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19일(토)
* 시작 기도
주님...
여동생의 성폭행 당함으로 분기탱천하여 그 일에 가담한 성인 남자들을 할례를 빙자해서 다 살해한 시므온과 레위.
자신의 정욕을 참지 못하고 아버지의 첩과 동침했던 르우벤을 봅니다.
이 시간 내가 무엇이라고 선악구조를 가지고 그들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나도 그들과 못지 않은 폭력살인자이며 정욕과 탐욕에 눈이 먼 자인데 말입니다.
이런 현상 앞에서 사람을 판단하거나 난도질하지 않도록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게 하옵소서.
나에게는 이런 것을 이겨낼 아무런 힘과 능력이 없습니다.
하여 그런 것으로 우쭐대지 않게 하시고 나는 이들보다 100배 1000배 더 악할 뿐임을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어떤 선한 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오니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의 긍휼만이 내게 필요합니다. .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오늘은 내일 주의 날을 맞이하는 예비일입니다.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나는 죽고 오직 예수만 드러나는 거룩한 한 날이 되게 하옵소서.
주향교회의 직분자를 세우는 일에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주의 마음에 합한 자로 바르게 세워질 수 있도록 간섭하여 주소서.
늘 넘어지고 자빠지는 연약한 자들의 뜻대로 내버려두지 마시고 오직 강권하시는 주님의 뜻을 이루어 주소서.
살아계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창 49:1-7
제목 : 야곱이 아들들에게 한 예언의 진정한 의미.
1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2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3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4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 나의 묵상
요셉이 아버지 이스라엘로부터 개인적인 축복을 받는다.
물론 그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아버지 이스라엘이 양자로 삼고 그들을 축복하는 것이다.
그 축복에 세겜을 잉여의 복으로 준다.
한편 오늘 본문은 임종을 앞둔 야곱이 그의 열두 아들을 불러 일일이 축복하는 내용이다.
그 중 르우벤 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축복이다.
야곱의 말은 그들이 후일에 당할 일을 그들에게 보일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르우벤은 비록 내 장자이므로 나의 힘이고 내 능력의 첫 열매이므로 너는 남들에 비해서 월등하고 그 힘이 탁월하다.
하지만 너는 물이 끓는 것처럼 제멋대로이므로 앞으로 으뜸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는 네가 아버지의 침대에 올라가 그 침대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이면서도 함께 칼을 휘둘러 폭력을 행사했다.
따라서 나는 그들이 하는 비밀스런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을 것이며 그들과 함께 악한 일을 꾸미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은 화가 난다고 사람들을 죽였고 자기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소의 발목 힘줄까지 끊어버렸다.
노여움이 너무 심하고 지나치게 잔인해서 그들에게 저주가 임할 것이다.
나는 그들을 야곱 지파 중에서 나눌 것이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흩어 놓을 것이다.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의 첩 빌하와 통간하였다.
이를 가리켜 오늘 본문은 ‘물의 끓음’ 같다고 표현한다.
그런 물의 끓음이 저지른 죄인 것이다.
이처럼 야곱이 예언한 대로 르우벤이 후일에 당할 일은 실제로 나타난다.
민수기 16장에 언급된 대로 르우벤 지파인 다단과 온이 고라의 반역에 동참한다.
또한 르우벤 지파는 가나안 땅에 입성하기도 전에 성급하게 요단 동편의 지역 분배를 요구하여 그곳을 기업으로 받기도 하였다(민 32장).
그리고 이스라엘의 위기 때에 드보라가 주도하는 연합군에 동참하기를 꺼리기도 하였다.
(삿 5:16)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찌 됨이냐?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따라서 모세는 신명기 33:6절에서 단 몇 마디로 르우벤 지파에 대한 축복을 마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신 33:6) 르우벤은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사람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
이뿐 아니라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에 대하여도 예언한다.
이 두 형제가 지닌 기질의 특징은 ‘잔인성’이다.
이들은 누이 디나가 세겜 성의 추장인 세겜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자 무자비한 방법으로 보복하였다.
이에 야곱은 그들의 행위를 강하게 책망하면서 그들의 후손이 분열될 것을 예언한다.
시므온 지파와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분열되는 현상을 맞게 된다.
시므온 지파는 인구가 격감하여 59,300명(민 2:13)에서 후에는 22,200명(민 26:14)으로 무려 37,100명이나 줄었다.
그리고 이 지파는 가나안 땅의 분배에 있어서도 독립된 지파로서 참여하지 못하고 유다 지파에 흡수되어 유다 지파의 땅 안에서 기업을 분배받는다.
(수 19:1) 둘째로 시므온 곧 시므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들의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라.
나아가 역대상 4:33-43절에서는 시므온 지파의 일부가 약속의 땅 밖에 거주하고 있다는 지파 분열의 현상까지 증거한다.
또한 레위 지파 역시 한 지역에 모여 살지 못하고 방방곡곡에 흩어져 사는 운명이 된다(수 21:1-40).
그럼에도 이들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가장 귀한 사명을 받는다.
이들이 이런 귀한 사명을 받은 까닭은 출애굽기 32:26절에 언급되어 있다.
(출 32:26)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당시 아론과 이스라엘 공동체가 시내 산에 올라간 모세에 대항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길 때 모세의 주장에 동조하여 그들의 우상 숭배를 정죄하는 믿음의 결단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야곱이라 불리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 안에서 그 아들들의 후일에 있을 일들에 대하여 예언을 한다.
이런 예언은 아직 계시가 완성되지 않은 시기에 하나님이 주신 계시로 일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계시를 완성하시고 또한 창세전 언약인 묵시가 하나하나 역사속에서 펼쳐져 드러나 보이며 더 이상 이런 예언이 필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고 난리다.
예언을 한다느니, 그 예언을 받으러 간다느니 하면서 성경 66권 외에 또 다른 계시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곧 계시가 성경 66권으로 부족하지 않다.
오직 우리의 탐욕이 이를 거부할 뿐이다.
어떤 목사들은 자기 성도들 중에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많아서 다른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들이 어제 무엇을 했는지를 다 말한다는 것이다.
그런 예언으로 인하여 성도들이 나쁜 짓이나 죄를 짓지 못한다고 자랑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예언이 아니다.
그것은 양복 입은 무당이나 예수 무당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살기를 원하시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아시기에 넘어지고 자빠져서 무릎이 깨질지라도 넘어지게 놔두시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런 공의의 심판을 통하여 무덤의 자리에 내려가게 되고 그 무덤에서 비로소 예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이 다윗을 충동질하도록 내버려 두신다(대상 21:1).
또한 사탄이 욥을 건드려서 그의 모든 자녀들과 가진 소유물을 흩어버리도록 놔두시는 것이다(욥 1:12, 2:5).
다윗이나 욥이나 이런 공의의 심판을 통하여 무덤 안으로 들어가며 그 무덤에서 철저히 회개하여 부르짖음을 통해서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된다.
그런 그에게 구원이 임한다.
이 구원은 참 자유가 있는 구원이다.
혹시 예언하는 자들에 의해서 내 죄가 폭로될까봐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선이 아니라 오히려 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숨겨진 악이 아니던가?
그런 숨겨진 악 속에 무슨 자유가 있으며 무슨 평안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며 오직 의와 평강과 기쁨이 있는 것이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사람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자기가 무언가 선한 일을 한 것 같으면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채워진다.
그것이 바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자기 의다.
이처럼 우리는 지극히 연약한 자이다.
그런 연약함을 날마다 경험하며 바라볼 때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임을 깨닫고 날 구원하실 이는 오직 예수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내 안에서 선을 찾으면 그것으로 나를 드러내는 자랑이 앞서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셨습니다.’ 하고 주님께로 그 공을 돌리는 것이다.
그런 중에도 우리 마음에는 이런 마음이 남는다.
‘그래도 내가 조금은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다.
그런 것은 애교로 봐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구원에 관한한 우리의 그 무엇이라도 보탤 것이 조금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 안에서 선한 일을 하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주님이 하셨다는 고백을 늘 입에 달고 살아야 한다.
습관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말이다.
그럼에도 내 안에 조금이라도 내가 조금 보탰다는 마음이 들 때 그것을 보면서 나의 ‘없음’을 부인하는 나를 발견하고 그런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더 아래로 내려가서 진짜 진리 안에서 ‘nothing’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불러야 한다.
지금까지 한 말은 다름 아니라 나의 이야기이며 내가 그렇다는 말이다.
못 박고 또 못 박아도 다시 살아나는 나의 옛 사람을 오늘도 다시 못 박는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새 생명으로 살아, 나는 죽고 오직 하나님만 드러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십자가에 못 박고 또 못 박아도 다시 살아나는 나의 질기고도 질긴 엣 사람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못 박는 일이오니 내가 죽을 때까지 못 박는 것이 나의 할 일임을 믿습니다.
그렇게 매일 매일을 못 박으면서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로 살기 원합니다.
그런 와중에도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나의 의가 고개를 내밀려 하오니 이런 나를 보면서 나에게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며 사는 자가 되게 하소서.
하루 종일을 말씀으로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묵상하오니 주님을 묵상함이 내게 심히 좋으며 기쁨입니다.
주의 말씀이 내게 꿀보다 더 달고 야곱의 우물보다 더 시원한 생수입니다.
이 말씀이 나를 영생으로 인도하는 솟아나는 샘물이게 하소서.
날 구원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