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젤과 소다수 / 고선경
너에게서는 멸종된 과일 향기가 난다 투룸 신축 빌라 보증금 이천에 월세 구십, 어떻게 해야 너를 웃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두 시간 동안의 폭우, 일주일 동안의 아침, 유리병 속 무한히 터지는 기포 현관에 놓인 신발의 구겨진 뒤축이 웃는 표정을 닮았어 너는 침대에 누워 있고 바람이 많이 부는 청보리밭에 가고 싶다 멸종된 기억을 가지고 싶다 너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날릴 때 나는 사라진 언어를 이해하게 된다 아침의 어둠이 이젠 익숙해 그래도 같이 씻을까 산책을 갈까 세상에서 가장 느린 산책로 쓰러진 풍경을 사랑하는 게 우리의 재능이지 네 손의 아이스크림과 내 손의 소다수는 맛이 다르다 너의 마음은 무성하고 청보리밭의 청보리가 바람의 방향을 읽는 것처럼 쉬워 무한히 터지는 기포 나는 너의 숨을 만져보고 싶다 너는 머나먼 생각처럼 슬프거나 황홀한 곳까지 나를 데려갈 수 있다 이렇게 차가운 빛의 입자는 처음이야 아이스크림 속에도 휴양지가 있는 것 같아 매일 집에서 너를 보는데도 놀랍지 세상에 없는 농담 같아 마른 손 위에서 거품을 일으키며 녹는 이상한 열매가 사랑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느린 목욕 시간 투명해지는 몸들이 자국을 가르치지 사라지지 않는 생각이 나를 쓰다듬고 있어 생활이라는 건 감각일까 노력일까 너와는 어디에서도 쉴 수 없어 미리 장소를 지워두웠지 날씨를 오려두었지 향기만 남겨두었지 욕실용 슬리퍼가 바닥을 끄는 소리 어둠 속에 잠겨가고 우리는 우리의 미끄러운 윤곽을 읽는 데 몰두한다 시간이 잼처럼 졸고 나는 불붙은 기억이 되려 한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숨 뼈와 살이 좁혀진다
-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 (문학동네, 2023.10) -------------------------
* 고선경 시인 1997년 경기도 안양 출생.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 **************************************************************************************** 오늘은 고선경 시인의 시집과,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고선경 시인은 2022년 <조선일보>로 등단한 시인입니다. 이번 시집은 시인의 첫 시집이고요. 시인의 시를 읽어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시인과 동년배의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라면, 충분히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는 눈과 머리로도 읽을 수 있지만, 그것보다 마음으로 읽어낼 수 있는 시가 나에게 가장 좋은 시입니다. 시인은 시를 통해 ‘생활’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이 생활이라는 것, 감각일까요 아니면 노력일까요. 아니면 샤워젤로 깨끗하게 씻어내버려야 하는 것일까요. 내가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내 삶은 충분히 나아질 수 있는 것일까요. ‘투룸 신축 빌라 보증금 이천에 월세 구십’의 방에서 시작한 삶. 이 삶은 얼마나 나아질 수 있겠습니까. 구축 빌라가 아니라 스물네평짜리 아파트로 소다수처럼 팡팡 터질수 있겠습니까. ‘제자리걸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요즘은 중학교 1학년 막내도 월급은 오르지 않는데, 물가는 오른다고 푸념 합니다. 막내의 얘기를 들으며 웃습니다. 자기가 하는 얘기가 무슨 얘기인지 알까요. 아니, 10여 년쯤 시간이 흐르면, 자기가 한 말이 무엇인지 여실히 느끼게 될 것입니다. 멀지 않아서 맞이하게 될 현실, 굳이 저는 알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쉽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우리들의 삶은 이어집니다. 최선을 다해 이겨내려고 합니다. 사실 이겨내는 것 이외에 ‘선택의 여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청보리밭의 청보리처럼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흔들립니다.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최선을 다해 익어가는 것이 청보리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익어가는 것입니까. 농담 같은 얘기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청보리 알갱이처럼 ‘수확’ 당하는 존재가 아닐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삶의 끝에 지옥이나 천국과 같은 낭만적인 미래가 존재하기보다, 외계인 같은 거대한 존재가 집게로 영혼을 수확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로테스크한 상상을 하게 되죠. 삶은 낭만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어쩌면 ‘(서울이나 수도권) 투룸 신축 빌라 보증금 이천에 월세 구십’의 방을 꾸리는 것이 현실에서 바랄 수있는 최대치의 낭만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의. - 시 쓰는 주영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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