제무대에서는 정해진 규칙을 지키는 것이 최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것들은 내 안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잘 다스릴 줄 알면 우리는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악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우리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욕심, 시기, 질투, 탐욕, 인색, 게으름은 모두 내 안에서 나옵니다. 이 세상을 오염시키는 것은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셨던 인간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 때문입니다. ‘시기, 질투, 교만, 인색, 탐욕, 욕망, 미움, 원망’과 같은 것들은 이 아름다운 세상을 무질서하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악한 것들이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은 밖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들 내면의 갈등과 우리들 내면에서 나오는 악한 것들의 뿌리를 자를 때 비로소 회복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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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2월8일 [연중 제5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 7,14-23: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예수님은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15절) 하시며 금기 식품은 없다고 하신다.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란 음식을 말하는데, 어떠한 음식을 어떻게 먹든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 그 사람을 죄로 더럽힌다는 것이다. 즉 자연의 음식물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결단이 사람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시면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배 속으로 들어가서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라고 하셨다(마태 15,11.17 참조). 그리고 주님께서는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19절) 밝히셨다. 율법에 얽매인 자들이 부정하다고 선언한 것들을 먹는다고 해서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입술이 앞뒤 가리지 않고 지껄이고 끼어들면서 우리가 더러워질 수 있다.
그런데 레위 11장에 보면 부정한 음식물의 종류가 나오고 있다. 그것은 유다인들의 전통에서 신앙처럼 지켜오는 먹지 말아야 할 음식 중에 대표적인 것이 돼지고기가 있다. 2마카 6장에서는 안티오쿠스 에페파네스는 유대교를 근절시키려고 유다인들로 하여금 돼지고기를 먹게 하였고, 그것을 안 먹는 유다인들은 왕명을 거스른 죄로 수백 명이 죽임을 당했다는 역사적인 사건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런 유다인들에게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15절) 하셨는데 그 말씀은 그들에게는 깜짝 놀랄 말이었다. 즉 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음으로써 사람이 부정하게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지내왔고 죽어가면서도 지켜온 그들의 율법을 무시하는 듯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을 당황하게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본뜻은 무엇인가? 물건, 음식이란 그 어떤 것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측면에서 볼 때 “부정한 것이다.” “깨끗한 것이다.”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데 믿음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이라는 창고 안에 무엇을 쌓아 놓고 있으며, 그 안에서 무엇을 내어놓으며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악한 생각들이란 마귀가 나에게 불어넣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의 나쁜 생각에 힘을 보태고 부추길 수는 있지만 그러한 생각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것은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며 이러한 생각이 일어날 때, 마귀가 그것을 정당화시키고 그렇게 행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느냐에 믿음의 근본 의미가 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물건이나 음식이 아니라 사람 자신에서 나오는 생각과 행위이다. 바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이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과 이웃을 향하여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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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마르 7,14-19)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에는 세 가지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1) “죄는 너 자신이 짓는 것이다. 죄를 짓고 나서 남 탓을 하지 마라.”
2) “물질 자체는 선한 것이다.”
2) “몸만 씻지 말고 마음을 씻어라.”
1) ‘악’은 분명히 ‘사람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내가 짓는 것’입니다. 잘 아는 ‘친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든지 잘 모르는 ‘낯선 사람’의 모습으로 오든지 간에, 박해로 오든지 유혹으로 오든지 간에, 밖에서 오는 그 ‘악’이 나를 죄짓게 하지만, 그래도 어떻든 ‘죄’는 내가 짓는 나의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 5,8-9ㄱ)
믿음을 굳건히 하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면서 악을 물리치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데, 자만심에 빠져 있거나 방심한 상태로 있는 사람은 악에 굴복하거나 물들어서 죄를 짓게 됩니다.
‘악’이 죄를 짓도록 유혹했고 압박했다고 핑계를 대겠지만,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은 죄를 지은 사람 자신에게 있습니다.
죄를 짓고 나서 ‘다른 사람 탓’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남 탓’을 한다고 죄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죄가 더 커질 뿐입니다.
다른 사람 탓을 하는 것은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고, 회개하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진실하게 회개하는 사람들은 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말만 합니다.
반대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항상 말이 많습니다. 죄를 짓게 된 원인이나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설명은 사실상 변명입니다.
2) 음식이든지 다른 무엇이든지 간에 물질 자체는 선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 가운데 악한 것은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으면 안 되는 짐승’에 관한 율법이 나옵니다.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는 예수님 말씀은, 바로 그 율법을 폐지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음식을 언급하신 것은, 아마도 그 당시에 음식 문제가 사람들을 가장 많이 압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카베오기 하권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매우 뛰어난 율법학자들 가운데 엘아자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미 나이도 많고 풍채도 훌륭하였다. 그러한 그에게 사람들이 강제로 입을 벌리고 돼지고기를 먹이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더럽혀진 삶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 자진해서 형틀로 나아가며 돼지고기를 뱉어 버렸다. 이것이 바로 목숨이 아까워도 법에 어긋나는 음식은 맛보는 일조차 거부하는 용기를 지닌 모든 이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2마카 6,18-20)
돼지고기 먹기를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할 정도로 유대인들에게 음식 문제는 대단히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법에 어긋나는 이교 제사의 책임자들이 전부터 엘아자르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따로 데리고 가, 그가 먹어도 괜찮은 고기를 직접 준비하여 가지고 와서 임금의 명령대로 이교 제사 음식을 먹는 체하라고 권하였다. 그렇게 하여 엘아자르가 죽음을 면하고, 그들과 맺어 온 오랜 우정을 생각하여 관대한 처분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 6,21-22)
박해자들이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한 것은, 사실은 ‘배교’하라고 강요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특정 음식을 먹기를 거부해서 죽은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을 지키려고 순교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음식 규정을 폐지하셨다고 해서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순교자들의 신앙까지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회개는 하지 않고 외부 탓만 하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3) 회개는 몸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을 씻는 일입니다. 몸을 잘 씻는다고 회개하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을 씻어야 회개하는 것이 됩니다. 이 말은 바로 앞의 ‘식사 전의 정결예식 논쟁’에(마르 7,5) 연결됩니다.
정결 예식을 엄격하고 철저하게 실행하는 사람이 깨끗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과 삶이 정결한 사람이 진짜로 깨끗한 사람입니다. 음식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데, 거룩한 음식을(성체를) 먹는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먹든지 간에 무슨 마음으로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굶주리는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혼자서만 배불리 먹는 것은 분명히 죄입니다. 남의 것을 훔쳐 먹거나 빼앗아 먹는 것도 죄입니다. 절제하지 않고 ‘탐식’하는 것도 죄입니다. 그 죄들은 모두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로 그 마음을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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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제1독서가 그리는 세상의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사막 한가운데에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고 거기서 사방으로 물줄기가 뻗어 나가며, 물 속에는 많은 종류의 물고기들이 넘쳐 나고, 물이 지나는 땅 주변에는 식물들이 풍성히 자라나고 동물들이 활기 넘치게 뛰어다닙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모든 이가 꿈꾸는 이상향일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히브리 말로 된 구약 성경을 그리스 말로 맨 먼저 번역한 이들이 이 정원을 가리켜 ‘낙원’이라고 이름 지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사람이 이 정원에서 할 일을 규정한 동사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일하다’ 또는 ‘경작하다’의 의미를 지닌 동사 ‘아바드’입니다. 그런데 이 동사는 구약 성경에서 흔히 ‘봉사하다’, ‘섬기다’, ‘공경하다’의 의미로도 쓰였습니다. 따라서 이 낱말은 주인을 위하여 봉사하고 섬기는 직무를 받은 종의 역할을 드러냅니다. 사실 창세기 첫 장에는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땅의 권한을 위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1,26.28 참조). 결국 이 말은 사람이 땅을 지배하라는 의미가 땅을 섬기는 일, 땅을 공경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두 번째 동사는 ‘-을 잘 바라보다’, ‘-을 눈을 뜨고 지키다’라는 뜻을 지닌 ‘샤마르’입니다. 이 낱말은 사람이 정원을 지키는 소명을 받았음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인간이 땅을 지배하는 의미를 다시 한번 설명합니다. 인간은 온유하고 겸손하게 땅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주인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아름다운 ‘낙원’의 산지기로서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섬기는 하느님의 충실한 관리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껏 우리가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훼손한 기존의 생활 양식을 되돌아보고, 의미 있는 변화를 이루어 내는 일에 모두 함께 관심을 가지고 발맞추어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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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윤복 모세 신부님]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무엇?>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궁금증과 의문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과연 무엇이기에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 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더럽힐 수 있는 것들을 여러 가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조류독감을 비롯한 각종 질병과 불량식품들, 상한 음식같이 사람 몸에 좋지 않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도대체 왜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힐 수 없는지 이해가 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다른 방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육체의 관점, 물리적인 관점이 아닌 우리 영혼과 정신에 관한 관점에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들, 그것들은 사실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하느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 우리를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부정하다고 말하는 음식을 먹는다 해도 그 부정한 것을 이 세상에 내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사실 율법이 생긴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이 부정하게 여기던 돼지고기와 비늘 없는 물고기들은 더운 지방인 팔레스타인에서 쉽게 상하는 음식이었기 때문에 먹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여겨지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런 음식을 부정한 음식으로 생각하고 먹지 않았습니다.
결국 부정한 음식은 팔레스타인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배려였던 것이지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그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은 바로 우리 마음 속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사고가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사고 또는 실수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도하여 그렇게 되라고 생각하며 잘못된 일을 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의 어떤 행동이 ‘죄’가 되기 위해서는 죄를 지으려는 의도와 죄를 저지르는 행위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마음에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을 더럽히는 것들은 바로 우리 마음 안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죄를 저지르게 하는 악한 것들은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 또한 선하신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마는 우리 마음 안에 나쁜 생각과 의지를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게 하는, 우리의 영을 더럽히는 것들은 모두 우리 마음 안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마음을 더럽히는 그것들을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을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우리에게 그런 나쁜 생각을 불어넣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선택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나쁜 생각을 ‘유혹’이라고 부릅니다. 유혹은 우리를 나쁜 길로 강하게 이끌지만 우리를 반드시 그 길로 이끄는 힘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거부하면 그 유혹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을 더럽히는 것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의지에서 옵니다. 우리 의지가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이상 우리는 유혹의 결과인 죄를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하루에도 수백 가지 생각들이 들어왔다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좋은 생각도 있지만 나쁜 생각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는 나쁜 생각을 다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을 지나쳐 보낼 수는 있습니다. 우리 귀에 대고 악마가 아무리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여도 우리가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런 유혹들은 모두 그냥 흘러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어떤 목소리에 귀 기울이느냐가 우리를 하느님께로 또는 악마에게로 갈 것인지를 정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은 어디를 향해있는지 살펴보고 생각해 보시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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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진정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
오늘 복음에서도 부정함과 정함에 대한 논쟁이 계속된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잣대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제자들의 부정함을 트집잡았다.
이에 예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29,13)를 인용하여 그들이 율법만큼 중요시하는 조상의 전통을 ’사람의 계명’(7절), ’사람의 전통’(8절)이라고 단언하셨다. 즉 사람들이 만들어낸 관습에 불과한 것을 율사들은 하느님의 계명인 양 내세운 것을 질타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만든 조상의 전통은 하느님을 섬기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아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은 행동이 율법상 정결을 깨뜨린 부정함의 행동이 아닌 셈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바리사이와 율사들, 그리고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가까이 불러 모아놓고 정결에 관한 율법을 다시 세워 주시는 대목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더럽히고 진정 하느님 앞에 부정(不淨)함이 되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15절)
이 말씀으로 신약의 새로운 "정함"과 "부정함"의 율법이 세워졌다.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느 것도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 이것으로 구약에 불결하다 하여 금기한 음식들은 (레위 11장; 신명 14,3-21) 모두 폐기된 셈이다.
사실 유다인들에게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들, 정(淨)한 새들과 곤충들, 그리고 비늘과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들 외에 다른 동물은 거의 부정한 것이어서 식용이 금지되었다.
그나마 그것도 주검에 닿으면 다 부정한 것이 되어 먹을 수 없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주식으로 삼았던 메뚜기(마태 3,4; 마르 1,6)는 식용으로 허용된 곤충(레위 11,22)이었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모든 금기식품을 단 한마디 말씀으로 폐기해 버리셨다. 자연 그대로의 모든 음식물이 명예를 회복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과연 사람을 더럽히고 하느님 앞에 부정함이 되는가? 그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15절)이다. 여기까지가 바리사이들, 율사들, 그리고 군중이 들은 말씀이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물러갔을까? 대변(大便)을 생각했을까? 진정으로 더럽히는 것에 대한 설명은 제자들에게만 허용되었다.
어떤 음식이든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마음속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대변이 되어 배설되고 만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파고들어 사람을 더럽히는 부정(不淨)한 것은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22절) 이는 곧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죄악의 목록이다.
온갖 정결규정을 동원하여 ’껍데기’만 가지고 백성들의 정함과 부정함을 판단하던 율사들은 자신들이 내뱉은 말 때문에 도리어 부정하게 되고 말았다. "정함"과 "부정함"에 대하여 예수께서 새롭게 세우신 규정은 남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타인이 볼 수 없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는 본인 스스로가 가장 잘 알지 않겠는가?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서 나오는 가장 먼저의 것은 말이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그러니 한마디의 말이라도 사랑과 깨끗함이 담긴 말이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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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현우 안드레아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많은 군중들에게,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을 비교해 말씀해 주십니다. 이 말씀은 어제 복음 말씀에 이어진 내용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비난합니다. 이러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규정을 가르치고, 사람의 전통을 고수하면서, 오히려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린 그들의 위선을 질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에 이어서,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어떠한 음식도 부정하지 않다고 가르치십니다.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 하여 그 음식이 부정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 음식을 먹는다하여 그 사람이 부정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와 그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가르치십니다.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은, 더러운 손으로 먹는 음식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 안에 담겨 있는 좋지 못한 마음입니다. 좋지 못한 마음이 좋지 못한 생각을 끌어내고, 이러한 부정한 생각이 추한 말과 행동을 끌어냅니다. 이는 자신의 삶의 모습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도 오염시켜 버립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가짐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좋은 마음이 좋은 생각을 이끌고, 좋은 말과 행동을 이끌고,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아름답게 이끕니다. 우리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바뀌게 됩니다.
또한 이 마음가짐 역시, 주변 환경과 관계성 안에서 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주 보고 듣고 경험한 것에 따라, 생각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사는 것 자체에 급급해서, 살아지는 대로 살게 되고, 살아지는 대로 생각하게 됩니다. 더 이상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고, 살아지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경제 논리와 경쟁 구도, 계산적인 관계성 안에서 살아가다 보면, 그러한 세상의 흐름에 자기 삶의 모습을 맞추어가게 됩니다. 결국 그 삶의 모습에 맞추어 마음가짐도 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의 언어와, 계산적인 이해관계, 인간적인 판단들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세상의 논리가 우리 마음속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앙의 언어, 사랑의 언어, 용서의 언어를 자주 듣고 접하게 되면, 우리 또한 그러한 언어를 말하게 되고,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 언어를 자주 접하고, 어떠한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까? 나의 이웃에게, 나의 자녀들에게 어떠한 사람으로 다가가고 있습니까?
욕설과 폭력, 거짓과 탐욕, 교만과 다툼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파괴적으로 변화시키고, 그 사람의 생각을 부정적으로 이끌며, 결국 인생을 부정적으로 바꾸어 놓고, 주변 사람들까지도 그렇게 만들어버립니다.
우리의 삶이 아름답고 아름답지 못하고는 우리 자신의 생각에 달려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나 긍정적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삶은 언제나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에서도 좌절하고 불평하고 복수심을 불태우는 사람의 삶은 그렇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마음과 아름다운 눈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언어, 하느님의 표현을 즐겨 사용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칭찬과 감사, 용서와 화해, 존중과 겸손의 언어와 표현을 통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변화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주님의 삶을 기억하고, 주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으면서,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밝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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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에게 달렸다>
마르코 7,14-23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 또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나에게 달렸다>
하느님께서
나를 있게 하셨으나
나를 오롯이 있게 하는 것은 나요
나를 없게 하는 것도 나요
나에게 달렸다
하느님께서
나를 나이게 하셨으나
나를 참으로 나이게 하는 것은 나요
나를 나 아니게 하는 것도 나요
나에게 달렸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람이게 하셨으나
나를 온전히 사람이게 하는 것은 나요
나를 사람 아니게 하는 것도 나요
나에게 달렸다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과 하나 되게 하셨으나
나를 비로소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하는 것은 나요
나를 하느님과 갈라서게 하는 것도 나요
나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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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람을 더럽히는 것>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이 그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보시니 좋더라.”, “보시니 참 좋더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조된 모든 것은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더럽히고, 안 더럽히는 것은 사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사실 좋고 나쁨은 사람들이 서로 비교하여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더 좋고, 어떤 것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좋게 창조된 것이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 쓰려고 하면 더러움을 만들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 안에 품은 육의 욕망들은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을 밖으로 표출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자주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정작 문제는 외적인 것에 있지 않고 내적인데, 외적인 것에 연연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니 내면을 깨끗이 하십시오.
우리는 ‘얼짱’ ‘몸짱’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외면을 중시하는 말입니다. 어떤 이는 성형수술을 하고 겉모양을 가꾸는데 온갖 노력을 다 쏟아붓습니다. 반면, 속을 가꾸는 데에는 소홀히 해서 내면을 황폐하게 버려둡니다.
심지어 ‘감정에 충실하자.’ ‘솔직한 것이 좋지 않으냐?’하면서 자신의 악한 생각을 합리화하고 행동으로 옮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 많이 무뎌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겉뿐만 아니라 속까지도 보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16,7) 그러니 내면을 더 깨끗하게 가꾸어야 합니다.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나오는 글입니다. “당신의 행동에서는 활달하며 당신의 대화에 있어서는 조리를 지키며 당신의 사상에 있어서는 방황하지 말고 당신의 영혼에서는 내적인 분란과 외적인 혼란을 없애고 실생활에서는 여가가 없을 정도로 분주한 생활을 하지 말아라.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고 당신을 갈기갈기 찢고 당신을 저주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다고 이러한 것들이 순결하고 현명하고 건전하고 올바르게 머물려고 하는 당신의 영혼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투명하고 맑은 샘물가에서 샘물을 저주한다 하더라도 샘물은 결코 식수를 제공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진흙이나 오물을 집어넣었다 하더라도 샘물은 이것들을 흘려보내고 씻어내어 전혀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평범한 우물이 아니라 영원한 마음의 샘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그것은 만족과 단순과 겸손으로 결합된 자유를 스스로 끊임없이 누리면 된다.”(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진정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을 닮은 사람을 만들어 숨, 당신의 영, 얼을 불어넣어 주셨으니 그 본래의 아름다움을 잘 지키고 가꾸며 하느님의 좋은 작품인 만물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밖으로 나오는 것은 안에 담겨 있던 것입니다. 평상시에 좋은 것을 잘 담아 놓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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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첫눈에 반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첫눈에 사랑을 느꼈고, 이 사랑에 부부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첫눈에 반하는 것이 가능할까 싶습니다. 그보다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 아닐까요? 실제로 사랑에 빠지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고 합니다. 시러큐스 대학교의 스테파니 오티그 교수는 대뇌 촬영을 통해 0.2초 만에 그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코카인을 사용한 것과 같은 희열을 느끼고 뇌의 지적 영역에도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서서히 사랑이 물들어 가면서 사랑의 마음이 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첫눈에 반하는 사랑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어느 순간이 되면 이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자신과 맞지 않는 이유를 찾으면서 처음에 가졌던 사랑을 부정하게 됩니다. “내가 눈이 삐었지.”라고 말하면서 그 사랑이 잘못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처음의 사랑은 분명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 착각이라고 하면서, 아름답고 귀한 사랑을 잘못된 마음으로 바꾸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도 이렇지 않을까요? 0.2초 만에 내 뇌에 각인되는 주님의 사랑은 이유를 만드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이익을 따지는 사랑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주님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끼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준으로 사랑을 보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하는 사랑을 볼 수 없습니다. 함께함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간직해야 큰 기쁨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늘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라고 하시면서 깨끗한 마음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의 나오는 마음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마르 7,22) 이 마음이 나와서 사람을 더럽혀서 하느님과 함께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은 어떤 마음이어야 하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0.2초라도 충분히 반할 수 있는 사랑을 계속해서 내 마음에서 뿜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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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마음>
마음.
오늘은 묵상 주제를 마음으로 잡아봤습니다. 복음이 어제에 이어 마음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인간의 전통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린다고 주님께서 나무라시며 입술로는 하느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이미 하느님에게서 멀어졌다고 꼬집으셨지요.
그리고 오늘은 우리가 정결해야 한다면 손이나 발이 아니라 마음이 정결해야 한다시며 마음에서 온갖 죄가 나온다고 하시는데 인간의 마음을 사뭇 부정적으로 그러니까 죄의 온상으로 보십니다.
실제 우리도 마음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제 맘대로 한다고도 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 때, 이때의 마음은 좋은 마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은 얼마나 자기중심적입니까? 어떻게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들고, 어떻게 모든 것이 자기 맘에 들기를 바랍니까?
마음이 바다같이 넓다면 그나마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마음 안에 들어오길 바라니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마음에 안 들면 화를 내고 미워하니 얼마나 폭력적입니까?
그렇지요. 꼭 주먹을 써야 폭력적인 것이 아니지요. 미움이나 분노 같은 감정 폭력도 폭력이지요.
아무튼, 우리 마음이 자기중심적일 때 오늘 주님 말씀대로 온갖 죄와 악이 마음에서 나옵니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마음 때문에 비관에만 빠져있을 수 없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마음 안에서 이 모든 것이 나오고 마음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정신을 차려 마음을 바꾸고 곧 회심하고, 마음을 잡으면 곧 조심하면 됩니다.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 우리의 육의 정신을 버리고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바꾼 마음을 단단히 잡으면 됩니다.
지난 대림절 강론에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방심한 것을 다시 조심해야 합니다.
방심은 마음을 놓는 것이고, 조심은 풀어진 마음을 잡는 것이지요.
조심의 조操 자가 ‘잡다’, ‘쥐다’, ‘조종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조심한다는 것은 풀어진 마음을 다시 잡는 것이고, 이는 말고삐를 다시 잡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말의 고삐를 죄지 않고 풀어놓으면 말이 제멋대로 돌아다니지만 다시 말고삐를 잡고 조이면 말을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지요.
조심한다는 것은, 이처럼 마음의 말고삐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방심을 조심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본대로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는데 정신을 차리고 회심하는 겁니다.
마음에서 모든 것이 나오니 우리 오늘 경각심을 가지고,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시 잡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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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달음의 여정>
-무지에 대한 답은 은총의 깨달음뿐이다-
어제에 이어지는 오늘 제1독서 창세기 역시 흥미롭습니다. 어제의 인간 창조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어제는 하느님을 닮은 고귀한 품위의 인간존재를 말했다면 오늘은 흙에서 창조된 유한한 피조물로서의 현실적 모습입니다. 하늘과 땅의 양 측면을 지닌 모순(矛盾)적인 인간 피조물임을 깨닫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흙의 인간임이 엄연한 현실로 드러납니다. 흙의 먼지로 빚어진 인간, 바로 피조물로서 인간이라는 자각이 우리를 참으로 겸손하게 합니다. 우리는 사람이지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흙(humus)’에 어원을 둔 ‘인간(homo)’이요 ‘겸손(humilitas)’입니다. 흙처럼 겸손해야 비로소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흙으로의 인간창조에 이어지는 에덴동산이 웬지 모를 긴장이 감도는 분위기입니다. 참 좋은 에덴동산의 낙원이지만 모든 것이 허용된 것은 아니었고 에덴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동시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고, 이어지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참으로 엄중한 금령으로 끝나는 오늘 제1독서 창세기 말씀이 우리를 긴장하게 합니다. 새삼 인간의 선택의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모든 것이 허용된 에덴동산이 아닙니다. 넘지 말아야 선을 넘어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는 선택을 하는 날, 온갖 불행과 더불어 죽음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새삼 삶은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부단히 선善을 선택하여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요즘 참 많이도 강조한 “선택의 은총–훈련-습관”의 시스템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도 참 좋은 선택을 보여줍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하느님 찬미는 영혼의 본능이요 참 좋은 선택이자 훈련입니다. 찬미의 선택이요 훈련입니다. 영혼의 건강에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자발적 선택과 훈련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깨달음의 은총도 이런 좋은 선택의 훈련에서 옵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이 참 강렬합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내가 나를 더럽힐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나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네탓이 아닌 내탓이라는 것이고 이 또한 진실입니다. 이어 제자들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예수님께서는 다시 반복합니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은 알아들지 못하느냐?”
예수님은 결국은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시는 것입니다. 결코 음식이 마음을 더럽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깨달음을 강조하십니다. 우리의 영적 삶은 ‘깨달음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여정과 더불어 자유롭고 겸손해지고 순수해지는 마음이요 무지로 부터의 해방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우리에게는 참 좋은 깨달음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가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바로 이것이 인간무지의 현실입니다. 이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흙으로 지음 받은 모순(矛盾)된 우리 인간의 엄연한 어둡고 부정적인 보편적 현실입니다. 참 무지한 인간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오늘날의 인간현실을 보면, 멀리 갈 것 없이 내안의 나를 보면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이런 안에서 나오는 악한 것들이 자신을 더럽힐뿐 아니라 공동체도 사회도 더럽힙니다.
참 무지한 인간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그동안 참 많이도 강조한 무지의 병, 무지의 악, 무지의 죄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깨달음뿐입니다. 깨달음의 지혜를 통한 마음의 순수와 자유, 겸손입니다. 이래서 깨달음의 지혜,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훈련, 깨달음의 여정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깨달음, 깨어있음, 깨끗한 마음, 모두 ‘깨’자 돌림으로 서로 하나로 연결되는 우리 말이 고맙습니다. 부단한 깨달음의 훈련과 여정을 통해 마음의 정화와 성화가 뒤따릅니다. 이래서 부단한 기도, 부단한 회개, 부단한 말씀 공부의 선택과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무지가 아니라 말씀입니다. 인간 영혼은 무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깨달음에 대한, 말씀에 대한, 공부에 대한 본능적 갈망과 열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공부의 궁극적 목적도 무지에서 벗어나 참나의 행복을 살기위함입니다. 하느님은 고맙게도 하느님 말씀을 향한 사랑과 갈망도 우리 마음에 심어주셨습니다. 시편37장 30-31절 말씀입니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자아내고,
그의 혀는 옳은 것을 말하느니라.
하느님의 법이 그의 마음에 있어,
그의 걸음이 흔들리지 않느니라.”
이어 시편 39장9절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
사람되는 공부보다 더 중요한 평생 공부도 없습니다. 늘 강조하다시피 우리 삶은 평생 졸업이 없는 평생 현역의 주님의 평생 학인입니다. 평생 배움터 인생에서 부단한 기도, 부단한 회개, 부단한 말씀 공부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를 통해 깨달음의 여정에 항구할 때, 비로소 무지에서 벗어나 참나의 순수와 겸손, 자유의 참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깨달음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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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5주간 수요일🕯(2.8)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르7,20)
오늘 복음(마르7,14-23)은 '사람을 더럽히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7,14-15)
그리고 이 비유의 뜻을 물어보는 제자들에게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7,20-23)
한마디로 어떻게 먹든 먹는 게 문제가 아니고 음식이 문제가 아니라, 먹고 나서가 문제이고, 먹고 난 다음, 마음 안에서 나오는 것이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요즘 우리가 듣고 있는 독서는 창세기의 말씀, 곧 천지창조에 관한 말씀입니다. 모든 것의 원창조자요 제일원인(causa prima)이 하느님이시라는 것과 창조된 모든 것은 선(善)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고, 주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의 숨을 받아 생명체가 된 으뜸 창조물인 사람은 창조물 중에서 유일한 영적 존재, 곧 영의 움직임에 이끌려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영적 존재인 사람은 '두 가지 영, 곧 성령과 악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오늘 복음은 악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 문제이고, 그것이 나와 너를 더럽히고 죽게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마르7,20-23의 말씀은 '악령의 지배에 놓여있는 사람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믿음과 믿음의 구체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얻는 선물은 '성령'입니다. 곧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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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 15)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입니다.
뒤틀린
마음도 달래고
씻어 주어야
마음으로
빛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마음의 참맛은
단연코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입니다.
산다는 것은
이와 같이
우리 마음이
하느님을 향해
깨어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는 삶은
서로에게
너무나
아픈 삶입니다.
돌보지 않은 마음은
상한 음식보다
더 고약합니다.
마음이 죽으면
행복도 죽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마음으로
돌아가야 할
신앙의
마음입니다.
신앙의 마음이란
마음을 지켜주는
십자가의 마음을
품고 사는
마음입니다.
마음의 상처
마음의 피를
소독하고
닦아주는
사람이 올바른
마음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이 커가고
마음이
변질(變質)되지
않는 마음의 나라
하느님 나라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살리기에
가장 좋은 오늘
마음의 가장
기쁜 날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좋은
마음을 모시는
가장 가슴 뛰는
오늘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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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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