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웅태 요셉 신부
연중 제9주간 수요일
마르코 12, 18-27
부활에 대한 논쟁
오늘 복음은 "부활에 대한 논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영생이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 바오로가 유대인들에 붙잡혔을 때
이 두파의 교리가 대조적인 점을 이용하여 의회에서 연설하여 풀려나온 일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평신도들이었으나 사두가이파는 귀족이나 부호들 출신이었고
그 대부분은 제사직(사제직)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안정되고 특권을 누리고 있었고 그들 가운데서 지배자들도 나왔습니다.
또 사두가이파는 성문화된 모세 5경만을 귀중하게 여기고
바리사이파가 귀중하게 여기던 구전상의 율법이나 관습, 규정 등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두가이파들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바리사이파 들에게도 질문을 받은 일이 있고
또 사두가이파들에게서도 질문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두가이파들은 그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모세 5경 중에 신명 25, 5-10에 나오는
수혼제도(嫂婚制度)라는 율법을 가지고 부활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신명 25, 5-10을 보면 이 수혼제도에 대해 나옵니다.
즉 여러 형제가 한 집에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자손이 없이 죽으면 죽은 형의 미망인을 아내로 삼고
형을 위하여 자손을 이어주는 것이 다음 동생의 의무로 나옵니다.
그리고 자손이 생기면 본래 남편의 자손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의 목적은 가족의 명칭이 유지되고 가족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율법에 근거를 둔 이스라엘의 수혼제도를 가지고
부활이 없음을 증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즉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하면 부활 후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는 것입니다.
정말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두가지 점을 강조하면서 답변하신 것입니다.
첫째, 부활한 육신은 육체적인 욕망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다음에는 시집, 장가가는 일이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즉 부활한 후에는 육체적인 욕망같은 것은 없게 되고 천사와 같은 기쁨의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
사람이 부활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즉 탈출 3, 6을 보면 모세가 하느님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보면 사람이 죽은 후 살아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은 언제나 살아계시기 때문에 죽은 자의 하느님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사악, 야곱이 죽고 또 살아 있지 않다면
모세가 하느님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는 것이 모세 5경에서도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예수님은 살아 생전에 바리사이파나 사두가이파나
그밖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시험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인해 그 모든 신비가 벗겨진 것입니다.
특히 그분의 부활을 알고 또 믿는 우리로서는 이 질문이 별로 큰 문제는 안될 것입니다만,
그러나 우리 주위에서 예수 부활에 대한 질문을 듣게 될 때
우리도 예수의 논증과 같이 그 확실한 믿음과 답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증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을 부활시켜 주시는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천주님!
우리는 비록 한번 죽게 되더라도 당신의 능력으로 부활하리라 믿습니다.
살아 생전에 당신을 믿고 따름으로서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도 주소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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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욱 안드레아 신부
연중 제9주간 수요일
마르코 12,18-27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위해서 어떠한 목적을 가진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유대 사회 안에서 부유함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계급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배마저도 평화와 국가적인 복지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각하여
로마의 식민통치에 찬성하고 협조하는 세력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종교적, 민족적 주체성보다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더 큰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 백성들과 항상 함께 하시며 사람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고 있는
예수님이 사두가이파들의 눈에 가시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하고 다른 성경은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모세오경에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부활에 대한 사상을 부정하였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그러한 부활에 대한 교리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시도하고 있습니다.
수혼법에 따라 맏이의 아내였던 형수와 나머지 여섯 동생들이 모두 결혼을 하게 되었다면
부활 후에 그 여자가 과연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인간은 부활 후에 천사들과 같이 되어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살아간다고 하시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부활시키시는 하느님, 복음의 표현대로 하면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사두가이파들을 반박하고 계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위해서 어떠한 목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목적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지만 지금 나의 현재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목적을 가지고 있으나 현재부터 그 목적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그 목적이 이루어 질 수 없기 때문에 미래의 목적이 현재의 나를 움직여서
삶의 자세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두가이파들처럼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그들이 가질 수 있는 목적에 한계가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부정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목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현세의 삶일 뿐입니다.
지금 내가 어떻게 잘 먹고 잘 사느냐, 극단적으로 말하면
다른 사람의 고통은 외면하더라도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 만이 문제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부활이라는 목적을 갖고 있는 사람은
현세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만 얽매이지 않습니다.
지금 나의 삶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장 큰 목적을 얻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세에만 머물지 않고 하느님이라는 더 크고 위대한 가치를 찾고
그분의 뜻을 내 삶 안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주셨으며”,
자신이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스승으로 임명”되었다고 굳게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명이 비록 고난에 빠지게 하더라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부활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그것을 희망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바오로 사도의 끈임없이 주님을 향해 걸어가는 삶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이 가장 큰 목적은
우리를 지금 이 순간에도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내 삶의 자세와 방향이 항상 하느님을 향해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부활에 대한 희망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대구대교구 이정욱(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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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대 마르코 신부
연중 제9주간 수요일
마르코 12,18-27
하느님의 존재방식 : 순수현재
앞장에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예수께 와서,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로마황제에게 주민세(인두세)를 바쳐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물었다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17절)는
놀랄만한 명답(名答)을 듣고 물러갔다.
오늘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께서 와서
구약의 수혼법(嫂婚法)을 부활과 관련지어 질문을 던진다.
그들의 질문은 구약의 수혼법(창세 38,8; 신명 25,5-10)에 근거를 둔 것이긴 하다.
수혼법에 의하면 남편이 죽게될 경우 가장 가까운 형제로부터 친척까지(룻기 4,1-8)
미망인과 결혼해야하고, 이렇게 하여 낳은 첫 아들은 고인의 아들로 인정하여
이스라엘 가문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
그러나 칠 형제가 모두 맏형의 부인을 두고 자식 없이 살다 죽었다면,
부활 때 그 여인은 일곱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질문은
너무 과장된 가공(架空)의 질문이라 하겠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이 질문은 사실상 두 가지 측면을 의도하고 있다.
하나는 그 시대에 통하던 부활사상을 우습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된다면 예수까지 난처하게 만들 심상이었다.
우선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신약성서에서 "사두가이파 사람"은 94번 등장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보다 훨씬 드물게,
모두 14번 등장하는데, 마르코와 루카복음에 각각 1번(마르 12,18; 루카 20,27),
마태오복음에 7번, 그리고 사도행전에 5번 등장한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정확한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통치하기 시작했던 기원전 333년까지 거슬러가야 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침공한 모든 곳에 헬레니즘 문화를 퍼뜨린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이때부터 기원전 63년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던 때까지의 과정에서
지도층의 유다인들은 크게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에세네파, 열혈당원(젤롯당원),
꿈란공동체 등으로 분리된다.
비록 여러 번 나라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였지만 야훼신앙과 율법준수에 대한 정신은
누구보다 강했던 유다인들이다.
헬레니즘 문화와 이교도의 신과 여신의 숭배를 강요하던 희랍의 프톨로메오 왕가와
셀레우쿠스 왕가의 통치는 약탈과 박해로 이어지고,
결국은 유다인들의 무력(武力)저항을 불러오게 되고, 하스모네 가문의 마따니아가
선봉에 선다.
마따니아의 저항운동은 "하시딤"(경건한 자, 율법에 충실한 자들) 무리와 결탁하면서
막강한 힘을 얻게 되었고, 그의 아들 유다(마카베오)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유다는 마카베오항쟁을 일으켜 셀레우쿠스 군대를 무찌르고 기원전 164년 12월에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그 후 해마다 성전봉헌 축제(하누카)를 지낸다.
이를 계기로 종교적인 상황은 호전되었지만 정치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문제는 유다의 동생 요나단에 와서 벌어진다.
그와 그 일가는 헬레니즘 세력과 오히려 결탁, 협정 등을 통하여 유다를 통치하는 실세로 둔갑하였고,
다윗 시대 이후로 사독 가문이 맡아왔던 대사제장직을 겸하는 탐욕을 부렸던 것이다.
이에 "하시딤" 무리들이 결별을 선언하고
"분리된 자", "의로운 자"로 자처하는 율법 경건주의자들이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며, "경건한 자"로 자처하는 "에세네파" 사람이다.
후자는 속세를 떠나 사해 근처에 모여 꿈란 공동체를 이루었다.
나머지는 끝까지 무력으로 종교와 정치의 자유를 꾀하려는 열혈당원에 속한다.
결별을 선언한 자들이 모두 떠나고 남은 무리들이 바로 하스모네 가문의 후손들인
사두가이파 사람들인 셈이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당시의 대사제장직을 독차지하고 최고의회 산헤드린의 구성원으로서
당대 최대의 권력을 누리는 자들로서 율법에 대하여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단지 모세에게서 비롯된 율법, 즉 모세오경의 권위만을 인정하고
구전(口傳)된 율법이나 계율, 조상의 전통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모세오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기원전 2세기경부터 싹튼 부활사상을 믿지 않았으며,
천사의 존재, 사후(死後)의 상벌, 묵시론적인 사변과 같은 새로운 개념들을 철저하게
부정하였다.(사도 23,8)
원래 기득권은 변화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법이다.
사실 이스라엘은 예수의 출현으로 적지 않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고 날로 많은 추종자를 얻어 가는 예수를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여
배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두가이파의 가공할 질문에 예수께는 성서와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먼저
탓하신다. 구약의 수혼법과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가 그런 오류를 빚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두 가지 의도를 내포한 답변을 시도하신다.
첫째는 육체부활의 의미를 밝히시는 것이고,
둘째는 하느님께서 죽은 이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아무래도 세상에 빗대어 천국을 상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육체의 부활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할 때 육신도 함께 부활한다면, 그 육신이 어떤 모양일지는
지금의 육신의 틀을 벗어나 생각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무지하게 더울 때, 시원한 곳을 천국이라는 생각,
무지하게 배고플 때 한 술의 밥이 천국이라는 생각,
사막에서는 오아시스가, 유목민들에게는 어렵게 찾아낸 푸른 풀밭이
천국과도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육신의 부활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차원임을
분명히 하신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과 발현에서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는 차원이다.
예수께서는 모세에게 하신 하느님의 계시말씀(출애 3,6)을 새롭게 해석하여
이 계시가 이미 부활사상을 내포하고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늘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눈에는 아브라함도 이사악도 야곱도 모두 죽었다.
인간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태어났기 때문이다.
즉 시작이 있기 때문에 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반면에 하느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시니 늘 영원하시다.
이를 계시 신학적 언어로 "순수현재"(pura praesentia)라고 한다.
순수현재란 하느님의 존재방식으로 과거와 미래가 없는 늘 순수한 현재(現在)의
상태로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가 죽었던, 살았던, 살 것이든,
늘 살아 계신 하느님이신 것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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